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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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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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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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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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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꿈을 이루는데 시간제한은 없다!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멋들어진 예복을 차려 입은 연정훈이 주례 단상으로 이어진 통로 끝자락을 바라봤다.

잔뜩 긴장한 모양인지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예식홀 곳곳에 비디오카메라를 든 제자들이 보였다.

단상 앞에 트라이포드에 올려놓은 카메라 한 대.

황재정의 8mm 캠코더.

류지호가 촬영하는 이번에 새로 구입한 소니 베타캠 카메라.

신포고 방송부 후배들이 촬영하는 국산 VHS 캠코더.

총 네 대의 카메라로 자신의 결혼식을 담아내고 있다.

카메라맨들을 지휘하는 제자 류지호가 보였다.

제자가 자퇴를 할 때만 해도 초임 교사인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기도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제자는 열심히 노력해 미국의 명문대학에 입학했다.

아픈 손가락 같았던 제자의 미담은 현재 와서는 큰 자랑거리다.


“선생님. 거기 버진로드 안쪽으로 들어와서 서보세요.”


연정훈이 류지호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버진 로드(Virgin Road)라는 말은 없어. 그런 봉건주의적인 일본식 표현은 쓰지 말도록 해. 넌 녀석아,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지 않니. 차라라 웨딩아일(Wedding Aisle)이라는 표현을 써.”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웨딩 스튜디오의 회장이란 녀석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일본에만 존재하는 표현인 버진 로드(Virgin Road)란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었다.

아마 미국에서 그 같은 표현을 썼다면 류지호는 남녀 가리지 않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Virgin이란 단어는 숫처녀 내지는 순결한, 정복하지 못한 등의 의미가 내표되어 있어서 신랑신부가 함께 걷는 길에 그 같은 표현을 붙이는 것은 서양에서는 매우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앞으로 주단이나 꽃길이라고 고쳐서 부르도록 할게요. 선생님.”

“꽃길이란 말이 더 좋을 것 같다.”

“평생 사모님과 꽃길만 걸으시길 기원 드릴게요.”

“고맙다.”


이 별것 아닌 일로 가온 웨딩 스튜디오는 버진로드라고 불렸던 통로의 길을 ‘꽃길’이라는 우리말 표현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통로에 화려하게 꽃장식을 하는 유행도 훨씬 앞당겨서 시작하게 된다.

용어가 우리말로 바뀐 것까지는 좋았다.

다만 꽃장식을 해야 하는 신랑신부의 비용이 늘어나게 된다.


“후우.”

“많이 긴장 되세요?”

“너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조금 살 것 같다.”

“다시 긴장하셔야겠어요. 예식 시작할 모양이네요.”


류지호는 디렉터가 되어 네 대 카메라를 컨트롤 했다.

말이 거창해 디렉터지 촬영에 참여하는 후배들과 서로 동선이 겹치지 않게 간간이 참견만 하는 수준이다.


“신부 입장!”


사회자의 힘찬 외침과 함께 입장곡 ‘파트 오브 유어 월드'(Part of Your World)가 흘러나왔다.

WaW 픽처스가 배급한 LOG 컴퍼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OST다.

자칫 편집에서 통째로 사라질 뻔한 이 명곡이 대한민국 예식 최초로 신부입장곡으로 사용되는 역사적(?)인 날이다.

단 하나 아쉬운 것은 연주곡이 아닌 영어 원곡이라는 점.

사실 이 노래는 뮤지컬 용어로 ‘I Want Song’이다.

극의 도입부에 삽입되어서 주인공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가사만 놓고 보면 결혼식에 어울리지는 않는 편이다.


“영어 가사 알아들을 사람은 여기서 재정이와 선생님 두 분 밖에 없으니까....”


곡 자체가 워낙 아름다워서 그 부분으로 시비 걸 사람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장인의 팔짱을 끼고 꽃길을 걸어오는 신부를 보고 있자니, 연정훈은 기분이 이상했다.

연정훈이 긴장과 설렘을 안고 성큼성큼 신부를 마중 나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류지호가 이를 따라가며 촬영했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연정훈이 장인이 될 어르신에게 넙죽 절하며 말했다.

장인은 사위에게 딸의 손을 넘겨주며 말했다.


