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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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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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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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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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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08화

DUMMY

아침나절에 웨이샤오바오가 허겁지겁 달려와 전한 소식은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주리는 믿겨지지 않았다. 어제 중국인 거리 앞에서 지나정대학살을 일으키겠다고 난동을 부리던 그 여자애가, 자기보다 몇 살 정도 어려보이던 그 여자애가 하루아침에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여자애가 보여준 증오어린 행각에 대노하여 당장 처치해야 할 이적행위자라고 펄펄 뛴 주리였다. 그러나 정말로 그 계전아란 여학생이 그렇게 살해당했다는 보도를 보니 꼭 자신이 죽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우가 보기에 이 살인사건은 주리 개인의 죄책감을 유발과 비교도 안될 정도의 더 심각한 국면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천 어르신! 형님들! 우리가 한 게 아닙니다!”


웨이샤오바오가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먼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네. 옥룡회가 그랬을 리도 없고 다른 중국 사람들이 그랬을 리도 없네.”


천 지부장이 냉철하게 말했다.


“작년 이후 대형께서는 옥룡회에 무력행위를 철저히 금지하였고 또 거리의 사람들도 폭동을 유발할 수 있는 어떠한 충돌도 조심하려 애쓰고 있는 걸 잘 아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민호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음모입니다, 사부님! 어떤 놈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일부러 이 계집애를 죽여 거기 던져놓은 거라고요!”


음모. 그 두 글자가 형제들의 머릿속에 빠르게 자리잡았다. 항상 신중하고 진중한 정우가 봐도 그리하였다.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웠다. 만보산 사건으로 인한 폭동에 큰 피해를 입은 중국인들이,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해도 압도적인 다수인 조선 사람들에 눌려있을 수 밖에 없는 중국인들이 이 여자애의 폭언에 화가 난다고 무턱대고 죽였을까? 설령 도무지 참을 수 없어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치자. 그럼 왜 시체를 은폐하지 않고 이른 아침부터 발견되게 내버려 두었단 말인가?


“아직은 기다려야 할 일이다. 섣불리 단정짓진 말거라.”


천 지부장이 민호를 제지시켰다. 그러나 결국 그도 한 마디 덧붙이고 말았다.


“그러나 네 말대로 음모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게 아니고서야 왜 이 여자애가 죽어야 할 이유를 찾기 힘들어. 의도적으로 폭동을 유도하기 위한 살인이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관계나 또는 그저 살인을 즐기는 정신나간 놈의 작태라고 한다 쳐도, 왜 시체를 수습하지도 않고 발견될 수 있게 내버려 둔단 말이더냐?”


“역시 음모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명수의 말이었다.


“인천이나 의주나 목포에서 뭔 범죄만 벌어지면 덮어놓고 중국인부터 의심하는 자들이 이 나라에 한둘이 아닙니다. 무슨 조건반사적으로 그때마다 짱꼴라 쳐죽이자며 선동질을 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사건의 진실이 어떤지 제대로 보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중국인 거리에서 여학생이 살해되어 발견되었다는 것만 중요할 겁니다. 이 사건은 그런 놈들을 자극하기 위한 장치가 분명합니다!”


“와, 씨! 돌겠네!”


재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만보산 사건 이후 그들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몇개월 동안이나 인천에 갈 때마다 장 대인과 몇몇을 제외한 옥룡회 사람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동포들이 저지른 만행에 가슴아파하고 미안해하며 화가 잔뜩 난 중국 사람들을 저자세로 대해야 했다. 그런 답답한 나날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로 끝이 나나 했다. 두 약소민족이 힘을 합쳐 일본에 하나되어 대항할 날이 오게 될 것을 확신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또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하필 그들이 군산을 경유해 상하이로 복귀하기 직전에 또 폭동이 벌어진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노력들은 허사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간의 노력과 희생은 하잘것없는 것으로 화해버릴지도 모른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이제까지 싸워 온 게 그들의 노력과는 별개로 무위로 돌아가게 될 위기인 것이다.


호외보도 이후 더 자세한 기사가 실린 조간신문들이 나왔다.


