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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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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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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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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141

DUMMY

‘이게 드래곤 슬레이어―― 인간의 최고봉, 영웅이라 불리는 자인가······’


시련, 마력레벨 300을 넘기는 것과는 다른, 무예를 익힘에 있어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그 벽을 확실하게 넘어섰다.


솔직히 그녀에 대한 여러 평은 과한 감이 없잖아 있다고 여겼었다.


그 소문들이――


이스피리아는 엘리멘탈 마스터라 모든 속성의 마법을 다루고 대마법사 클래스인 5급의 마법도 무영창으로 쓰며, 무예는 전 A랭크의 모험가였던 그리모르를 혼쭐낼 정도의 실력, 거기에 총명하기까지 하여 미래 예지에 가까운 앞날을 내다본다.


――이러한 것들뿐이니까.


물론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마법의 경우 전문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4대 속성에 적성이 있는 사람은 그리 드물지 않다. 마법사 100명 중 1명꼴은 있을 거다.


그러니 이스피리아가 4대 속성을 모두 다루어도 전혀 이상하진 않다.


다만, 엘리멘탈 마스터라 불리는 건 다르다.


엘리멘탈 마스터는 4대 속성 모두 4급 이상에 이르는 마법사들에게만 붙는 칭호다.


얼핏 들으면 적성만 있으면 손쉬워 보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는 건 칭호를 받은 사람의 수가 증명한다.


엘리멘탈 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이는 베르다드의 학원장인 리카드 디안 클로디아노―― 오직 단 1명뿐이니.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엘리멘탈 마스터의 칭호를 따기 위해서는 남들의 4배에 달하는 노력―― 모든 속성의 마법을 차례차례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파생 속성까지 따지면 정말 끝도 없다.


그래서 보통은 모든 적성이 있다고 해도 필요한 몇몇 속성만을 위주로 배운다. 그게 효율적이니까. 그 외에는 처음 써본 마법이 자신의 적성인 줄 알고 착각하여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데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엘리멘탈 마스터인 것도 모자라 무예에 두뇌, 어디 하나 모난 데가 없다고 하는 소문이 쉬이 믿어지겠는가.


하지만 실제 그녀를 목전에서 겪어보니 소문의 진실은 제쳐두고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를 알 것 같다.


‘오히려 소문보다도 더 대단할 듯싶지만.’


어지간해서는 소문 쪽이 더 부풀려지기 마련이건만 놀라울 지경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제대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으니. 그리고 그녀의 진가는 바로 그런 부분에 있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심장이 크게 뛰고 머리에서는 방금 막 대련이 무한히 반복된다.


타고난 재능이 아닌, 가지지 못한 자의 추악한 발버둥―― 오로지 한결같은 순수함만으로 일구어낸 그 눈부심이.


‘헤라드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수업 때문에 오지 못한 친구를 애석하게 여기며 레스는 검을 되돌렸다.


비 오듯 흘러내린 땀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도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중히 가슴에 손을 얹고는 예를 표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게만 보이는 소녀지만 그딴 건 상관없다. 지위, 체면 모두 제쳐두고 전사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음 깊이 경의를 담았다.


검정 일색인 훈련복과 그와 대비되는 은빛 머리칼이 밤하늘의 달처럼 빛나 보이는 그녀에게.






“――그랬던 것이 어째서 그렇게 된 거야?”


자신의 기숙사로 찾아온 친구의―― 황당함을 넘어, 대놓고 어이없다는 기색을 풍기는 헤라드.


그 물음이 향한 레스는······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쪽이 알고 싶을 지경이다.


――그때의 자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한숨을 내쉬니 다리를 꼬고 차를 마시던 헤라드에게서 곤란하다는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니, 실제로도 곤란한 상황이다. 아주 많이.


길지 않은 자신의 16년의 인생 중에서도 단연 최고다. 이처럼 초여름의 맑은 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말이다.



“일이 벌어진 건 어쩔 수 없다만, 제대로 오해는 푼 거야?”

“아아. 말은 해뒀는데······”

“여느 때처럼?”

“어······ 사람들이 우르르 있었어.”


헤라드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공부 모임이랄까······ 그거 아마 최상급 반의 강의 수준이지?”

“아니. 그리모르 교수가 학생으로 포함된 시점에서 우리 제국이었다면 한 문파의 비전 수업이나 다름없어. 아무리 거금을 들인다 한들 단순한 배기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면 다행일 거야.”

“그 정도라고?”


묻는 말에 작금의 사태를 만들어 낸 그녀와의 대련이 다시금 떠오른다.


들끓는 감정에 레스는 눈을 감았다.



“스승님께도 소개해 드리고 싶을 정도야. 분명 잔뜩 흥분하셔서 검부터 들이대실걸?”

“흠. 그렇군. 하지만 지금만으로도 난처한 건 아직 기억하지? 가베인 경이라면 진짜로 그러실 거 같으니까 좀 참아줘.”

“그, 그렇지.”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는 레스의 모습을 보며 헤라드는 쿡쿡 웃었다. 그러다 잠시 뒤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들었다.



