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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검혼 님의 서재입니다.

무림경천기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이검혼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4
최근연재일 :
2023.05.24 06:34
연재수 :
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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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61
추천수 :
67
글자수 :
105,630

작성
23.05.22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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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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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그 말이 더 또렷이 뇌리에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기 마련이다. 그도 그랬다. 그렇게 허망하고 황당하게 죽기 전까지는.




DUMMY

다음 날 해가 채 뜨지 않은 묘시(卯時) 경 어린 종복이 무향을 찾아왔다. 무향은 어젯밤 연회에서 과하게 받아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무향이 침대에 누운 채 종복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종복이 가주님께서 조반(朝飯)을 같이 하면 어떻겠냐고 의향을 물어보라고 해서 왔다고 말했다.


무향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머리를 빗어 묶고 옷을 차려 입었다. 종복은 무향을 대전 뒤에 있는 별채로 안내했다.


월동문(月洞門)을 열고 별채에 들어선 종복이 가운데 방 앞에서 멈추어 서더니 안에 대고 고했다.


“가주님, 무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어서 안으로 모시거라.”


어린 종복이 방문을 열어주고는 무향 보고 들어가라고 했다. 무향이 들어서자 문 안에 있는 또 다른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유 가주가 환하게 웃으며 무향을 반겼다.


무향이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자 유 가주는 이미 한 식구인데 그렇게 깍듯하게 예의 차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어서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 무향이 엉거주춤 자리에 앉자 차를 끓이고 있던 시비가 무향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차를 받아든 무향이 실내를 흘깃 살펴보았다. 가주의 처소치고는 아주 검박(儉朴)했다. 비치된 가구들도 그리 비싸 보이지 않았고 장식이라고 해봤자 우측 벽에 걸린 달랑 팔마도(八馬圖) 족자(簇子) 하나뿐이었다.


단출해도 너무 단출했다. 처소에 있는 모든 것들이 허례허식과 가식을 싫어하는 유 가주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무향을 건너다 보던 유 가주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이 무사. 그리 보여도 그 차가 멀리 운남의 고산에서 온 제법 귀한 것이라네. 어서 드시게. 조반은 잠시 후면 곧 준비될 것이네.”


무향이 차를 한 모급 마셨다. 차향이 아주 은은하면서도 깊었다.


무향이 반쯤 마신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향이 정말 좋습니다. 가주님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혹시 저에게 무슨 하명이라도 계신지요.”


“이 무사, 뭐 그리 성질이 급하신가. 천천히 조반을 먹으면서 얘기하세.”


잠시후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시비가 문을 열었다. 조반이었다. 시비 둘이 상을 들고 들어왔다. 탁자에 조반을 차리고는 곧바로 물러갔다. 차를 따르던 시비가 밥시중을 들었다.

가주가 말했다.


“어제 연회에서 이 무사가 아무래도 과음한 것 같아 내가 속이나 좀 풀라고 용봉탕을 준비하라고 했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 그리고 명아주도 한 잔 하시게.


쓰린 속을 푸는 데는 아주 그만이지.”


진수성찬은 아니었지만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가주의 말대로 어젯밤 과음으로 쓰렸던 속이 확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아침상을 물리고 시비가 차를 따를 때 가주가 말했다.


“이 무사, 어제 자네의 활약은 참으로 놀라웠네. 그 나이에 벌써 수석 장로와 거의 평수를 이룰 정도의 탁월한 성취를 이루다니.


검법과 권장법 둘 다 난생처음 보는 대단한 무공이었네.


도대체 사문이 어딘가?


그리고 자네 같은 고수를 길러낸 고인은 또 누구신가?”


“가주님의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가의 무사가 된 이상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 무공은 대대로 가문에 전해져오는 양생법에서 유래한 것이라 저 자신도 그 연원을 잘 모릅니다.”


“하여튼 제네 같은 탁월한 인재가 내 사람이 되다니, 내가 길을 가다 금덩이를 주운 기분이네.


그건 그렇고 내가 말 한 필 내 줄 터이니, 자네는 이곳을 나가는 즉시 곧장 천검보에 가보게.


천검보주 단우성과 나는 죽마고우라네. 비무가 끝나는 데로 곧장 자네를 보내달라고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는지.


