EP15. 회귀자와 비밀의 궤짝(4)
대감집 노비는 아침부터 부지런했다.
물론 집주인이 대감은 아니지만 제법 직업 만족도가 높아 보였다.
“식사하세요.”
주말은 좀 늘어져도 괜찮은데 정확히 식사 시간에 맞춰 고우주는 밥시간을 알려왔다.
“쌈촌, 집 조아?”
“응! 근데 단점이 있었어.”
“단점?”
“거기, 아궁이로 불 때더라.”
“···아궁이! 웅지네 집에서 닭고기 삶아 먹을 때 그거로 만드는데! 옛날 구경했었어! 고구마도 꾸울 수 있고!”
실제로 웅지 본가에는 아궁이가 5개가 있다.
처음엔 정말 보일러가 없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웅지용 누룽지와 백숙, 누나 부부가 고구마와 감자를 좋아해서 있는 거랬다.
워낙에 대식가 집안이라 그런지, 한번 불 피우면 다섯 개를 다 써도 모자란다고, 사용인들의 고충을 들은 적이 있다.
“꼬구마 맛있는데.”
“겨울 되면 구워먹자!”
“웅! 구로자!”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는 두 사람은 온갖 먹을 것 이야기로 바빴다.
“겸아. 이따가 웅지랑 쇼핑 갈 건데, 같이 갈래? 숙제 있어?”
“다 했어요. 같이 가요.”
“살 거 있으면 생각해 두고.”
“네.”
어느새 웅지가 프렌치토스트를 한입 가득 베어 물어 조용해지자, 고우주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저는요? 짐 잘 드는데.”
“···약속 없습니까? 일요일인데.”
“없죠.”
“지난 주 내내 집에 있던 거 아닙니까? 산책 한시간 말고 거의 집에 있는 것 같던데.”
“집에 도청 장치 있습니까?”
“아뇨, 안전 문제로 문 여닫는 때 찍힌 사진이 실시간으로 날아오거든요?”
“아아···.”
몰랐던 눈치였다. 따로 사찰하려고 둔 건 아니고 원래 있던 건데 굳이 설명해 줄 필요가 없어서 말하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친구가 별로 없어요.”
“유랑 같이 다니던 팀들은요?”
“주 이사한테 눈치를 봐야 하니 저랑 가까이 못 지내죠. 원래도 그 사람과 일 스타일이 달라서 종종 부딪치긴 했거든요.”
“우리랑 머무르는 건 괜찮은 겁니까? 나중에 불이익이 있다거나···.”
“제가 여기 있으니 정보 긁어모으는 거 좋아하는 그들이 오히려 절 포섭하려 들겠죠. 근데 전 유랑에 별로 생각 없습니다. 잠입 위장보단 대감집 노비 가정부가 훨씬 맘 편하고 좋습니다. 전 아이들이랑 좀 잘 맞거든요.”
이쪽도 사연이 많긴 한데, 뭐 그런 건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웅지가 가엾어 하니, 데려가 줘야겠다.
“웅지 호위 맡겨도 됩니까?”
“안고서 뛰라면 뛸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건 당신이 할 일은 아니고.”
“매정하신 도련님···.”
“아버지 호위를 맡아. 웅지는 나만 있어도 되니까.”
“네, 알겠습니다.”
“내 호위를 왜?”
“아버지는 아무것도 못 하시잖아요. 웅지는 힘이라도 있지, 아버지는···.”
아니, 애초에 호위라는 게 딱히 필요한 것은 아니다.
김투비서팀도 근방에 있을 테고, 그냥 역할 나누면 좋을 것 같아 호위나 맡으세요. 하고 한 소리였는데,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이야기까지 나올 것인가 싶었다.
“나 이래봬도 태권도···.”
“초등학생때 배우셨다면서요.”
“어···.”
“호위는 아버지에게 붙이는 게 맞아요.”
“맞습니다. 유랑은 웅지를 위해 있기도 하지만, 우선순위는 항상 가주님입니다.”
