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와 뱀파이어 17
"우와."
"와. 언니 여기 봐 봐... 되게 부드럽다."
"얘들아. 아저씨 차 좋지?"
"네. 태워다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오빠가 양심적인 구석은 있구나."
"왜? 뭐가?"
"오빠라고 안 하고 아저씨라고 하는 거."
"하하하. 어이고... 오빠라고 하면 니가 좀 뭐라고 하겠냐."
채린이와 친구들을 데려다 주는 길이었다.
내 동생은 그렇다 쳐도, 뒤에 앉은 애들을 거울로 보는데.
아이돌 연습생이라더니 진짜 떡잎이 곱구나. 이런 애들이 연예인이 되고 스타가 되는 거구나.
"연습하고 집에 가려면 힘들지?"
"아. 왜 이래... 말 걸지 마. 운전이나 해."
"네. 가끔 움직이기도 힘들 때 있어요."
"언니. 굳이 대답 안 해줘도 돼."
"하하하! 다들 몇 살이야?"
"오빠? 왜 이래. 미쳤어?"
"야. 나이도 못 물어보냐!"
"저. 스무살이요."
"전 채린이랑 동갑이요."
"그래? 그럼 너가 면허 땄다는 그 친구야?"
"아니요. 그건 다른 애 있어요."
"아 운전이나 하라고. 괜히 친한 척 말 걸지 말고..."
"야. 진짜 너 왜 그러냐. 내가 무슨 이상한 걸 묻는 것도 아니고..."
그러자 스무 살 언니라는 친구가 한 마디를 꺼낸다.
"채린이가 오빠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요."
"하하! 그치? 얘가 은근 어릴 때부터 츤츤 거리는 게 있다니까."
"다들 왜 이래... 아 짜증나..."
스무살 동생은 예은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고 채린이 친구는 주희란다.
"으음. 예은이네는 집이 기독굔가?"
"네? 아니요."
"어. 그래? 예수님의 은혜 이런 이름 아니야."
"아. 그런 애들도 있는데, 전 그냥 한자 이름이에요."
"풉! 아는 척..."
"이 자식이... 너 자꾸 오빠 민망하게 할래...?"
옆에서 김채린이 틱틱 거리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졌다.
"너무 힘들어. 아까 언니도 말했지만 어떤 날은 그냥 다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미친듯이 밀려 와."
"아까 어떤 애는 선생님한테 지적받다가 화장실가서 울다 그냥 집에 갔어요."
"나도... 그땐 좀 뭔가 무너지는 기분이었어."
"얘들아. 그걸 참아야 해. 내 나이쯤 돼서 보면, 해내는 사람은 그 순간을 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더라고."
"흠."
"고맙습니다."
"저희도 어떻게든 견뎌보고 있어요."
"그래. 잘 해서. 다들 멋지게 데뷔하면 좋겠다."
"오빠도 그럼 저희 공연 보러 오실 거에요?"
"아 그럼 물론이지! 난 공개방송이고 어디고 다 따라다닐 거야."
"우와... 그런 날 오면 진짜 좋겠다."
"난 싫어. 무대 하는데 오빠 앞에서 어우..."
"하하! 가봐라. 나중에 가면 오빠가 앞에 있고 없고 자신감이 하늘과 땅 차이일 거다."
두 친구를 먼저 내려주고 고모네 집으로 향했다.
"애들이 착하네."
"착하지. 사람 가르지 않고... 편견 없고."
"저 예은이란 애는 좀 걔 닮았다."
"누구?"
"매리골드 연지."
"..."
"이쁘네. 쟤도 데뷔조 아니야? 그럼 대체 니네 회사에선 누가 데뷔하는 거야? 너도 아니고 쟤도 아니고."
"오빠."
"어. 왜?"
"...나 진짜로 차 빌려주면 안돼?"
왜 이렇게 차에 매달리나 했더니, 채린이가 말한 면허 땄다는 한 살 많은 언니가 다음 데뷔 팀으로 확정이란다.
"그래서 요즘 다들 그 언니랑 친해지려고 그러고 있고..."
"..."
"아니. 그렇게 보지말고. 모양 빠지는 건 아는데... 그치만. 누가 봐도 그 언니 중심으로 팀이 꾸려지는 건 확실한 거라..."
스무 살도 못 먹은 동생의 사회생활을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안타까운지, 자존심을 버리면서라도 기회를 잡으려는 그 마음을 기특하다고 해야하는지...
