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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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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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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8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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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쪽

130

DUMMY

조용히 눈을 뜬 리아는 손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음. 정말 묘한 기분이야······’


방금까지만 해도 협곡이었었던 대지에 있었는데 말이다.


기억상으로는 분명 그러하였다. 그 끝 또한 명확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내 손으로 직접 끝을 맺었는데, 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렇다면 지금 이 광경은 무엇일까. 되려 그리울 정도로 멀쩡한, 과거의 영광이 그대로인 대성당의 정경과 제법 반가운 저 얼굴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다. 하지만 놀랍도록 혼란스럽지 않다. 현 상황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혼란은 없다. 더불어 지금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평행세계라······ 지금의 나는 제법 똑똑한가 보네. 이런 묘한 개념도 알고 있고. 하지만 지구라······ 나도 그 세계에서 왔다는 거겠지. 다른 나들도. 거참 신기하구먼.’


그래서 그랬던 건가. 타 세계에 와서 꽤 고생했다는 기분이 든다. 어느 때의 자신이든 간에. 오죽하면 있지 말아야 할 이물질을 제거하려 했던 게 아닐까 하는 망상마저도 든다.


잠시 생각하던 리아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작다. 무지하게 작다.


손만 작은 게 아니다. 전체적으로 작다. 시선조차도 너무나도 낮은 것이 그냥 아이의 시선이나 다름없다. 16살 때의 기억은 오래전이라 그리 잘 나진 않지만, 이것보단 한참은 컸지 않았을까 싶다.


‘꽤 신선한 감각이네.’


피식 웃은 리아는 물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낸 존재에게.



‘아이라고 했지? 그래서 넌 결국 뭐야? 지금의 나는 태평한 녀석인지라 그냥 넘어갔지만, 내가 볼 땐 네 존재는 매우 이상하거든. 그것도 그렇잖아, 마법이 기생하고 자아를 얻는 것도 모자라 육체의 제어권마저 얻다니······ 어딜 어떻게 봐도 이상하지 않아? 그러다 의식까지 강제로 잠재우는 짓거리나 해대고.’

『당신에게 대답할 이유는 없습니다.』

‘온도 차가 너무 심하네······ 나도 이스피리아인데.’

『제 마스터는 당신이 아닙니다.』

‘그렇군······ 넌 확실히 나의 영향을 받아있어. 나도 나와 지금의 나를 별개의 존재로 놓고 보거든. 사고방식이 비슷해. 이 특수한 상황에 우연일 리도 없어. 거기다가 반대로 내가 너의 상황이었다면 똑같이 이스피리아라고 나불거리는 게 은근 화가 났을 거야.’


대답은 없지만 느껴진다. 정곡을 찔렸다는 기척이.



‘과연······ 이래서 자신의 아이 같다고 느꼈던 건가, 지금의 나는. 맹하긴 해도 역시 나는 나네. 근본적인 부분은 잘 꿰뚫어 봐.’

『그게 당신만의 힘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들려오는 목소리 자체는 평탄하나 그 안에 숨겨진 조소를 리아는 알 수 있었다.



‘뭔가가 더 있다는 거네. 으음. 하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감이라고 하기엔 너무 딱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었긴 하지? 그게 다른 이유가 있었구나. 그리고 넌 그게 뭔지 알고 있는 거고.’


대화를 섞어보면 섞어볼수록 이 아이라는 존재에 대해선 수수께끼이다. 일단 다른 때의 자신을 불러낸다는 것 자체가 신묘하다.


우선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하고, 마법이라면 필시 사람이 정한 급수를 뛰어넘는―― 신급에 준할 텐데도 놀라울 정도로 마력의 소모가 없다.


아니, 마력의 소모 자체가 일절 있질 않았다.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지금의 자신이 잠들기 전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영문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기만 하는 건 더욱 성에 차지 않는다.


리아는 살짝 입꼬리를 틀어 올리고는 말을 걸었다.



‘근데 로봇이라고 하던가? 그 딱딱한 말투는 그만둔 거야? 사람처럼 잘만 이야기하네~ 여전히 그다지 억양의 변화는 없지만 말이지. 지금의 나에게만 부리는 내숭이야?’

『······』

‘키킥. 지금의 나도 참 취향이 특이해. AI인지 뭔지는 냉철하고 딱딱하지만 마음씨는 좋은 여성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고.’


아이가 조용히 화를 낸다. 그것을 느낀 리아는 재차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한숨을 내쉬어 참아냈다.


물론 그렇다고 놀리는 걸 멈췄다는 뜻은 아니다.



‘아아. 너무 화내진 말아줘. 이래저래 여동생을 대하는 느낌인지라 나도 모르게 그만. 특히 너무 당황해서 안절부절 황급히 날 부른 점이 말이야.’

『······당신에게도 기회를 주려고 한 판단이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괜찮으신 모양입니다.』

‘우왓! 자, 잠깐. 진정해! 여기서 날 바로 내보내면 이걸 어찌 정리하려고? 해결하려고 날 부른 거잖아?!’

『······』


다행히 설득됐는지 곧장 내보내려던 낌새가 옅어진다.



‘후······ 가차 없네. 이거 백방 나한테 영향받은 거야. 뭐, 투덜거림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고는 싶은데. 하아······ 내 인생이랄까, 평형세계의 나는 참으로 각양각색으로 살아왔네. 진짜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다양한 삶을 살 수도 있는 거냐. 허 참.’


엄청난 숫자의 기억들.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감정.