“내 딸 잘 부탁하네.”

“......네!”


연정훈은 아내가 될 신부를 에스코트해 주례단상 앞에 섰다.

모든 카메라가 단상 근처로 올라가지 않고, 조금 떨어져서 촬영했다.

하객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서다.

황재정이 재빨리 트라이포드에 올려놓은 카메라를 조작해 신랑과 신부의 클로즈업(C.U)을 찍었다.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하는 순간.

신부들은 보통 이 때 눈물을 훌쩍인다.

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부모님의 시선과 마주하게 되면 저절로 울컥하게 되는 모양이다.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니고, 다시 못 볼 것도 아닌데도 눈물을 흘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꾸려가야 하기에 덜컥 겁이 나기도 할 것이다.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에 대한 고마움.

앞으로 펼쳐지게 될 미지의 결혼생활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산다는 설렘.

온갖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버무려져 눈물을 또르르 흘리는 신부.

류지호는 그런 신부를 조금 떨어져서 줌으로 천천히 당겨 촬영했다.

약간 떨어져서 고우찬이 핸드 라이트를 비추고 있다.

가까이에서 치는 조명이 아니어서 신부의 얼굴에 빛이 흩어지며 닿았다.

곱게 화장한 얼굴에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옅은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영상에 담겼다.

줌으로 당겨 찍은 영향인지 배경이 흐릿하게 보이며 소위 ‘뽀사시’ 효과가 나왔다.


‘하레.’


할레이션(halation).

이 현상은 강한 빛이 직접적으로 카메라의 필름(CCD)으로 들어올 경우 빛이 번져버려 피사체의 윤곽을 흐리게 하거나 전제적으로 번지게 하는 현상이다.

사진의 질을 저하시키는 대표적인 빛의 잘못된 현상이다.

그렇지만 잘만 이용한다면 도리어 사진을 더 감각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종종 의도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딴따따단~”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이에 맞춰 순백색 대리석에 깔린 융단을 따라 신랑·신부가 행진했다.

빛나는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를 걸어가는 신랑 연정훈은 근사했고, 긴 드레스 자락을 늘어뜨리며 걷는 신부 역시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신부의 얼굴은 더없이 환하고 발그스레한 홍조가 맴돌았다.


“신랑 멋있다!”

“사모님 예뻐요!”


하객들 사이사이에 앉아있던 졸업생 제자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행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결혼식은 별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오늘의 결혼식을 차질 없이 준비하기 위해 류지호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직접 살폈다.

류지호는 머릿속으로 축가 타이밍을 기다렸다.


- 다음 순서는 신랑·신부를 위한 축가가 있겠습니다. 축가를 부르실 분은 단상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짝짝짝.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아무도 단상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없다.

하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성미 급한 몇 명은 피로연장으로 가기 위해 홀을 빠져나가기까지 했다.


- 축가 부르실 분?


신랑·신부의 부모님들이 망신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다시 한 번 사회자가 재촉하는 그때 -


[밤바라 밤밤바라라..!]


별안간 작년에 발매되어 큰 히트를 친 노래 ‘오직 하나뿐인 그대’가 흘러나왔다.


[그리움 두고서 가지는 마~!]


하객들이 흥겨운 노래에 웅성거릴 무렵.

객석 한쪽에서 강용석이 벌떡 일어서 권총 쏘는 심산의 시그니처 춤을 췄다.

하객들의 시선이 녀석에게 향했다.

강용석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꿋꿋하게 몸을 흔들었다.

이어- 단상과 가까운 곳에서도 한 녀석이 일어서서 춤을 췄다.

그리고, 맨 뒤에서도, 중간에서도, 통로 주위에서도 차례로 연정훈의 제자들이 일어서서 춤을 췄다.

류지호가 슬그머니 리듬에 맞춰 박수를 쳤다.


짝.짝.짝.


얼떨결에 하객들이 호응했다.

열 명이 넘는 졸업생 제자들이 노래에 맞춰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


신랑·신부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 축가가 대중화되기 전이다.

제자라는 놈들이 스승의 결혼식을 망치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에라이, 신나면 장땡이지!”


신랑 친구들이 하나둘 합류했다.

