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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유니버스

두억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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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작품등록일 :
2012.10.08 21:24
최근연재일 :
2017.03.14 08:26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15,595
추천수 :
256
글자수 :
97,337

작성
16.12.23 04:54
조회
717
추천
19
글자
11쪽

Target. 01: 도화선 (9)

DUMMY

태일은 갈등했다.

참견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외면할 것인가.

태일은 고민하면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객차 안에는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들까지 피해를 입을까봐 노심초사하며 소지품 단속하기도 바빴다. 거기에는 아마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나서주겠거니 하는 심리도 있을 것이다. 무릇 세상사란 조금만 비겁하면 자신에겐 아무런 해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런 믿음이 있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여기 소매치기가 있어요. 좀 찾아주세요!”

여자가 울먹이며 애타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 사람들은 매정하게 그녀를 외면했다.

태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태일의 눈에는 유력한 용의자가 셋이나 보인다.

첫 번째 용의자는 노약자석 바로 옆 출입문에 기대고 서서 신문을 보는 40대 남자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호기심 때문이라도 흘끗거릴 텐데도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신문에만 열중한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원래 남의 일에는 무신경한 이기적인 사람이거나, 그게 아니면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어 일부러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딴청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는 후자였다. 여자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미미하지만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두 번째 용의자는 키가 유난히 큰 30대 남자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샐러리맨 같지만 눈빛이 날카롭고 열차의 흔들림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게 석연치 않다. 마찬가지로 이런 소란에도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

세 번째 용의자는 여자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슬그머니 통행로로 이동한 20대 청년이다. 그는 전철역 입구에서 나눠주는 무가지를 반으로 접어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펼쳐들고 있던 신문이다. 그 안에 뭔가를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청년은 내친 김에 옆 칸으로 이동하려는지 슬금슬금 사람들 눈치를 살피고 있다.

게다가 이들 세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지갑을 확인하기 마련인데, 이 세 사람은 다른 승객들처럼 동요하지도 않고 소지품을 확인하는 모습도 없었다. 손에 들고 있는 무가지도 모두 같은 신문이다.

소매치기는 단독범행보다는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그 구성은 보통 바람과 기계, 그리고 안테나로 나뉜다. 분위기를 만들며 목표물을 정하는 설계자가 ‘바람’, 빠른 손놀림으로 지갑이나 돈을 직접 터는 기술자는 ‘기계’, 그리고 동료들을 뒤에서 지켜보며 뒤처리를 맡는 척후병이 ‘안테나’다.

태일은 이들 셋이 모두 공범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마도 40대 남자가 바람, 20대 청년이 ‘기계’이고 키 큰 30대 남자가 ‘안테나’일 것이다.

그사이에 열차가 멈췄다.

충정로역. 공교롭게도 유동인구가 많은 환승역이다. 장한평역까지 가려면 태일도 여기서 내려 5호선으로 갈아타야한다. 열차 문과 스크린도어가 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소매치기를 당한 여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울먹거렸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태일은 여전히 여자와 용의자들을 번갈아보았다.

그때 용의자 셋이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천천히 열차에서 내렸다. 세 명이 모두 공범인 게 분명하다. 쫓을 것인가. 그냥 외면할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열차 문이 닫히려고 한다. 태일은 서둘러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여자 앞을 지나는데, 끝내 그녀가 무너지면서 울음을 토했다.

“어떡해, 엄마 병원비······.”

제길, 듣지 말았어야할 말을 들어버렸다. 태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주저앉으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열차 밖으로 끌어냈다. 깜짝 놀란 여자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겁을 먹어선지 목소리가 크지 않아 주변 소음에 묻혀버렸다. 굳이 입을 막을 필요도 없었다.

“쉿. 여기서 기다려요. 아무것도 묻지 말고, 경찰에 신고도 하지 말고, 5분만 기다려요. 알았습니까? 딱 5분이면 됩니다.”

태일이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여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일을 쳐다보았다. 낯선 남자의 무례한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5분입니다, 5분.”

태일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일은 그녀를 세워두고 용의자 셋이 사라진 방향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요즘은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있어서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해야하므로 그렇게 멀리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면 돈만 빼내고 지갑은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갈 곳은 불 보듯 뻔하다.

남자화장실.

태일은 급히 표지판부터 찾았다. 가장 가까운 화장실이 30미터 전방에 있다. 다행히 열차가 떠난 뒤라서 통로를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태일은 지체 없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키 큰 남자, 안테나!’

화장실 안으로 뛰어드니 그가 손을 씻을 것처럼 세면대 앞에 서서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그가 ‘안테나’였다. 나머지 둘은 지갑을 처리하기 위해 좌변기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태일은 소변기로 걸어가는 척하며 곁눈질로 사용 중인 좌변기가 어느 칸인지 확인했다.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좌변기만이 유일하게 사용 중이었다. 안에서 희미하게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비라고 했으니 꽤 거금일 것이다. 다행히 화장실에는 이들 셋 말고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태일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면서 몸을 이완시켰다.

