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순환의 고리
우선 생각나는 이유들은 단순했다. 그냥 처음부터 미워했던 존재라서 쭉 미워했을 뿐이다. 악마는 처음부터 악마였고 여태까지도 악마일 뿐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모습으로 변신하고 또 변신해도 소용이 없었다.
악마라서 미웠다. 악마이기 때문에. 악마니까, 악마처럼 굴어서, 악마를 사랑할 순 없으니. 악마라서, 악마라서, 그냥 악마라서!
이건 너무 단순한가? 어떤 존재를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 미워하는 게 온당한가? 가만 이게 온당함의 문제던가?
김혁은 갑자기 달겨든 시뻘건 얼굴에 급하게 주먹을 날렸다. 좀비라는 걸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갑자기 바짝 다가들어 당혹스럽게 만드는 시뻘건 것이 꼭 악마 얼굴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얼굴에 피를 잔뜩 묻힌 채 돌아다니던 몸뚱이는 이제 비어 있던 골목 끝까지 날아가 담벼락에 부딪쳐서는 그야말로 산산이 박살났다.
그걸 보자 김혁은 곧바로 후회했다. 불필요하게 길을 더럽힌 것 같아서였다. 가볍게 주먹을 털어 힘을 뺐다. 역시 머릿속이 복잡하면 힘 조절에 소홀해지기 마련. 후회가 사그라들 동안 멍하니 담벼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좀비의 머리가 터져 흘러 떨어진 자리에는 불그죽죽한 핏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그건 곧바로 다른 무엇을 연상시켰다.
붉은 점이로구나.
악마와의 첫 만남, 그 시작은 저런 무정형의 빨간 점이었다. 무(無)의 공간에 뜬 빨간 점이 점점 악마의 형상을 갖춰가던 그 순간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다. 백지에 잉크가 번져가듯 손톱만큼 작디 작은 한 점이 점점 커지더니 형상을 갖춰가고 마침내 우락부락한 빨간 아저씨의 상체로 변했다. 이내 눈에 익숙한 만화 캐릭터 같은 뿔 달린 악마의 모습으로 바뀌긴 했지만 처음 그 아저씨 이미지가 악마의 본모습으로 뇌리에 박히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악마는 처음부터 별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존재였다. 혹 그때 빨간 점에서 나타난 게 죄를 다 태웠다고 말하던 그 허연 미소년의 모습이었다면 좀 달랐을까?
김혁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첫 인상이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시뻘건 덩어리에 우락부락한 아저씨의 모습이나 뿔 달린 악마의 모습이란 이유만으로 40년이나 미워할 일은 없다. 그건 외모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
그보단 거짓말과 쇼로 무장한 채 숨어서 남들을 염탐하는 존재라서가 더 정확하다. 사자들을 맘대로 부리고 제멋대로 환상에 넣었다 뺐다 이승으로 가랬다 저승으로 오랬다 무한 권력을 휘두르는 그 방식이 비호감이라서 말이다.
그런 존재에게 무시(無時)로 부림당하는 자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반감, 그건 몇 백년이 흘러가도 절대 사라질 것 같지 않다. 낚시 바늘에 걸려 파닥이는 물고기는 낚시 바늘을 잊을 수 없고 그런 고통을 주는 존재를 미워할 수밖엔 없지 않은가.
모든 저승사자들이 하나같이 악마를 싫어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거라 짐작 가능하다. 각자 더 많은 이유가 덧붙여질 수는 있겠지만 미움의 시작은 거의 비슷할 터였다.
속은 자는 분노할만 하고 속여 넘긴 악마 탓을 안 할 이유가 없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이도저도 아닌 채로 머물 곳 없는 존재가 되길 원한 적도 없는데 악마에게 속아 발이 묶여버렸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고 안주하지도 맘껏 떠돌지도 못한다. 하물며 지옥불을 택했는데도 저승사자가 돼버렸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진짜 선택마저도 깡그리 무시당한 거나 마찬가지다. 악마가 제시한 선택지는 천국이냐 지옥불이냐였다. 엄밀히 따지면 서정을 구할 것이냐 말 것이냐 중에서 선택한 거긴 하지만 어쨌든 서정을 구하고 지옥불로 가겠다는 결정이 진짜 선택이었다.
