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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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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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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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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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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모하비 사막 촬영을 다녀온 류지호는 친구들과 함께 블루스크린을 구비하고 있는 스튜디오를 빌려 불타는 마네킹을 촬영했다.

2000년대라면 굳이 마네킹에 불을 붙인 실사를 찍을 필요가 없다.

현재는 직접 불이 타는 것을 촬영한 소스가 필요했다.

CG 아티스트들이 이 필름을 스캔 받은 후에 플러스알파를 더해 풍성한 불길을 만들어 줄 터.

LMI 같은 업체 말고

CG업체들은 소스 없는 완전한 창조는 불가능했다.

LMI 같은 대형 CG 업체에 보내면 가능하긴 하다.

비용과 상관없이 받아주기만 한다면.

암튼 류지호는 CG 업체에서 나온 슈퍼바이저가 하라는 대로 했다.

적정 노출이 이 정도다 하면 그의 말대로 했다.

심지어 구도와 화면 사이즈도 그의 말을 따랐다.

전문가 앞에서 어설픈 지식을 뽐낼 필요는 없다.

영화 작업은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초창기 한국의 CG맨들이 충무로와 소통에서 무척 애를 먹던 모습을 류지호는 똑똑이 기억하고 있다.

블루 스크린에 칠해야할 페인트는 일반 페인트와 다르다.

충무로에서는 비싼 페인트를 주문하는 것 대신 일반 페인트를 섞어 쓰는 일이 다반사였다.

촬영감독에게 ‘노출을 이 정도로 해 주세요‘ 하면 ’네가 뭘 알아? 너나 잘해‘ 라고 수퍼바이저에게 쏘아붙이기 일쑤였다.

그렇게 찍혀서 현장에서 넘어 온 소스를 가지고 CG팀에서 몇 곱절의 노동과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돈도 쥐꼬리만큼 지불하면서.

CG가 요술방망이는 아니다.

다만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 많은 걸 만들어 낼 수 있다.

일반 페인트를 섞은 블루스크린에서 촬영하고, 필터를 쓰지 않은 조명을 치고 촬영하게 되면 색이 탁해져 CG팀에서 제 색을 내려다가 피사체가 뭉개지기도 하고, 그걸 보정하기 위해선 또 작업시간이 서너 배가 길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CG 프로세서를 모르니 제작진에서는 왜 빨리 결과물을 가져오지 않느냐 다그쳤다.


‘더럽게 비싸게 구네.’


<이카루스> CG 작업을 맡은 업체의 슈퍼바이저는 마치 무슨 대단한 기업비밀이라도 되는 양 류지호가 궁금한 것을 물으면 답을 주지 않았다.

너무 사무적이다.

자신들이 작업하는 것에 필요한 부분만 정확하게 주문하고 그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류지호가 작업공정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나중에 결과물을 확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 가서 수정보완 사항을 말해달라고만 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로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TV광고에서나 하는 CG작업을 학생작품에서 하는 류지호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류지호가 로이를 달랬다.


“번거롭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나중에 <터미네이터>나 <스타워즈>를 촬영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난 가짜를 찍는 영화는 안 할 거야.”


순간 류지호는 로이의 뒤통수를 한 대 칠 뻔했다.


“며칠 전 모하비 사막에서 미국 국경 씬을 찍었어. 진짜를 찍은 거냐?”

“그건 다르지. 실제 공간에서 실제 사람을 놓고 찍었잖아.”

“나는 네 영화관을 존중해. 그런데 로이. 앞으로 촬영감독이 CGI를 모르면 괜찮은 일자리를 얻지 못할 거야. 마이너에서만 놀아야 돼. 그래도 좋아?”


물론 그런 시대가 오려면 아직 10년은 더 흘러야 했지만.


“교수님들이 그랬잖아. 대학에 있을 때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고. 현장에서는 누구도 가르쳐 주는 게 없다고.”

“그래도 너는 너무 많이 찍어.”

“겨우 세 편이야.”

“한 쿼터에 세 편이야. UCLA 기록이라도 세울 생각이야?”

“음.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암튼 너는 별종이야.”


로이가 보기에 이 부자 후배 놈은 진짜 그렇게 할 것만 같았다.

사실 류지호의 상황을 몰라서 하는 생각이다.

곧 군대에 가야했다.

30개월 혹은 26개월 동안, 류지호는 영화를 찍고 싶어도 못 찍는다.


