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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검혼 님의 서재입니다.

무림경천기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이검혼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4
최근연재일 :
2023.05.24 06:34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10,960
추천수 :
67
글자수 :
105,630

작성
23.05.12 06:13
조회
513
추천
6
글자
12쪽

이미 너무 많이 아파봤기에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기 마련이다. 그도 그랬다. 그렇게 허망하고 황당하게 죽기 전까지는.




DUMMY

자신의 비수로 손톱을 손질하던 흑호가 돌연 비수를 무향 뒤에 있는 벽에 던졌다. 무향의 오른쪽 귀를 딱 한 치 사이로 스치고 날아간 비수가 벽에 박혀 부르르 떨며 진동을 하던 순간 그가 말했다.


“이웅성의 서재에 <어의여래경>이란 서책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무향아, 이자영을 어떻게 꼬드기든 그 책을 빼내서 나에게 가져다주면 된다.


그러면 너와 나의 계산은 모두 끝난다.


그 이후 네가 그년을 어떻게 하든지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반드시 해내야 한다. 네 미래가 그 일에 달려 있다는 걸 명심해라!


시간은 이달 그믐까지다.


만약 못하면···.”


말을 끝맺으며 흑호는 왼손으로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무향은 그냥 입을 꾹 다물고 흑호가 하는 꼴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가타부타 명확하지 않은 무향의 뜨뜻미지근한 태도에 흑호의 인내심이 결국 한계를 넘어버린 것 같았다. 그의 눈빛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무향은 밀실의 문을 밀고 들어올 때부터 흑호가 어떤 요구를 하건, 그녀에게 털끝 하나 해가 되는 일도 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건 짓을 시킨다는 것은 그녀의 진심을 배반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일지라도 무향은 그녀의 믿음을 절대로 배신할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무향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형,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 서책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녀를 그런 일에 끌어들이기 싫습니다.


대형이 주신 돈은 차근차근 갚도록 하겠습니다.”


무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벽에 박혀 있던 비수를 뽑아 탁자에 꽉 박아넣으며 흉광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무향을 노려봤다.


무향도 전혀 기죽지 않은 눈빛으로 흑호를 마주 쳐다봤다. 흑호가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나 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무향을 쳐다봤다.


돌연 흑호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무향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향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다는 듯이.


탁자에 박힌 비수를 뽑은 흑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흑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말하곤 했었다.


“흑호의 웃음을 조심해라!


놈의 웃음에는 피가 배어 있다!”


흑호가 비수로 손톱을 손질하며 타이르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향아, 나는 분명히 말했다. 이달 그믐까지라고.


그만 나가 봐라.”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밀고 나가는 무향의 등에 대고 흑호가 대못을 박듯 다시 한번 비수보다 더 섬뜩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향아. 부디 내 말을 흘려듣지 말기를 바란다.


네 인생과 우리 흑오파의 운명이 걸린 문제다.


실패하면 그 결과가 어떨지 나도 장담할 수가 없다.”


그때부터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은 두려움과 공포가 줄곧 무향의 심장을 짓눌렀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무향의 마음 한구석에서 흑호의 섬뜩한 웃음이 선혈이 뚝꾹 떨어지는 깃발처럼 나부꼈다. 그 끈적한 미소보다 차라리 죽음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흑호가 못박은 그믐은 금세 다가왔다. 그동안 무향은 그녀를 세 번이나 더 만났지만, 그 서책에 대해 일언반구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흑호파의 2인자 막칼이 무향이 잠들어 있는 방에 신발을 신은 채 들이닥쳤다. 무향은 흑호가 드디어 자신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다고 짐작했다.


아, 마침내 여기가 끝이구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무향은 이미 속으로 수없이 죽은 상상을 하면서 작정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를 못 본다는 것만 빼고는 그 어떤 것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막칼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아 반 실신한 상태에서 목줄이 잡혀 끌려갈 때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먼저 떨고 있었다.


