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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홍기석입니다.

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홍기석
작품등록일 :
2019.05.13 19:38
최근연재일 :
2021.02.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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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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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천리마의 고삐 1

DUMMY

1


DM 리테일.


마치 지독한 금단 증세를 경험하는 듯했다. 업무와 휴식 말고는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경찰 “용인 귀의학 연구 센터 화재, 방화의 흔적은 없어”」

「곤지암 사고··· 연구원 추정 남성 시신 2명 발견, 사망자 15명으로 늘어」


온종일 보도되는 소식들을 보아도, 문자만 흡수하는 스펀지가 된 기분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좋을지, 의욕마저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호억은 우두커니 사장실의 자리만 채우고 있었다.


때로는 정신이 얼떨떨했다. 살면서 이렇게 머릿속이 조용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휴식일까.


“어제도··· 별 일 없으셨지?”

“네. 종일 외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하지만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회의감이 그를 잠식했다. 살아가는 이유가 사라지고 말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야 하는가. 자신이 절실하게 소원하던 일상은 절대 이런 형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나. 오랫동안 그것 하나를 제대로 찾지 못해서, 혼자 떨어지는 경험이 낯설었다. 어머니의 얼굴에 일순 실망하는 내색이 서릴 만했다.


회사와 지금의 자신도 모두 그녀가 원해서 만든 결과물이었다. 다시 태어난 직후부터 줄곧 어머니의 곁만 맴돌았으니까. 독립할 의사는 당연히 없었다. 그녀가 유일무이한 기둥이자 방어벽처럼 보인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발짝이라도 더 나가자고 주문했다. 그것이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을 줄이야. 묵묵히 실천했지만 사실상 자신의 의지로 이룩한 내용이 거의 하나도 없었다. 애초부터 역량이 부족한 작자가 이 회사의 사장으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는 안 되었다. 이미 실망한 그녀에게 재차 한심한 모습을 보이는 셈이었다. 어떻게든 스스로 해내야 옳았다. 당장은 힘들어도 자립하는 방법을 찾아야, 나중에라도 그녀 앞에서 당당했다.


지금의 행색으로 다시 만나 보았자 반기지 않겠다. 한없이 상냥했던 얼굴과 재회하기 위해서, 호억은 일말의 정신력을 쥐어짰다.


“오늘은.”

“오전에 회의가 있습니다. 민감한 시기라, 아마 주력 상품에 변화가 생길 듯합니다.”

“개인 방역··· 호신용품··· 이것들?”

“네. 이삼십 대 여성에서 그친 수요가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업무에 집중하자 머리가 맑아졌다. 차라리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지금이 편안했다. 급변한 민심 때문에 방향을 수정하는 때가 제일 편하다니, 실무자들이 들으면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어차피 한때였다. 점심시간 이후로 특별한 업무가 없으면 또 다시 잡생각들이 마음을 침식할 것이었다. 며칠째 비스름한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다.


“충무로에서 발견된 변사체 탓인가. 하기야 곤지암에 이어서 벌써······.”

“용의자의 윤곽이 잡혔다는데, 수사 결과도 곧 발표될 것 같습니다.”


속보가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관심이 없어도 정황만은 자세히 알게 될 정도였다. 무려 곤지암 사태마저 뒤로 밀리지 않았나. 곤지암 기사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모습을 감추었고, 오귀의 위험성을 언급한 화제만 연이어 인기 검색어에 떠올랐다.


그 흐름을 타고 여론은 귀왕까지 비난했다. 귀의학 연구 센터 화재도 그녀의 책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특수한 능력이 작용하지 않고서야, 절대 일어나기 어려운 사고라는 논리였다.


딱하게도 사실이었다. 연구 센터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자신이지 않은가. 무턱대고 저지른 행동이 그녀에게 악영향을 끼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자신은 존재가 민폐였다. 뜻대로 행하면 반드시 주변에 폐가 되었다. 차라리 침묵하고 있을걸, 그래서 따뜻했던 그녀마저 그렇게 변했을지 몰랐다.


충무로 사건은 다른 사고와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용인과 곤지암은 원인이 뚜렷했다. 계약을 어기고 몰래 행한 실험의 대가였다. 참담한 결과를 낳았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체감하기 어려운 위기였다.