“그러고 보니 한국 들어가서 신검도 받아야 하잖아!”


류지호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 ❉ ❉


오랜만에 류지호가 컬버 시티를 방문했다.

트라이-스텔라 픽처스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서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

류지호가 예상했던 범위를 훨씬 넘어선 규모의 파티다.

적어도 트라이-스텔라 픽처스 직원의 절반 이상은 참여한 것 같다.

외부 인사들도 꽤 섞여서 파티를 즐기고 있다.

류지호가 안면이 있는 직원들과 눈인사를 하며 파티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엘! 에단!”


와인 잔을 들고 샘 리버먼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고언 형제가 류지호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미라클 보이!”


에단이 활짝 웃으며 류지호를 반겼다.


“에단, 축하해.”

“고마워.”

“조엘은 여전하네요?”


조엘 고언은 표정 없는 얼굴로 무게를 잡고 있다.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묵한 스타일도 아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상당히 말을 아끼는 편이긴 하지만.

그러다 가끔 입을 열면 사고가 터지곤 한다.

여과 없이 내뱉는 독설과 황당한 발언 때문에.


“축하 고맙다.”

“아직 축하를 전하지도 않았는데요?”

“어차피 할 거였잖아.”


5월에 열린 44회 칸영화제에서 <바톤핑크>가 황금종려상, 감독상, 존 터튜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오늘의 이 모임은 그 일을 축하하는 파티다.


“에단, 아쉽지 않아?”

“뭐가?”

“황금종려상에 형인 조엘만 올라갔잖아?”

“난 상관없는데? 어차피 형이 받은 거나 내가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이때만 해도 칸영화제의 대상인 황금종려상(Palme d'Or, Golden Palm)에서 공동수상이 없었다.

게다가 영화 크레디트 각본 부분에 고언 형제 두 사람 이름이 모두 들어가지만, 연출에는 형인 조엘이 제작에는 동생인 에단의 이름을 올렸다.

공동 감독을 허용하지 않는 미국감독협회 규정 때문이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고언 형제에게 축하를 전한 류지호가 <바톤핑크>에 참여했던 친분이 있는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조엘 고언의 아내 프랜시스 맥도먼드, 미식축구광 존 굿맨, 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존 터투로 등.

고언 사단이라 불리게 될 이들에게 축하를 전했다.


“빈센트, 잘 지냈어요?”

“오랜만이다. 지호.”


툭 튀어나온 눈을 가진 독특한 얼굴 덕분에 한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배우.

뉴욕시에서 소방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 배우 빈센트 부셰미(Vincent Buscemi)다.

7월에 쿠엔 태런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을 찍을 예정이다.

고언 사단과 인사를 담소를 나눈 후 모리스 메타보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배니 소넌펠트에게 다가갔다.


“베니, 얼굴이 활짝 폈네요?”


류지호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베리 소넨필드다.


“농담하지 마. 1년 전 내 모습을 되찾으려면 아직 멀었어.”


촬영현장을 떠나있을 때에 비해 얼굴색이 좋아졌다.

류지호가 마지막에 봤을 때에 비해 확실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Moe, <아담스 패말리> 개봉은 잡혔어요?”

“11월로 예정되어 있네.”

“베니, 행운을 빌어요.”

“내 손을 떠났어. 메타보이씨가 알아서 하겠지.”


세 사람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여배우 둘이 다가왔다.


“이 젊은 신사분이 누구인지 소개시켜 줄 사람?”


<피아노>.

류지호는 여배우를 보고 영화 제목을 뱉을 뻔했다.

157cm 밖에 안 되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에너지를 품고 있는 여배우.

금발의 각진 얼굴, 깊은 눈 안에 자리하고 있는 정열적인 눈동자.


“안녕하세요. 패트리샤. 지호 류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미스터 류.”


콧소리를 섞으면서 말끝을 약간 길게 늘어뜨리는 패트리샤 헌터(Patricia Hunter)의 독특한 남부식 액센트가 매력적으로 들렸다.

작은 체구지만 뜨거운 남부의 햇볕처럼 폭발적인 에너지와 정열로 똘똘 뭉친 여배우다.


“만나서 영광이에요. 캐슬린 도일.”

“반가워요. 미스터 류. 캐시라고 편하게 불러요.”


다소 통통한 체격에 동글동글한 얼굴.

<미저리>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케시 도일이다.