원래라면 이런 무수히 많은 기억과 감정을 한 인간이 담아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 다 담아내지 못하고 미쳤을 것이 분명한데도.


저 아이라는 존재가 무언가를 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했다만······ 딱 보니 원래 다른 기억들은 불러올 예정에 없었던 것 같다. 아까도 언급했듯 당황한 나머지 대충 긁어모으다 보니 이렇게 됐을 듯싶다.


그럼에도 멀쩡하며, 믿을 수 없는 이 숫자는 도대체······


평행세계라는 요상한 것은 무한대로 뻗어나간다는 이 정보는 의외로 신빙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으려나~ 어차피 난 환상 같은 거니까.’


자신이 뭔갈 생각해봐야 괜한 짓이다.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을 멍청하니 보낼 바에야 좀 더 유익히 쓰는 게 바람직할 거다.


뭘 해야 할지는 알고 있다.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한 리아는 흩뿌려진 마력을 끌어모았다.


지금의 자신은 교황들이 가만히 있던 이유가 저격의 실패로 알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바로 짓눌렸기 때문이었다.


물리적으로 눌린 게 아니다. 공간 가득 꽉꽉 들어찬 농밀한 마력에 짓눌린 것이다.


한 번도 못 느껴봤을 이딴 정신 나간 마력을 어디서 느껴보겠는가. 저들은 이 엄청난 마력에 압도되어 뭔가를 해볼 생각 자체를 못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에쿠릴과 아베라가 보호막을 쳐두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대혼란 확정이었다.


‘에휴. 잘못하면 근방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빈사 상태까지 갈 수도 있었는데 조심성이 없구먼. 그나저나 이게 세스의 일격이라······ 녀석답게 단순하긴 하네. 근데 용케도 게헤르 엘의 부름을 해냈네. 제대로 다루지도 못해서 마력을 죄다 흩뿌려댔는데 말이야.’


아마 가능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도중부터 자신이 아는 세스가 됐기 때문일 거다.


말하는 거나 하는 행동으로 봐도 그렇고, 신검을 안다는 게 확정적이랄까?


현재 알고 있는 기억 중에서 신검을 소지한 경우는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러니 그걸 알고 있는 데다가 소지 여부까지 묻는 걸 보면 빼박이다. 도중부터 세스는 그때의 세스였을 거다.


게헤르 엘의 부름은 아주 익숙한 그때의 세스니 한참 모자란 지금에도 어찌저찌 해냈지 않았을까 싶다.


‘흐음. 이 당시의 세스는 요 정도인가. 꽤 약해빠졌네.’


호인왕 세스타스와 비교하기엔 천양지차. 운이 나쁘면 일격만으로도 이때의 세스는 죽을 수도 있어 보인다.


다만 한 가지. 호인왕 때와 달리 마력의 흐름을 유달리 잘 읽는다.


마력만 잘 읽는 게 아니다. 그리도 싫어하던 장비의 착용도 하고 있었던데다, 무식하게 돌진만 하던 것과 달리 지금은 신중히 상대를 파악해가며 맞섰다.


드디어 제법 머리도 굴리게 된 것이다.


‘이걸 보면 20년 후엔―― 날 만날 때쯤엔 지금의 세스가 훨씬 강대해지지 않을까도 싶네. 그런데······ 여전히 웃옷은 안 입는구나.’


마력이 회수되는 동안 옛 동료를 떠올리며 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회수작업이 모두 끝나자마자 곧바로 돌변하여 얼굴을 굳히고 몸을 돌렸다.



“자, 그럼 시작하기 전에―― 이거부터 좀 해결하자. 아놔, 진짜 미치겠네.”


굳은 얼굴로 몸을 돌린 리아는 곧장 찬크에르―― 현재 자신의 남편이라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당당한 걸음걸이와 달리 리아의 속은 쭈뼛쭈뼛한 기색이 가득하였다.



“리······아?”

“으음. 잘생기긴 했다만 내 취향은 아니네. ······지금은 무진장하게 취향인 듯하지만.”


의아하게 보는 에르를 아랑곳없이 위아래로 슥, 훑어 얼굴 평가를 한 리아. 그리고는 훤칠한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려 했으나······ 신장상 어쩔 수 없이 배를 툭툭 두드렸다.



“당신, 나랑 한 약속 하나도 안 지켰더라?”

“약속?”

“그래! 극성맞게 굴지 않는다는 거랑 나와 함께 그 아이랑 논다고 했던 거! 난 붙잡는다는 약속을 잘 지켰더니만 당신은 바로 내뺐더라. 약속해놓고 그러면 쓰나. 그래도······ 이후엔 충실히 내 곁을 잘 지켰으니 봐줄게. 대신······”


휙휙.


상당히 귀찮다는 느낌으로 리아는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에르는 당황하면서도 허리를 숙였고, 리아는 가까워지는 그의 목덜미를 먹잇감 노려보듯 보았다.


그러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가 되었을 때―― 리아는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는 확 끌어당겼다.



“읏?!”


역시나 용왕. 엄청난 반사신경이다. 바로 반응한 것도 모자라 저항하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이리도 가까운데다가 아내에겐 함부로 대하지 않는 그이기에 차마 떨쳐내진 못했고······ 리아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무, 뭐······”


곁에 있던 델리안이 대신 당혹스러워했지만 리아는 차분히 음미했다.


그렇게 잠시 만족스러울 시간 동안 있던 리아는 푸하, 숨을 내뱉고는 서둘러 에르의 목덜미를 놓고 떨어졌다.