“과연.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는 사람은 원래부터도 많았으니. 그만한 공부 모임이라면 당연히 구경하는 사람도 많았겠지. 앞으로는 더더욱 모여들 거고. 그건 상관없지만······ 이번만큼은 너한테 형편이 안 좋아. 소베르비아 공주님의 귀에도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겠어.”

“윽.”


무심코 나온 이쪽의 반응에 헤라드의 고개가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미처 막지 못해 새어 나오는 소리도 그렇고, 어깨도 들썩거리는 것이 보나 마나 뻔하다.



“우, 웃지만 말고. 헤라드! 무슨 방편이 없어?!”

“하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긴 하지. 그녀는 공주님이 대대적으로 자기들 것이라고 선전해놨으니.”


그렇다. 공국은 왕실을 상징하는 두 영수 중 하나인 에인샤론드를 몸소 이끌고 찾아와 화려하게 엄포를 놓은 것이다.


――건들지 말라고.


그러한데 일을 벌이고야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어, 어떡하지?”

“확실히 좋진 않아. 향후 그녀의 처우에 관해선 벨루디스 측과 무언가 합의를 봤다는 이야기도 있어. 그런데 갑자기 끼어든 거야. 분명 귀에 들어간다면 간단히 넘기진 않겠지.”


계속 신경 쓰고 있던 걸 말하는 헤라드다.


레스는 신음을 흘렸다.


세인트리안을 뺀 세 나라 간의 전력의 우위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다가 공국의 경우는 타국으로의 수입이 적다. 내부만으로도 효율 높게 경제를 움직이니 무역으로 인한 외교적 압박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건 공국 측의 무기.


광활한 토지를 전부 밭으로 만든 공국에서는 매해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양의 식량을 수출하고 있다.


그것이 끊어진다면······ 제국은 상당 기간 식량난에 허덕일 것이다.


제국도 수뇌부들의 지시로 수년 전부터 대비하고는 있었지만, 식량을 늘린다는 게 좀처럼 잘되지 않았다.


공국 측의 농민들을 끌어들여 노하우를 배워보려고도 했으나······ 별로 좋은 대답은 듣질 못했다. 전원이 자국인 공국에서의 삶에 만족하여 제국으로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기술의 전수만큼은 마음대로 함께 일하며 배워가라고는 했지만, 그 또한 여의치는 않았다.


제국의 토지에 적응할 품종의 개량이라던지 거의 처음부터 접근해야만 했는데, 그러한 경험이 부족한 탓에 아직 제대로 된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 4~5년 후면 유의미한 성과가 나올 테지만 그전까지는 공국과의 마찰은 상당히 껄끄럽다. 더군다나 지금은 벨루디스에 집중하는 형국이다. 이 시기밖에 할 수 없는 일인데 다른 곳에 힘을 분산하는 건 형편이 나쁘다.



“시간이 없으니 하나만 물어볼게.”

“응? 뭘?”

“그때 그녀에게 한 얘긴 본심이었어?”


텁텁한 목을 축이려 했던 레스는 순간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다행히 친구가 젖는 사태만은 어떻게든 피했지만, 감정만큼은 다 추스르지 못했다.


절친의 귀에 들어간 게 아닌가. 부모님의 귀에 들어간 것보다도 훨씬 부끄럽다.


입가에 살짝 흘러내린 물을 엄지로 닦은 레스는 떨리는 손을 들어 헤라드를 가리켰다.



“너, 너······ 벌써 들었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제 와서. 너도 아까 사람이 많았다고 했었잖아.”

“아, 아니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까지 소문이 났다고?”

“당연한 소릴 하고 있네? 그녀는 이 학원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야. 소문이야 퍼지는 건 순식간이지. 나도 돌아오면서 들었던 거야.”

“그, 그럼 공주의 귀에도······”

“이미 들어갔겠지.”


시간이 없다고 했던 건 이런 의미였나.


레스는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당사자인 그녀에게는 오해를 풀어뒀다. 함께 다니는 공주에게도 설명할 것이란 생각도 든다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선 사람을 보내서 만날 약속을――”

“――잠깐, 레스. 대책은 됐어. 그보다 아까 그거나 말해줘.”

“그거라니?”

“그때의 그 성대한 ‘고백’은 진심이었냐고.”

“고, 고, 고······ 고백이라니?!”

“누가 들어도 고백으로 생각할 거 같은데. 나도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그런 류의 소설에서나 볼 법한――”

“――그만! 아, 알겠으니까.”

“그래서?”


레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쳐다봤다.



“······진심이었어.”


대답을 들은 헤라드는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푸하핫! 크크. 그래. 정말 본심이었다는 거지. 크흐흐. 단련밖에 관심이 없던 네가. 너한테 열심히 추파 날리던 영애들이 이 소릴 듣는다면 어떨지 참. 캬아~ 사람 일은 모른다고 하더니 정말이네.”

“너라면 오해라는 걸 알 거 아니냐?! 돼, 됐고! 어떻게 해야 할지나 알려줘!”

