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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유니버스

두억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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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작품등록일 :
2012.10.08 21:24
최근연재일 :
2017.03.14 08:26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15,584
추천수 :
256
글자수 :
97,337

작성
17.03.13 16:25
조회
395
추천
9
글자
11쪽

Target. 01: 도화선 (18)

DUMMY

영준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다. 분명히 이 사내도 자기를 알아봤다고 영준은 확신했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내도 영준과 마찬가지로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면서 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편함을 느끼는 쪽은 영준이었다.

“저기······.”

영준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채 다 잇지도 않았는데 사내가 등을 보이더니 창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니,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데 뭐 저런······.”

영준은 순간 욱해서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사내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창고 출입문을 한동안 쳐다봤지만 밖은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결박당한 것을 봤을 텐데도 사내는 풀어주기는커녕 내버려두고 매정하게 가버렸다. 갈 때는 가더라도 결박은 풀어주고 갈 것이지. 영준은 야속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잊고 있었던 병 조각을 다시 떠올리고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찾고 있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매몰차게 밖으로 사라졌던 사내가 다시 돌아왔다. 왼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영준은 동작을 멈추고 사내를 노려봤다.

“이거 당신 지갑이랑 휴대폰인 거 같은데, 여기 문 앞에 놔두고 가겠어. 이따가 도와줄 사람이 올 거야.”

사내가 말을 내뱉기 무섭게 손에 들고 있던 지갑과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창고 문을 닫으려고 했다.

“놔두고 간다고? 어이, 잠깐! 가는 건 좋은데 이건 좀 풀어주고 가!”

영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한 시간 후에 사람을 불러줄 테니 불편하더라도 그때까지는 참아. 이게 내가 베풀 수 있는 친절이야.”

“이봐! 지갑을 봤으면 내가 누군지 알 거 아냐.”

사내가 싸늘한 눈초리로 영준을 노려봤다.

“그래서 당신이 아직 살아있는 거야.”

“뭐라고?”

영준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껑충거리며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

“알아들었을 텐데? 억지는 그만 부리고 얌전히 도와줄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 나는 오늘 충분히 피를 봤어. 피곤하게 만들지 마. 계속 고집을 피우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생각을 바꿀 거야.”

협박이 아니었다. 이 사내는 진심이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타입. 영준은 더는 대꾸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이야. 한 시간 후면 도와줄 사람이 올 거야. 그때까지만 조금만 더 참아. 그리고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인데 이후로 나를 찾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서로 불필요한 에너지는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창고 문을 닫았다.

영준은 허탈해져서 털썩 주저앉았다.

‘이거야 원. 오늘 여러 번 체면구기네. 병신 같이 납치를 당하지 않나. 기에 눌려서 찍 소리도 못하지 않나.’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머피의 법칙이 제대로 적용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좋든 싫든 사내의 말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영준은 벽에 뒷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딱히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지금은 달리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영준은 이대로 잠시 눈을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생각해보니 며칠 사이에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다. 갑자기 거짓말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영준은 서서히 심신을 잠식하기 시작한 수마(睡魔)에 저항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꿈속에서 영준은 기나긴 터널을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저 멀리 출구에서 하얀 빛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영준은 터널 밖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했다. 정확히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터널 밖에서 마주하게 될 무언가를. 그럼에도 계속 걸음을 옮겼다. 마치 무언가에 등을 떠밀리는 것처럼 두 발이 저절로 움직였고, 어느새 터널 출구에 다다랐다.

영준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다시 되짚어 돌아갈까.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 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와 영준을 집어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터널은 사라지고 없고 아파트 복도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낯익은 현관문이 있다. 영준이 살고 있는 아파트다. 심장이 무섭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는데 문이 저절로 입을 벌리며 영준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사람처럼 영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다리도 부들부들 떨렸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치 강한 인력에 사로잡힌 것처럼 저절로 걸음이 떼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영준은 조심스럽게 아파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분명히 자기가 사는 집인데도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웠다.

뒤에서 현관문이 소리를 내며 거칠게 닫히는 바람에 영준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마음을 다잡고 눈길을 거실로 돌리니, 누군가가 어두컴컴한 주방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영준은 실루엣만 봐도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준희야?”

영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아내는 나이트가운을 걸친 채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이름을 서너 번 더 불러봤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보, 나야. 왜 그러고 있어.”