입가에 얇게 늘어지는 실.


리아는 그것을 손등으로 터프하게 닦고 슬쩍 에르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걸로 용서해줄 테니까 다시는 떠나려고 하지 말아. 그리고―― 이제 좀 멈추라고 이 멍청한 몸뚱이야. 그만 만족 좀 하라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리아······?”

“뭐, 뭘 자꾸 불러! 아, 키스 못 해서 그런 거야? 미안하네요, 못해서!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처음이니까······. 불만이라면 네 아내한테나 하라고. 도대체 얼마나 좋아하면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당신을 찾아대는 거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이놈의 몸뚱이는 정신을 차리고 나서부터 쭉―― 정말 계속 에르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이는 의식하지 않아도 그런 것으로, 어느샌가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무의식의 영역.


이것이 무진장하게 번거로웠던 리아는 되도록 빨리 해결하려고 했고, 몸이 원하는 대로 하면 해결되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과감한 입술 박치기를 하였다. 절대 제 뜻은 아니었다.


‘아니······ 조금은 있긴 했으려나. 무, 물론 나보단 이 미련한 몸뚱이가 더 바랬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진정은 됐다. 부끄러운 탓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고까지 한다.


그래, 해결된 것이다.


‘그런데 왜, 어째서―― 이번엔 심장이 아플 정도로 콩닥대냐? 응??’



“적당히 좀 해줘라. 쪼옴!”


도대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일상생활을 이어 나가는 건지······ 맨날 붙어 다니기까지 하는데.


거하게 한숨을 쉰 리아는 되도록 멍한 에르를 보려 하지 않고 말하였다.



“당신 머리 똑똑하잖아. 낌새도 보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 감이 왔지? 설명할 시간도 없으니까 그걸로 넘어가 줘.”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끝낸 리아는 시선을 옮겼다.



“여! 오랜만이야, 델리안. 나로서는 20분도 안 돼서 다시 만난 느낌이지만.”

“자넨······”

“응. 짐작대로. 델리안도 아까 날 부르는 모양새로 보면 얼추 떠올린 거 아냐?”

“그, 그게 진짜였다는 말인가······”

“아. 그쪽? 글쎄~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는데. 다만 어느 곳에서는 진짜로 벌어졌던 일이지 않을까? 여기와는 상황 자체가 너무나도 달라서 믿기는 힘들지만.”


델리안은 멍하니 고개를 돌려 에르를 쳐다봤다.


――당시 우리들의 숙적이었던 파멸의 용왕을.


믿기지 않는 눈인 그녀는 기억을 떠올렸을 때, 인간의 모습이지만 에르의 정체를 어렴풋하게 느꼈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믿기지 않겠지. 그 세상을 부수고 다니던 용왕이 동료였던 이스피리아의 남편이라니까.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런 영문 모를 일에 불리기도 하고. 아니, 이미 죽었던가? 아무렴 어때. 덕분에 그 아이―― 아이리스도 보게 됐는데. 내 아들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 못 했지만 난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후후.’



“델리안도. 그리 시간이 없으니 설명은 참아줘? 어차피 나도 모르고 말이야. 그러면―― 네가 홀린이냐?”

“당신은······”

“아아. 마력 내뿜었던 걸로 놀란 듯한데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위해를 가할 생각 따윈 전혀 없어. 애초에 네 그 몸으로 날 상대할 방도도 없잖아?”


표정을 굳히는 홀린을 리아는 빤히 쳐다봤다.



“흠흠. 확실히 반응이 좋긴 하네. 아까도 [마력탄]에 반응했었지? 몸이 안 따라줘서 막아내진 못했지만. 과연, 과연······ 왜 델리안이 네가 있었다면 큰 전력이 됐을 거라고 했는지 이제 알겠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몰라도 돼. 너랑은 그다지 관계도 없으니까.”


그리 말한 리아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엿차. 됐다. 네 몸을 갈아 먹고 있던 병마를 다 제거했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곁에서 델리안을 잘 보좌해. 남정네가 아까처럼 우는 얼굴 하지 말고.”


잠시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던 홀린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그냥 [정화]지. 혹시 처음 받아봐? 아! 그게 아니라 어떻게 강제로 했는지가 궁금한 건가? 그건 뭐······ 워낙 수준 차이가 심해서 저항할 수 없었던 거니까 별로 마음에 담진 말어. 창피한 게 아니야.”

“하아······ 이스피리아야. 이전에도 말했고,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한다만 [정화]는 쉽게 볼 수 없단다. 그리고 남에게 쉽게 간섭하여 마법을 걸 수 있는 것도 자네 정도뿐일 거다.”

“으응? 델리안도 [정화] 정도는 대충 비슷하게 할 수 있―― 아하. 지금 기억이 돌아와서 힘들려나?”

“그렇구나······ 얼핏 어떻게 하는지 감은 온다만 연습이 필요하겠지.”

“그럼 전신에 퍼진 암은 어떻게 하진 못하겠네. 그래서 아직도 치료를 못 하고 있었던 건가? 뭐어, 열심히 연습해둬. 하는 김에 간섭하는 것도. 그거 그냥 마법을 써서 효과만 따로 적용하면 되는 거니까 어려운 것도 없어. 아, 물론 마력을 끌어올려서 저항할 수도 있으니 너무 맹신하진 말고.”

“알고 있다. 가르쳐줬잖나.”

“그랬······었지, 참. 하하.”


‘그, 그랬나?’