“큭큭. 네가 여느 청년들처럼 볼을 붉힐 날이 오게 될 줄이야.”


항의의 목소리에도 헤라드는 점차 즐거워지는지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사용인을 물려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릴 순 없었다.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똑같이 했을 자신의 모습이 쉽게 상상됐기 때문에.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자신이 지금은 조금 미웠다.


그러니 얌전히 당하기로 했다. 이번만큼은.


레스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언젠가 절친인 그의 마음을 가져갈 이가 나타난다면 지금의 배로 갚자고.


이러한 마음은 모른 채,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헤라드는 한동안 만족할 만큼 웃어댔다. 그리고는 눈가를 살짝 훔쳐냈다.



“후우. 힘들었다.”

“······.”

“미안미안. 사죄라 하긴 그렇지만 하나 알려주자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 공주님 그리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거든.”


왜 그런지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똑똑.


사용인이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 공주 전하께서 방문을 요청해오셨습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거절?


말했듯 공국과의 마찰은 피해야 하므로 불가능하다.


도망?


현명하지 않다. 갈 곳도 따로 없거니와 어차피 학원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단순한 시간벌기에 불과하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다.


결과, 헤라드의 조언을 믿고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 기다림은 길게만 느껴졌다. 1분이 10분 이상은 되는 듯한 착각이 든다. 다만 이토록 초조하게 만드는 원인이 공국과의 마찰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뭔가 창피하다는 기분이 앞선다.


왜 그런지는······ 당연히 잘 알고 있다.



“긴장 안 해도 돼.”

“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사용인이 신호를 보내온다. 이쪽에 알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공주 쪽도 상당히 서두른 모양이다.


지시를 내리고, 곧장 이쪽을 향해 다각, 다각 구둣발 소리가 다가온다.



“서훈식 이후군요. 도련님들, 오랜만에 뵈어요.”


방으로 들어온 소베르비아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친근감 있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부채로 입가를 가린 그녀가 실제로는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


살짝 읽어보려 했지만 전혀 읽을 수가 없다. 찔린 탓인지 언뜻 보기엔 기분이 상한 걸로도 보인다.


덕분에 긴장감은 부풀어 올랐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대신해 자리에서 일어난 헤라드가 정중히 예를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소베르비아 님. 누추한 곳까지 몸소 오셔서 황송합니다.”

“환영 감사드려요. 실례지만 앉아도 될는지?”


이건 방의 주인인 자신이 나설 차례.


레스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공주에게 자리를 권했다.


무엇하나 지적할 게 없이 깔끔한 자세로 집사가 꺼내 준 의자에 앉은 소베르비아는 잠시 따라준 차를 마시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방안.


숨이 막힌다. 왠지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고요함을 연상케 한다.


탁.


일부러 소리를 내며 잔을 놓은 소베르비아가 지긋이 쳐다봤다.



“용건은 아시리라 봅니다.”

“예······.”

“그럼 돌아가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요. ――레스 린 프라바이드 님, 저희 측에선 구태여 제국과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게 배려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장난이 좀 지나치시지 않았는지요?”


소베르비아의 말은 정당한 주장이다. 공국은 제국이 개입한 곳에는 정말로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립할 이유가 없으니 서로 관여하지 않는, 일종의 상호 불가침계약을 맺은 상태였었다.


오늘 자신이 사고를 치기 전까진.


이젠 아니게 되었다.


물론 겨우 이런 일 때문에 호들갑이라는 감정이 없잖아 있긴 했다. 조금 억울하달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소한 헤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은 귀족. 그중에서도 제국의 3대 가문이라는 영향력을 가진 집안의 자제이다.


오해로 끝날 만한 일이 점차 부풀려질 수도 있는 거다.


역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오해로 인해 전쟁이 벌어진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히려 정치 싸움에서는 이러한 실수를 물고 뜯어 적대 세력을 깎아내리는 게 워낙 비일비재해서 따로 찾아볼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러한 사실을 주지하고 있었기에 언제나 조심했었건만······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다. 3대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 책임을 확실하게 져야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스는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소베르비아님. 이번 일은 제 독단에 의한 것. 결코 제국의 의사가 아닙니다.”

“흐음······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못 믿으시는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뇨. 믿습니다.”

“······네?”

“믿는다고 했어요.”

“시, 실례했습니다.”


잘못 듣진 않았다. 분명 제대로 들은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쉽게 믿어주는 것에 도리어 당혹스럽다.



“참고로 묻습니다만, 레스 님께선 리아 양에게 손을 댈 의향이 있었던 건지요?”

“소, 손을 대?! 아, 아,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었습니다.”


레스는 숙였던 허리를 곱게 펴 똑바로 소베르비아를 쳐다봤다.



“전 무예를 익히는 한 사람의 검사로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한 겁니다. 그로 인해 불미스럽게 된 점은 사죄드립니다만, 부디 억측된 시선으로 보시지 않으면 합니다. 당신의 친우를 위해서라도.”