두 여배우는 조엘 고언의 아내 프랜시스 맥도먼과 꽤 친했다.

특히 패트리샤 헌트는 <아리조나 유괴사건>에도 출연한 적이 있고, 한때 패트리샤 헌트와 LA에서 함께 살기도 했었다.


“프랜시스 말에 의하면 뉴욕에서 상당한 유명인사라던데?”

“유명하긴요. 놀림감이었죠.”

“LA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UCLA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그렇게 류지호는 파티에 참석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다졌다.

파티가 무르익을수록 옥상으로 사람이 들고 나갔다.

류지호는 잠시 파티에서 떨어져 한쪽 편으로 물러났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컬버 시티는 야경이라고 할 수 있는 불빛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고층빌딩도 별로 없고 밤 9시만 되면 깜깜해지는 소박한 도시다.


“요즘 단편영화 찍고 있다며?”


조엘의 목소리에 류지호가 파티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앞에서 맥주병이 어른거렸다.

조엘이 내민 맥주병을 받아든 류지호가 한 모금 넘겼다.


“좋은 태도야.”

“단편영화 찍는 거요?”

“응.”


류지호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난 뉴욕대 다니면서 그렇게 크게 배운 게 없었어. 솔직히 고리타분했지.”

“단편영화를 많이 찍어보면서 스스로 깨우쳤어요?”

“딱히..... 학교 졸업하고 작은 영화들 편집 하면서 많은 걸 배웠지. 그때 배운 것들이 대학에서 4년 동안 배운 것보다 훨씬 값지다고 생각해.”

“에단은 언제부터 영화에 관심을 가졌어요?”

“프린스턴에 다닐 때부터 연극 대본을 쓰더라.”

“조엘은 배우들에게 절대 애드리브를 시키지 않는다면서요?”

“물론이지.”

“왜요?”

“내 각본과 완성된 영화가 차이가 나지 않게 하려고.”

“그렇군요.”


고언 형제는 세계적인 감독이 된 후로도 배우가 약속되지 않은 연기를 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존 터튜가 단역으로 잠깐 우정출연 했을 때 문제가 터진다.

존 터튜가 대본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연기를 해버린다..

당연히 조엘 고언은 화를 내게 되고 아랑곳하지 않고 존 터튜는 애드리브로 연기를 마치게 된다.

당연히 존 터튜는 화가 난 고언형제가 자신의 분량을 편집에서 빼버릴 것이라 생각한다.

몹시 기분이 상하게 되는데, 막상 영화에서 자신의 애드리브 연기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걸 보고 한동안 고언 형제 영화에서 유일하게 애드리브를 선보인 배우라고 자랑하고 다닌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나와 동생은 스토리보드를 매우 꼼꼼하게 만들어. 그리고 현장에 나가면 필요한 씬만 정확하게 찍고 끝내지. 난 이야기든 씬이든 낭비되는 게 싫어.”


류지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무리 없이 진행되다가 뜬금없는 말이 조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안 봐.”

“뭘요?”

“네 단편영화.”

“누가 보여주기나 한데요?”

“부끄러워?”

“아니요.”

“그런데 왜 안 보여주겠다고 하지?”

“먼저 안 본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죠?”

“바쁘지만 내가 네 영화를 봐줄게. 지호니까 특별히.”

“필요 없어요.”

“계집애처럼 굴 거야?”


말장난 하는 것이 재미가 없어 류지호가 파티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트라이-스텔라 픽처스 관계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고언사단이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이다.

고언 형제는 같은 배우와 스태프들을 계속해서 기용하는 편인데, 그래서 그런지 촬영현장도 화기애애하고 손발도 무척 잘 맞는다고 들었다.


“너도 <바톤핑크>가 어려워?”

“별로요.”

“근데 왜 사람들은 내 영화가 난해하다고 하지?”


‘당신들이 그렇게 영화를 찍었잖아! 이 양반들아!’


류지호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도로 집어 삼켰다.

어려운 걸 쉽게 풀어내는 게 진짜 연출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들 형제가 천재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다음 작품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더 칩스 픽터스와 스크립트 하나를 계약했어.”

“트라이-스텔라와 안 하고요?”


류지호의 어조에는 어떤 섭섭함도 없었다.

단지 궁금할 뿐.

할리우드에서는 계약 외에 의리를 따지는 건 아마추어나 하는 짓이다.