전혀 기억나지 않은 무안함을 뒤로 하고 리아는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손을 뻗었다. 마법을 쓴 것으로, 리아의 손엔 빛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기다란 창이 들려있었다.


키가 작은 리아가 들고 있기에 더 길어 보이는 창은 끝이 송곳처럼 뾰족하고, 봉 부분엔 2cm 간격을 두고 나선으로 홈이 파여 미끄러지지 않게만 된 단순한 형태였다.


리아는 그 창을 내밀었다.



“쿠 엘 홀린, 위대한 창술의 달인이여. 길어봐야 5년인 네놈의 목숨은 이 내가 구했다. 고로 말하노니―― 앞으로의 여생은 즐겁게 살아라. 후회 따윈 남기지 말고. 알겠냐?”


홀린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은은하게 은빛이 감도는 창과 리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받으라고 내민 건데······


뻘쭘해진 리아는 제대로 만들어졌나 확인도 할 겸 창을 휘릭 한 바퀴 돌려보았다.



“물론 네 건 아니야. 예전에 델리안이 보여줬던 너의 창을 똑같이 만들었을 뿐이야. 회복한 기념이야. 급조하긴 했지만 내 마력으로 만든 거니 걱정하진 않아도 돼. 네 원래 창보다는 훨씬 좋을걸?”

“무슨――”

“――아아. 일단 받아. 이제 가봐야겠다.”


언제까지고 떠들 수만은 없다.


대성당 쪽의 삐걱거림을 눈치챈 리아는 창을 땅에 찍어 강도까지 확인을 마치고는 무심하게 홀린에게 던졌다.



“어, 자, 잠깐――”

“그럼 다녀올게.”


가볍게 말을 한 리아는 허둥대는 홀린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뗐다.


흡사 산책하러 나가는 듯한 가벼운 발돋움. 하지만 리아는 바람이나 잔상 같은 건 남기지도 않고 사라지듯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드러낸 건 대성당의 안―― 저격이 행해진 첨탑의 밑이었다.


한순간에 행해진 고속 이동. 리아는 작게 감탄했다.


‘헤에. 막상 움직여 보니 생각보다 몸도 가볍고 멀쩡하네. 그런데도 이게 제 상태가 아니라는 거냐······ 지금의 나는 진짜 엄청나네. 키가 작은 것도 리치가 짧다 뿐이지 이 수준에 이르렀다면 장점밖에 없어 보이는데―― 응? 설마 일부러 이런 짜리몽땅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던 건가?’


혹시나 드는 생각이었지만, 아예 신빙성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 지금의 자신은 신과도 정말 싸워볼 심보인 이상한 녀석이니.


‘으음. 본인도 별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꽤 다급했으니 조금은 노린 걸로도 보이지? 다만, 이 엄청난 압축이 행해진 마력은 대체······’


흠, 흠. 고개를 주억거리는 리아.


그런 리아의 귀에 쓰디쓴 신음이 들려왔다.



“크윽. 하필이면――”

“――아. 잠깐만. 할 말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조금만 기다려, 인디아. 넌 상처나 치료하고 있으라고.”


뭐라 중얼거리는 인디아를 무시하고 리아는 귀걸이에서 장검을 꺼내 곧바로 위로 가볍게 찔렀다.


공기가 응축되는 소리가 들리고――


부우웅······!!


검 끝에서 직경 10m에 달하는 레이저 같은 마력이 뿜어져 나와 은색의 빛을 뿌리며 하늘을 꿰뚫었다.


――델리안의 [공간절개]로 인해 불안하게 매달려있다 떨어지는 커다란 종을 없애버리면서.



“으음. 확실히 상태가 안 좋긴 하나 보네. 마력의 컨트롤이 쉽지가 않아. 그나저나 오리진이 아낌없이 들어간 검이라······ 꽤나 사치스러운 물건이네. 그래봐야 신검보단 조금 떨어지려나.”


장검과 뜻하지 않은 과도한 출력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 때였다. 제법 그리운 여성의 말이 들려왔다.



“[유성 천공]······. 역시······ 언니셨군요?”

“오우, 리지. 오랜만이야.”

“예······ 정말 오랜만이에요, 언니. 너무나도 뵙고 싶었어요.”

“헤~ 아직도 언니라고 부르는 거야?”

“당연하죠. 언니는 언니이신데. 나, 나이 같은 건 상관없어요.”

“여전하네.”

“그리고······ 죄송해요. 언니의 마력을 느끼기 전까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여기와는 전혀 관련 없는 기억이라고? 아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그러니 미안할 필요도, 사과할 필요도 전혀 없어.”


피식 웃은 리아는 누워있는 리블리지―― 리지에게 다가갔다.



“멈춰라!”


하지만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받쳐주고 있던 인디아가 이를 제지했다.



“흐음? 너는 그다지 그때의 기억이 없나 보네. 낌새를 보면 어렴풋하게 뭔가를 느끼는 것도 같지만.”

“무슨 말이냐······”

“아아. 너도 시작이야?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네.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그리고 내가 뭔가를 하려고 했으면 더 일찍 했어. 너흰 10번은 여유롭게 죽고도 남았겠고.”

“네, 주교님. 뭔가를 하려 하셨다면 벌써 하고도 남으셨을 거예요. 언니께선 그런 분이시거든요.”

“리지, 너······”

“헤헤.”


한숨을 쉰 리아. 하지만 기분만은 좋아 장검을 도로 넣고 리지에게 다가가 그녀의 긴 앞머리를 걷어줬다.