“호오······ 과연 프라바이드의 차기 가주님답네요. 뭐, 일단 알겠습니다. 그런 의도로 물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의도?”

“예. 전 단순히 그녀를 제국으로 꾀기 위함이었는지를 여쭌 것이었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소베르비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신 이게 무슨 소리인지를 곱씹어보았다.


그러다 수차례의 반복 끝에······


깊게만 꼬아졌던 고개가 우뚝 멈춰 섰다.



“아······?”


멍청하니 나온 말과 함께 레스는 빠르게 돌아보았다.


그렇게 보게 된 자신의 절친은······ 이쪽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등을 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어깨는 마구 들썩이고 있었는데, 소베르비아의 앞이라 참아서 그런지 아까보다도 훨씬 격렬하다. 저럴 거라면 차라리 대놓고 웃는 게 좋지 않을까도 싶다.


‘알고 있었다면 눈치 좀 주지!’


하지만 가장 나쁜 건 소베르비아다. 부채로 가리고 있긴 하지만 안에 깃든 눈이 웃고 있었다.


명백히 놀리려 한 것일 테지. 무겁게 깐 서두는 긴장감을 끌어올려 낚기 위한 포석이었으리라. 소문대로 책략에 능하다.


그렇지만 불평은 할 수 없다. 애초에 잘못은 이쪽에 있으니.


‘어쩌면 공주 나름의 분풀이였을지도.’


한숨을 쉰 레스는 다시금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그러나 역시 놀림을 당한 앙금이 살짝 남아 조금은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왔다.



“이걸로 후련하십니까?”

“썩 나쁘진 않네요. 도련님들에게 이럴 기회는 그다지 없으니까요.”

“그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역시 놀리는 것이었나.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 능글맞다. 평소의 사교성이 좋은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아마 이게 본래의 그녀라는 거겠지.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소베르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으니 말이죠. 당시의 우리나라―― 공국은요.”

“뭣······”

“눈치를 보아 말씀드렸을 뿐이어요. 가면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귀족이든 간에 하는 소양 같은 것이지요. 놀랄 만한 일은 아니어요.”

“그렇군요.”


침착하게 동의했으나――


그럴 리가 있나.


귀족도 인간이다. 특수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는 예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신분과는 상관없이 인간은 모두 공평하다. 귀족으로서의 소양이라는 것도 후천적인 연습과 혹독한 단련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소베르비아의 저것은 다르다.


제아무리 눈치가 좋다지만 이토록 완벽히 핀포인트로 생각을 짚어낸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만약 그랬다면 귀족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암약은 그 뿌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치 깊었을 것이다. 생각을 읽히지 않아야 하니까. 들키지 않기 위해 지금보다도 더더욱 복잡하게 꼬여있었을 거다.


반대로 서로 모든 걸 다 읽으니 암약은 줄고, 대놓고 정면에서 표출하게 될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그건 한없이 적을 것이다.


‘어찌 됐든 공주의 저건 달라. 후천적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절대적인 고랑이 느껴져.’


과연 이렇기에 공국의 빛이라 불릴 수 있게 된 것인가.


내심 감탄하며 레스는 차분히 자리에 앉았다.



“실례지만 절 놀리기 위해 오신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질문을 받자 소베르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도를 보러 온 것은 맞습니다만······ 훌륭하시네요. 재차 제국의 밝은 미래가 보이는 듯합니다. 덕분에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겠어요.”

“소베르비아 님께서 그리 칭찬하시니 무척이나 기분이 들뜨는군요. 감사드립니다.”

“후후. 정말 올곧게도 솔직하신 분이네요.”


귀족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며 소베르비아는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 모습은 마치 이쪽을 깔보는 듯한 틀어진 미소였다.


분명 본래의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착각했을 거다.


하지만 그건 차치하고, 뭘 어떻게 하면 진실한 미소가 저리도 일그러질 수 있는지 궁금하다. 저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성장 과정이라든가, 그녀 주변 환경이 조금은 안타깝고 가엽게 여겨진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이 안 되지만 공국은 일찍이 매우 힘들었었다는데······ 실제는 그보다 훨씬 심각했었나 보군.’


그런 상황을 뒤집은 거다.


눈여겨봤던 대로 역시 소베르비아 또한 경의를 갖고 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피의 축전이라는, 조금 불명예스러운 이명이 있긴 하나 그조차도 그녀의 경이적인 업적을 기리기 위함이 아닐까.



“좀 불쾌해지네요.”

“예······?”

“아뇨.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살짝 오한이 들었지만 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베르비아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대국을 짊어진 공주의 시선으로 냉철하게 본다.


여기서부터가 진짜라는 건가.


레스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시다시피 소문이란 걷잡을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것이어요. 각자 받아들이는 뜻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그러하기에 저희는 언제나 몸가짐에 주의하고 헛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죠.”


이제 막 귀족 사회에 대해 배우는 어린 자제들에게나 설명할 기본상식이다. 굳이 자신에게 이야기할 수준은 아니다.