"근데 그 친구랑 친해진다고 데뷔가 되는 게 맞어? 어차피 결정은 윗 사람들이 할 거 아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지금 이야기 나오는 게 그 언니랑 가까운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래. 오빠가 한번 잘 생각해 볼 게."
"진짜로! 정말?"
"그렇다고. 하루 정도 생각해보고 내일 연락 줄 테니까"
"딱 네 명만 갔다 올 거야. 좌석 네 개니까. 아무 문제 없이 타고 기름도 넣어서 돌려놓을 것이고."
"하하. 알았다고 임마. 들어가서 쉬어."
어차피 공짜로 받은 건데,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동생 성공을 위해서니까. 이깟 차가 뭐? 뭔데? 괴물이 덮치긴 했어도 난 혼자 2억도 박살냈는데. 차 그 까짓 거 뭐?
다음 날 다시 채린이네 회사 앞으로 가 데뷔가 임박했다는 친구와 우리 채린이 그 외 다른 또 새로운 얼굴 두 사람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디 좋은데 놀러간다며?"
"데뷔 앞두고 회사에서도 푹 쉬고 오라고 하셔서요."
"근데... 정말 이 차 빌려주셔도 되는 거에요?"
"그럼. 재밌게들 놀다 와. 안전운전 하고."
채린이가 슬쩍 다가와 소리없이 입모양으로 오빠 고마워 라고 하는데 툭 어깨를 쳐주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언제 출발하는 거야?"
바다나 그런 사람 많은 곳이 아니라, 강원도 깊숙이 자리한 친척네 펜션으로 간단다.
채린이도 싱글벙글이고 친구들도 멋진 차 탈 수 있다는 마음에 신이 나는 것 같다.
동생을 생각하면 뭐는 안 해주고 싶냐.
하지만, 한편으론 애들이 너무 조숙해도 문제구나 싶어진다.
나 어릴 땐 외제차가 아니라 국산 경차 한 대만 있어도 세상 부러울 게 없겠구나 싶었는데.
서른도 안 됐는데 이런 걸 따지고 앉아있고. 아저씨가 되나? 젠장 젊게 생각하자고.
그런데 애들한테 비싼 차를 선뜻 내어준 게 채린이나 주변을 떠나 그 회사 관계자들한테도 크나큰 인상을 주었는가. 며칠 뒤 채린이네 회사 매니저라는 분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네. 아니요 그냥 애들 놀러가고 싶다고 하길래. 빌려주기로 했어요."
-대표님이 감사하다는 인사 전해드리라고 하셨고요. 그리고 여행은 삼촌 분 차로 가지말고, 따로 저희 회사에서 움직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어. 그럼 차는요?"
-아무래도 큰 일 앞둔 애들을 자기들만 보낼 순 없죠. 무슨 사고라도 나면 안되니까요.
그래도 여행 멤버에 채린이가 끼어들었다.
느끼기엔 저쪽 회사에서 나를 엄청 돈 많고 그런 사람으로 본 것같다.
대표가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한다는데, 투자라도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여기는 것일까?
"...신기하네."
깊게 생각하지 말자.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안 되면 카드깡이라도 해서 얼마 주지 뭐.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거 아닌데.
며칠 뒤 채린이가 강원도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그날도 나는 별 계획 없이 집에서 TV나 보고 앉아 있었다.
근데, 다시는 연락 없을 거 같은 놈한테 전화가 들어왔다.
"어. 석훈이. 오랜만이다."
-기백아. 너 뉴스 봤어?
"뭐? 어떤 뉴스?"
강원도에서 요즘 야생동물이 큰 골칫거리라는 내용인데, 민가에 피해도 크고 동네 주민들도 무서워서 밤에 밖을 나가지 못한단다.
"강원도가 원래 그렇지. 멧돼지 나오고 뭐 튀어 나오고. 우리 부대 있을 때도 그랬잖아."
-주민들 말이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게 돌아다닌대.
"야. 오버하지 말라고."
-사냥꾼들도 그랬어. 이상하다고. 보통 산짐승들이 보이는 발자국이 아닌 거 같다고 그런 말을 했다니까?
"그래서. 그게 그 괴물이라고?"
-아닐까? 지금까지 한번도 우리나라에 이런 문제가 생긴 적 없었잖아.
"석훈아. 잊는다며. 이제 로제니 뭐니 상관 안 한다고 했잖아. 왜 그래 자꾸."
-아니. 그래도... 야 난 뭔가 불안해. 꼭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터질 거 같애.