이곳의 일은 신경 쓰지 말고 한 보름 푹 쉬다 오시게. 그래야 단우성에게 내 체면이 서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조반을 들고 즉시 가보게. 어쩌면 자네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인연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 * *


천금보는 유씨 세가로부터 오십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다. 회수의 동쪽 물길이 흘러드는 강 길을 거슬러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굽이치던 물길이 깊어지면서 시야가 탁 트이는 강가의 언덕배기 송림이 울창한 야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길은 강굽이를 따라 조응하듯이 강으로 내리뻗은 산능선과 골 사이로 마치 기다란 흰 뱀처럼 꾸불꾸불 이어져 있었다. 말 잔등에 올라탄 채 흔들거리며 여유롭게 보는 풍경은 걸어서 길을 갈 때와는 전혀 다른 맛을 느끼게 했다.


강줄기는 빠르게 사라지는 근경의 미루나무들과 원경의 산봉우리들 사이에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멀리 우뚝 선 산을 배경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위로 드리워진 산 그림자의 명암은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전혀 지겹지 않았다.


천천히 가도 세 시진이면 충분하다고 했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천금보가 가까워질수록 무향은 유 가주가 했던 말이 더 또렷이 뇌리에 떠올랐다.


유 가주가 말한 ‘좋은 인연‘이란 무슨 의미일까? 남녀 간의 문제 문제를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여자에 대해선 무향 자신도 관심이 없었고, 천금보주에겐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딸도 없었다. 보주의 손녀 영영은 아예 여인으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산능선 사이로 방금 나타난 먼 강줄기에 무심하게 눈길을 던지던 무향이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렸다.


“고민할 게 뭐 있나. 가보면 뭔지 알겠지.”


굽어진 산길을 지나 평탄한 길이 나오자 무향은 어기적거리며 길섶의 풀에 한눈을 파는 말에 살짝 박차를 가했다. 화들짝 놀란 말이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채 일각도 달리지 않아 무향은 갑자기 눈앞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강 옆의 구릉지였다. 좌측으로 언덕길이 보였다. 그 길 끝 송림이 울창한 야산 자락에 웅장한 전각의 지붕들이 송림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천금보였다. 유씨 세가에 견주어 그 규모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웅장한 것 같았다. 왜 사람들이 유씨 세가와 천금보를 회수의 이대 가문으로 손꼽는지 알 것도 같았다.


울창한 송림에 들어선 지 채 일각도 되지 않아 그 높이만 해도 거의 삼 장 가까이 되는 거대한 패루(牌樓)가 떡하니 나타났다. 이곳이 천금보의 영지임을 상징하는 구조물이었다.


무향은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손에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다른 가문의 영지에 들어오면 하마(下馬)해서 걸어가는 것이 강호의 불문법이었다. 그것은 방문자가 어떤 적의도 없음을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했다.


송림 속을 얼마 가지 않아 무향의 두 눈에 그 높이가 족히 이장이 넘는 성벽 같은 돌벽이 들어왔다. 돌벽이 정중앙에 한꺼번에 팔두 마차 두 대가 충분히 교행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대문이 있었다.


대문 앞에는 육 척도 되는 창을 든 두 명의 우락부락한 장한이 무슨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는지 연신 킥킥거리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무향이 대문의 오장 가까이 다가갔을 때 무향을 발견한 두 장한이 갑자기 표정이 굳으며 창을 힘주어 꼬나쥐었다.


두 장한이 창을 가슴께로 들어올렸다. 왼쪽에 있는 장한이 짧고 강한 어투로 말했다.


“귀하께서는 당장 그 자리에 멈추시오!


천금보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즉시 신분을 밝히고 방문 목적을 말하시오.”


그 장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는 천금보를 위해 일한다는 나름의 어떤 자부심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방문객을 대하는 장한의 절도 있는 태도에서 무향은 천금보의 규율이 상당히 엄격한 것 같은 인상도 받았다.


걸음을 멈춘 무향이 장한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이무향이라 합니다. 보주님을 뵈러왔습니다.”


그 장한이 갑자기 반색하며 말했다.


“천뢰검 이 소협이셨군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대협을 안내하기 위해 이미 사람이 나와 있습니다.”


그 장한이 창으로 대문 한쪽을 세차게 두드리며 안에 다 대고 큰 소리를 질렀다.


“천뢰검 이 소협이 당도했습니다. 문을 열어주시오.”