그렇지만 잘못은 이쪽에 있으니 딱히 언급은 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책임은 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고맙겠네요. 이제 와 꿀벌들이 달라붙는 건 영 개운치 않거든요.”

“예. 그러한 자가 나오지 않도록 말을 해두겠습니다. 만약의 때에도 확실하게 문제로 이어지지 않게 조처하겠습니다.”

“그쪽은 잘 부탁드리어요. ――자, 그럼 제가 부탁하고 싶은 걸 말씀드리죠.”


앞에 나온 것들은 당연히 문제를 저지른 이쪽이 처리할 사후 책임. 이제부터 소베르비아가 요구할 건 말하자면 손해 배상. 이쪽이야말로 본론이었다.


너무 과한 요구가 아니길 바라며 레스는 소베르비아의 말에 집중했다.



“지금 이 나라엔 세인트리안의 사자가 파견 나와 있어요. 레스 님께 요구하는 건 조만간 찾아올 그들과의 자리에 동석해주시는 것이죠.”

“그 정도라면 알겠습니―― 응?”


어지간한 요구는 감내할 요량으로 곧장 대답했지만······ 뭔가 내용이 이상하다.


이윽고 머릿속으로 소베르비아가 한 말들이 해석되기 시작하고, 레스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세인트리안의 사자가 와 있단 말씀이십니까? 아, 아니, 근데 왜 소베르비아 님과 면회를······? 그거라면 공국 쪽으로 가면 될 터인데. 그리고 저를 왜 그 자리에?”

“많이 놀라신 듯하군요. 이번만큼은 귀찮―― 어쩔 수 없으니 말씀해 드리자면, 일단 사자들이 찾아오는 건 제가 아닙니다.”

“그, 그럼 누굴?”

“리아 양이죠.”


이야기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세인트리안이 사자를 보낸다는 것 자체가 의외인 판국에 그녀를 만나러 올 이유가 떠오를 리 만무하다.


잠시 생각 끝에 하나 짚이는 걸 말해보았다.



“세례―― 섭외하러?”

“나쁘지 않은 추측이어요. 여러분들도 들으셨겠지만 세인트리안은 현재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말이죠. 뛰어난 활약을 펼친 리아 양은 일손으로서 손색이 없겠지요. 더군다나 리아 양은 [치유]를 쓸 수 있건만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몸. 때마침 좋은 명분이었겠죠. ――하지만 아니에요. 그들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죠.”

“――혹시 이번 사태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짚이는 게 있었는지 여태 부외자로서 조용히 있던 헤라드가 끼어들었다.



“갑작스레 실례했습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다음을 듣고 싶습니다만?”


뭔가 의미심장한 눈이 된 소베르비아. 그런 그녀에게 재차 사과한 헤라드는 이어 말을 하였다.



“말씀하시는 바로 판단컨대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사도의 재림을 이야기하시는 건지?”

“헤라드, 그건――”

“――아아. 괜찮아. 내가 알리지도 않았을뿐더러 먼저 말씀하셨잖아?”

“네. 저 스스로 언급을 한 겁니다. 그러니 기밀 유출이라던가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레스 님. 게다가 이 정보는 곧 유통기한이 다 돼요. 조만간 이곳에도 알려질 테니 가치 따윈 전무하죠.”

“그, 그런 겁니까?”


슬쩍 헤라드를 보니 그가 눈빛으로 틀리지 않다는 의견을 보낸다.


다만 능숙하게 몰래 했다고 여겼건만 소베르비아는 눈치를 챘는지 덧붙여 이야기하였다.



“세인트리안 인근 도시에서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에요. 이곳도 모험가 길드나 상인 조합, 교회에서는 이미 파악하고 있을 거예요.”

“대외적으로 크게 알리지 않은 건 눈치를 보기 때문이군요.”

“예. 노한 사도께서 신벌을 내리셨다 하니. 세인트리안으로서는 썩 유쾌한 얘깃거리는 아니겠죠. 그러니 눈치를 보며 자중하고 있겠지요.”


그렇게 말한 소베르비아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이해는 간다. 저리도 삐뚤어지게 만든 장본인들이니. 조금 통쾌해지는 거야 어쩔 수 없으리라.


물론 이러한 감정을 내비치진 않는다. 제국은 일단 세인트리안과는 우호적인 위치에 있으니.


――그것이 이가 갈리도록 마음에 안 들지만.



“흐음······ 계속하자면, 사자들이 온 목적도 그것 때문이라는 거죠.”

“그것?”

“쉽게 말하자면 세인트리안은 의심하고 있다는 거야, 레스. 그녀가 이번 사건의 주범―― 재림했다는 사도가 아닌가 하고.”

“뭐?!”


사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마리가 없다고 듣긴 했지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면 일이 그렇게 연결이 되는 것이란 말인가.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헤라드를 쳐다보니―― 그럴 필요도 없이 곧장 소베르비아가 말을 해주었다.



“레스 님도 기억하시겠지만 두 번째 큰 마력의 파동이 있었지 않습니까?”