좋은 스크립트, 감독, 배우는 먼저 선점하는 사람이 임자인 곳이 할리우드다.


“Joe와 작년부터 논의하던 프로젝트야.”

“무슨 영화인지 물어보면 대답해 줄 거예요?”

“훌라후프. 빅 비즈니스(Big Business).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어.”


류지호는 훌라후프를 듣고 단번에 무슨 영화인지 알 수 있었다.

<허드서커 대리인>.

조엘은 두 단어를 듣고 류지호가 궁금한 표정과 함께 즉각 더 물어볼 줄 알았다.

그런데 류지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뭐야? 안 궁금해?”

“궁금해요.”

“....음. 표정이 그게 아닌데?”

“더 칩스 픽처스라면 조 실버의 그 프로덕션 맞죠?”

“응.”

“그 스크립트도 샘 레이미와 함께 쓴 거죠?”

“내 뒷조사라도 했어?”

“설마요? 예전에 조엘이 알고 있던 트라이-스텔라가 아니에요. 할리우드의 많은 소식들이 모여들고 있지요.”

“그렇다고 트라이-스텔라가 메이저가 된 것은 아니지.”

“아직은 그렇죠. 그 영화 끝내고 다음 작품은요?”

“감독 목숨이 파리 목숨인 걸 몰라?”

“더 칩스랑 한 작품 하고 나서 다시 트라이-스텔라랑 해요.”

“싫어.”


조엘 고언이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류지호는 짜증이 팍 하고 차올랐다.

그래서 날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왜요?”

“나와 동생은 처음으로 2,000만 달러짜리 영화를 찍을 예정이야. 당분간 이 프로젝트에만 집중하고 싶어.”

“....음. 그런 이유라면.”


류지호로서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똑같은 입장이라면 그런 판단을 할 테니까.


“편집을 직접 한다는 건 언제 밝힐 생각이에요?”

“무슨 헛소리야.”

“로더릭 제인스. 그게 조엘과 에단을 숨기려고 만든 가상 인물이잖아요.”

“어, 어떻게 알았어?”

“내가 편집하는 걸 구경하고 싶다고 하니까. 방해하지 말라면서요?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음.”


‘여보세요. 댁들은 뛰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요.’


<허드서커 대리인>.

류지호도 재미있게 봤던 영화다.

자세한 박스오피스는 알지 못했지만 류지호가 기억하기로 상업적으로 망한 영화다.

참고로 이 영화는 제작 예산과 P&A 포함해서 4,500만 달러를 쓰고, 전 세계적으로 1,500만 달러 수익을 거두는데 그치고 만다.

망해도 적당히 망해야 다음 기회가 있다.

메이저 스튜디오와 일한다는 건 그런 거다.

게다가 재촬영, 편집권을 놓고 제작자와 갈등을 겪기도 한다.

류지호는 <허드서커 대리인>의 실패로 인해 고언 형제가 잠시 슬럼프를 겪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내버려두기로 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실패 이후로 더욱 독하게 칼을 갈고 들고 나오는 영화가 <파고>다.

그때부터 함께 하면 된다.

파티에서 기숙사로 돌아온 류지호는 완전히 뻗어 버렸다.

학업과 단편영화 작업을 병행하며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모양이다.

류지호는 일주일 간 컨디션을 조절하면서 숨을 골랐다.


새벽에 일어나 상쾌하게 스트레칭과 조깅을 마친 류지호가 연인 낸시와 기숙사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즐겼다.

두 사람 다 피로가 풀린 안색이다.

더스틴과 쉐인이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잘 쉬었냐? 캡틴?”

“어서 와.”


단편영화 두 편을 촬영하면서 류지호가 매우 능숙하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마치 함장 같다며 부르던 호칭이 캡틴이다.

친구들도 장난스럽게 부르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


낸시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더스틴과 쉐인이 음식 접시를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를 빼 앉았다.


“다시 달리는 거야?”


쉐인이 또 단편영화를 찍을 생각인지 물었다.


“학기말고사 전까지 아슬아슬하게 한 편 더 찍을 수 있을 것 같아.”

“미쳤다, 정말!”


쉐인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반면에 더스틴은 뭔가 고심에 찬 표정이다.


“더스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안 좋은 일은 없어.... 단지.....!”


더스틴이 잠시 뜸을 들였다.

말하면 듣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세 사람은 묵묵히 포크를 놀렸다.