시체를 발견한 목격자들은 계전아가 실로 무참히 살해되었다고 상세히 증언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발가벗겨진 사체, 괴로움 속에 일그러진 표정과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자국, 거칠게 잡혀서 피멍이 든 두 팔, 그리고······.


“더 못보겠어요!”


주리는 신문기사에서 목격자의 입을 빌려 지나치리만큼 상세하게 묘사된 시체의 상태가 너무 확연하게 상상된 나머지 정우의 품 속에 얼굴을 묻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미 가장 끔찍하고 결정적인 진술, 잘려나간 살점과 부어오른 중요부위란 말은 이미 머릿속에 남고야 말았다. 아무리 처단해야 한다고 열화를 토하던 사람이라도, 그렇게 괴롭게 겁간당하며 죽어갔다. 신문기사 속 묘사와 겹치며, 꼭 자신이 그렇게 당하는 느낌이 들고마는 것이다.


정우는 주리를 토닥이면서도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음모라는 확증이 굳어갔다.


“이건 분노 유발용이야.”


민호가 이를 갈았다.


“이렇게 끔찍하게 살해한데다가 알몸인 채로 보란 듯이 내버려두었어. 이렇게 여학생이 끔찍하게 살해당했으니 다들 분노해 일어나서 중국인에게 보복하라는 의미가 분명해!”


“난 목격자란 놈도 수상해.”


재호의 말이었다.


“신문기자도 수상하고. 목격자 말을 빌렸다지만 너무 표현이나 묘사가 자극적이잖아! 이거 기획된 작업 아냐?”


“폭동 유발하려고 기획한 거다 그거지?’


대석의 말이었다.


“그래! 내 말이! 이거 죄다 짜고 치고 움직이는 거 같다고! 살인범, 목격자, 기자가 하나로 움직이면 파장이 될 만할 사건 하나 만들어 내는 거 일도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는 없어.”


계속 조용히 있던 정우가 입을 열었다. 정우는 사실 재호의 추정이 지나친 의심이라고도 생각하긴 했지만, 이미 그들은 정보공작으로 우정식 서기를 비롯한 여러 목표들을 제거해 왔다. 자연히 그러한 계획적인 음모가 있으리라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떤놈이 이런 수작질을 한 걸까?”


대석의 물음이었다.


“지금은 생각나는 게 없지. 옥룡회에 원한이라도 있거나 아니면 인천 접수라도 노리는 놈들이 꾸민 것 같기도 한데······. 이건 장 대인이 아실 것 같은데?”


재호의 말을 천 지부장이 받는다.


“자세한 사항은 장 대형과 직접 의논해 보겠다. 그때까지는 일단 기다린다.”


지부장은 바로 장 대인과 직접 통화하였다. 그는 장 대인이 인천경찰서장 도가와 경시와 회동을 가지고 이 사태를 논의할 것임을 전달받았으며 그 회동 자리에 숨어들어 상황을 직접 파악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천 지부장은 제자들을 여관에 두고 장 대인을 만나러 떠난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요.”


천 지부장이 떠난 주리가 툭 던진 말이었다.


“어째서 우리 조선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을 그렇게 미워해요? 지금 다 같이 일본에 고통받고 있는 처지잖아요!”


그 말에 정우를 비롯한 형제들의 얼굴에는 이미 져 있던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다 같이 힘을 합쳐 일본에 대항해도 모자랄 판인데, 왜 그렇게 증오하고 싸워대야 해요? 전 그런 거 처음 봤어요! 그 증오에 찬 눈빛들! 상대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그 끔찍한 태도! 그게 사람이에요? 야차에 아수라지! 아니 그것도 아니다! 짐승이에요, 짐승! 어떻게 사람이 되어서 그럴 수가 있어요?”


정우는 주리에게 무슨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막막해진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무너져가던 청이 중화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조공국인 조선을 더욱 속박하고 간섭하려 든 이야기부터 해 주어야 할까?


서구 국가들이 만들어낸 국제질서에서 조공과 책봉의 관계를 일방적인 속국의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정체성의 건설과정에서 자연히 중국에 맞선 서사들을 강화하여 필연적으로 적대감을 자아냈다고 말해주어야 할까?


