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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검혼 님의 서재입니다.

무림경천기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이검혼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4
최근연재일 :
2023.05.24 06:34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10,959
추천수 :
67
글자수 :
105,630

작성
23.05.10 10:35
조회
807
추천
7
글자
12쪽

그는 원래 이런 종자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기 마련이다. 그도 그랬다. 그렇게 허망하고 황당하게 죽기 전까지는.




DUMMY

흑호가 시퍼런 비수로 무향의 심장을 찌를 때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던 놈들 중 무향에게 손가락질을 해대지 않는 자는 없었다.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단 한 명도 자신를 편들거나 동정하지 않았던 기억이···.

모두가 혹시라도 흑호의 비위를 거스르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할 뿐인 더러운 기억이···.


* * *


무향이 조심스레 도박장에 딸린 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흑호가 전혀 흑호답지 않게 환하게 웃으며 무향을 반겼다. 평생 단 한 번도 무향이 본 적이 없었던 흑호의 웃음이었다.


흑호가 여태껏 누군가를 환하게 웃으면서 맞이했다는 소리를 무향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흑호의 웃음이 만들어 내는 극단적 공포가 순식간에 무향의 내면을 얼어붙게 했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웃은 흑호의 모습에서 무향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느꼈던 모든 불안을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한 불안을 느꼈다. 그 두려움의 거대한 손이 자신의 심장을 불끈 움켜쥐는 것 같았다.


이 야화로의 친구들은 그냥 흑호에게 번 돈을 상납하고 그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운이라고 모두들 말했다. 무향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흑호가 자신에게 귀하디귀한 비싼 차까지 따라주며 바로 코앞에서 웃고 있다. 다정하게 말까지 걸면서···.


“무향아!


내가 널 이렇게 친히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우리 흑호파를 위해 중요한 일 하나를 해줬으면 한다.


이 일은 우리 흑호파에서 너 말고는 할 수 있는 적임자가 없다.


네가 그 일만 잘해주면 내가 책임지고 이 야화로에 네가 원하는 가게 하나를 내주겠다.”


무향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지옥 야차 같은 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런 말도 안 되는 통큰 제안을 나한테 한단 말인가. 그는 원래 이런 종자가 아니었다.


그는 상대를 힘으로 윽박지르고 겁박하고 그것도 안 되면 멱을 따서라도 자신의 의도를 관철 시키는 잔혹한 자였다. 그런 그가 나에게 이런 정중한 부탁이라니···.


무향은 갑자기 돌변한 낯선 흑호가 더 두려웠다. 무향이 항문에 잔뜩 힘을 주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대형,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냥 평소대로 시키시면 될 것을···.”


흑호가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무향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천천히 운을 뗐다.


“무향아! 너, 이곳에서 동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서호(西湖) 근처 야산에 있는 이가장(李家莊)을 알지.


그 이가장에 소림의 속가제자 출신이면서 무관으로 상장군까지 지낸 이웅성이 낙향해 말년을 보내고 있다.


이가장에 다리 저는 딸이 하나 있다. 그녀 이름이 ‘자영’이라고 했던가. 얼굴이 예쁘고 마음씨도 비단결처럼 곱다고 소문이 자자하지. 아마 너보다 세 살 더 많을 것이다.


일단 재주껏 그녀와 사귀어라. 다른 건 묻지 말고. 이유는 나중에 말해주마. 너는 인물도 훤하고, 글도 좀 알고···.


우리 흑호파엔 너 말고 그 일을 할 적임자가 없다. 네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 흑오파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건 명령이 아니라 정중한 부탁이다.”


이게 대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은 소리인가?


이 가장의 여식과 사귀라니···.


아닌 밤중의 홍두께도 아니고···.


게다가 명령이 아니고 부탁이라니···.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라는 흑호의 말이 무향은 더 무서웠다.


그리고 그녀와 자신이 사귀는 것이 흑호파의 운명은 또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무향은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무향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흑호의 내심을 한 번 떠보기 위해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


“대형, 저는 대형의 말이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뜬금없이 이가장의 여식과 사귀라니···. 그리고 그게 우리 흑호파의 운명과 또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죽는시늉이라도 하는 아랫것이 자신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대자, 흑호가 더 이상 자신의 성질을 참지 못하고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본래의 지랄 같은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향아!