원래 예정에 없던 사람들의 동참이다.

노래의 1절이 흐르는 동안 연정훈의 제자들 신랑의 친구들이 막춤을 췄다.

사실 제자들은 안무도 짜고 춤 연습도 나름 충실히 했다.

결국 그 모든 노력은 수포가 되어버렸다.

응원부 출신 제자가 브레이킹 기술인 토마스를 선보였다.

막춤을 추는 제자들이 슬금슬금 신랑·신부를 반원을 그리며 둘러쌌다.


하하하.

호호호.


흥이 달아오를 때로 달아올라 신랑·신부도 박수를 치며 막춤의 향연을 즐겼다.


뚝.


갑자기 예식홀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노래가 끊어졌다.


띠링~


류순호가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며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이 예식홀을 적셨다.

그런데 멜로디가 어딘지 익숙했다.

‘스승의 은혜’다.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는 동생 곁에 류지호가 섰다.


“연정훈 선생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선생님이 주신 소중한 가르침 제자들은 늘 가슴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겠습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연정훈 입에 대줬다.


“....참. 녀석들.... 고맙다 애들아. 제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마.”


짝짝짝.


예식홀이 떠나가라 박수소리가 터졌다.

류지호가 1학년 때 반장이었던 녀석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강용석이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면서 다음 가사를 받았다.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류지호를 비롯해 제자들이 차례차례 노래에 동참했다.

하객 일부도 ‘스승의 은혜‘를 따라서 불렀다.

김준우가 황재정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이런 게 지호가 말한 플래시몹이란 거야?”

“몰라.“


황재정은 결혼식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근엄하고, 예의범절 따지는 어른들이 박수치며 좋아들 하는구나.’


미래에는 웨딩플래너들에게 의뢰해 다양한 결혼식 이벤트를 벌인다.

지금 시대는 결혼식이 천편일률적이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편이다.

결혼식 축가가 아예 없지는 않다.

주로 차분하게 악기를 연주하거나 팝송을 불렀다.

음향시스템도 허술해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불렀다.

류지호처럼 앰프까지 동원해 신나는 가요를 빵빵하게 틀고 춤까지 추는 경우는 없다.

환갑이나 칠순잔치도 아니고.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신랑·신부가 슬며시 눈시울을 붉혔다.

모두가 ‘스승의 은혜’를 합창하며 이제 막 탄생한 부부의 행복을 빌었다.

가요에 맞춰 춤을 출 때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던 연세 많은 어르신들도 제자들의 합창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신부가 신랑에게 속삭였다.


“정훈씨, 제자들이 참 대견해요.”

“그러게요. 선생하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결혼식이라는 인생에 단 한 번 밖에 없는 큰 행사.

자신의 첫 제자들이 불러주는 축가.

평생 기억에 남을 순간이다.

류지호는 신포고 댄스팀까지 끌어들여 플래시몹을 흉내내보려 했다.

너무 일을 키우는 것 같아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했다.

결혼식 축가도 쑥스러워서 자주 볼 수 없는 시절이다.

연세가 많은 어른들은 아무래도 유교적인 예의범절을 따지는 풍토다.

너무 나가면 반발을 살 것 같아 ‘스승의 은혜‘로 마무리 했다.

카메라맨이 4명이 돌아다니고 플래시몹 같은 이벤트가 벌어지자 다른 예식에 참석한 하객들도 연정훈의 예식홀에 몰려들었다.

젊은 하객들 사이에서 신기함, 부러움 등의 반응을 보였다.

황재정은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것도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겠지.....?’


류지호는 은사인 연정훈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결혼식을 선물했다.

덤으로 4대의 카메라를 운용해 예식을 찍음으로써 다양한 소스를 얻었다.

4대의 카메라로 찍은 포지션, 구도, 앵글 등을 연구하다보면 웨딩비디오의 기본 포맷을 확립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물론 비용을 생각하면 손해였다.

그런데 연정훈은 류지호에게 거의 유일하다시피 좋은 기억으로 남은 교사다.

다른 동창들에게 마찬가지다.

진정한 스승의 표상은 아니겠지만, 연정훈은 초임교사로서 아직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

촬영한 영상을 확인하고 있는 류지호에게 정종택이 말을 걸어왔다.