내가 이 집안 최약체라고?
하!?
***
“오늘 비 오는데요.”
운전대까지 빼앗기기 싫었다. 굳이 고우주가 운전하겠다는 거 밀쳐두고서 난 운전대를 잡았다.
“선글라스, 정말 쓰고 가십니까. 어두울 텐데. 봐요, 비 많이 오잖아요.”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도 정말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우다다다 와!”
“아버지.”
“아, 알았어.”
괜히 혼자 꿍해져서는 선글라스로 멋이라도 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최약체라서 그래. 최약체라서.
난 짙은 색 선글라스를 도로 넣어두고, 옅은 색 하날 더 사둬야겠다 생각하면서 마트로 향했다.
뜬금없이 웬 마트냐고? 이건 웅지랑도 약속했던 건데, 한 달에 한 번은 꼭 바깥에 나가 장을 보자고 했었다.
웅지가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는 데다, 식욕과 물욕이 상당한 녀석이니 마트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물론 백화점 같은 곳은 가끔 들리곤 했던 것 같은데, 그런 곳에서 파는 고급품은 한신에서 주기적으로 보내주니 우리까지 그런 걸 살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들고 갈 사람도 많겠다, 대용량 잔뜩 사자.”
“웅! 꼬기는 웅지가 고를래!”
“저는 해산물이요.”
“저는 주방 조리 기구 좀 보겠습니다.”
각자 사분오열하려는 듯 움직이길래, 난 고갤 가로저었다.
“다 같이 이동한다.”
“왜애! 웅지 쪼은 꼬기 사고 시픈데!”
- 선착순, 한우 할인 행사가 진행중입니다.
“오늘 항공 직송 연어랑 참치도 들어온대요.”
각자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온 것은 같이 장을 보러 온 것에 의의가 있다.
“겸이 다녀와, 웅지랑 정육 코너에 있을 테니까.”
겸이 녀석, 뭔가 섭섭하다는 듯 고개가 픽- 45도로 돌아갔다.
“저랑은 안 가주세요?”
갑자기? 얘가 왜 이러지?
“제, 제가 가 드리겠습니다!”
“넌 필요 없어.”
“어쩔 수 없죠. 그럼, 제가 웅지와 고기 사러 다녀오겠습니다. 뒤에 한신 놈들도 붙어있으니까요.”
“그래, 그럼.”
겸이 녀석, 이거 갑자기 사춘기라도 시작된 것인가.
안 하던 몽니를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선 코너엔 연어와 참치가 잔뜩이었는데, 이 녀석 본 체도 않는다.
네가 온다 그러지 않았냐?
“참치는 뱃살? 기름기 있는 거로?”
“네.”
“너 나한테 뭐 불만 있냐?”
“아뇨.”
아닌 게 아닌데?
같이 사러 가자고 몽니를 부리더니 와서는 저 좋아하는 생선을 보는 둥 마는 둥이라니.
그래도 아이보단 어른인 내가 보는 게 좋겠다 싶어, 신선해 보이는 걸로 잔뜩 골랐다. 횟감에, 끓여 먹을 재료까지 든든하게 담고 보니 녀석은 뭣에 토라진 것인지 다른 데만 보고 있었다.
“뭔데?”
“아녜요.”
“겸아,”
이 녀석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지, 나이도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 왕처럼 군림하기에 어른처럼 대하곤 했다.
그런데 이거 상태 보니까···. 삐졌구먼?
근데 왜? 어느 포인트에서? 아니, 최약체가 된 건 난데 어째서 네가?
궁금한 게 상당히 많았지만 그런 속좁은 생각은 접어두고서, 난 녀석에게 물었다.
“아빠가 뭐 잘못했냐?”
‘아빠’.
나에겐 되게 징그러운 말이다.
그래도 이 녀석 약간의 애정결핍 같은 게 있는 녀석인 걸 감안하면, 이정도 퍼포먼스는 해 줘야 반응이 올 것이다.
