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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뉴야 님의 서재입니다.

여주가 XX를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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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뉴야
작품등록일 :
2022.05.11 16:20
최근연재일 :
2022.07.02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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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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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 거짓과 함께 춤을

DUMMY

"갈파고스에 축복을."


챙!


룬이 기사단의 인사를 받아주자 기사단이 일제히 검을 회수했다.


이례적인 파티장의 분위기와 호스트의 패션에 게스트들의 조용한 숨소리가 파티장으로 퍼져나갔다

.

파티장에 기사를 대동하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이다. 그건 파티에 참석하는 이들의 권위를 의심하는 일이니까. 특히나 신분이 높을수록,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하지만 파티장의 압도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참석자 중 누구 하나도 항의를 해오는 사람이 없었다.그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이 파티에 참석한 대부분의 이들이 기대하는 것. 그건 일리야의 새로운 인사와 친분을 트는 것이다. 실제로 이 파티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 파티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숨막히는 정적과 파티홀의 공기를 무겁게 짙누르고 있는 기사단의 마나다.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과 다르게, 눈치빠른 몇몇의 귀족들은 룬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깨달았다.


'이건 출사표다.'


평시라면 이런 파격적인 행보는, 득보다는 실이 많다.


가문의 어른들을 무시하는 행동은 결국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일리야에는 파티를 주최할만한 어른들이 없었다.


본래라면 아직 룬의 나이는 사교계에 입문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지만 상황이 좋았다. 지금이라면 신선한 이미지를 만들면서도 사교계로 진출할 때 사용할 다리를 미리 건설하는 셈이었다.


남작가 출신의 부머는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좌중을 살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부지런하게 눈알을 굴리는 이들을 보며 자신의 판단이 맞다는 확신을 내렸다.


'이건 기회야.'


아무런 힘도 없이 저런 폼을 잡았다면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았겠지만, 룬은 본인부터 마스터에 오른 강자이고 오십에 달하는 충성스러운 기사들을 지녔다.


단일 세력으로 룬보다 많은 기사단을 소유한 귀족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겉으로는 한 가문의 밑에 결집해있는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는 각기 세력이 갈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낙영도에서 레기오르스가 실종된 이후 그 모든 세력은 룬에게 집중되었다. 이것이 귀족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높으신 분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기회!'


일리야 룬은 황금 동아줄이다. 그렇게 생각한 부머가 룬을 향해 다가가려는 때, 부머는 행동력 빠른 귀족들이 이미 룬에게 다가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참 아름다운 제복입니다, 저는..."


부머 또한 다급히 달려가 스스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아카데미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부머라고..."

"아름다우신 일리야의 아가씨, 저는 뭔헨 백작가의..."


그리고 룬에게 다가간 이들보다 좀 더 신중한 이들은 발헤임 대공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발헤임 대공은 룬에게 달라붙은 이들과 자신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이들을 비웃어주고는 파티장을 떠났다.


중도 세력의 귀족들은 처음에는 발헤임 대공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자신들과 왕실 세력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룬에게 접근해 있음을 깨달았다.


'이러면 나가린데?'


그들은 제외한 다른 귀족들이 위치스 타이에게 몰려들어 있다. 아마도, 저곳이 왕실파의 중심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귀족들이 타이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 차례 이동이 끝나자, 파티장은 룬과 타이를 기준으로 두 부류류 나뉘게 되었다.


왕실 세력의 귀족들은 타이를 향해 이동하면서도 룬에 대한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래전 아케도니아에서는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파헬의 재림이다.'


유리하게 이끌어 가던 상황이, 파헬의 등장과 동시에 귀족파를 향해 기울었다. 그리고 파헬은 여전히 그 영향력을 사교계에 행사중이다.


귀족들은 왕세자와 왕녀가 있는 방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왕세자와 왕녀는 대체 뭘 하는거야?'