“아, 예. 살이 떨리던 엄청난 파동이었지요. 진원지는 세인트리안으로 판명 났다고는 들었습니다만. 분명 그때 나타난 사도가 발한 것이었다고······ 설마?”


소베르비아가 긍정의 의미로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그만한 파동이었습니다. 아무리 이스피리아 공이라 하더라도――”


그때 레스의 머리에 번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혹시 체험학습 때의?”

“그렇지요. 그 충격적인 첫 번째 마력의 파동. 사룡을 물리친 리아 양의 이명은 널리 퍼져 그들의 귀에도 들어갔겠죠.”

“그래서 이스피리아 공을.”

“네. 일주일 간격으로 비슷한 일을 겪었던 리아 양이니 의심이 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요.”

“정세가 안정되지 않았음에도 사자를 보낸 건 그 때문입니까. 하지만 체험학습과 세인트리안은 아무 연관이―― 음?!”


레스는 흠칫 몸을 떨었다.



“후후.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리아 양은 사도가 나타나기 바로 전날에 기숙사에 있었죠. 다음날인 오후에는 레오노반 제1 왕자님의 초대에 응해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도 하더군요.”

“······제게 바라는 건 증인의 역할입니까?”

“큰 걸 바라지는 않아요. 레스 님은 그 자리에 계시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말씀드렸듯 뒤늦게 꿀벌이 와 채가는 게 달갑지 않거든요. 저로서는 괜한 트집이 잡히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에요.”


위험한 냄새가 난다.


고고하게 기품을 유지하고 있는 소베르비아에게선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읽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긍이 간다.


세인트리안의 입김은 세다. 진실이 어떻고 간에 밀어붙인다면 제아무리 소베르비아라 할지라도 본인이나 자국민에 관련된 것이라면 모를까, 일단 타국인인 이스피리아에게 영향을 끼치기란 어렵다.


세례를 강요하며 세인트리안으로 연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막기엔 명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이후의 일―― 사도로 추앙해버리면 그대로 끝. 더는 손쓸 방도도 없다.


그야말로 손가락만 빠는 사이 보기 좋게 옆에서 가로채 가는 꼴이다.


벨루디스 측에서 막으면 되지 않나 싶지만, 정세가 불안정한 현 상황에서는 여의찮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세인트리안이 개입할 명분을 줄 수도 있었다.


――사도를 억압하고 있다며.


선동은 그들의 특기다. 만약 그리된다면 당해낼 재간도 없이 왕가의 입지는 단숨에 좁아질 것이다. 벨루디스야말로 현재 교회의 입김이 가장 쎈 나라니까.


그런 위험은 감수할 수 없기에 벨루디스는 이스피리아를 포기할 것이다. 최고 국빈이라고는 하나 나라의 명운과는 저울질할 순 없다.


아니, 어쩌면 되레 환영할 수도 있을 듯싶다. 어찌 됐든 벨루디스는 사도를 발굴해낸 거니까.


이를 대가로 현재 빚어지고 있는 세인트리안의 개입을 중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일찍이 사도를 보호해 최고국빈으로 모신 안목으로 인해 왕가의 권위도 높아질 터.


단 한 사람을 내놓는 것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점을 챙겨 갈 수 있다. 시급했던 사항들이 전부 해결되는 거니 벨루디스의 입장에서는 바라 마지않는 일이지 않을까.


세인트리안로서도 손해는 없다. 진짜 사도는 아니더라도 후에 ‘사도로 착각할 성스러운 성녀’였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 어영부영 국가 재난급의 인재를 얻어가는 것이니.


――그리고 그녀는 이에 대해 항변하지 않을 거다.


검을 맞대보았기에 그녀의 성품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이스피리아,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을 지키는 한 저들의 요구를 수용할 것이라는 걸.



“그건 마음에 들지 않는군.”


귀족이란 모름지기 자국의 이익에 충실해야 하는 법. 그로 따지자면 자신은 분명히 틀렸다. 그런데도 자신이 반한 여자의 얼굴이 흐려지는 건 보기 싫달까, 그녀의 앞길은 그녀 스스로 정했으면 했다.


그런 의미에서 소베르비아와 라프리트―― 그 둘과 학원에 다니고 있는 지금의 그녀는 보기 좋다.


이후 그녀의 행보는 물론 신경이 쓰인다. 안 쓰인다는 건 거짓말일 거다.


허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녀와 동급생으로 있는 이 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어찌하시겠습니까? 레스 린 프라바이드 님.”


‘아아. 이쪽이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말을 걸다니 정말 만만찮은 공주님이시구먼. 능글맞게 굴기나 하고.’


피식 웃은 레스는 귀족답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빚을 진 사람이 갚을 방법을 고른다는 건 도리에 어긋나겠죠. 소베르비아 님의 요구에 응하겠습니다.”

“부탁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긴 좀 그렇지만 괜찮으신지요?”

“음? 전 그저 이스피리아 공과 무예에 대해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눌 뿐입니다만. 문제 될 게 있습니까?”

“후후. 그것도 그렇네요.”


레스와 소베르비아는 서로 마주 보며 조용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전형적인 귀족들의 가식이다.