질질 끌려가는 거친 길바닥에서 견딜 수 없는 공포가 마른 먼지처럼 일었다. 기루의 처마마다 줄줄이 내걸린 홍등에도 검붉은 죽음이 흔들거리고 있었고, 대로로 마차를 끌고 가는 말의 검은 눈망울에도 죽음이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얼굴을 스쳐는 서풍의 입김에서도 죽음의 냄새가가득했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작은 바람에도 곧 떨어질 홍시처럼 덜렁거리는 머릿속에서 들리는 그녀의 커다란 한숨 소리였다. 마치 징을 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무향을 끌고 가서는 바로 죽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조건 때리고 또 때리기만 했다. 무향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초주검이 되었을 때 그들은 거의 시체가 된 무향을 도박장에 딸린 창고에 처박았다.


흑호는 나의 목숨을 담보로 그녀를 매일 협박했다. 며칠 후 흑호는 기어이 자신이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었다. 흑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도 나를 풀어주지 않았다. 이틀 뒤 흑호는 야화골의 뒷산 공터로 나를 끌고 올라갔다.


흑호가 마침내 나를 죽이기로 작정한 날이었다.


지나가는 다람쥐 한 마리 없는 야산의 깊은 공터에서 거의 시체처럼 축 늘어진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빙긋이 웃고 있는 흑호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의 오른손에 쥔 시퍼런 비수를 바라보다, 웃음이 점점 분노로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비수를 바라보다,를 반복했다.


내가 죽는다···.


오늘 죽는다···.


지금 죽는다···.


내 죽음이 이해는 되었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저 가느다란 풀잎에 앉아 지나가는 개미를 바라보는 사마귀도,


썩은 가지에 앉아 사마귀를 노려보는 작은 산새 살아갈 궁리에 여념이 없는데···.


아무 죄 없는 내가,


왜!


왜!


왜!


풀잎을 흔드는 바람도 어제와 똑같이 살랑이고,


하늘을 흐르는 구름도 여전히 똑같이 여유롭고,


저기, 저 나뭇잎들도 여전히 그대로 푸르른데···.


아무 죄 없는 내가,


왜!


왜!


왜!


무엇 때문에!


이럴 수는 없다!


이건 아니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


절대로!!


무향은 흑호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자신은 생의 마지막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죽음의 순간이 눈앞에 닥치자 준비는 단지 준비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 노을빛이 스며든 흑호의 비수가 그날따라 유난히 더 날카롭고 섬뜩해 보였다. 노을 속으로 막 검붉은 어둠이 섞여들던 어느 찰나, 흑호는 한가하게 손톱을 다듬던 바로 그 비수를 무향 심장에 정확히 박아넣었다. 손잡이까지 전부, 쑤-욱···.


흑호의 비수가 심장에 파고드는 그 순간 무향은 자신의 심장에 비수가 아니라 흑호의 손톱이 쑥 들어오는 것 같은 더러운 이물감을 느꼈다. 아주 길고 긴 찰나 같았다.


무향은 이미 속으로 수십 번도 더 죽어봤었기에 진짜로 죽는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진짜 죽음은 머리로만 생각했던 죽음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진짜 죽음에는 생각으로 죽을 때는 없었던 지독한 아픔이 뒤따랐다. 아파도 너무 아팠다. 무향은 아픈 게 가장 싫었다. 살면서 이미 너무 많이 아파봤기에.


게다가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아는 사람의 얼굴은 왜 또 그리 많이 떠오르는지···.


그녀의 환한 얼굴은 그렇다 쳐도, 이미 오랫동안 코빼기도 보지 못했던 친구 차돌이, 동칠이, 말뚝이···, 그리고 이 노인의 얼굴까지···.


자신의 머릿속에 친구들의 애틋한 모습이 그리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줄 무향은 진짜로 죽은 바로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황혼이 밤으로 변하듯 아스라이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흑호 패거리들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비명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던 것을 무향은 어렴풋이 기억했다.