중국인과 조선인의 문화적, 사회적 차이 때문에 생긴 이질감과 충돌 때문에 적대감이 커졌다고 말해 주어야 할까?


실제 중국인들 중에서도 여전히 오만한 시선으로 조선인을 깔아보는 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키고 해야 한다고 말해주어야 할까?


너무나도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한 바람에 입이 안열리던 찰나였다.


“아가씨. 세상 사람들이 다 아가씨처럼 바르고 이성적인 생각만 했다면, 지난 세계대전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레닌이 말한 제국주의 전쟁의 국제내전 전환도 일어났을 거고, 폴란드 노동계급이 붉은군대에 바르샤바 진공의 길을 열어줬겠지.”


정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민호가 냉소를 담아 말한다.


“그래.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때 유럽 국가들의 일반 대중들은 하나가 되어 전쟁을 막기 위해 일어나는 게 정상이었어. 근데 그러지 않았지. 그들은 전쟁에 열광했어. 왕과 카이저와 차르의 전쟁을 자기들의 전쟁이라고 여겼어.”


“그러다가 참호속에서 다 죽어갔지.”


재호가 덧붙인 말이었다.


“자기와 다른 존재에 대한 증오의 감정, 그리고 자기가 속한 집단의 위상을 높이려는 욕망을 성인들의 가르침보다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세계인구의 절대다수야. 그런 현실에서 웬 미친 폭도들이 중국인 다 죽여버리겠다고 처들어오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야, 아가씨.”


“그래도······.”


주리는 비록 부끄러운 아버지를 두었고 근래 남편에게 헌신하는 거지 여인을 잔인하게 비웃던 여성해방론자들이나 일본 대처승에게 조카딸을 바치는 타락한 승려, 총독부에 부역하는 추악한 개신교 목사 등을 보아왔다. 그럼에도 최소한 세상에 더 많은 사람이 세존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높은 가르침 정도는 아니라도 더 공공의 선을, 더 모두가 행복하고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할 길을 걸을 거라고 내심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 계전아를 필두로 한 중국인 증오에 혈안이 된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을 지극히 냉소적으로 해석하는 단원들의 반응에 가슴이 지극히 텁텁해져 온다.


“윤리고 도덕이고 법이고 다 무시하고 오직 자기 감정해소만 바라는 자들이 세상에 참고 넘쳐. 자기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자각도 못해. 자기 감정을 위해 남이 힘들어지는 건 아랑곳하지 않는 것들 말이야.”


명수의 말에 대석이 으르렁댄다.


“불만만 가득해서 입술 삐죽 내밀고 다니다가 나중에 밀정짓 하는 위험인자들이나 작년에 그 만행을 저지른 폭도들이 되는 거야.”


“그래 대석이 말 대로야.”


민호가 다시 나선다.


“그런 것들이 폭도가 되지. 중국인만 두들겨 팰 수 있다면 총독부의 개가 되어도 상관없는 놈들. 그놈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놈들이지. 자신들이 힘든 것이 적의 통치 때문이란 건 놈들도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 현실을 뒤엎기 위해 떨쳐 일어나는 건 무서워서 못해. 근데 그러면서도 그간 쌓인 울분은 풀고 싶어하지.”


“그래서 중국 사람들에게 그러는 거에요? 만만해서?”


“그래. 일본인을 때리면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받고 법정에서 중형을 선고받지만, 중국인에게 그러면 그렇게 되지는 않으니까!”


주리는 참지 못하고 분개하고 만다.


“비열하고 비겁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소인배들!”


“어쩔 수 없어. 공자께서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엄격히 한 것도, 군자는 적고 소인은 많아서였으니까.”