마침내 더스틴이 입을 열었다.


“네가 쓴 각본 중에 <재단사> 이야기 있지?”

“응.”

“그걸 내가 연출해보면 안 될까?”


류지호가 고개를 들어 더스틴을 쳐다봤다.


“단편영화를 찍고 싶으면, 네 이야기를 찍어.”

“네 글을 보고 내 이야기가 떠올랐어.”

“그걸 찍으면 되잖아. 굳이 내가 쓴 각본을 연출할 필요가 있어? 단편이잖아.”

“나는 UCLA에 입학해 독립하기 전까지 대가족과 함께 살았어. 우리 집안은 굉장히 보수적이야. 그런 집안에 게이가 한 명 나타났어.”

“......!”

“내 삼촌이 게이야.”

“그 이야기를 써 봐.”

“아니. 네가 쓴 각본이 마음에 들어. 그것 이상으로 나한테서 나올 것 같지 않아.”

“혹시 시나리오 형식의 글 써봤어?”

“아니.”

“.....음.”


류지호는 더스틴의 제안을 놓고 식사도 잊은 채 장고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그런 류지호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


‘난 그저 촬영을 해보고 싶었던 거잖아. 누가 연출을 하던 상관이 없잖아.’


사실 자신이 촬영하고 조명만 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연출자의 입장이 아닌 촬영감독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그걸 위해 단편을 찍고 있는 것이니까.

감독은 콘티를 통해 영화 전체를 관할한다.

촬영감독은 카메라를 통해 영화의 모든 시각적인 걸 다룬다.

이번 기회에 시각적인 부분을 다뤄보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 애초 목적이다.

생각을 정리한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촬영만 할 수 있다면 난 상관없어.”


류지호의 시원스런 승낙에 더스틴의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났다.


“고마워! 캡틴!”

“캡틴 소리는 집어치우면 안 될까?”


더스틴이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촬영감독은 모든 현장 스태프의 매니저이자 관리자. 고로 대장이야.”


일리가 있는 말이라 류지호는 쉽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많이 가르쳐줘.”

“난 널 가르칠 수 없어. 대신 방법은 알려줄게.”


류지호는 불현듯 고등학교 1학년 때 방송제를 준비하던 때가 생각났다.

당시 친구들이 방송제 전날부터 긴장해 벌벌 떨었었다.

헌데 미국에서 만난 이 친구들은 그런 게 없다.


“이번엔 더스틴이라 이거지. 그럼 내 차례도 곧 오겠네?”

“쉐인, 이번에 내가 어떻게 하는 지 똑똑히 봐.”

“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매번 찍을 때마다 Jay한테 물어보겠지.”

“나도 비디오 좀 찍어봤거든.”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다고 하면 긴장도 되고 걱정도 들법한데, 두 녀석은 아니다.

의욕이 불타오르고 있다.


“너희 둘 다, 한 번도 필름으로 영상을 찍어본 적이 없지?”


두 녀석이 고개를 힘차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더스틴, 비디오카메라로 간단한 영상은 촬영해봤다고?”

“응.”


편집 개념도 없는 비디오 동영상.

무조건 순서대로 찍고, 여기서 시작해서 저기서 끝나니까, 끝난 다음부터 다시 시작.

중·고등학교 시절에 비디오카메라로 이야기가 있는 동영상을 찍는다면 대개 그렇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지우고 다시 촬영하기도 하고.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라.”


류지호의 충고는 적절했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두 녀석의 얼굴에 살짝 긴장감이 서렸다.


“겁주려는 게 아니니까 잘 들어봐. 필름 작업은 비디오카메라로 일단 찍고 보자는 식으로 촬영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집중해서 일해야 돼. 특히 감독은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전달할 줄 알아야 하고. 그들이 감독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줘야 해. 단순이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류지호는 다소 엄하게 말했다.


“<재단사>는 내가 앞 서 찍은 세편보다 훨씬 작업 난이도가 있어.”


전작들에 비해 미장센을 염두에 두고 쓴 각본이다.

다소 여유롭게 작업했던 지난 촬영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다.


“흑백필름으로 찍으려고 했어. 괜찮겠어?”


류지호에 제안 아닌 통보에 더스틴이 상관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좋아. 고전영화처럼.”

“<재단사>에서 주제는 그대로 가져가지만, 스타일은 전의 세 작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촬영할 생각이야.”

“어떻게 할 건데?”