관여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모두가 은근히 방심하기 쉬웠다. 탈옥수들이 암만 참혹한 만행을 저질러도 그러했다. 정부와 언론은 하나같이 쉬쉬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변사체 사건은 아니었다. 지나가는 행인이 별안간 피습된 사례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든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고, 오귀들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밤이면 더욱 안심하기가 힘들었다.


동지도 맞이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분간 밤은 속절없이 길어질 터였다. 용의자에게 최적의 사냥터가 생기는 꼴이었다. 건강한 혈액을 가진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는 여론이 점점 커지다 보니 앞선 두 사건들의 진위가 계속 가려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누구야? 최근에 입국한 녀석들이라도 있어?”

“아니요. 따로 확인했지만, 없었습니다.”


하도 정신이 없었던 나머지 이제야 정체가 궁금했다. 덩달아 비판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 자신도 순간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건물 한 채까지 모조리 재로 만들었으니까.


하마터면 일전에 폐허로 만든 용마 공원도 들통날 뻔하지 않았는가. 오귀의 만행으로 연관하지 않아서 다행일 정도였다. 소수의 사람들이 줄곧 의구심을 가졌지만, 아직은 누구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뭐, 조만간 모이면 물어보지.”

“신생일까요. 그런 시신은 처음 보는데.”


어머니와 있었던 일로 호억이 얼빠진 사이, 석수는 나름 바깥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충무로 사건은 아무래도 기이했다. 연루된 용의자가 하나로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공범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싶었다. 절단된 발의 형태와 결정적 사인이 당최 일치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반항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흡혈했다. 피해자의 발목을 굳이 잘라야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도무지 짐작 가는 용의자가 없었다. 오랫동안 많은 얼굴들을 만났지만, 정황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가 전무했다.


“녀석이 누구든··· 전부 어머니를 해하려는 수작이야. 역시··· 믿어서는 안 됐어.”


호억은 기어이 불만을 드러냈다. 용의자가 동기들 중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이만한 일을 범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오랜 세월 정도를 지키면서 살지 않았는가. 여색을 밝히던 유철이 아니고서야, 욕망을 이기지 못해 사고도 칠 위인들이 아니었다. 그 유철마저 바깥에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기들이 쿠데타 직전까지 그 악행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분명히 일부러 저질렀다. 용의자가 정말로 오귀라면, 방역도 부르지 않았다는 뜻이니. 귀왕이 현재 진행하는 일에 철저히 훼방을 놓겠다는 의미였다.


차라리 진범이 검거되기를 바랐다. 그러면 곧 있을 코로키아 회의에서 떡하니 언급할 것이었다. 아는 얼굴이든 모르는 얼굴이든, 모두의 표결이 끝나는 대로 직접 찾아가서 응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겠다.


“회의는 오래 걸릴까.”

“이미 진행한 사안이라··· 거래처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 정도만 있을 겁니다. 나머지는 실무자들이 따로 의견을 나눌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오늘은 따로 일정이 없으십니다.”


호억은 고민했다. 오랜만에 시간이 비었다. 물론 따끔한 핀잔을 들었지만 흔하지 않은 날이니 잠깐이라도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없는 시간을 마련했던 전보다 빈도도 훨씬 줄지 않았는가. 그동안의 수고를 생각해서 이번에는 반갑게 맞이할지 몰랐다.


“오늘은 괜찮을까?”


결국은 넌지시 물어보았다. 눈치가 보이는 나머지 대상조차 제대로 입에 담지 못했다. 그럼에도 석수는 그 의도를 잘도 알아챘다.


“어머님···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잘도 참았다. 그동안은 찾아가고 싶어도 시간이 없었다. 연달아서 발생하는 사건과 사고들 때문에, 유통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한정 수량으로 들이던 호신용품에 대한 문의가 이어졌고, 나중에는 사용법을 자문하는 단계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상황이 급해도, 정당방위의 범위를 지켜야 법률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라였다. 그저 몸을 지키는 용도라도 사용에 제약이 따랐다. 자칫 사고라도 일어나면 판매처나 유통처 역시 곧바로 도마에 오를 것이었다.


와중에 자문들의 조언은 똑같았다. 상대가 오귀라면, 당장은 법률에 구애받지 않으니 상처를 내거나 죽여도 상관없다. 지나치게 맞서거나 먼저 공격해도, 인간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안쪽으로 굽을 팔이니까.


업무는 수월해졌지만, 솔직히 묻고 싶었다. 반대의 경우에는 어찌할 작정인가. 그들의 논리라면, 오귀가 사람을 죽여도 처벌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렇게나 자신하는 헌법은 오직 사람을 대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가.