그러다 잠시 후 레스는 물었다.



“그래서 합격입니까?”

“글쎄요. 낙제는 면했다고만 말씀드리죠.”

“혹 낙제했다면······”


소베르비아는 대답 대신 씨익―― 진하디진한 눈웃음을 지었다.


살짝 몸을 떤 레스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있으니 부채를 접은 소베르비아가 가냘픈 동작으로 손뼉을 쳤다.



“자! 그러면 제 용건은 끝났습니다만 이대로 돌아가기엔 너무 정이 없지 않겠나요? 시간이 되신다면 좀 더 담화를 나누어도 될는지요.”

“네······ 그야 물론 괜찮습니다.”


혹시 몰라 헤라드를 봤더니 그도 괜찮다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면 처음부터 궁금했던 것입니다만―― 어째서 그렇게 된 건가요?”

“······예?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긴요. 레스 님의 성대한 고백 말고 뭐가 있겠나요?”


거기서 과장되게 한숨을 쉰 소베르비아. 그리고 이어 말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대련이 끝나자마자 그렇게 될 수가 있는지요?”

“그게――”

“――옷! 나도 듣고 싶어, 레스. 결국 어물쩍 넘어갔었잖아. 어쩌다가 그런 공개 고백을 할 용기가 든 거야?”

“역시 오래 알고 지내신 만큼 헤라드 님께서도 궁금하셨군요.”

“예. 어렸을 때부터 여자에겐 눈길도 안 주던 애였는데 갑자기 그런 소릴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불길함이 느껴졌다. 인생에 최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감을 믿고 레스는 황급히 변명으로 무마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다시금 드는 충격에 조금 늦어버렸다.


이쪽이 입을 여는 것보다 먼저 소베르비아의 말이 나왔다.



“그렇죠. ‘반했다, 이스피리아 공! 아름답게 빛나는 그대에게 눈을 뺏겼다. 더할 나위 없는 이 마음을 부디 받아주었으면 하네!’라니. 이 어쩜 멋진 고백인가요.”

“소문을 듣고 무척이나 감탄했습니다.”

“저도 그러했답니다. 공주인 저의 결혼은 정치의 연장선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러한 순애에는 동경해버리고 말지요.”

“음음. 충분히 공감합니다. 레스가 몸소 실천하는 그 모습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더라도 반려는 진정으로 사모하는 분과 맺어지고 싶어지는 법이니까요.”

“공주님께서도 그러하십니까?”

“의외인가요?”

“아뇨. 실례했습니다.”

“괜찮아요. 하지만······ 그러네요. 저도 별 관심은 없었지만, 최근 들어선 조금 생각이 달라졌지요. 곤란하게도 제 마음을 꿰차는 분이 영 나타나시질 않지만요. 그나마 비슷한 분이 계시긴 했지만······”

“만?”

“이미 짝이 계시더라고요. 후후.”

“소베르비아 님의 눈에 드신 분이라면 필시 멋진 남성이셨을 터. 실로 유감입니다.”

“정말 그래요. 신분으로 인한 걱정도 전혀 없는 분이었는데. 그러한 분을 또 찾을 수 있을지······ 살짝 조바심도 드네요.”


몹시도 아쉬운지 처량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리는 소베르비아.


오늘 본 그녀 중 가장 뚜렷하니 감정이 드러났다. 으레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유감인 듯하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고위 귀족이나 왕족은 사모하는 상대와 이어지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드무니. 차라리 약혼자로 정해진 상대를 사모하도록 노력하는 편이 편하리라. 실제로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 드문 확률을 뚫고 사모하는 상대와 만났건만······.


레스는 저도 모르게 딱하다는 심정으로 소베르비아를 보았다.


그러던 때였다.


휙――


소베르비아의 시선이 옮겨왔다.


뭐라 설명하지 못할 꺼림칙함을 느낀 레스 도망치려고 했다.


속으로만.


당연히 무례이고 예의가 아니니 차마 실행에 옮길 순 없었다. 어디 갈 데도 없고.



“그러면 레스 님? 부담스러우실까 봐 부끄러움도 참고 먼저 물고를 열어봤습니다만.”


이번엔 이쪽의 차례라는 거겠지. 대놓고 눈치를 준다.


하지만 이 부끄러운 걸 암만 잘못했다지만 제 입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레스는 도움을 바라며 헤라드를 보았다. 아직 정확한 사정을 듣진 못했지만 어울린 시간이 있다. 자신의 절친은 이미 진상을 파악했을 터다.


――반했다고 한 건 이스피리아에게 경의를 표한 말임을, 아름답게 빛나는 그대에게 눈을 뺏겼다고 한 건 그녀의 검술을 말한다는 것을.


더할 나위 없는 마음을 받아달라는 건, 앞으로도 계속 공부 모임에 와도 되냐고 물은 것임을······ 분명 헤라드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듬직한 절친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친구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자신은 할 만큼 했다고. 암만 그래도 이 이상은 무리라고. 얌전히 포기하고 받아들이라며 종용해 온다.