“형식미, 조형미, 흑백을 이용한 콘트라스트 영상미.”

“드라마 보단 미장센과 이미지 위주로 풀어보겠다는 거지?”

“응.”

“상관없어. 돈 받고 팔 영화도 아니고, 부담 갖지 말고 맘껏 그렇게 찍어.”

“.....?”


류지호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는 친구들이 굉장히 똑똑하고 스마트한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한국에 있는 친구 고우찬처럼 대책이 없어 보였다.


“네가 나 좀 많이 가르쳐줘.”

“친구끼리 뭘 가르쳐?”

“학교에서는 실기는 안 가르치잖아. 어차피 누군가에게 배워야 한다면 이번에 네가 실기를 시켜주면 되지.”


대학에서 따로 실기를 가르치진 않는다.

대신 선배들의 단편영화 작업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시스템이다.

생각해보면 영화과 선배들이 해왔던 일이 친구인 류지호로 바뀐 것뿐.


“학기말고사 망쳐도 난 책임 없다?”

“내가 알아서 할게.”


류지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나만 믿고 따라와 봐.”


낸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자신감 하나는 끝내준다니깐.”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사인방 친구들 그리고 방송부 친구들이 류지호에게 자주 하던 말이다.


“그럼 친구들을 다시 한 번 모아보자.”

“라저!”


혹시 더스틴이 제작비가 없어서 자신의 작품에 얹어갈 생각을 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아니었다.

더스틴은 당당하게 학교에서 필름과 장비 일체를 지원 받아 왔다.

진행비로 자신의 비상금을 내놓았다.

류지호는 더스틴의 진정성(?)을 의심한 것에 대해 반성했다.

따라서 제작비 대부분을 기꺼이 부담했다.


작가의말

어쩌다 배우가 이번 주에 완결이 되면서 다음 주부터는 미스터 할리우드 연재시간이 9시로 앞 당겨질 예정입니다. 미스터 할리우드에 집중하다보면  연참도 자주 하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봅니다. 활기찬 한 주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PS. 루시오엘님, 니름님, gpart님 과분한 후원 감사드립니다. 여유가 생기게 되면 연참 자주 하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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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할리우드!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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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Life Goes On. (3) +7 22.06.08 5,921 186 22쪽
185 Life Goes On. (2) +7 22.06.07 6,015 193 25쪽
184 Life Goes On. (1) +9 22.06.06 6,199 194 26쪽
183 만능이 되어볼까 합니다. (3) +7 22.06.04 6,159 200 22쪽
182 만능이 되어볼까 합니다. (2) +10 22.06.03 6,217 190 26쪽
181 만능이 되어볼까 합니다. (1) +8 22.06.02 6,278 169 23쪽
180 가진 것이 없어도 가치 있게 살아라. +13 22.06.01 6,295 191 27쪽
179 할리우드 파티는 비즈니스의 연장선. (2) +9 22.05.31 6,257 177 25쪽
178 할리우드 파티는 비즈니스의 연장선. (1) +6 22.05.30 6,401 177 23쪽
177 꿈을 이루는데 시간제한은 없다! (4) +7 22.05.28 6,362 181 26쪽
176 꿈을 이루는데 시간제한은 없다! (3) +9 22.05.27 6,309 181 25쪽
175 꿈을 이루는데 시간제한은 없다! (2) +4 22.05.26 6,287 179 21쪽
174 꿈을 이루는데 시간제한은 없다! (1) +13 22.05.25 6,429 184 24쪽
173 우리는 항상 승자 쪽에 있어야 한다! +5 22.05.24 6,495 180 25쪽
172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 (5) +11 22.05.23 6,517 200 24쪽
171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 (4) +7 22.05.23 6,257 165 21쪽
170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 (3) +8 22.05.21 6,674 177 25쪽
169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 (2) +7 22.05.20 6,638 188 25쪽
168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 (1) +6 22.05.19 6,669 179 23쪽
167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7) +9 22.05.18 6,281 191 24쪽
166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6) +5 22.05.17 6,337 167 23쪽
»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5) +7 22.05.16 6,331 174 23쪽
164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4) +6 22.05.14 6,380 176 21쪽
163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3) +6 22.05.13 6,367 159 22쪽
162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2) +9 22.05.12 6,542 172 22쪽
161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1) +9 22.05.11 6,717 179 22쪽
160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 +8 22.05.10 6,774 18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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