덤으로 인디아의 팔과 다리도 내친김에 치유해줬다. 인디아가 스스로 하기에는 더디기도 한데다가 받쳐지고 있는 리블리지가 불편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놀라는 인디아는 무시하고 리아는 상당히 다정하게 말을 하였다.



“내가 몇 번을 말했잖냐. 앞머리는 치우는 게――”

“――원판이 괜찮으니 절대로 이쁠 거라고요?”

“그래.”


배시시 웃는 나이 많은 동생과 어느 날에 있었던 그리운 대화. 그게 떠오른 리아는 밝게 웃었다.



“언니······”

“어엉?”

“저는 어땠나요? 지금의 전 토벌대에 데려가 줄 정도는 됐나요?”

“아! 맞아! 너, 왜 엄한 사람을 쐈냐? 보나 마나 언니는 쏠 수 없었어요~ 라면서 다른 사람을 노렸겠지만 말이야.”

“마, 맞아요. 여, 역시 언니예요.”

“에휴, 못 말리겠다 진짜. 넌 얼굴을 몰랐겠지만 네가 쏜 건 델리안이야. 그 토벌대에 속한 엘프 쪽의 영웅. 그 델리안에게 쏴버린 바람에 지금의 내가 단단히 화가 났거든? 알고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 어찌나 화가 났는지 여기를 지도에서 없애버리려고 하더라. 뭐어······ 본인에게 그럴 의도가 있던 건 아닌데 결과적으로 절반은 날아갔을 거야. 전력의 [유성 천공]이니까. 그것도 방사형인데다가 이해 못 할 뭔가가 더 합쳐진 엄청난 녀석으로. 끔찍하지? 난 그걸 수습하기 위해 나온 거고.”

“그, 그런! 전 결코 언니를 화나게 하려고 한 게 아녜요!”

“알아. 그래서 말했잖아. 수습하러 왔다고.”

“그렇군요······ 죄, 죄송해요. 괜한 일을 하시게 만들어서.”

“누가 아니래. 망령까지 불러들여서 뭘 하는 건지 원.”


어깨를 늘어뜨린 리아는 힘겹게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리지를 조용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내 찬찬히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해도 토벌대에는 보조로 아슬아슬하게 들어올 수 있을 거 같아. 말하자면 턱걸이 합격이라는 거지.”

“지, 진짜요?!”


위험지대에 제 발로 가는 게 그렇게나 좋을까. 힘도 안 들어갈 텐데도 리지는 기쁨에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이마를 내리눌러 막았지만.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참고 리아는 송구스럽다는 듯한 얼굴인 리지에게 이어서 이야기하였다.



“아까 너의 [마력탄]을 막았던 남자 있지? 너희가 내 사용인으로 알고 있던 사람 말이야. 사실 그가 그 토벌대의 목표거든. 그런데 손을 날려버린 쾌거를 선보였네? 허를 찌른다는 목적으로 데려가기엔 충분하다는 거지.”

“저, 정말 그 파멸의――”

“――거기까지. 지금은 내 남편인데다가 함부로 입에 올릴 명칭은 아니잖아? 거기에 그건 다른 쪽의 일. 여기에서는 아내 바라기일 뿐인 순둥이 그 자체야.”

“수, 순둥이라니······ 그리고 남편······되시는 분이라고요?”

“어어. 나도 당혹스러운데 그렇다더라. 아, 미리 말해두는데 손을 날렸다고 사과하려 들진 마. 사양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잘했어, 리지. 실은 나도 한 대쯤은 때려주고 싶었는데 네가 대신해줘서 속이 다 후련하더라.”

“언니는 그걸로 만족하신 건가요?”

“응. 나도 의외지만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도와주기로 한 거지. 평화로운 나의 일상을 위해서. 그러니까 이제 쉬어도 돼, 리지. 지금의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똑똑히 봤어. 마력레벨도 벌써 400을 넘겼고. 장하다, 장해.”

“네. 저 말이에요. 정말······ 정말 열심히 했어요. 당시엔 왜 그리 필사적이었는지 저도 잘 몰랐지만, 분명 보여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언니께. 지금 제 모습을요.”

“그래. 훌륭했어, 리지. 대단해져서 깜짝 놀랐지 뭐야.”

“하, 하지만 아쉬워요······ 이대로 눈을 감기가. 드디어 언니를 만나게 됐는데.”

“괜찮아. 아쉬울 게 어딨어? 우린 지금 살아있어. 보고 싶을 땐 만나러 오면 그만이잖아? 이곳은 그곳과 비교하면 평화롭기 그지없고 시간도 많은데 말이야.”

“제, 제가 뵈러 가도 되나요?!”

“안될 건 또 뭔데. 그래도 오늘 이후에 날 다시 만난다면 차근차근 설명해야 할 거야. 그때의 나에겐 지금의 기억이 없을 거거든.”

“혹시······ 저도 기억이······ 사라질까요?”

“그건 모르겠네.”


혹여나 소중한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는지 리지는 초조한 기색과 함께 두려워했다.


리아는 차분히 그런 리지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기억이 남든 사라지든 그게 뭐가 대수냐. 중요한 건 앞으로지. 토벌대도. 이제 와서 뭘 토벌할 건데. 얌전히 있는 내 남편을 족치고 싶은 거야?”

“아, 아뇨.”

“그렇지? 그러니 너무 토벌대에 얽매이지 마.”