결국 나중에 악마가 제멋대로 말을 바꿔버린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악마 탓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하다.
잘못이 있다면 리스트 업무를 마쳤을 때 저승사자 할 거지? 크하하하!! 지옥이 떠나가라 웃어제끼는 악마에게 환생하겠어, 똑부러지게 소리치지 못한 그 순간의 잘못 뿐이다.
그렇게 멋모른 채 거짓으로 버무린 회유에 얼떨결에 불공정하고 이상한 계약을 맺어버렸으니 사기당한 것 같은데다 진실을 알고나서도 물릴 방법이 영 없다니 누구 탓을 해야 할까. 악마가 아무리 ‘이 길을 선택한 건 너다.’를 소리 높여 외쳐도 절대 그게 ‘내 탓’이 될 리 없었다. 모든 게 다 악마가 의도한 대로 이루어졌고 거기에 거짓말까지 섞여 있었으니 더더욱 그렇게 되질 않았다.
한 번이라도 악마에게 주먹이라도 날려볼 수 있었다면 좀 덜 미웠으려나? 이러나 저러나 손 하나 까닥할 수도 없고 거짓말에 제대로 낚인 물고기 신세로서는 미워하는 것 말고는 다른 복수가 마땅히 없기도 했다.
죽도록 미워하기. 정말 소심한 복수다. 그래서 악마는 40년간이나 원수처럼 대해도 끽소리 한마디 못하고 눈치를 본다.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편한 면은 있지만 그래도 미운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래서인가! 김혁이 길길이 날 뛴 이후로 들어온 세 명에게는 복수하고서 지옥불로 간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은정, 장한조, 민하진이 들어오기 전까지 거의 30년 동안 미움 받은 결과였다. 아이들 얘기를 들어보면 여전히 써먹는 뻔한 몇 가지 레파토리는 있는 것 같지만.
제멋대로 나타나서는 자기를 태어나게 한 게 ‘너’라고 우겨댄다거나 갖가지 요사스런 말로 꼬셔놓고는 결국 저승사자의 길을 선택한 건 ‘너’라고 우겨대는 말 따위들, 그러나 그건 여전히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악마만의 주장일 뿐이었다.
악마의 눈물이 마음에 쓰이기 전까진 악마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 또한 일종의 복수라면 복수였다. 마음속에서 최대한 그 존재감을 지우는 것. 악마가 뭘 하거나 말거나 한 번도 악마를 좋아해본 적 없었고 그 말들에 수긍한 적도 없었다. 미워하는 이유나 좋아지지 않는 이유조차도 특별히 짬을 내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악마가 신경 쓰는 것만큼의 반에 반도 악마에 대해서 생각 자체를 안 했다. 무심했다고 하는 편이 맞다.
지옥을 떠나서는 악마를 잊기 일쑤였으며 인간 세상 구경이나 리스트 업무를 하기에도 바빴던 데다 여러 가지 다른 생각할 거리들은 무궁무진했다. 정말 인간들이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40년이었다. 이렇듯 떨어져 있으면서 악마에 대해 생각하는 건 정말 최근에 들어서나 가끔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였다.
악마의 눈물에 마음이 쓰이고 악마의 말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하는 일들이 아주 아주 낯설고 이상하리만치.
리스트가 종료될 때나 만나는 관계, 사무적인 대화가 끝나면 다시 헤어지면 그만. 악마가 인간 세상까지 쫓아오지 못하는 건 참 다행이었다. 어딜 가나 따라다니는 그의 시선쯤이야 신경쓰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불쾌했지만 신경쓰지 않은 지 벌써 오래 됐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아마도 악마의 새로운 제안, 악마가 돌아오라고 한 4월 4일에 예정된 일들 때문인 모양이다.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다. 궁금했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또 다른 희생양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에 관여하는 것이니 이번만큼은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고 싶기도 했다.
그건 악마 앞에서 감정적 혼란을 겪고 미혹되고 악마의 요사스런 구슬림에 넘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하기엔 너무 중대한 결정이니까.