“···아닙니다.”
어쭈, 태세 전환?
“아빠가 요즘 좀 소홀했지?”
이 녀석이 웅지의 대적자고, 화석에 가까운 조상님이고, 알고 보니 용왕님이더라도···. 애초에 이 녀석이 우리에게 오던 당시를 생각해 보면, 고우주나 웅지보다 더 세심하게 돌봐주어야 했던 게 맞다.
하는 짓만 어른이지 아직은 애니까.
“우리 집에 너 없었으면 나 집 나갔어.”
“집주인이 나가긴 어딜 나가요.”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냥, 이야기나 하고 싶어서 심술부린 거예요.”
웅지는 어려서, 몽이는 말 못 하는 짐승이어서, 고우주는···. 딱히 더 잘해준 기억은 없다.
그러나, 이 녀석이 도와주고 가정에 노력하는 만큼 고맙다는 말도 잘 못해 준 것은 사실이었다.
“항상 고맙다. 그리고 뭐···. 웅지도 웅지지만, 지금 내 삶에서 믿을만한 건 너밖에 없어. 알지?”
“당연한 소리잖아요.”
“···난 아버지가 일찍부터 없었거든. 그래서 잘 몰라. 아빠는 어떤 존재고,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우리 엄마랑은 뭐, 불만은 많았지만 고칠 수 없는 사이였거든. 누나가 거의 날 돌보다시피 했으니까.”
겸이는 생선을 고르는 척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모르는 것뿐이지, 네게 그 도리를 안 하겠다는 것은 아냐. 얼떨결에 가족이 된 상황이긴 하지만, 내가 네 아빠가 되기로 했으니까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할게. 너도 할 말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바로 해. 관심이 좀 부족한 것 같은데요, 하고. 섭섭해도 이야기하고.”
“섭섭하진 않아요. 그냥 ···나도 잘 모르겠거든요.”
“원래 그 나이엔 싱숭생숭하고 잘 모르겠고, 그런데 마음은 좀 꽁해지고 다 그런 거다.”
“다 그런 거라고요?”
“응. 친구들이랑 지내면 그런 마음을 더 많이 느낄 거야. 내가 널 학교로 보낸 이유도 그런 거고.”
“걔들한텐 관심 없어요.”
꼭 내가 남들한테 관심 없다고 뻗대는 거랑 닮았다.
아이들은 부모를 닮는다는데···. 다 큰 애들도 그런가.
“부모로 여겨줘서 고맙다.”
“당연한 소리 또 하시네요.”
“당연하기는 무슨, 내가 너 같으면 어? 재벌집 막내아들로 삼아라, 하고 쳐들어갔을 거야. 그럴 힘이 없으니 이 모양이지.”
“아버지도 재벌집 막내아들이고 전 그 아들이잖아요. 자신감을 가져요.”
“하여간에, 말은···.”
“그, 인간들은 혈연이 중요하다면서요?”
그런 건 또 어디서 주워듣고 온 건지···.
사회를 알아가는 건 좋은데 괜히 불편한 것들까지 일찍 알진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도 않은 절 거둬줘서 감사해요. 아빠.”
“···?!”
“아버지는 좀, 그래서요. 애들은 다 아빠라고 하더라고요. 그날 ‘아버지’라고 하니까 애들이 이상하게 봤어요.”
“그거야···.”
아빠라고 부를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니까.
그런데··· 뭐지? 이 알 수 없는 느낌은? 아, 설마. 이런 게 부성애라는 건가?
아니다. 애정결핍은 얘가 아니라, 난가?
“그렇게 불러도 괜찮죠?”
“어, 그래.”
내 말에 녀석은 웃었다.
꼭 그 웃음이, 성탄절에 선물을 받은 아이 같았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빨리오세요. 아빠.”
얼떨결에 생긴 아들이 부리는 몽니가 사춘기라서가 아니라, 나를 향한 관심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서 마음이 놓였다.
조금 더 편하게 대해도 되겠지?