파헬은 그 당시의 공주가 차지했어야 할 사교계의 퀸 자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가져갔다.


사교계에서 영향력을 잃은 공주는 팔려가듯 한미한 백작가의 장남과 결혼했고, 이제는 그 이름마저 잊혀졌다.


왕실의 귀족들이 보기에 룬의 잠재력은 파헬보다 더한 것이었다.


귀족들은 변화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자살과 다름없는 사교계에서 이 정도의 변화에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왕세자와 왕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파티장에는 각각의 생각과 욕망들이 교차하며 이곳 저곳에서 웅성거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일리야 파헬님과 아티 나스챠님 드십니다!"


정문을 지키는 가드의 외침과 동시에 파헬과 나스챠가 파티장을 향해 걸어들어왔다.


'어머님과 나스챠가 왜?'


파헬이 파티장에 들어서자 귀족들의 시선이 파헬에게 집중되었다.


파헬은 검은 드레스와 검은 머리칼은 파티장의 모든 빛과 시선을 흡수하는 듯 그 오만함을 뽐내고 있었다.


순식간에 파티장의 화제는 파헬으로 전환되었다.


"아프다더니 이제는 나은건가?"

"아니, 이것도 어쩌면 일리야에서 준비한 계획일지도 모른다네."


"정말 저게 어떻게 사십대라는 거에요?"

"정말로요."


순식간에 술렁이는 파티장에도 파헬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멍한 표정으로 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초점없는 눈동자와 헤매이는 듯한 움직임은 머리 속에 있던 가능성을 점화시켰다.


'뭔가 이상하다.'


파헬의 옆에 선 나스챠는 여태까지 본 적 없었던 싸늘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프린과 마린, 그리고 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룬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나스챠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귀족들을 오시하고 있었다.


순간 룬의 머릿속에 평소와 다른 나스챠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떨쳐냈던 한가지 가능성에 대해 떠올렸다.


'...빌어먹을.'


오랫동안 나스챠에게 품어왔지만 그 정때문에 미뤄두었던 의심이 그제서야 룬의 가슴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파헬은 룬의 얼굴에 떠오른 불안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키에엑!

우와아아!


그 때 파티장 너머로 마물들의 비명소리와 기사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죠?"

"이건..."


검술에 대해 무지한 이들은 흥미롭다는 듯 소리의 근원을 바라보았지만,전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자들의 얼굴은 더 없이 굳어졌다.


"마물이다!"


한 귀족의 외침과 동시에 외벽에서 창문 깨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쨍그랑!


한 마리의 마물이 파티장의 창문을 깨고서 난입했다.


"크르릉?"


원숭이와 닮아있는 마물은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한번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순진한 귀족들에게는 한 가지 긍정적인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키에엑!"


마물은 이내 입을 쩍 벌리며 사나운 소리와 함께 귀족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끼야악!"

"기사, 기사를 불러와!"


순식간에 파티장이 소란에 휩싸였다.


웅-


룬이 마물을 향해 폭사시킨 검기가 마물의 하반신과 상반신을 분리하며 피를 흩뿌렸다.


정면에서 피를 맞은 한 영식이 구토를 참지 못하고 음식물을 내뱉는 와중에, 파티홀의 정문에서 충격음이 울렸다.


쿵.


"이게 무슨 소리죠?"


한 귀부인이 불안한 듯 중얼거렸고,


쿵.


"...일리야 룬, 이 사태에 대해서는 나중에 확실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오."


백발이 어울리는 노년의 귀족은 칼을 뽑아들었다.


콰직.


걸쇠로 걸어잠근 파티장의 문에 균열이 지며 그 사이로 초록빛의 피부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쾅!


그리고 다음 순간 충격음과 동시에 정문이 부셔지며 파티장 안으로 마물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씨발.'


애초에 마물은 경계 대상이 아니었다. 오십의 기사라면 이런 마물들을 제압하는 데는 실패할 리가 없었다.