레스는 한 점의 흐림도 없는 깔끔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깊게 반성했다. 앞으로는 평정심을 기르고 말을 할 때는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며.


인생에 다시는 없을 깊은 깨달음과 교훈을 얻은 레스는 그렇게 자신의 흑역사를 제 입으로 말하고 설명한다는―― 참혹하기 그지없는 수치 플레이를 체험한다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용건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소베르비아―― 주인은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깊게 몸을 맡겼다.


피곤한 듯 신음을 흘리는 주인에게 레딧츠는 말을 걸었다.



“만족하셨습니까?”

“기대 이상이야. 간만에 좀 즐거웠네. 레스 녀석은 놀리는 맛이 있단 말이지. 어설프게 리아를 파악하는 것도 그렇고. 그 꼬맹이가 세인트리안에 억지로 끌려간들 그곳에서 얌전히 있을 리가 없는데.”


흡족스럽게 웃는 주인. 하지만 이내 그 웃음은 진한 미소로 바뀌었다.



“뜻하지 않은 것도 얻어냈고 말이야.”


주인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니. 그러한 일은 이스피리아와 라프리트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 한 좀처럼 없다. 딱 이번 고백 사건처럼.


뒤처리에 불과할 뿐인 이 방문은 주인에게 큰 변수가 없을 거라 여겼거늘······ 의외의 복병이 숨어있었나 보다.


레딧츠는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소베르비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뭐, 알려달라고?”

“실례가 아니라면.”

“후음······ 그럼 문제. 둘 중 누구일 거 같아?”


평범하게 생각해보면 이번 소동을 일으킨 프라바이드 가의 적자이지 않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인이 그런 당연한 것을 문제로 낼 것 같진 않다.


잠시 고민하던 레딧츠는 대답했다.



“샤라즈 님이십니까?”

“정답부터 말해주자면 그렇지. 내가 얻은 건?”


무언가의 정보이겠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이 안 된다.


레딧츠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모르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주인은 크게 즐거워했다. 어지간히도 재미있었는지 웃으며 소파까지 탁탁 두드린다.


아마 다시금 떠올린 것이겠지.


좀처럼 보기 힘든 주인의 모습이다. 방해 따윈 할 수 없으니 레딧츠는 얌전히 기다렸다.


그렇게 한동안 소리를 높이던 주인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대충 손으로 흘기고는 입을 열었다.



“크큭······ 이야~ 이 나를 속일 수 있는 녀석이 존재할 거라고는 진짜 상상도 못 했네.”

“주인님의 눈을?!”


놀랍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정확히 꿰뚫어 보는 주인의 눈을 피해 갈 수 있다니.


수많은 경험을 통해 겪은 게 많다 보니 쉽사리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주인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여태 감쪽같이 속았지 뭐야. 고놈 참 물건이더라. 하핫! 그랬던 게 열혈 친구로 인해 발각되다니. 이 무슨 싸구려 촌극이야?”


재차 웃음보가 터진 소베르비아.


곧이어 콜록거리는 주인에게 레딧츠는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에게 컵을 받아 건네주었다.



“아아, 고마워. 리아, 그 계집애 이외에 이렇게 웃게 될 줄은 또 몰랐네. 걘 아예 관심 밖이었는데 실수했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까?”

“대단하고말고. 그도 그럴 게―― 헤라드, 그 녀석 나랑 같은 부류거든.”

“같은 부류라 하심은······”

“그래. 녀석도 나랑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부터 남들과는 좀 달랐다는 거지. 방향성이 틀리지만. 여하튼 그런 게 제국에 있었을 줄이야······ 샤라즈만 아니었으면 냉큼 리아와 함께 데려온 건데 아쉽게 됐어.”


레딧츠는 눈을 가늘게 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내버려 둬. 그거의 주인은 따로 있어. 오히려 현 제국의 상황을 보면 가만히 놔두는 편이 이득이야. 뜻하지 않은 이득을 바리바리 챙겨줄 수도 있거든. ――제국의 몰락이라든가 말이지. 뭐,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게 좋지만.”

“그런 일까지 가능한 겁니까?”

“당연하지. 이 나랑 같은 부류라니까? 제국 내부에 있기까지 한 그 녀석이 못할 리가 없지.”


주인의 판단이 그렇다면 자신이 뭐라 토를 달 가치는 없다. 얌전히 존명의 뜻을 내비쳤다.


그런 레딧츠를 보며 소베르비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하지 마. 딱히 이득을 주지 않아도 주인의 성격상 우리에게 이를 드러내진 않을 거야. 해는 없다는 거지. 그 주인을 건들지만 않는다면.”

“주인은 누굽니까?”

“누구긴 누구야? 레스지. 걔가 그 텅빈 놈의 주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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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설정 및 줄거리 요약. 베르다드 편. 22.07.14 79 0 31쪽
164 설정 및 줄거리 요약. 나트알 편. 22.07.14 63 0 22쪽
163 143 22.07.14 66 0 36쪽
162 142-2 22.07.13 58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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