다른 형제들의 분석들을 듣는 정우는 자신이 지나치게 근원적이고 학문적인 층위에서 사안을 분석하려 한게 아닌가 하여 은근히 머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우는 세존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과 맹자와 주자가 가르친 대로, 모두에게 불성이 존재하고 성인이 될 자질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만이 아닌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사람 모두에게 존재하는 문제 때문인 것만은 아니야. 그걸 이용하고 조장하는 자들이 있지. 총독부는 오래 전부터 이 땅의 중국인들을 추악한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작업을 지속해 왔어. 총독부의 신문인 매일신보를 비롯한 여러 매체들이 중국인 거리를 마굴이자 아편굴로 그려 왔어. 조선에 사는 중국인이 신문에 나올 때는 거진 아편밀수와 관련되어 나왔지. 이건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방식이야. 약소민족들이 뭉치지 못하게 하고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것.”


“그래. 만보산 사건도 그걸로 터졌지.”


명수가 정우의 말에 덧붙인다.


“프랑스 정부도 기미년에 우리에게 그렇게 대했어. 우사 선생님이 기미년에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을 때, 월남의 독립운동가인 호지명, 거기 식으로 읽으면 호치민이란 사람을 만난 적이 있거든. 서로 약소민족으로서 공감과 연대를 느끼고 언젠가 같이 투쟁하자고 말을 나눴었는데, 글쎄 프랑스 경찰이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쪽 대표단에게 호지명하고 다시는 접촉하지 말라고 경고했더라고.”


“지금도 프랑스 영사관 경찰들은 우리가 지들이 지배하는 월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사람들과 접촉하진 않는지 불시에 확인한다고. 평소에는 농담따먹기 하며 지내던 사람들이 그 문제만 나오면 정색해.”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민족들이 뭉치지 못하게 차단해. 이런 식으로.”


다시 정우가 말을 받는다.


“그래야 통치가 쉽거든. 서로 싸우고 약해지게 만들어야······.”


“자기들에게 의존할 수 있으니까요.”


주리는 빠르게 핵심을 파악한다.


“끔찍해요. 적의 계산과 속임수 하에 놀아나는 꼴이라니!”


몰려오는 암담한 감정 때문에 풀이 죽을 것 같았다. 반드시 모래성처럼 무너지리라 생각했던 총독부가 갑자기 낭공불략의 철옹성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우가키 총독을 비롯한 자들이 교활한 계교와 술책으로 저항하는 자들을 하나로 뭉치지 못하게 만들어 약화시키고 서로 증오하고 싸우게 만들어 무너지게 만드는 걸 관찰하며 낄낄대는 장면이 떠오른다.


아무리 같이 뭉쳐서 대항하려 해도 저들은 연대와 협력을 방해하고 파괴할 계략을 가지고 있다. 이걸 어떻게 이길 수 있을 까?


그때였다.



“근데 우리 말이야······”



갑자기 말을 꺼낸 장본인인 종팔에게 일제히 시선이 돌아간다. 종팔은 이제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었다.


“폭동이 일어나면, 폭도들 잡으러 앞장서야 하냐?”


그 말에 무거운 침묵이 쓸고 지나간다.


이때 모두가 쳐다보는 대상은 항상 정우다. 선뜻 누구도 입장을 표하기 곤란할 때, 천 지부장 부재 시 그들을 이끄는 형제의 입으로 시선이 쏠린다.


정우는 형제들의 눈을 의식하며 입을 연다.


“그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최전방에 서야 할 거다.”


그의 입에서 결연한 목소리가 나온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상하이로 가버린다면, 이제까지 쌓아온 게 모두 허사가 되버려. 하지만 남아서 폭도들을 맨 앞에서 막는다면, 지금의 위기를 만회할 수 있을거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해 중국과의 우의를 추구하고 공동으로 일본에 맞서 항전하는 자들은 폭도들을 동포라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강하게 줄 수 있지. 그 때문에 우린 남아야 한다.”


정우는 그렇게 말하고 모두를 한 차례 돌아본다.


“설령 그 때문에 우리가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 말에 순간적으로 모두의 얼굴에 망설임이 스치고 지나간다. 18세 이후로 항상 체포와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어 왔던 그들이었다. 최악의 위험에 처하는 상황은 지난 7년간 그들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안전을 누리고, 더 삶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바람은 인간인 이상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망설임은 잠시였다.


“얼굴이 드러나서 체포되건 말건 이젠 상관 없어.”


대석이 먼저 입을 연다.