내가 이렇게 부탁을 하면 너도 어느 정도 성의를 보이는 게 예의가 아니냐?


내가 누구에게 언제 이렇게 부드럽게 부탁한 걸 너는 본 적이 있느냐?


그럼, 단도직입으로 말하마.


할 거냐, 말 거냐?


긴말 말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해라. 물론 네 선택에 따라 네 앞날도 결정될 것이다.”


흑호가 드디어 본래의 흑호로 돌아왔다. 흑호에게서 늘 보던 익숙한 모습을 보자 무향은 아까보다는 흑호가 훨씬 덜 무서웠다.


흑호는 개구리를 노려보는 뱀 같은 눈빛으로 무향의 아래위를 훑어 내렸다. 한 척 정도 되는 시퍼런 비수로 손톱을 거스러미를 하나하나 손질하면서···.


무향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건 승낙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결정해놓고 하는 지시일 뿐이었다. 무조건, 해야만 한다. 하지 않으면 그 뒤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거절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건 곧 손가락이 잘리거나 팔목이 잘린 채 이 야화로를 떠나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무향은 턱을 벌벌 떨면서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대형.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제야 흑호는 입가에 한 줄기 비릿한 미소를 베어 물고는 한층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무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탁자의 서랍을 열어 은색 비단 주머니 하나를 청운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은자 스무 냥이다. 깔끔하게 목욕도 하고 옷도 몇 벌 맞춰 입어라. 너는 얼굴이 되니 잘 차려입으면 어느 대가댁 귀공자 못지않을 것이다.


돈 아끼지 말고 최대한 좀 가꿔봐라. 돈이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 이제 나는 너만 믿는다. 그만 나가봐라.”


무향은 두렵고 멍한 상태에서 무언가에 동의하고 말았다는 느낌과 그 거래 때문에 앞으로 자신이 치를지도 모르는 어떤 대가를 생각하자 마음에 천근 바위를 얹어놓은 것 같았다.


이거, 뭐가 잘못돼도 많이 잘못된 것 같은데, 하고 무향은 생각했으나 이미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흑호의 제안에 대해 자신의 결정권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승낙의 가부를 결정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승낙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흑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순간 그건 그냥 무조건,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이 야화로의 밤을 지배하는 제왕의 법(法)이기에···.


무향은 다만 하필 그런 부담스러운 일이 자신에게 할당된 것이 재수 없었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우는 소리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퍼담으려고 버둥거리는 짓은 자신만 더 추하게 만들 뿐이다. 그건 자신을 더 멍청이로 만드는 짓이니까. 저승사자가 던진 주사위에 웃는 바보처럼···.


더러움 속에 있는 깨끗함과 깨끗함 속에 있는 더러움은 뭐가 다른가? 그건 둘 다 똑같다. 흑호나 자신이나 둘 다 똑같이 더러운 족속이라고 무향은 생각했다.


“그는 왜 하필이면 나한테 자신의 피 묻은 손을 내밀었을까?


그의 피 묻은 손을 잡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 둘 중 하나겠지. 살거나 아니면 죽거나···.”


어쩔 수 없이 무향은 자신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그녀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혹은 필연이 실수한 우연처럼.


무향은 그녀의 얼굴은 보지 않았다. 그녀의 한쪽 다리가 절름거리는 것도 보지 않았다. 오직 그녀를 사귀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결말이 어떻게 되던 일단은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 선택 역시 그저 잠시 잠깐 삶을 유예할 뿐일지라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가끔 그녀가 성도로 나들이 나오는 날을 택해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접근을 시도했지만, 그녀는 너무나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무향의 시도를 원천 차단했다.


객점에서도, 포목점에서도, 잡화점에서도 무향은 그녀에게 말 한 번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아니, 말을 붙이기는 했었다. 아무 반응 없는 혼자만의 말을···.


그는 몇 가지 주워들은 바람둥이의 기본 수법으로 수작을 걸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예의 바르게 그의 말을 정중하게 듣고는 침묵하는 바람처럼 그대로 가버렸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녀에 대한 무향의 들이댐은 초조와 염려가 뒤섞인 거의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행한 모험이자 수행이었다.