“하, 하지만······”

“――쓰읍! 하지만이고 자시고! 리지, 네가 토벌대에 들어오려 했던 이유가 뭐야?”

“그야······ 언니와 함께 있으려고······”

“그래! 아, 일단 그리 말해줘서 고마워. ――어쨌든 그런 거야, 리지. 난 기억이 없어질 테지만, 네가 만나러 온다면 난 분명 널 반갑게 맞이할 거야. 이래저래 나잖아? 한 번 믿어봐.”


당당한 태도와 달리 확신은 없는지라 리아는 아마도―― 라며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그런 줄은 모른 채 리지는 당연히 언니의 말을 믿겠노라고 해맑게 답하였다.


양심이 매우 찔린 리아는 얼버무리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그래도 사과는 해야 한다? 이, 일단 나는 화가 났던 상태니까.”

“예, 언니. 그렇게 할게요.”

“그, 그리고 혹시 네가 기억을 잃어 지금의 대화를 잊는다면······ 그래! 너! 인디아. 네가 알려주는 거야.”

“뭐?!”

“부탁드려요, 주교님.”

“리블리지······”


간곡한 리지의 부탁에 인디아의 마음이 흔들린다.


이때다 싶었던 리아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려 곧바로 몰아붙였다.



“어차피 너도 사정은 모르니까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대충 만나보게끔 둘러대기만 하면 돼. 그것조차도 리지가 기억을 잃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잖아. 어때?”

“인디아 주교님······”

“이렇게 귀여운 리지의 부탁을 거절할 셈은 아니겠지?”


자신이 받히고 있는 리지를 고민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인디아. 리아는 정 안되면 그의 은밀한 비밀을 약점으로 협박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내 인디아는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피리아, 네년을 위해서가 아니다.”

“뭔 당연한 소릴 하냐. 그리고 나 이스피리아 아니다? 자인 디바오러야.”

“그거 아직도 밀고 나가는 거냐?”

“응. 내 정체는 비밀이니까. 일단은.”

“그렇게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의미가 없잖아······”


인디아는 지친 듯한 숨을 토해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리아는 웃음을 흘리면서 리지를 내려다봤다.



“자, 걱정거린 없지? 그러니 이제 쉬어.”


꾸역꾸역 버텨보려 한 리지였다만 아무래도 한계가 온 듯하다. 본인도 그걸 느꼈는지 애달픈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언니, 나중에 또 봬요.”

“그래. 푹 자두라고. 다음에 만났을 때 비실거리면 놀지도 못할 거 아냐.”

“예······ 반드시 잘 쉬어서······ 언니랑 함께――”


리지는 마지막까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색색 조용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리아는 리지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한번 쓰다듬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인디아를 쳐다보는데······ 그 시선은 조금 전의 리아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차가운 눈빛. 분위기조차도 살이 에일듯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갑자기 돌변한 리아의 모습에 인디아는 몸을 굳히며 긴장했다.



“뭐······냐.”


묻는 말에도 리아는 대꾸도 없이 인디아를 쳐다봤다. 리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 안으로 끌어들이는 그를.



“아니. 조금 의외여서.”

“의외?”


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상관없는 이야기야. 지금의 너랑은.”


그리 말한 리아는 몸을 돌렸다.



“넌 이제 어쩔 생각이냐.”

“어쩌긴. 아까 하던 걸 마저 해야지.”

“리, 리블리지와 만날 약속까지 해놓고 계속한다고? 그만한 마력의 일격이다. 이 아이가 죽어도 좋다는 거냐?!”

“흥분하지 마. 그러다 리지 깬다.”


냉정한 지적에 인디아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리지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 그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리아는 나긋하게 이야기하였다.



“일의 끝맺음은 해둬야 해.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올 거야. 난 정산만큼은 확실하게 하는 편이거든. 그러니 지금 내가 해두는 게 좋아. 그게 너희들에게도 좋고. 물론 봐주지 않을 거야. 그만큼 내가 너희에게 당한 일들이 제법 많아.”

“······.”

“죽지 않게 지켜. 그게 인간을 위해서라고 한 너희들의 책임이야. 리지가 죽는다면 용서하지 않는다? 알겠지, 인디아?”


그것을 끝으로 왔을 때처럼 사라지듯 리아는 움직였고,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곳은 대성당의 정문이었다.


펼쳐진 보호막의 앞에 선 리아는 정면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잠시 후 마중을 나오는 사람이 있었고, 리아는 그를 향해 오른손을 가슴팍으로 가져가 2개의 정십자를 그렸다.


세인트리안 식의 인사에 마중을 나오던 그는 얼굴을 굳혔지만, 똑같이 마주 보며 정십자 2개를 그려 답했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처음 뵙는다고 해야 할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바오로 클레멘스 교황 예하?”

“그대는······ 인류의 수호자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인가, 인류의 배신자―― 악몽이라 불리던 그대인가?”

“으응? 처음 묻는다는 게 그거야? 뭐어······ 말해주자면, 둘 다 맞으면서도 아니라고 해야 할 거 같은데? 의식 자체는 대주교이자, 단장이었던 자인 디바오러 쪽 성향이 강하지만.”

“그렇······군.”

“응. 그러는 걸 보면 예하도 어느 정도는 기억을 하나 보네?”

“그대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예감은 있었다.”

“그러다 나를 보고 쬐끔 더 선명해졌다?”

“그렇다.”

“다행이네. 괜한 설명 같은 건 필요 없어서.”