영준은 아직도 꿈이라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조심스레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어깨를 짚으려는데 미동도 하지 않던 아내가 그때서야 돌아섰다. 아주 느릿느릿하게. 비로소 아내와 시선이 마주친 영준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준희야!”

아내의 나이트가운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아주 선명한 선홍빛. 그게 피라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영준은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 아내의 목에 붉은 실선이 생기더니 쩍 하며 살이 갈라지고 붉은 핏물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영준의 얼굴을 적시고, 주방 바닥에도 흥건히 고였다. 아내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쳐다볼 뿐이었다. 당황한 영준이 벌떡 일어나 지혈하려고 상처를 손으로 눌러봤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어느새 바닥에서 차오르기 시작한 붉은 핏물이 거품을 일으키며 영준의 무릎을 넘어, 가슴께까지 올라왔다.

“아, 아, 안 돼······.”

그리고 아내도, 영준도 붉은 핏물에 완전히 잠겨버렸다.


“준희야!”

영준은 고함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고 나서야 꿈을 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가시지 않은 여운 때문인지 심장이 무섭게 고동쳤다.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체 진정이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영준은 혀를 차며 뒷머리를 벽에 쿵쿵 부딪쳤다. 아내의 꿈은 오랜만이었다. 마치 자기를 잊지 말라는 듯, 꿈을 통해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절대로 잊을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 영준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힌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새 사내가 약속한 한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설마 그 친구가 다시 돌아온 건 아니겠지.’

이윽고 자물쇠를 따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어, 정말이네. 안에 사람이 있었네?”

천식을 앓고 있는지 쇳소리가 섞인 중년남자의 목소리가 영준의 귀를 자극했다.

영준은 고개를 들고 문을 열어준 남자를 쳐다봤다.

쉰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깡마른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 자율방범대원인지 해병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웬일이래.”

뒤늦게 영준이 결박당해있다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달음에 달려와 등산용 칼로 박스테이프를 잘라냈다. 덕분에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영준은 손목을 주무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영준이 고개를 숙였다.

중년남자는 허허거리며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장난전화인 줄 알았는데 와보니 진짜였네.”

“장난전화요?”

영준이 물었다.

“아, 보다시피 내가 여기 자율방범대 소속인데 오늘 내 순번이라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초소에 나와서 티브이를 보고 있었거든. 마감뉴스까지만 보고 순찰을 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전화가 한 통이 걸려왔지 뭐유. 여간해서는 유선으로 전화가 걸려오는 일이 없거든. 그래서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혹시 몰라서 받았지. 그랬더니 어떤 남자가 다짜고짜 여기에 사람이 갇혀있으니 가서 꺼내주라고 하곤 그냥 끊더만. 솔직히 긴가민가했지. 그래도 찜찜한 기분이 들어서 와봤더니 정말로 사람이 있었네?”

중년남자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영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갔다. 그 사내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아니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중년남자는 뭔가 찾아보려는 듯 창고 안을 두리번거렸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영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창고 밖으로 나왔다. 출입문 옆에 지갑과 휴대폰이 있었다. 영준은 지갑과 휴대폰을 주워 먼지를 털어내고는 지갑은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부재중 전화가 열두 통이나 와 있었다. 그중 절반은 서장이, 나머지는 안 순경의 번호였다. 서장은 그렇다쳐도 안 순경이 무슨 일로 전화 걸었는지 선뜻 떠오르는 게 없어 번호를 누르려고 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 거 아니요?”

뒤따라 나온 중년남자가 영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지갑을 다시 꺼내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제가 경찰입니다.”

“잉? 경찰이었어? 경찰인데 왜 창고에······.”

중년남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천성적으로 오지랖이 넓고 호기심도 많은 모양이었다. 계속 상대를 했다가는 밤을 새도 모자랄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중요한 수사를 하는 중이라 자세한 얘기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중요한 수사. 그렇지. 나랏일이니까 다 그런 거겠지.”

그때서야 중년남자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서 영준은 다행이라고 여겼다.

“암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신세를 단단히······.”

위화감.

영준은 처음에는 그게 무엇 때문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순히 연이어 겪은 불운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러다가 다시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위화감의 원인을 깨달았다.

“뭐야, 이거······.”

깨끗했다.

응당 있어야할 시신들도 사라지고, 총상으로 인한 혈흔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정리가 된 상태였다.

잠시 잠든 사이에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영준은 말문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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