아무 소득 없는 무향의 시도에 비례해, 흑호의 인상는 언제라도 한바탕 퍼부어댈 찌푸린 하늘처럼 점점 사납게 일그러졌다. 구렁이알처럼 아끼는 돈은 돈대로 쓰고 아무 소득도 없으니, 무향에 대한 흑호의 압박이 서서히 가중되기 시작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무향은 조만간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더 이상 흑호의 성질을 버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시간이 되면 죽여 죽여달라는 요청이나 다름없었다.


관도를 지나는 말 밥굽에 마른 낙엽이 와그작와그작 부스러지던 그해 가을이었다. 무향은 목숨을 걸기로 작정했다. 어차피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흑호에게 죽을 목숨이었다. 돈은 물쓰 듯 쓰면서 아무 성과가 없다면 언제까지 참아줄 흑호가 아니었다.


무향은 그녀가 시녀와 함께 나들이 나온다는 정보를 듣고는 마차를 한 대 빌렸다. 도박장 사환으로 있는 친구 깡구에게 그녀를 보자마자 마차로 그녀를 치라고 부탁했다.


포목점에 들렀다 나온 그녀가 시녀와 함께 막 대로를 건너던 순간이었다. 골목에 숨어 있던 무향이 깡구에게 팔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깡구가 무지막지하게 마차를 몰며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무향이 바람처럼 마차로 뛰어들었다. 그녀를 밀쳐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 후 무향 자신은 그대로 마차에 치었다. 무향의 몸은 삼 장 이상이나 허공에 떠올랐다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다음은 기억이 전혀 없다. 자신이 무슨 짓거리를 저질렀는지도 깡그리 잊어버렸다. 미친 짓에서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것만큼 미친 짓도 없기에···.


무향이 사흘 만에 깨어난 곳은 성도에서 가장 큰 ‘신수의원’ 침대였다. 힘겹게 뜬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이가영’ 바로 그녀였다.


그녀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못된 짓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해냈다는 흥분이 무향의 심장을 한동안 두 방이질 치게 했다.


그녀는 근심 어린 눈빛으로 붕대로 친친 감은 무향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근심 어린 눈빛과 마주한 무향이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마음은 벌떡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온몸의 뼈란 뼈가 다 부러졌는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약방문을 열고 들어오던 의원이 화들짝 놀라며 그를 다시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이 사람아! 꼼짝 말고 그대로 누워있게!


뼈가 온전히 붙으려면 최소한 달포는 정양을 해야 하네.


자칫 뼈가 잘못 붙으면 평생 병신으로 살아야 하네.”


그녀가 그의 옆에 딱 붙어 앉아서 흐트러진 이불을 수시로 바로잡아 주었다. 무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가 그의 옆에 있었다. 반은 성공한 것 같았다.




이 악물고 살려고 그렇게 발버둥 칠 때는 죽어라 죽어라 고통만 주더니, 막상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니 또 이렇게 살려 놓는구나 싶어 무향은 하늘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동네 똥개도 물어가지 않을 하늘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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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 거무튀튀한 검신(檢身)이 말을 걸었다 +1 23.05.22 417 3 11쪽
15 그 말이 더 또렷이 뇌리에 떠올랐다 +1 23.05.22 402 3 12쪽
14 종말의 채찍이 유씨 세가를 후려치는 것 같았다 23.05.21 408 1 12쪽
13 그건 도대체 무슨 무공이냐? 23.05.21 424 1 12쪽
12 유 가주는 믿지 않으려 했다 23.05.20 411 1 12쪽
11 대가 그 이상을 기필코 받아 내겠다 23.05.20 40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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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미 너무 많이 아파봤기에 23.05.12 513 6 12쪽
5 다시 태어나는 보상을 받고 싶었다. 23.05.11 580 4 12쪽
4 나도 한 번쯤 주목받는 생을 살고 싶었다 23.05.11 648 3 11쪽
» 그는 원래 이런 종자가 아니었다 23.05.10 808 7 12쪽
2 눈부신 기적 같기도 하고 끝없는 악몽 같기도 한 +1 23.05.10 1,031 4 12쪽
1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었다 +2 23.05.10 1,421 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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