장한의 외치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대문 왼쪽의 작은 쪽문이 열리며 안에서 장한 하나가 나오더니 무향에게 깍듯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보주밈께서 한 시진 전부터 별원에서 소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별원은 본채 뒤에 있었다. 월동문을 열고 들어서자 멋들어진 정원이 나타났다. 정원은 특별히 인공적으로 가공하지 않은 자연적 지형지물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집채만 한 바위들과 지표면의 높낮이를 이용한 몇 개의 작은 폭포가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고, 폭포 주변에는 최소 몇백 년이나 됨직한 아름드리 노송과 백송이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은은하게 핀 난초와 석등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이 얼마나 황홀한지 눈을 돌리는 곳마다 풍경들이 새로운 빛깔과 윤곽으로 눈에 들어와 안기는 것 같았다. 속세 한가운데 존재하는 낙원 같았다.


무향은 자신도 모르게 아~, 하며 감탄을 했다. 자신도 언젠가는 이런 곳에 꼭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폭포를 멀찍이 돌아 노송 사이를 지나자 아담하고 운치 있는 정자 하나가 나타났다. 정자는 정원을 감상하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자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 십여 장 정도 더 갔을 때 대나무숲이 나타났다.


바람에 댓잎 서걱이는 소리가 마음가지 시원하게 했다. 빽빽한 대나무 숲속으로 난 소로를 따라 다시 십여 장 정도 갔을 때 그리 크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고아(高雅)한 품(品)자 형태의 기와집 세 동(棟)이 보였다.


발걸음을 멈춘 장한이 공경심이 듬뿍 담긴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주님, 기다리시던 천뢰검 이무향 소협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장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운데 건물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천금보주 단우성과 그의 손녀 단영영이었다. 단우성은 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고, 단영영은 은은한 붉은 빛이 도는 경장을 입고 있었다.


무향이 단 보주를 향해 깍듯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보주님을 뵙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단 보주가 가볍게 목례를 하며 말했다.


“어서 오시게, 이 소협. 그래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는가?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덕분에 편안했습니다.”


인사를 마친 무향이 포권을 풀며 고개를 들었을 때 단영영이 쪼르륵 달려오더니 무향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단영영이 소협을 뵙습니다.”


“영영 아가씨께서도 잘 계셨는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향의 ’아가씨‘란 호칭에 단영영이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부끄러워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단 보주가 호방하게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소협. 어린애에게 무슨 그런 호칭을···. 지금부터 영영에게 당장 하대를 하게.”


“그렇게 하시지요. 그러면 저도 소협을 편하게 오라버니로 부르겠습니다.”


영영도 덩달아 단 보조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거들고 나섰다. 무향은 왼손으로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악물고 살려고 그렇게 발버둥 칠 때는 죽어라 죽어라 고통만 주더니, 막상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니 또 이렇게 살려 놓는구나 싶어 무향은 하늘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동네 똥개도 물어가지 않을 하늘 같으니….


작가의말

djsejr님 지적 감사합니다. 신경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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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 거무튀튀한 검신(檢身)이 말을 걸었다 +1 23.05.22 417 3 11쪽
» 그 말이 더 또렷이 뇌리에 떠올랐다 +1 23.05.22 403 3 12쪽
14 종말의 채찍이 유씨 세가를 후려치는 것 같았다 23.05.21 408 1 12쪽
13 그건 도대체 무슨 무공이냐? 23.05.21 424 1 12쪽
12 유 가주는 믿지 않으려 했다 23.05.20 411 1 12쪽
11 대가 그 이상을 기필코 받아 내겠다 23.05.20 407 2 12쪽
10 한 生의 마지막이 모든 관계의 종말은 아니었다 23.05.19 421 1 12쪽
9 이미 한 번 죽었던 목숨의 용기로 23.05.13 474 3 11쪽
8 살면서 워낙 자주 피를 흘려봤기에 23.05.13 489 3 12쪽
7 나를 온전히 나로 대접해주는 그런 삶을… 23.05.12 513 5 11쪽
6 이미 너무 많이 아파봤기에 23.05.12 514 6 12쪽
5 다시 태어나는 보상을 받고 싶었다. 23.05.11 580 4 12쪽
4 나도 한 번쯤 주목받는 생을 살고 싶었다 23.05.11 648 3 11쪽
3 그는 원래 이런 종자가 아니었다 23.05.10 808 7 12쪽
2 눈부신 기적 같기도 하고 끝없는 악몽 같기도 한 +1 23.05.10 1,031 4 12쪽
1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었다 +2 23.05.10 1,421 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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