새끼. 머리 좋은 놈은 잊는 것도 안 되나?
걱정 말고 강원도면 군부대도 많고 무기도 많으니, 나라에서 알아서 할 거라고 대충 신경쓰지 말고 지내라고 했다.
-야. 그러다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다치면 뭐 어쩔 건데? 괴물이 나타난 게 우리 잘못도 아니잖아. 니 말대로면 그것도 결국 로제가 원인이라는 거 아냐."
-그렇긴 하지...
"신경 꺼. 그냥 니 공부해."
-음. 알았어.
"지민 씨는? 연락 하냐?"
-안 해... 그냥 다 끝난 일인 거 같아서...
"새끼야 여자나 잘 붙잡어. 이상한 데 몰입하지 말고. 어쨌든 너 정신 나가서 방황할 때 옆에 있어 준 사람인 거 아냐. 좋은 사람 왜 놓치냐?"
그때까지만도 석훈이가 말한 강원도 야생동물은 나에게 크게 와닿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당한 괴물 교통사고와도 연결되어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 어딘가는, 채린이가 현재 강원도 깊은 산골로 여행을 떠났다는 걸 잊지 않았다.
그날 밤. 채린이한테 잘 도착했냐는 문자를 보냈다.
[동생. 재밌게 놀고 있어?]
한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다.
당연하지. 당연한 거야. 뭘 걱정해.
노는 날도 없이 연습에 또 연습만 매진하던 애들이 데뷔를 앞두고 모였을 건데. 한참 신나게 고기 구워 먹고. 밝은 미래와 꿈을 나누고. 모닥불 피워놓고 꺅꺅거리고 있을 게 분명해.
남자친구도 아닌 사촌오빠 메시지 따위를 왜 보겠어.
그렇게 마음 편안하게 생각하며 잠자리를 찾았다.
채린이한테선 다음 날 점심이 되어서야 답장이 넘어왔다.
[응. 오빠. 잘 지내고 있어.]
그럼 그렇지. 무슨 일이 있다고.
만에 하나 석훈이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강원도가 얼마나 넓은데. 괴물이라고 해봐야 넓은 땅에서 보면 하나의 생명일 뿐이고.
그 넓은 땅에서 딱 우리 사촌 동생이 얽히는 문제가 생긴다?
말도 안 되는 확률이야. 그럴 일은 없어.
[동생아 그래도 너무 노는데 빠지지 말고. 그럴 때도 알게 모르게 윗분들의 심사가 있다 생각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 보여야 된다. 알겠지?]
[응. 걱정하지 마.]
[오늘은 뭐하냐?]
[여기 근처에 폐교가 있다고 그래서. 이따가 담력훈련 가기로 했어]
그런 걸 굳이 왜 하지?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보니 동생이 말하길.
[실은, 나중에 데뷔하고 에피소드 이야기 할 거 만들러 가는 거야. 오빠 생각만 해도 너무 신나지 않어?]
* * *
같은 날 밤 8시. 깊고 우거진 설악산의 깊은 곳 어딘가. 검고 이글거리는 피부를 가진 무엇인가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킁. 킁 킁?"
이질적인 그것은 갑자기 식욕을 돋구는 달콤한 향기라도 맡은 듯 눈을 떠 고개를 들었다.
"클클클. 큭큭큭."
그년의 냄새가 묻은 무엇인가가 반경에 들어왔다.
아직은 거리가 있지만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이질적인 존재. 끔직하게 일그러지는 피부를 가진 무언가.
심지어 그것은 꽤 큰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발을 디디고 일어서자 풀들이 썩어들어 간다.
"저쪽이군."
* * *
"아이고 저런 한심한 놈들."
"으하하하! 아버지는 저런 일 생기면 어떻게 하실 거에요?"
"뭘 어떡하냐? 니 아버지라면 모르는 척 지나가지."
"무슨. 내가 그렇게 의리없는 사람인가. 당신은."
밤 9시. 별 생각없이 가족끼리 엉켜붙어 TV를 보고 있었다.
깔깔 거리고 웃고 떠들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툭툭 발로 등을 미신다.
"얘. 기백아."
"하하하하. 어? 왜요?"
"너 전화 오는 거 같은데?"
"아. 충전중인데."
채린이였다.
자식. 담력훈련 간다더니 무섭다고 전화 했나?
"어. 김채린."
-오... 오빠...
"오~ 이 쉐끼. 목소리 살벌한데.
-오... 오 오빠... 자 장난하지 말고... 나 좀 지금 구해주러 오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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