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존재 이유2
이거야말로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김혁은 세상의 마지막 한 사람처럼 혼자 앉아 있는 강탄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식어빠진 음식을 먹으면서도 만족스럽고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끔 뭔가 생각나는지 설핏 실없는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지금껏 보아온 그의 행동들을 보면 검은 오라를 달고 있는 게 의문스럽기만 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렇게 됐을까?
너무 일찍 검은 오라를 가져버린 소년. 그가 좀비에게 희생된다 하더라도 결국 갈 곳은 지옥일 터였다.
그럴지라도 너무 뻥 뚫린 허허벌판에 떨어뜨려 놓은 것만 같아 김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좀비가 돌아다니던 숲속에서 어서 탈출하기를, 꼭 살아남길 얼마나 바랐던가를 잊지 않았음에도 너무 무방비로 여기다 데려다 놓은 것만 같아서였다. 주은정이 일부러 문을 달아둔 움막 하나로는 부족한 것.
김혁은 강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저 앤 참 특이해. 그때 그 아지트에서도 분명 작은형님이 도망칠 기회를 줬는데도 도망가지 않았어. 거기 조직원들과 거의 어울리지도 못하던 존재였는데. 물론 작은형님이 좀비가 될 거란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일까 싶지만. 그렇게 좀비랑 죽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놓고 여길 오겠다고 하다니 무슨 생각이었을까?”
“검은 오라치곤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아요.”
쟤를 왜 데려가냐며 길길이 날뛰던 떠중이가 하룻 밤새 이런 말을 하다니, 김혁은 또 어젯밤에 뭔가 자신이 모르는 무슨 대화가 꽤 많이 오갔는가 짐작할 뿐이었다.
“저 애는 아지트에서 자기 아빠가 좀비가 돼서 불태워지는 것도 봤지.”
이번에는 셋이 깜짝 놀란 얼굴로 강탄이를 바라봤다.
“아빠라구요?”
주은정은 정말 놀라워하고 있었다.
“작은형님 말이야. 아마 쟤가 그 조직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 뭐 확실친 않지만 은연중에 둘 다 서로가 핏줄인 걸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끝내 서로가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둘만의 뭔가가 분명 있었거든. 진실은 악마만이 알겠지만.
작은 형님은 죽는 순간까지도 강탄이를 친구 아들로만 남겨두려 했어. 저애의 슬픔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 되었지. 남모르게 고였던 눈물, 아주 잠깐. 그걸 본 건 나뿐이야. 그때 저 애가 그 슬픔에 빠져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김혁은 시선을 마주치면 부담될까봐 일부러 민하진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좀비 앞에서 넋놓고 있다 물려버린 걸 탓하려는 것보다는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고 싶을 뿐이므로. 민하진은 민하진답지 않게 내내 침묵하고 있었다.
김혁에겐 그날 일이 생각만 해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불타는 건물 속에서 좀비가 되어가던 검은 고치들. 그리고 숲속을 헤매던 강탄이.
주은정, 장한조, 민하진도 그날 그 장면을 목격했다면 뭔가 좀 느낀 게 있었을 거였다. 그러나 셋이 목격한 건 불타고 남겨진 건물과 불탄 시체들 그리고 탄내뿐이었다.
아무리 실감나게 표현한다 해도 직접 본 것과는 느낌이 많이 다를 거였다. 그 모든 걸 실감나게 표현해낼 자신도 없었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기도 어려운 것. 모두의 침묵은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혁은 담담히 말했다.
“밖에선 살인귀 같은 것들이 총질을 하고 건물이 불타고 있어. 강탄이랑 또 한 사람만 풀려 있고 나머지는 모두 꽁꽁 묶여 있는 상황이었지. 그때 저 애가 혼자 도망쳤거나 문을 막는데 좀비를 이용할 생각을 못했다면 모두가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야.”
“아빠를요? 자기 아빠의 몸으로 문을 막았다고요? 아빤 줄 알았다면서요.”
주은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생존, 생존에 집중한다는 건 바로 그런 거지. 저앤 그걸 알았어. 산 사람이 먼저라는 이승의 법칙을. 검은 고치들을 풀어주었고 또 갇힌 공간에서 살아나가는 것에만 집중했으니까. 모든 순간에 조금씩만 망설였어도 저들의 탈출은 불가능했을 거야. 불타는 건물 속에서 검은 연기에 질식해 죽을 뻔 했고 가벽을 부수고 나와서도 빈 손으로 총 든 놈들에게 맞서 싸워야 했어. 정말 살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 쳤지. 총 맞아 죽고 좀비한테 물려 죽고 결국 마을에 돌아간 건 두 명뿐이지만.”