다만 지금 룬이 침음을 삼키는 것은, 지금 진짜 경계해야 할 적들은 마물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마물들이 백배로 불어나도 만들지 못할 참상을, 지금 룬 앞에선 두 여자가 만들 수도 있었다.


'나스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고민에 빠져드는 순간에 이미 기회는 흘러갈 것이다.


결심을 마친 룬은 곧바로 오러를 피워냈다. 그러자 룬의 주위로 금빛 아지랑이가 생겨나더니, 이내 갑옷처럼 룬을 중심으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먼저 타이를 제압하고, 두 사람에게 연결된 실을 끊어낸다. 그렇게 생각한 룬이 바라자, 지면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로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여든 마나에 공명하듯 룬의 근육이 팽창하기 시작했고, 팽창이 극에 달한 순간, 룬은 도약했다.


팡!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내며 쏘아져 나간 룬은, 메피스토텔레스에게 받은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검 위로 파동을 씌우기 시작했다.


‘제발 먹혀라!’


그렇게 간절한 룬이 타이에게 거의 도착했을 때, 타이에게 연결된 실이 끊어졌다. 검을 휘두르려던 룬은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 도로 착지함과 동시에 쓰러지는 타이를 받아주었다.


'뭐지?'


룬의 의문과 동시에 연결이 끊어진 타이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허어억! 살려주세요! 살려줘!"


“대체 무슨 상황이야?”


짝!


룬이 비명을 지르는 타이의 뺨을 때렸지만, 타이는 여전히 패닉에 빠져 있었다.


"괜찮아, 너 안죽어."


"저기, 그 자가, 저기, 저기 있어요!"


타이는 파헬과 나스챠가 있는 방향을 가르키며 소리쳤다.


그 순간, 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파헬의 입가가 점차 가늘어지며 실선을 만들고 있었다. 그 옆에서 나스챠는 여전히 냉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룬을 응시했다.


"설마..."


파헬의 등 뒤로 검은 마력의 실들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파헬의 목소리가 파티홀을 울린다.


"좋은 표정이에요 룬"


"나스챠."


파헬의 조롱에도 룬의 시선은 나스챠를 향하고 있었다.


"흐응, 그렇게 뜨겁게 바라보면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네가 어떻게-"


"-아하하, 나도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요?”


여전히 파티장의 밖에서는 기사단이 마물들을 사냥하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무미건조한 표정을 듣고있던 나스챠가 지팡이로 지면을 찍었다.


그러자 넋이 나간 듯한 기사 하나가 한 소녀를 안은 채 파티장으로 걸어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자매가 비명을 질렀다.


"프린!"


마린의 처연한 비명소리가 파티장을 넘어, 저택을 울렸다. 담담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아티 나스챠가, 나지막히 중얼거린다.


"처음부터."


나스챠의 싸늘한 시선이 룬의 심장을 핥았왔다.


"속아있던거야 룬."


그리고 다시 한 번, 룬이 지면을 박찼다.


쾅!


룬이 지면을 박차며 커다란 소리와 함께 지면에 균열이 지며 커다란 에너지를 만들었다.


룬은 발끝에서 생성된 에너지를 중심 축으로 흘려 몸을 회전시켰다. 검과 함께 룬이 회전하며 나아간 자리에는 파괴의 흔적만이 남았다.


룬의 질주는 나스챠의 코앞에서 멈췄고, 검에 서린 황금색 검강이 나스챠를 향해 터져나갔다.


나스챠에게 닿기 직전, 파헬의 등 뒤에서 검은 마력의 실들이 길어지며 검강을 향해 뻗어져나왔다.


쩅!


실들과 검강이 맞닿자 귀를 찢는듯한 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막는다.


