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악마는 왜 그럴까3
김혁은 속으로 이뻐서는 아니고? 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들보다 쳐지는 외모지만 주은정, 민하진, 장한조 모두 17세라는 공통점 외에도 외모가 특히 눈에 띄는 건 사실이었다. 자신 이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분명 30년 후의 선택은 외모가 많이 작용했나 생각해본 적도 있었으니까.
악마가 살짝 눈을 흘기더니 말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진짜 날 뭘로 보고. 참. 넌 왜 맨날 날 니 기준으로만 생각하는 거야? 사람이 외모가 전부가 아니잖아. 뽑다보니 다 예쁘고 잘생긴 것 뿐. 내 기준은 특히나 더 고차원적이라고.”
“뭐가 고차원적인 건데?”
악마가 마치 자기 추억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듯 아련한 눈빛이 되어 말했다.
“특히나 은정이는 유난히 동생을 아끼고 잘 보살펴줬어. 참 다정다감하고 좋은 언니였지. 나한테도 저런 누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울 만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볼수록 좋은 아이란 생각이 들었지.”
누나? 그럼 악마의 성별이 정말 남성이란 말인가?
악마가 김혁의 속마음을 읽고는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얼어붙은 듯 있더니 당황한 한 듯한 목소리로 서둘러 말을 덧붙이는 모양새가 더 의심쩍기만 하다.
“아, 아니 뭐 뭐 모든 동생들이 바라는 좋은 언니, 누나 같은 존재라고. 은정이가.”
김혁은 악마의 빨갛게 덩어리진 몸을 바라봤다. 늘 저런 저음의 목소리로 대화를 하는데도 특별히 성별을 의식한 적이 없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거의 대부분 빨간 덩어리일 때는 상체뿐이고 그게 아저씨처럼 보이긴 하지만 특별히 인간들처럼 남자 여자 그런 느낌으로 본 게 아니어서다. 그건 마치 구름이나 개미, 나무를 보고 남성이냐 여성이냐 따져 보는 것과 같은 그런 무의미함이었다.
그냥 김혁 앞에 나타나는 악마는 악마일 뿐이었다.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성별을 초월한 영적 존재 같은 것.
늘 자기가 바꾸고 싶은 대로 모습을 변장시켜 나타나는데다 상황에 맞게 달라지기 때문에 특히 명령을 내려야 할 때만 남자 어른처럼 보이는 걸 선호한다는 걸 또 알기에 딱히 남자라고 인식되지도 않았다. 악마가 40년간 변장한 캐릭터만도 무생물과 생물을 아울러 수천 가지는 되니까.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악마의 정체가 원래 생각하던 그런 게 맞는 걸까?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김혁이 그런 생각을 진행시켜 나가는 걸 들여다보던 악마가 마치 털 뽑힌 닭처럼 팔을 퍼덕거리며 몸을 요란뻑적지근하게 흔들고는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전에 없이 격앙된 목소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건 분명 닭이나 뭐 다른 걸로 변장하고 나서 해야 할 몸짓을 그냥 해버린 것 같은 아주 어색한 몸짓이었다. 거기다 왠 뜬금없이 변사 같은 말투람?
김혁이 어이없어 하며 보고 있자 악마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무 죄도 없는 소녀는 악마를 불러내고. 그게 바로 나지.”
악마는 어이없어 하며 바라보는 김혁을 한 번 흘깃대고는 다시 평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들여다봐야만 하는 가엾은 영혼을 마주할 때마다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넌 상상도 못 할걸. 내가 어쩌겠어? 여기 떨어진 이상 내게 맡겨진 거고 결국 난 선택이란 걸 해야 하는 걸. 한 가족이 동시에 천국과 지옥으로 갈려 떨어지고 유독 갈팡질팡하는 한 어여쁜 영혼. 물론 너무 예뻐서 깜짝 놀라긴 했지. 하지만 내가 봐야 할 건 더 훨씬 훨씬 많단 말이지. 그리고 여기선 오래 고민할만한 시간도 없어.”
김혁은 여전히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 채 듣고만 있었다. 악마는 팔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열정적으로 말한다.
“주은정은 정말 더 더 더 고민이 됐다고. 엄마와 동생이 있는 천국으로 보내야 할까? 아니면 여기에 남겨야 할까? 아, 선택은 언제나 어렵지만 그건 정말 어려웠다니까? 내가 아무리 잘해줘도 결국 원망이나 듣게 마련인데 천국에 갈 뻔한 사람들은 특히나 더 고민을 많이 해야 하지. 차라리 지옥에 갈 뻔한 존재라면 내가 구해주고 은인 대접이라도 받을 텐데.”