김혁도 잠시 강탄이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강탄이는 이제 식사를 마치고 입가심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에 얼굴을 찡그린 천진한 소년의 모습 어디에도 공포 한 조각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무서운 좀비로부터 간신히 도망쳤는데 그 소년이 저기 있어. 제 몸 가릴 곳 없는 곳에서 혼자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도 언제 좀비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를 일을 하겠다고 자원했단 말이지. 건수가 가겠다고 했는데도 굳이 온 거야.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좀비에게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곳에서 공포와 추위에 떨며 배고픔 속에 던져졌었던 게 며칠 전인데 그러기가 쉬울까? 저애가 가졌던 무기는 고작 주머니에 주워 담은 작은 돌멩이들뿐이었어. 지금도 다르진 않잖아. 그는 그저 공포 배고픔 추위를 느끼는 인간일 뿐인데도. 뭔가 생각나는 거 없어?”
김혁은 이번에도 굳이 떠중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젯밤의 오해가 많이 미안할 테니까. 뭔가 생각해내길 바라는 건 셋 모두가 그랬으면 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
“...!”
“...!”
모두가 여전히 강탄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강탄이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간이 식탁 위를 정리하고 널려 있는 쓰레기들을 비닐에 주워 담고 꺼진 모닥불의 재를 헤치기 시작했다.
식은 재 속에서 드러난 건 마지막 숯에 묻어뒀던 고구마들이었다. 껍질 채 까맣게 익은 군고구마. 아마도 점심으로 먹을 생각인가 보았다. 고구마 겉에 묻은 재를 털어 얌전히 간이 식탁에 올려두고 남은 재들을 쓰레기봉투에 퍼 담기 시작했다.
김혁은 저게 주은정이 시켜서일까, 아니면 강탄이가 알아서 하는 행동일까 궁금했지만 지금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 보고만 있었다. 오늘 하겠다고 마음먹은 말을 멋지게 마무리 하는 게 중요했다.
“난 그날 저 앨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싫었다. 시간을 돌려 어서 밤이 됐으면 했지. 내 생애 통틀어 가장 긴 낮이었어. 내가 죽기까지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던 그때처럼 될까봐, 저 애가 숲에서 죽을까봐 걱정이 많이 됐어. 다행이었지. 무사히 마을까지 가게 돼서.”
여기까지 말하고 김혁은 셋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난 내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지금이 더 좋다. 너희들은 어떻지? 나도 그렇게 죽었으니 남들도 그렇게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냐?”
인간들의 범죄 피해로 상처입고 지옥문 앞에 버려진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니요.”
주은정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 김혁은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주은정은 그게 누구든 아이를 지켜주러 올 사람을 위해 하루 머물 움막에 문까지 달아두지 않았던가.
“그런 거 아닌 거 잘 아시잖아요.”
민하진도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대답했다. 찬수 때문에 넋이 빠져서 위험을 초래하긴 했지만 버려진 아이와 지켜줄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한 쇼핑을 해왔으니까.
“...그냥 너처럼 찌질하게 굴면 안 된다고 혼을 내세요. 선배님.”
떠중이는 거의 울상을 짓고 있었다. 이제 와서 책망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김혁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널 탓하려고 하는 말 아니야. 그런 걸로 치면 내가 더 하지. 난 더 오랜 시간을 애처럼 굴었는데. 알잖아? 지성으론 너희들 못 따라가는 거. 그래도 40년 동안 생각이란 걸 하니까 좀 달라진 건 있지. 아 나도 좋은 책들을 예로 들면서 근사하게 말하고는 싶은데 사실 생각나는 게 없네.”
김혁은 한껏 가라앉아 있는 주은정이나 떠중이를 좀 띄워주고 싶어서 한 말이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저 악마가 정해준 리스트나 들고 썩은 영혼을 거둬들이던 일을 할 때랑은 많이 다르잖아. 좀 게으름 부리고 하루나 이틀 늦는다고 해도 괜찮았던 그 시절하곤 완전 달라졌으니까. 그걸 잊지 말자.
우리도 이제 달라져야지. 문제는 우리가 저승에서 온 사자라는 걸 곧잘 잊어버린다는 거야. 우리가 인간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인간일 때의 감정에 너무 얽매이는 거. 인간적일 때도 필요하지만 우린 인간이 아니지.
잊지 마. 우리는 저승사자야.”
아무도 대답이 없는데 그 순간 유난히 한줄기 밝은 햇살이 버스 지붕에 서 있는 김혁과 저승사자들을 에워싸듯 강렬하게 비추었다. 어느새 구름들이 모여들어 하늘을 가리고 햇빛이 한곳에만 닿도록 뚫려 있었던 거였다. 악마다운 장엄한 연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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