그 사이에 검강으로 다가온 검은 마력의 실들이 검강을 휘감았고, 검강은 순식간에 쪼개지더니, 파헬을 가운데 두고서 쪼개진 검강 뒤로 기다란 파괴의 흔적을 만들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기술들. 아마도 주술이다. 그 사실에서 어떤 확인을 얻은 것인지, 룬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아니 어째서?"


그 말에 안그래도 올라가있던 파헬의 입꼬리가, 거의 찢어질 듯이 올라갔다.


"그래요! 어떻게 했는지 보다는 어째서 이런 짓을 했는지가 중요하다구요."


파헬은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입가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하자 웅성거리던 파티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어느새 사람들 등에는 가느다란 실이 하나씩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도···그걸 설명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니에요."


넋이 나간 기사에게 안겨있던 프린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스챠가 흠칫 놀랐다.


나스챠는 파헬이 보기 전, 잠시간 떠오른 감정을 얼굴에서 지워버렸다. 다시 가면을 들어쓴 나스챠가, 룬에게 고했다.


"사람끼리 서로 속이는 건, 흔한 일이야 룬."


"내가 묻는 건, 그런게 아니야. 분명 말했잖아.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서, 나를 고르면 된다고.”


나스챠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어째서라."


나스챠는 천장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찾는 듯 손짓했다.

찾는 것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 탓일까. 나스챠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망설이는 듯한 태도다. 룬은 나스챠가 무엇을 망설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건 일리야 룬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리라. 그렇기에, 아티 나스챠는 선택한 것이다.


"네가 보여준 것에는, 내가 있을 장소가 없었거든."


예상대로, 룬은 나스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하하, 그렇다는데요 룬?"


룬의 초췌한 시선이 파헬을, 아니 파헬의 몸을 차지한 무언가를 향했다.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존재가 저 곳에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룬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하나 있긴 했다. 구걸이다. 지금 룬이 할 수 있는건, 그녀의 적들을 향해 구걸하는 것이다.


"···대체 넌 누구지?"


그러자 유쾌한 듯한 여자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부자가 우연히 길거리를 지나다가 만난 부랑자에게 그러하듯, 내리꽂히는 듯한 시선과 함께 던져진 적선이, 적어도 지금의 룬에게는 간절했다.


"내 이름을 묻는 건가요? 어려울 건 없는데, 난 워리에요. 그 말고도 다른 이름이 많긴 하지만 뭐, 나를 대표하는 이름은 워리에요."


돌아온 것은 적선이 아닌, 조롱이었다.


"아하하! 놀리는 것처럼 들렸나요? 하지만 정말인데요."


무언가 마법을 쓰는지 파헬의 말이 바로 옆에서 말하듯 귓가를 간질였다.


"그래요, 당신도 이해하고 있어요. 당신도 나를 겪어 본 적이 있을거에요."


마치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듯 파헬은 끈질기게 룬의 답변을 유도했다. 끝내 룬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시무룩해진 워리는 머리를 푹 숙였다.


"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이렇게 까지 몰라주다니 정말 너무하네요. 난 항상 당신의 주변을 맴돌았잖아요."


우는 소리를 연기하던 파헬이 돌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로 모르겠나요?"


그 말에 룬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헛소리 그만하고 원하는 걸 말 해."


"달이 유난히도 밝았던 그 밤."


이어진 파헬의 말이, 금방이라도 사납게 그녀를 할퀼 것만 같은 룬의 행동을 멈춰 세웠다.


"당신과 그는 서로 기쁜 듯이 춤을 추더군요. 아름다웠어요. 그것도 잊어버렸나요? 아니, 아닐거에요. 그런 것들은 죽이려고 해도 도무질 죽질 않아."


그리고 이어지는 파헬의 말에 룬은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할렌을 껴안고 슬퍼하던 그 날에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그 밤에도 이렇게 달이 뜨곤 했잖아요.

아아, 우리에게 시간은 저주라, 결국 그 밤이 지고나면 그토록 소중했던 것도 잊고 마는군요.