“쌈촌!”
“어, 웅지. 고기 많이 골랐어?”
“웅! 고우주 쌈촌 고기 잘 골라! 쓸모가 있어!”
웅지가 하는 말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고우주는 얼굴이 벌게졌지만, 웅지에게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잔뜩 우쭐해진 어깨가 내려갈 줄 몰랐다.
“그럼, 주방용품 코너로 가자.”
“웅!”
각자 원하는 걸 다 산 우리는 억수로 쏟아지는 비에 식사도 해결할 겸, 푸드코트로 갔다.
“웅지는 돈까스 다섯 접시 먹을 거야!”
“전 두 접시 먹을래요.”
“저는 왕돈까스 먹겠습니다.”
“그럼 난 볶음 우동.”
“아, 쌈촌! 메뉴 통일해!”
“왜, 너 다양한 거 먹는 거 좋아하잖아.”
“이런 데선 통일하는 거야!”
누가 가르친 거람. 하여간, 웅지 요 녀석도 스폰지 같아서, 드라마 같은 거 못 보게 해야 한다.
“난 그럼 치즈돈까스.”
우리 네 식구는 쇼핑 카트 두 대를 잘 모셔두고 돈까스를 기다렸다.
내가 결혼은 결국 못했지만, 아니 못 할 것 같지만···. 이런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주말이지.
뭐, 이상한 가족형태이긴 하지만 제법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디링,
[한신카드(4444)승인 김*호 89,320원(일시불) 해롯마트]
“뭐지?”
아직 결제하지도 않았는데, 웬 결제 문자?
그러고 보니 카드가 나한테 없다. 백씨 남매한테 줬는데, 방금 결제한 걸 보니, 같은 곳에 있나 보다.
난 바로 백현우에게 전화를 걸어, 웅지를 바꿔주었다.
“현우한테 걸었어. 받아봐. 마트에 있으면 밥 먹으러 오라 그래.”
“혀누오빠? 웅!”
난 그렇게 살가운 고용주가 아니니까, 웅지가 말하면 냉큼 올 게 분명하다.
“오빠! 나 웅지야! 캐롯마트 돈까스 먹으러 와써!”
“헤롯이야. 캐롯아니고.”
“웅! 캐롯마트 1층! 쌈촌이랑, 오빠랑, 고우주쌈촌도 이써! 오빠도 와! 웅!”
“그 둘은 내가 누군지 모를텐데···.”
수화음을 줄여놓은 탓에 그쪽에서 뭐라는지는 들을 수 없었다.
웅지가 전화를 끊더니, 핸드폰을 내밀었다.
“언니도 온대!”
“잘했다.”
“백씨 남매면, 호장원에서 온 친구들이죠?”
“예. 자취한다길래, 장 보라고 카드 줬거든요.”
“우리 가주님은 성자라니까요.”
“성자는 무슨···.”
“저기 오네요.”
이젠 고우주가 내 주변인을 아는 것이 신기하지도 않았다.
남매는 학교 밖에서 보니 더 앳되어 보였다. 저 둘만 산다던데, 끼니 잘 챙기고 있긴 한 건가···. 밥 좀 더 먹어야겠는데.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저 애들 걱정까지 할 겨를이 어딨냐고, 정신 차려라, 김장호!
“밥 먹어. 먹고 싶은 거 더 시키고. 고기는 좀 샀어?”
“한번 먹을 정도만요.”
“뭐?”
이해할 수 없다.
이 녀석들이 아니라, 내가.
“뭔 소리야. 너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어쩌자고, 난 다시 정육 코너에 가서 고기를 20만 원어치를 더 샀는가.
난 아무래도, 이 팔자 스스로 꼬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내 팔자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미새.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어미새가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러다가, 진짜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래도 뭐···.
내 손에 들려 있는 든든한 고기 무게만큼 마음도 든든해진 느낌이니, 상관없나. 허허.
- 작가의말
장호 : 든든한 주말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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