리아는 지금의 외형과는 어울리지 않을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참고로 난 자인 디바오러야. 이스피리아란 꼬맹이가 아니라고.”

“후후. 그러한가.”

“응. 다들 착각하길래 정말 곤란하더라.”


서로를 바라보며 리아와 교황은 즐거이 웃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고 리아는 물었다.



“어떻게 할래?”


짧은 질문이었지만 교황은 알아듣고 답하였다.



“변함없네. 그대의 일격을 막아내도록 하지.”

“그걸로 괜찮아?”

“맞서 싸우는 게 더 곤란하다. 그대는 최강이란 칭호를 짊어지고 있으니. 이 대륙에서 그대를 이길 존재는 없지 않은가.”

“과연 이 대륙 최고의 겁쟁이들만 모인 집단의 수장다운 선택이네. 이런 땅꼬마를 상대로. 하긴 예하는 나한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으려나?”


같은 식으로 똑같이 응한 말. 리아는 슬쩍 자신의―― 백발도 아니고 한참이나 마력을 더 머금어 은발이 되어 버린 머리카락을 넘겨 보였다.


이에 대한 답변은 교황이 아닌, 그의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진한 살기로서.


하지만 선선한 바람을 맞이하는 듯했던 리아는 그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쟤들은 모르는가 봐?”

“아니. 주교들은 알고 있다.”

“그래? 그건 원래 남에게 말하지 않는 주의 아니었어? 약점이니까.”

“약점이니까 이야기해둔 거라네. 그래야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대응할 게 아닌가?”

“으음······ 확실히 여긴 뭔가가 다른 듯하네. 의외라고 해야 하려나? 예하도 그렇지만 특히 인디아 말이야. 걔 애들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동 혐오증이었잖아. 근데 아까 보니까 리지를 엄청나게 아끼던데? 아무리 봐도 내숭 떠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긴 하다만······ 그대로서는 아베라가 가장 의외인 게 아닌가?”


리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이내 의연한 태도를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후우······ 잘 나가다가 뭐 하는 거람. 예하, 아베라의 언급은 좀 참아줄래? 아까도 말했지, 둘 다 맞으면서도 아니라고. 물론 배신자는 정확한 표현이 아닌 걸 예하는 알겠지만······ 그건 넘어가고. 왜 그런 말을 했을 거 같아?”

“······그랬던 거로군······”

“오호? 예하는 내 생각보다 꽤 많이 떠올렸나 보네.”

“많은 건지는 모르겠네. 애초에 얼마큼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 다만······ 그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겠군.”

“응, 맞아. 촌스러운 시골 소녀부터 악몽까지, 이 모든 집합체가 현재의 나야. 나는 아베라와 큰 원한 따윈 없었지만······ 다른 때의 나는 아니잖아? 그러니 괜히 이야기 좀 꺼내지 마. 당장 죽이고 싶은 걸 말리기도 힘들어.”


후우, 후우. 리아는 몇 차례나 심호흡하면서 자신을 진정시켰다. 효과는 있어서 제멋대로 몸이 튀어 나가진 않을 것 같았다.


그걸 확인한 리아는 힐끔 곁눈질로 교황의 뒤편을 쳐다봤다.


단순히 궁금했을 뿐이었다. 한 번 살펴보고 관뒀을 것이었다.


하지만 보게 되고 말았다.


부릅뜬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아베라를. 그녀는 다 읽을 수도 없는 무수히 많은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아오. 이러면 신경을 안 쓸 수도 없잖냐.’


짜증으로 머리를 벅벅 긁은 리아는 [염화]를 사용했다.



『야! 들리냐, 아베라?』


누가 말을 걸었는지는 알 것이다. 그거면 됐다.


리아는 그녀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이어서 말했다.



『보아하니 다른 때의 일을 떠올린 모양인데 미리 말해둘게. ――너 자살하려고 하지 마라? 개짓거리는 용납 안 한다.』

『저, 저는――』


충격으로 더듬거리는 말. 리아는 당장 끊어냈다.



『아아. 시끄러워. 네 사정 따위 내가 알 바야? 그리고 네가 한 짓거리가 얼마나 휘황찬란한데 겨우 뒤지는 걸로 용서가 되겠냐.』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하고 아베라는 죄책감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리아야 그리 이상하다고는 여기지 않았지만, 다른 때의 자신은 모두 아베라의 이런 반응을 믿지 못하였다.


‘역시······ 이곳은 뭔가가 달라.’


이 때문에 조금만 돕기로 했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이대로 지나가선 안 될 것만 같았다.



『살아.』

『예······?』

『살라고. 끈덕지게 살아남아서 네가 느끼는 짐을 갚아 나가는 거야. 적어도 네가 노리개로 죽인 사람의 수만큼 다른 이들을 살려. 그걸 완수할 때까지는 악착같이 살아. 그게 대주교로서 너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피해자로서 너에게 하는 명령이야.』


아베라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차분해진 눈빛으로 조용히 무릎을 꿇어 정십자를 그려 예를 취했다.



『디바오러의 명을 받듭니다.』

『그래. 잘 선택했어――가 아니라! 애초에 아까 내가 제대로 정산하라고 했을 때 각오를 다졌었잖아? 두 번이나 같은 짓 하게 하지 말란 말이야!』

『번거롭게 하여 송구합니다.』

『일일이 사과하진 말고.』

『죄송합니다.』


‘하아······ 얜 왜 매사 진지한 캐릭터로 바뀐 거냐, 대체.’