“가끔 코미디언을 불러 분위기를 띄우거나 하는 것은 봤어도 이런 식으로 이벤트를 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군.”

“앞으로 결혼식도 단순한 기념식이나 행사가 아니라 축제가 되어갈 거라고 봐요.”

“예식장 입장에서는 손해겠어.”

“예?”

“식순이 늘어날수록 예식 시간도 그 만큼 늘어날 테니까.”

“글쎄요., 별로 그걸 것 같진 않네요.”


2000년대로 넘어간다고 해도 예식장 결혼식 시간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호텔예식이나 하우스 웨딩 정도가 넉넉한 시간으로 진행될까.


“지금 있는 음향 시스템으론 고객의 요구를 못 쫒아 가요. 서양문화를 배척하는 어른들과 달리 젊은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문화에 목말라 있어요.”

“류 감독은 이런 문화가 유행할 거라 보는 군?”

“오늘 선생님께 해드린 것처럼 요란하진 않겠지만, 축가는 모두가 하게 될 겁니다. 비디오 촬영이 유행하는 것처럼요.”


정종택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눈앞에 있는 친구가 고등학생 때 결혼식을 비디오로 찍어 팔겠다고 했을 때는 반신반의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3년이 흘러 결혼식 비디오는 결혼식의 필수요소가 되었다.


“방송부장, 이리 와봐라.”

“넵! 선배님!”

“가서 애들하고 맛있는 거 사먹어.”


류지호는 오늘 고생한 방송부 후배들에게 식사를 하라며 십 만원을 찔러줬다.


“류 감독, 저녁에 뭐해?”

“죄송해요. 동창들하고 술 한 잔 하기로 해서요.”

“그렇다면 언제 날 잡아서 식사 한 번 해. 언제가 좋을 거 같아?”

“당장 날짜를 정할 수는 없고, 다음 주 월요일에 전화 드릴게요.”

“알겠어. 미국 들어가기 전에 꼭 한 번 보자고.”

“네.”


류지호와 가온 웨딩 멤버들이 장비들을 짊어지고 신신예식장을 떠나갔다.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정종택이 중얼거렸다.


“자기 사업만 하지 않으면 데려다가 함께 일을 하고 싶은 녀석이야....”


류지호가 자신은 담을 수 없는 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정종택은 꿈에도 몰랐다.


✻ ✻ ✻


신포고 동창들이 아네모네 소주방으로 몰려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런 식으로 모인 것이 처음이다.

다들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근황을 묻고 대답하느라 술자리 내내 왁자지껄했다.


“학교 자퇴할 때만해도 지호가 이렇게 잘 나갈 줄 누가 알았냐?”

“난 잘 될 줄 알았는데?”

“지랄한다. 범생이라고 같이 놀지도 않은 놈이.”

“지호가 범생이는 무슨 얼어 죽을 범생이냐? 교감 학교에서 잘리 게 만든 장본인이 지호라더라.”

“진짜?”

“니들 몰랐어? 그때 학교 뒤집어 놓은 거 다 지호가 한 거야. 교감 잘리고, 한 동안 선생들 얌전했잖아. 지호 저거 은근히 학교 잘리기 전부터 골통이었어.”

“잘린 거 아니거든! 자퇴야 인마~”


동창들이 류지호의 무용담을 시작으로 추억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고우찬이 소주를 단숨에 목 뒤로 넘기고 류지호에게 물었다.


“야, 국회의원 아들래미하고 미국에서 안 좋은 걸로 엮였냐?”


류지호가 고우찬의 빈 잔을 채워주며 되물었다.


“국회의원 아들?”

“장 부장님하고 신변호사 누님이 고영철 의원인가 하는 양반 망하게 만들 거라던데?”

“아.... 고영민이 아버지?”

“고영민이 누군데? 미국에서 널 괴롭혔어?”

“걔들하고 문제가 있긴 했지.”

“애인이라도 빼앗겼냐? 그 자식 미국 유학 가서 난봉꾼 짓거리 꽤나 한 모양이던데?”

“넌 어떻게 알아?”

“현도 형님한테 들었지.”

“강현도씨?”

“엉. 짭새가 못하는 것을 해야 점수를 따지.”