소매치기들은 예외 없이 면도칼이나 잭나이프 같은 흉기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손놀림이 엄청나게 빨라서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그러므로 틈을 줘서도 안 되고 단숨에 제압해야한다. 또 중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도 문제다.

속전속결.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태일은 순서를 정했다. 우선은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안테나부터.

태일은 일부러 그를 외면하며 주의를 끌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걸음을 뗐다.

안테나가 수도를 틀었다.

다시 한 걸음.

안테나가 손을 씻는 척하면서 거울로 태일을 지켜본다.

그리고 또 한 걸음.

안테나가 의심을 사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고작해야 0.5초나 1초 정도. 하지만 태일에게는 충분한 시간이다.

태일은 재빨리 몸을 돌려 안테나의 종아리를 힘껏 밟아 중심을 무너뜨렸다. 틈을 주지 않고 놈의 뒷머리를 잡고 세면대에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반동으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안테나의 옆머리를 벽에 세게 박았다. 모서리에 관자놀이를 받힌 안테나는 뇌진탕으로 눈을 까뒤집으며 고꾸라졌다.

그때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다른 두 놈이 앞 다투어 나오려고 했다.

바람. 40대 남자가 먼저 얼굴을 내밀었다. 오른손에 과도처럼 생긴 칼을 쥐고 있는데 칼날이 훨씬 길고 날카로웠다.

“너, 뭐야! 이 새끼가······.”

태일은 놈에게 성큼 다가가면서 재킷 안감 속에 숨겨둔 세라믹나이프를 빼들어 역수(逆手)로 쥐었다.

순간, 뾰족한 칼날이 태일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태일은 옆구리를 상하기 전에 재빨리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나이프로 손목을 그었다. 남자는 신음을 내뱉으며 칼을 떨어뜨렸다. 나이프배틀에서 상대의 몸을 노리는 것보다 손목을 노리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태일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저쪽으로 걷어차고 칼자루 끝으로 관자놀이를 찍은 데 이어 주먹으로 남자의 인중을 연달아 세 번을 가격했다.

네 번째 가격하려는데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한 청년이 이미 의식을 잃은 남자를 뒤에서 힘껏 밀어붙였다.

태일은 중심을 잡고 자기에게 쓰러지는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아 소변기 쪽으로 내던졌다.

그사이에 청년은 동료들을 버리고 혼자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태일이 더 빨랐다.

태일은 다리를 쭉 뻗어 청년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바닥에 쓰러진 청년의 척추를 무릎으로 누르고 목에 세라믹 나이프를 겨눴다.

“여기가 경동맥이야. 내가 힘주면 어떻게 될까?”

태일이 나직이 속삭였다.

청년은 곧바로 저항을 포기했다.

태일은 청년에게 좌변기로 가서 지갑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새 바닥에 쓰러졌던 바림이 신음하며 일어서려고 해서 다가가 턱을 힘껏 걷어찼다. 바람이 다시 정신을 잃었다. 지갑을 가지고 나오다가 그 장면을 목격한 청년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허둥대며 알아서 빈 지갑을 채웠다. 눈치가 빠른 친구였다.

“다시 볼일이 없는 편이 서로에게 좋겠지?”

태일이 묻자, 청년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보다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시계를 보았다. 여자에게 약속한 5분이 거의 다 되었다. 이제 슬슬 퇴장할 시간이다. 태일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치고 나서 청년을 주시하며 느릿하게 뒤로 물러섰다. 다른 두 놈은 여전히 의식불명이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입구에 다다른 태일은 청년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내가 나가면 백까지 세고 여기서 나오도록 해. 어설프게 굴다가 내 눈에 띄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이미 봐서 알겠지?”

청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태일은 화장실을 나와 곧바로 여자가 기다리고 있는 승강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녀는 태일의 당부를 잊지 않아서 승강장에 홀로 서 있었다. 곁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태일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곧 걸음을 멈춰야했다. 공익근무원 두 명이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내려와 그녀에게 달려갔다. 태일은 혀를 찼다. 그새 기다리지 못하고 신고를 한 모양이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공익근무원들에게 뭔가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쪽을 쳐다보았고, 덩달아 공익근무원들의 시선도 따라왔다.

태일은 황급히 돌아서다가 교복을 입은 여학생과 부딪혔다. 넘어지려는 여학생을 얼른 부축하고 정중히 사과했다.

“학생, 미안. 다치진 않았나. 미안해, 내가 조심성이 없어서.”

“네, 괜찮아요.”

“그래. 그럼, 학생. 저기 말이야. 혹시 부탁 좀 하나 할 수 있을까?”

“부탁이요?”

태일은 아이에게 지갑을 건네며 자기를 대신해서 여자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사례비로 만원을 쥐어주었다.

여학생은 흔쾌히 수락했다.

태일은 고맙다고 말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지갑은 본래 주인에게 무사히 돌아갔다. 지갑을 돌려받은 여자가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마도 태일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태일은 환승로를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5호선 승강장까지 걸어갔다.

때마침 마천행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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