훅호의 비수에 제대로 찔린 무향의 심장에서 쏟아진 피가 비수를 타고 발등으로 콸, 콸 흘러내릴 때 먼 산정에서 검은 무복에 죽립을 쓴 사내가 하나가 밤안개처럼 하늘 한쪽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모습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흑호가 비수로 자신의 심장을 찌를 때 놈의 약지에 낀 금반지가 번쩍하는 것이 무향이 이 세상에서 본 마지막 빛이었다. 그 번쩍임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점차로 무향의 기억이 재처럼 사그라지면서 희미해졌다.


“잔인한 흑호는 나에게 한 평 흙무덤조차 만들어주는 것이 귀찮아서 나를 죽인 후 북망산의 허물어진 어느 고분의 구멍 속에 내 시체를 아무렇게나 던지고 가버렸다.


그가 나를 죽이고자 했을 때 내가 가장 경멸했던 것이 내 삶이었기에, 나는 더 이상 내 삶에 미련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지독한 아픔은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죽을 때 나는 내 죽음과 함께 숨이 끊어지는 나의 다른 죽음도 보았다. 비굴함으로 점철되었던 나의 혐오스러운 과거도 함께 죽는 것을.


내가 죽을 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비루하고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게 미소까지 지었다.


흑호에게 반드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가 몹시 죽고 싶을 때 때맞춰 그가 날 죽여 줬었기에. 하지만 그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은 꼭 가르쳐주고 싶었다. 덤으로 그가 생각하는 ‘내’가 진짜 ‘내’가 아니란 것도 가르쳐주고 싶었다. 기필코.”


* * *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고 선 울기 시작했다. 창호지 문틈으로 북풍이 새어 나오듯 그녀는 봇물 터지듯 터지는 울음을 한 손으로 막아가며 울었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어떻게···.”


말끝을 더듬거리며 그녀가 흐느껴 울었다.

나는 이제는 괜찮다고, 다 지난간 일이라고,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며 그녀를 달랬다.


나는 그녀의 울음을 그치게만 할 수 있다면 어떤 맹세와 다짐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울고, 나는 거듭 다짐하고, 약속했다.


다시는 인간 같지 않은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나의 결심에 나를을 바치겠다고.


그녀가 울음을 완전히 그칠 때까지 나는 그녀에게 이미 했던 맹세를 거듭 맹세했다.




긴 꿈이었다. 사방은 여전히 깜깜했고, 몸은 계속 아프고, 기억은 말짱했다.


무향은 시간도, 방향도, 크기도 알 수 없는 태초의 공간에서 혼자 어디론가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유령의 시간이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끝나야 할 삶이 끝나지 않으니 여전히 온몸이 이렇게 아프고 쓰린가, 하고 무향은 투덜거렸다. 아픔의 크기만큼 지난날의 기억은 더 생생하게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무향은 자신의 지난 생을 되새기듯이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나는 언제 어디서 누구의 칼에 찔려 죽더라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녀를 만난 후 다른 삶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이 악물고 살려고 그렇게 발버둥 칠 때는 죽어라 죽어라 고통만 주더니, 막상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니 또 이렇게 살려 놓는구나 싶어 무향은 하늘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동네 똥개도 물어가지 않을 하늘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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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살면서 워낙 자주 피를 흘려봤기에 23.05.13 489 3 12쪽
7 나를 온전히 나로 대접해주는 그런 삶을… 23.05.12 513 5 11쪽
» 이미 너무 많이 아파봤기에 23.05.12 514 6 12쪽
5 다시 태어나는 보상을 받고 싶었다. 23.05.11 580 4 12쪽
4 나도 한 번쯤 주목받는 생을 살고 싶었다 23.05.11 648 3 11쪽
3 그는 원래 이런 종자가 아니었다 23.05.10 808 7 12쪽
2 눈부신 기적 같기도 하고 끝없는 악몽 같기도 한 +1 23.05.10 1,031 4 12쪽
1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었다 +2 23.05.10 1,421 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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