김준우가 끼어들었다.


“누구한테 점수를 따. 지호한테?”

“당연하지 지호가 회장인데.”


UCLA 한인학생회 간부였던 박원택과 고영민은 부모에 의해 강제로 군에 입대했다.

군대로 도망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 둘이 미국에서 건드린 여학생들의 부모들이 강간혐의로 고소를 해버렸다.

신효정의 다온 법률사무소가 그들을 도왔다.

그 둘이 건드린 유학생 부모 중에는 현역 군인 간부도 있었고, 대학병원 의사도 있었다.

청소년기에 너무 공부만 한 여학생들은 한인학생 간부이자 좋은 집안의 남학생들에게 홀랑 넘어갈 정도로 순진했다.

화가 난 부모들은 박원택과 고영민을 강간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국회의원 아들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두 녀석의 부모는 그 일을 무마하느라 진을 빼야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장문식이 아직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년 3월에 제14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장문식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영민의 아버지가 아예 공천을 못 받게 하거나, 총선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낙선을 할 수 있도록 작업을 할 계획이다.

이 당시만 해도 선거판에 깡패가 동원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나래안전의 전직 안기부와 경찰 출신들은 그들의 부패와 비리를 수집하고 있었다.

고영민의 아버지는 다선의 중진의원도 아니고, 거물 정치인도 아니다.

장문식은 일단 고영민의 아버지를 낙선을 시킨 후에 수집한 비리혐의를 이용해 법의 처벌을 받게 할 생각이다.

박원택의 아버지는 조금 수월하게 작업이 진행되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기업이 어디 있을까.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횡령배임 등으로 사법기관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박원택 아버지는 망나니 자식 때문에 한 동안 경찰서와 검찰청을 수도 없이 드나들어야 할 판이다.

김준우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와아, 지호, 뒤끝 있네?”


황재정이 까칠하게 말을 받았다.


“힘이 없다고 그냥 당해줘야 하냐?”

“그건 그렇지만.”

“이번 기회에 지호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어.”

“힘?”

“부자라고 다 힘을 쓰는 건 아니야. 이놈에 나라에서 사업하려면 권력자를 상대할 만한 보이지 않는 역량이 필수야.”

“적을 만들면 좋지 않아.”

“애초에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일찍부터 치워버리는 것도 좋지.”


류지호가 말을 보탰다.


“맞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류지호의 자신감에 친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까지 내 이야기만 할 거야? 너희들의 학교생활은 이야기 해 주지 않을 생각이야?”

“아직 밤이 오려면 멀었네, 친구.”


고우찬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하하하.


그에 사인방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볼 때마다 몇 단계씩 성장하는 친구다.


‘지호하고 나란히 서려면 많은 걸 경험해야 돼.’

‘아씨... 이러다 가랑이 찢어지겠네.’

‘서울대 갔는데 뭘 더 해야 되냐....!’


사인방은 류지호에게 질투심보다는 투쟁심이 들었다.


❉ ❉ ❉


밤 새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한 류지호는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느지막이 침대를 빠져나와 여유롭게 모닝커피를 마시며 조간신문을 읽었다.

류지호의 옆에 류순호가 털썩 주저앉았다.


“형. 뭐해?”

“신문 보고 있지.”

“그렇구나.”


류지호가 고개를 들어 동생의 얼굴을 바라봤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진로는 정했냐?”

“진로?”

“대학이라던가, 계속 밴드활동을 할 생각인가 하는. 음악을 계속하겠냐는 거야.”

“잘 모르겠어. 난 연주에는 재능이 없나봐.”

“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남과 비교해서 그런 거야?”

“둘 다.”

“자식이,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

“불공평해.”

“뭐가?”

“형한테만 재능을 다 몰아줬나봐. 난 개털이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자, 이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해봐.”

“내가 음악을 계속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난 음악은 잘 모르는데?”

“형도 모르는 게 있어?”

“인마, 형도 모르는 게 많아서 미국까지 가서 열라게 배우고 있잖아.”

“불공평해.”

“또 뭐가?”

“형 같은 사람들은 재능도 있으면서 노력까지 하잖아.”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형은 재능이 별로 없어. 그래서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노력하는 거야. 천재를 뛰어넘진 못하겠지만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조금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럼 나도 형처럼 열심히 하면 음악가가 될 수 있을까?”