“그 망할 놈들 머리통을 죄다 부셔버리지 않고 비겁자 소리 들을 바에야 죽는 게 낫지!”


“그래! 그 말이 맞다!”


재호가 맞장구를 치며 나선다.


“한줌도 안되는 폭도놈들 때문에 이제까지 쌓아온걸 다 망칠 수는 없어!”


“그렇고 말고!”


민호도 목소리를 높여 거든다.


“옥룡회 형제들에게 한번 제대로 보여 줘야지! 그딴 폭도들 따위 우리 동포도 아니라고 말이야! 우리는 오히려 우리 동포가 저지르는 문제에 더 단호하다고 말이야!”


“하는 말들이 다 이러니 방법이 없구먼.”


명수가 살짝 투덜거렸다.


“상하이로 돌아가 봤자 옥룡회와 완전히 단절되면 결국 후속파견도 뭣도 뭣하고······ 에라, 모르겠다. 나도 폭도들 두들겨 패련다.”


“어······. 내 의견은 아직 안 말했는데 결정난 모양이네.”


종팔은 그러며 어깨를 으쓱 한다.


“근데 사부님도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실 거니까······.. 다른 선택지는 없겠다.”


“그래. 사부님도 분명 장 대인께 우리와 똑같이 말씀하셨을 거야.”


정우의 말이었다.


“사부님 성격 상 우리만 무사히 상하이로 간다는 건 생각도 하지 않으실 거야. 옥룡회를 비롯해 모든 중국 사람들과의 관계도 있지만, 그걸 지극히 비겁한 행동이라 여기실 거야. 우리는 임무 때문에 계속 잠행해 오고 안전보장을 최우선으로 움직였지만, 폭동이 터지면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은 문제야.”


정우는 말에 더 힘을 주어,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한다.


“우린 폭도들을 분쇄한다. 그 뒤에 상하이로 간다.”


“좋아요!”


단원들이 흥분해 떠드는 소리에 고양된 주리가 벌떡 일어난다.


“폭도들 뺨따구에 내 손이 얼마나 매운지 가르쳐 줄 거여요!”


주리는 방금 전까지 암담했던 감정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짐을 느낀다. 총독부의 분열책에 한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맹렬하게 싸움으로서 중국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폭도들을 동포라고 절대로 감싸돌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서 저들의 분열책을 무위로 돌리고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의 우의가 강고함을 보여줄 수 있다는 확신이 서자 마음 속에 다시금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민호가 풉 웃으며 한 마디 하고 만다.


“아가씨 무공 못하잖아.”


그 말에 형제들이 정우를 제외하고 키득키득 웃자, 주리는 “아 진짜! 왜 쓸데 없이 그런 말이여요!”하고 볼을 부풀리고 입을 삐죽 내밀고 만다.


정우는 웃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스스로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그는 주리만이라도 상하이로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미 전투를 거친 주리였지만 아직 그에게는 그저 갸날프고 사랑스러운 소녀일 뿐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런 생각을 반성한다. 주리는 이제 결코 보호만 받아야 하는 어리고 가여운 존재가 아니었다. 주리 본인도 그런 시선을 받으면 매우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정우는 결코 연인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은 관계로, 주리가 자신과 같이 최전방에 설 것을 말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그때 여관 문이 열린다. 누군가 하니 여관에서 부리는 심부름꾼이었다.


“소협들. 실례하겠습니다. 대백루의 왕 채주께서 보낸 편지가 와 있습니다.”


“왕 채주가?”


왕 채주와 그들이 연락을 취하지 않은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왕 채주가 돈 문제로 얄밉게 굴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확실히 도와준 사람이었고 의리를 보여주기도 했기에 오랜만에 보는 연락에 반가운 기색이 돈다.


그런데 편지를 펼쳐본 정우는, 너무 놀라서 편지지를 떨어트릴 뻔 하였다.


같이 편지를 흘깃 본 형제들도 눈이 휘둥그래진다.


“뭐······. 뭐야?”


“이게 무슨 말이야!”


편지에는 똑바로 적혀 있었다.


히로요시가 후지무라 토비자루 중위와 접촉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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