저승사자들에겐 아무리 자신들의 아픔과 슬픔을 격파해나가듯 좀비들을 깨뜨리고 부수어도 해소되지 않는 단단한 응어리 같은 것들이 있다. 저 깊은 곳에 감춰둔 이 복잡 미묘한 감정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부서뜨릴 수 없다. 이건 저승사자라면 누구나 떠안을 태생적 분노일 수밖에 없다. 그게 가장 안쓰럽고 애잔하다. 그게 누구라도 악마 앞에 떨어질 누군가기 벌써 가엾다는 생각부터 드는 건 그래서였다. 악마 앞에선 누구나 가엾어지고 만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악마에게 선택된다는 것만으로도 연민이 샘솟는다.
그런데 악마가 왜 갑자기 새로운 저승사자를 선택하는 자리에 자신을 끼워 넣으려는 건지 불안하기만 하다. 악마가 또 우려먹을 건수를 잡기 위해선가 싶고 ‘쟤를 뽑은 건 네 탓이야.’를 주구장창 외치기 위해서는 아닐까 짐작 가능하기 때문에, 악마라면 그러고도 남겠지. 하지만 겨우 앞으로 괴롭힐 구실 하나를 만들자고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도 싶었다.
그렇담 다른 이유는 또 뭐가 있을까? 악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애써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그만큼 악마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에 장난을 좋아하고 꼴에 일중독자라는 것 말고는.
악마가 애초에 사자의 분노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게 진실이라면 악마는 그저 분노 덩어리일 뿐이니 더욱더 멀리하고픈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취급해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마음속에 세상이나 인간들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도 사라져야 마땅한 그 분노덩어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나의 분노로부터 태어난 존재가 나를 쥐고 흔든다!
더욱 쌩쌩해져서 요란법석을 떨어대는 걸 보면 결국 처음 했던 그 말도 거짓말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아직 악마에 대한 분노가 남아 있어서 존재하는 것일까? 정말 손에 잡히기만 하면 주먹을 날리든 잡아 뜯어버리고픈 마음은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는 또 뜬금없이 사악한 악마 따위가 사랑과 존경을 원하고 있단다. 사랑과 존경이라니! 분노와 사랑이, 분노와 존경이 공존이 가능하던가? 그건 분노를 부수어야만 가능한 것들이 아니던가? 악마가 결국은 자기 소멸을 바라기라도 한단 말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악마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기도 싫은데 모를 것들을 생각하자니 머리마저 지끈거리는 것 같다.
알게 뭔가? 그 모든 게 다 거짓말이고 쇼일 뿐인지. 첫 만남부터도 거짓말을 해댔으니 악마가 진실처럼 하는 말들도 온전히 믿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그건 거짓말쟁이들이 겪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 자업자득이다.
무슨 말이든 하라지, 무슨 일이든 하라지. 그런 기분으로 내버려두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다른 가엾은 인간의 영혼은 어쩔까나...!
김혁은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는 서로 엇갈려 가던 좀비 둘을 양 손으로 잡아 박수 치듯 세게 박치기 시켰다. 두 몸뚱이는 곧바로 힘을 잃고 잔해를 흩뿌리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그 점점이 떨어진 붉은 파편들에서도 악마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아 왜 또 쓸데없는 걸 시켜가지고 머릿속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슬몃 악마에 대한 원망마저 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팽개쳐 둘 생각도 아니다. 악마가 자신에게 맡기겠다고 했으니 분명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요구할 것이고 그 대답에 따라 이후 어떤 식으로든 그 존재에 대한 책임을 떠안게 될 건 분명했다. 그래서 더욱더 명확한 생각을 가져야만 4월 4일을 대비할 수 있다. 악마에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은 바램에서 오는 치열한 정신적 분주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악마에게 선택당했고 40년간이나 악마와 함께 했으며 이제 악마의 눈으로 누군가를 봐야 하는 순간이 왔음에도 김혁은 악마에 대해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것만 알아냈을 뿐이라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40년이 지나도 여전히 악마는 혼란만 안겨주는 미스터리한 존재일 뿐 명쾌하게 결론내릴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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