그 말을 하면서 악마가 김혁을 똑바로 바라봤기 때문에 김혁은 조금 당황스런 기분을 느꼈다. 혹시 내가 지옥에 갈 뻔한 사람이었단 말인가? 설마 나한테 한 말이 거짓말이었다고? 아니면 넌 천국에 가지 못하게 한 나를 아직도 원망하니? 같은 걸 묻고 있는 건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40년을 봤어도 여전히 악마의 속내를 모를 때가 더 많았다. 장난을 빙자한 거짓말과 어설픈 연기와 그닥 흥미롭지도 않은 갖가지 쇼를 보여주는 바람에 더더욱 악마의 진짜 생각을 알 기회가 적었기도 하고 따로 알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악마는 김혁이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자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너를 뽑고 나서 왜 30년이나 지나서야 얘네들을 뽑았겠어?”
“...?”
김혁은 그 이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7번의 환상과 리스트 업무만으로도 40년은 훌쩍 지나가버렸다. 지옥에서만 보내는 악마에게 30년은 더 짧은 느낌일 테니 그렇게 오랜 시간도 아닐 텐데...
“나야 모르지. 필요하니까 뽑았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론 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뭐가 뭔지 짐작하기 어렵기만 했다.
악마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손가락을 탁 튕겼다. 김혁 앞에 예쁜 방 하나가 무대처럼 펼쳐졌다.
값비싼 벽지로 잘 꾸며진 방에 장난감과 인형들을 잔뜩 늘어놓고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중학생 정도의 소녀와 네 다섯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중학생 소녀는 긴 단발머리에다 지금 모습보단 훨씬 앳된 모습이었지만 많이 변한 모습이 아니라선지 주은정이라는 걸 금새 알아볼 수 있었다.
동생과 놀아주기 위해 어린애처럼 놀고 있는 주은정의 모습은 얼마 전 버스에 꼬마 하진이를 데려다놓았던 밤에 찍었던 동영상 속 모습과 비슷했다.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온 진짜 미소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진짜 은정이야. 무표정하고 까칠하고 침울한 건 일종의 가면이지. 정말 주은정은 너희 넷 중에서도 특히나 더 힘들었다구. 그 가족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은정이도 만만치 않다니까? 복잡해. 너~어무 복잡해. 자기를 꽁꽁 숨겨.
저 집은 그러니까 모든 식구들이 겉과 속이 달랐다는 거지. 겉보기엔 완벽하고 멋진 가정이고 현모양처 엄마에 건실한 아버지, 인형처럼 예쁘고 귀여운 딸들. 풍족한 경제적 여유까지. 모자람이 없어 보이고 행복해 보이기도 하지? 그치만 그 모든 게 아버지의 완벽한 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이미지일 뿐이고 속으론 모두 각자 이루지 못한 것들로 끙끙 앓고 있었으니 오죽했겠어?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사람들은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지.”
“...!”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기가 쉽냐? 김혁은 말은 하지 않고 그렇게 생각했다. 악마가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말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과 실제 삶의 괴리가 클수록 얼마나 불행한지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지. 은정이네 엄마는 화려한 미모도 미모지만 사업가를 해도 될 정도의 뛰어난 실무적 능력잔데 바깥 활동을 못하게 하니 가사에만 전념하긴 해도 우울증이 와서 아이들을 정서적으론 거의 방치하는 편이었지.
그러니 은정이가 엄마 몫까지 다 해서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지. 저 동생을 정말 사랑했거든.”
악마의 목소리가 눅눅해진 것 같아 바라보니 악마는 전에 보지 못한 미소를 담뿍 머금은 채 두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헐, 악마가 저런 미소를 다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오늘 따라 이상하게 악마가 달라 보이는 건 무엇 때문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뭔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김혁은 그게 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뭘까! 뭘까?
얼마 지나 악마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 은정이는 집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부모의 간섭을 벗어날 수 없었어. 연기 같은 걸 하겠다고 하지도 않는데 괜히 유치원 때부터 계속 재롱잔치 같은 것조차 못하게 막질 않나, 유난 떠는 아빠 때문에 학교에서도 자기답게 살기 힘들었지. 천하다나? 그러면서 장기 자랑도 못하게 하고. 그 아빠는 선생님한테 특별히 연극 같은 것에서 빼줄 순 없냐는 부탁까지 했다니까. 남들은 서로 주인공을 시켜달라고 난리인 판에. 그래서 은정이한텐 추억으로 삼을만한 사진 한 장조차 없지.”
그런 삶을 상상하니 김혁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방해로 자기 안의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가져볼 수 없다는 건 정말 끔찍할 것 같았다. 저건 재능보다도 자연스러운 무엇조차도 못하게 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건 자신에게 방에만 갇혀 있으라고 하거나 한조에게 춤을 추지 말라거나 하진이에게 말이나 연기 같은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다. 그 아빠가 요구하는 건 아이에게 아이답지 말기를 강요하는 게 아닌가? 그나마 방안에서라도 아이다운 자유를 맛볼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인지.
악마가 손가락을 튕기자 김혁이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인형 같은 두 아이가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이제 못생긴 인형 같은 악마만 덩그라니 떠 있었다. 인형 같은 아이들과 대비되어 오늘 따라 더 못생겨 보였다. 저 악마에게 변신을 못하게 하는 것과도 같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악마가 소리쳤다.
“그래, 그거야. 난 자기답게 못 살았던 영혼들에겐 특히나 더 관심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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