그래도 걱정하진 마요. 우리에겐 망각이라는 축복이 있으니까, 결국 이 밤이 지난다면 평화롭고 행복한 내일이 찾아 올거에요."


파헬의 깊은 눈동자가 룬을 향했다.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나요?"


그곳에는 말라 비틀어진 고목이 있었다.


처음 싱그러운 생명을 튀어낼 때와 다르게 어느새 방향을 잃고, 그저 언젠가 내려두었던 뿌리에 의존해 살아가는 존재다.


룬은 이제서야 저 존재와 대화를 하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헬의 몸을 차지한 존재는,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의지를 대행하는 망령에 불과했다.


"저는 단지, 이 세계의 평화를 바란답니다."


그 말에 룬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가. 이미 파헬에게 이어진 실에 간섭해 보았지만 검은 색으로 변해버린 저 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나스챠."


이미 룬은 알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나스챠에게 부탁한들, 그녀가 마음을 바꿀리가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룬은 나스챠를 불러보았다. 일리야 룬이 아닌 그에게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얻은 것들 중에 몇 안되는 소중한 것들을,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


"나 좀 도와줘."


룬의 부름에도 나스챠의 가면은 여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나스챠는 룬이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듯 그저 그 자리를 유지했다. 결국 룬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아티 나스챠가 일리야 룬을 배신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야."


이전과 같은 질문. 같은 방식으로, 나스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룬과 나아갈 세계는 아름답다.


저 존재가 완성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행운이리라. 그럼에도 나스챠의 직관은 룬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마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던거야.’


자신의 기억 속에 또 다른 자아를 심던 그 순간에, 언젠가 그것을 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그 때에, 이미 모든 것은 틀어지고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지나간 순간을 후회하는 것은 나스챠의 특기다.


나스챠는, 아니 지금 자신을 나스챠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나는 뭘까'


과거의 영광을 함께한 위대한 마법사는, 에리나의 이름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묻어두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일리야 룬의 유쾌한 동료인 그녀마저 저 깊숙한 심연으로 묻어버리려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덜어내자 나스챠의 안에는 남은 것 없이 텅 비게 되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나스챠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따라온 익숙한 관성에 몸을 맡겼다.


그것은 누군가의 약속이요 하나의 의지였다. 그 내용조차 잊어버린 나스챠지만 텅 비어버린 지금 나스챠에게는 달리 따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룬은 자신을 향하는 나스챠의 지팡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길 끝에서 마주하는 것이 구원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길은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친애하는 나스챠의 지팡이가 자신을 향하고, 파헬의 날카로운 말들이 정신을 헤집는다.


그럼에도, 룬은 나아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일리야 룬이 그를 조형할 때, 강인한 정신력을 염두에 둔 탓일까. 아니, 아니다. 이건 그냥 오랫동안 따라온 익숙한 관성이자, 누군가와의 약속이요, 하나의 의지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흐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꼬맹이가 깨어나려 한다.


'정말, 지랄같은 타이밍이야.'


룬은, 아니 적어도 룬의 반을 차지하는 그녀의 대전사는 그 생각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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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12시 30분에 매일 연재하겠습니다. 22.05.17 14 0 -
59 57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7.02 12 0 12쪽
58 56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7.01 11 0 12쪽
57 55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27 12 0 13쪽
56 54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25 15 0 12쪽
55 53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24 13 0 16쪽
54 52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23 14 0 12쪽
53 51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22 14 0 7쪽
52 50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21 11 0 17쪽
51 49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20 13 0 16쪽
50 48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19 13 0 17쪽
49 48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19 13 0 17쪽
48 47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18 12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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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45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16 17 1 13쪽
45 44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13 14 1 10쪽
44 43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12 47 0 15쪽
» 42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11 21 0 19쪽
42 41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10 14 0 13쪽
41 40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09 15 0 12쪽
40 39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08 1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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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34화 - 거짓과 함께 춤을 22.06.03 16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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