이대로 가면 끝이 안 난다는 걸 느낀 리아는 곧장 그녀와의 대화를 그만두기로 했다.


시선을 옮기니 교황은 바로 상황을 파악했는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소름 돋게 기분이 나빠진다.


팍 인상을 쓴 리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됐네요. 그보다 이제 내가 왜 이러는지는 예하도 알겠지? 여기서 끝내줄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니 담담히 받아들이도록 해.”

“그러도록 하지.”

“좀 쉽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번엔 조금 달라. 세스의 일격이 아니야. 그건 아까의 나고, 지금은 나의 방식대로 할 거야.”

“그건 무섭군. 하지만 결단코 쉽게 보지 않았네. 내 어찌 그댈 쉽게 볼 수 있겠는가. ――무려 용왕을 죽인 대영웅이거늘.”

“하······ 그 말은 NG였어, 예하.”


‘내심 조금은 살살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덕분에 마음이 바뀌어 버렸잖아.’


한순간에 감정을 완전히 지운 리아는 눈을 감았다.


‘어이, 지금의 나. 이럴 예정은 없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똑똑히 봐두라고. 확실하게 한다는 건 이런 거야.’


그렇게 속으로 알린 리아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입을 열었다.



《――고한다. 난 방관하는 자이며, 관망하는 자. 벗어난 자이며, 속하지 않는 자이로니.》


리아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지만, 넓게만 퍼져나갔다. 완전히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그렇게 결국 세인트리안 전역으로 퍼진 목소리는 사람들의 귀가 아닌, 존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혼이 인식을 하게 되었고―― 동시다발적으로 신음과 무언가 내려찍는 듯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바로 앞에 있었던 사람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으니, 그들은 경악에 찬 소리를 내었다.



“‘신언’이라고?!”

“바보 같은! 어째서 변절자 따위가.”


부정하려고 하지만 이건 엄연한 현실. 무엇보다 이것이 꿈도, 가짜도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건 그들이다.


――듣자마자 의지와는 상관없이 곧장 무릎을 꿇은 자신들이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로지 리아와 성녀만이 할 수 있는 신기였다. 특히나 특출났던 리아는 이 때문에 디아오러의 계승자로서 이름을 올릴 수가 있었다.


‘물론 짝퉁이지만.’


리아는 일어서려고 낑낑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이 신언은 만들어낸 가짜다. 괜히 특출났던 게 아니다. 언제든 신언으로 나불나불 떠들어댈 수 있었으니까 특출나 보였던 거다.


진짜는―― 정말로 신의 말씀을 전하는 건 성녀밖에 없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진짜인 성녀조차도 의심하질 않는다. 아니, 그녀는 신력을 느낄 수 있기에 더더욱 속이기가 쉬웠다.


그나마 눈칫밥으로 어렴풋하게 안건 교황뿐. 물론 알았다 한들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이렇게 보다시피 효력 자체는 완전히 똑같으니까.’


가짜라지만 이토록 똑같다면 구별하기란 쉽지 않은 법. 가짜라며 목소리를 내기도 힘들다.


더군다나 그때는 혼돈한 세상이었다. 파멸이란 불명예스러운 칭호가 붙게 된 용왕―― 날뛰던 찬크에르를 막아야 한다는 이해관계가 엇물렸기에 그런 건 따지고들 여력조차도 없었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겼었던 리아는 찬크에르, 델리안과 함께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서 있는 교황을 쳐다봤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곧바로 무릎을 꿇을 듯 힘겨운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에게는 청천벽력이었을 거다. 칭찬을 했을 뿐인데 돌아온 건 정색이었으니까.


물론 그의 잘못 따윈 없다. 누구에게도 말 한 적도 없는 속 사정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다. 그 일은 아직도 자신에게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 사무치게 아픈 기억이다.


――스스로 신검을 박아넣어 그와 생을 함께 했을 정도로.


그러한데 교황은 말한 것이다.


대영웅이라고.


당연히 나쁜 뜻이 섞이긴커녕 경외만 가득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는가. 친구의 부모를 죽이고 얻게 된 명예인데.


‘난 그런 정신 나간 여자가 아니라고.’


화풀이라는 건 잘 안다. 후회가 막심한 이 기분을 엄한 사람에게 푸는 것이라는 걸. 다만 변명거리는 있다.


리지를 탓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돌려주는 것뿐이다. 엄한 이유로 엄한 사람에게 불똥이 튀었던 자신처럼 말이다.


‘미안하지만 좀 어울려줘. ――내 분풀이에. 니들도 많이 했잖아.’


입술을 깨문 리아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겸허할지어다, 미숙한 자여. 그 오만함에 반성하라. 그 어리석음에 사죄하라. 그 불경함에 속죄하라. ――잊지 않은 자들이여, 기억한 자들이여 보이라, 그 짐을 내게 보이라. 증명하라, 그 업을 내게 증명하라. 비관하지 말지어다. 성의 징표는 내게 있노니 면책이 주어지리라. ――성숙한 자여 이룩하라, 달성하라. 추함과 고움 속에서만 닿을지니 버둥대라, 추앙되라. 나 자인 디바오러가 그대들을 가엾이 여겨 이를 목도 할지어다.》


연출은 이만하면 됐을 거다.


리아는 왼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었다.



“그럼, 예하. 잘 지켜내도록 해봐. 예하가 그리도 죽이고 싶어 했던 인간들을. 단 한 사람도 죽게 하지 말라고?”


싱긋 웃은 리아는 내리치듯 왼손을 내렸다.



“[운석 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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