“뭐든 될 수 있어. 그리고 순호야.... 넌 다른 많은 사람이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잖아.”

“그게 뭔데?”

“형이 있잖아. 넌 이 형의 동생이잖아.”

“아우! 재수 없어.”

“그런 게 아냐 인마.”

“자꾸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을 말하면 안 돼?”

“형은 널 도와줄 수 있어. 너희 밴드 앨범을 내줄 수 있고, 쾌적한 연습실을 만들어 줄 수 있고, 매끼 굶지 않고 음악만 할 수 있게 지원해 줄 수 있고, 대단한 음악가들의 공연을 언제든지 볼 수 있게 해줄 수 있고, 선진 스튜디오 시스템을 경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돈으로 네게 재능을 사줄 수 없지만, 네 인생에서 낭비되는 시간을 줄여줄 수 있지.”


평범한 부자는 자녀에게 스펙만 쌓아준다.

진짜 부자는 자녀에게 폭넓은 견문과 경험을 제공해주고 그것을 통해 가치관을 정립하고 지혜를 갖출 수 있도록 돕는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야 예술이 나온다던데?”


맞는 말이면서 틀린 말이기도 하다.

불운한 시절을 겪고 대단히 성공한 대중예술가들의 스토리가 대중에게 크게 각인되어서 그렇지, 어릴 적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이 더 크게 활약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모의 재력이 자녀에게 선택지를 늘려주니까.


“형하고 미국에서 공부해 볼래?”

“미국?”

“네 실력으로는 솔직히 버클리 음대니 그런 좋은 데는 못 가. 대신 미국에는 좋은 실용음악학교가 많아. 그곳에서 대중음악을 공부해 보는 것도 좋지. 저번에 형하고 구경 다닌 뉴욕만 해도 다양한 음악가들이 있어. 매일 거리와 공연장에서 다양한 음악 공연이 펼쳐지지.”

“한국의 대학도 못 가는데, 미국에서 날 받아줄까?”

“일단 한국의 실용음악과를 도전해 봐. 실기 위주로 뽑는 학교도 분명 있을 거야.“

”공부를 안 해서, 학력고사는 솔직히 자신 없는데....“

“자랑이다 인마.”

“그냥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뿐이야.”

“가수가 되고 싶은 거야?”

“형이 시나리오 쓰고, 영화 찍는 것처럼 음악을 작곡하고 앨범도 내고 그러고 싶어.”

“해봐. 형이 도와줄게. 음악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찾아보면 꽤 많아. 대중가요 작곡가, 프로듀서, 영화음악가, 광고음악, 드라마음악, 게임 배경음악, 이벤트 음악 기타 등등.”

“....음.”

“꿈이 무엇인지 고민해봐.”

“작곡가.”

“그건 목표지 꿈이 아니잖아.”

“....?”

“형은 꿈은 이룰 수 없는 허무맹랑한 무엇이라고 생각해. 비현실적인 어떤 것. 작곡가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갖는 직업이거나 수단이지 꿈이 아니라고 생각해.”

“형의 꿈은 뭔데?”

“글쎄. 형도 아직 명확하게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궁색하네.”

“영화감독 아니야?”

“아까 말했잖아. 영화감독은 꿈을 이루기 위해 내게 필요한 직업이라고.”

“그게 뭐야?”

“그러게. 어렵지?”

“아우! 형은 쉬운 말도 어렵게 해.”


류순호가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하하하.


류지호가 그런 동생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유능한 영화감독.

이는 류지호에게 꿈이라기 보단 그냥 목표라는 말이 더 적합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목표나 직업을 떠나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루고 싶은 비현실적인 어떤 것.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켜 줄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하는 프로듀서?

왠지 이것들은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룰 수 없는 목표 같기도 하고.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기준이라는 것이 추상적인 것이니까.


“암튼! 약속한 거다.”

“응. 형이 도와줄게. 음악공부 도전해 봐.”

“고마워 형.”


쓰담쓰담.


류지호가 푸근하게 웃으며 오랜만에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가의말

한 주 잘 마무리하시고, 편안한 주말 맞이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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