아무튼 그 조언에 따라서 제품을 선별하는 과정이 수고로웠다. 이번 기회에 유통처를 제대로 확보하려는 회사도 많았다. 그래서 약속이 끊이지 않았다. 숨가쁘게 일정들을 소화하고 나서야, 간신히 여유를 되찾았다.


이렇게 분주하지 않았다면, 호억은 지금쯤 바닥을 뚫고 내려갈 만큼 기분이 울적했을 터였다.


“조금 있으면 소집이잖아. 참석하는 녀석들 안부도 전해야 하고···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속도 불편하실 것 같고···.”

“일반적인 경우라면··· 응당하십니다만.”


석수는 난감했다. 시기가 생각보다 일렀다. 최소한 몇 주는 기다리는 그림이 괜찮았다. 아마도 그 정도가 귀왕이 기대하는 선이지 않을까.


하지만 나날이 이어진 일상을 갑자기 끊는 실천도 만만하지 않았다. 그동안 묵묵하게 버티지 않았는가. 불길한 점괘까지 알고도 계속 제자리를 지키기는 어려웠다. 자신의 경우도 대입하면 간단했다. 편하게 쉬지도 못하겠다. 혹시라도 눈에서 멀어진 사이에 일이 터지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겠다.


“그 자식이 언제 작당하고 움직일지 몰라. 지혜연도 그렇게 떠났잖아.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인데······.”


오직 혈주의 기분을 고려해 판단할 사안이 아니었다. 이러다 정말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한다면, 호억은 더욱 아파할 것이었다.


석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변명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었다. 오늘은 스스로 판단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진정한 독립이 시작되었다. 언제까지 그의 역할을 한낱 비서가 대신해서야 되겠는가.


‘호억아.’


호억은 당황했다. 일전에 맞닥뜨린 그녀의 얼굴이 불현듯이 떠오른 탓이었다. 상냥한 손길을 원했지만 그 표정과 다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니야. 내가 괜한 생각을 했어.”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였다. 미숙했거나 몰랐거나, 다양한 이유로 용서받을 자격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명백히 본인의 의지가 관련되었다. 모르지 않으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곧 상대의 뜻마저 무시하고, 더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었다.


“벌써 흔들리면··· 한심하게 보실 거야.”


그 날따라 기분이 나빴을 가능성도 있었다. 허황된 추측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지간한 잘못에도 격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유철과 민선 사이에서 벌어진 일도 깊게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나머지 변했다면?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전이었다. 아직도 그녀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는 못난 자식이 한심해 보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난번과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실망감이 엄청날 터였다.


가족으로 들인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까. 계모가 매정하게 버린 까닭을 알 만하다고.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카메라가 알립니다. 습관처럼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석수는 재빨리 거들었다. 오랜만에 호억이 스스로 인내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을 테니 더는 후회나 흔들림이 없도록 돕고 싶었다. 함부로 장담해서는 안 될 사항임은 알았다. 아직 불미한 점괘가 남아 있는 상황이니까. 불상사가 당장 오늘 일어날지 시간이 지난 후에 찾아올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눈앞의 상황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조심성 없이 자신하고 말았다.


“알았어.”


호억은 가만히 두지 못하던 손을 멈추었다.


믿음직한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의지하고 싶었다. 그래야 옳은 결정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부정적인 생각은 삼가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불안감이 가중되면 모든 것을 팽개치고 즉시 저택으로 향할 테니까.


이 선택을 후회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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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곰이 피는 나무 5 20.02.14 52 0 11쪽
173 곰이 피는 나무 4 20.02.14 47 0 12쪽
172 곰이 피는 나무 3 20.02.11 63 0 12쪽
171 곰이 피는 나무 2 20.02.11 43 0 11쪽
170 곰이 피는 나무 1 20.02.07 45 0 11쪽
169 천리마의 고삐 11 20.02.07 48 0 11쪽
168 천리마의 고삐 10 20.02.04 46 1 12쪽
167 천리마의 고삐 9 20.02.04 51 1 12쪽
166 천리마의 고삐 8 20.01.31 53 1 12쪽
165 천리마의 고삐 7 20.01.31 56 1 13쪽
164 천리마의 고삐 6 20.01.28 49 1 11쪽
163 천리마의 고삐 5 20.01.28 49 1 11쪽
162 천리마의 고삐 4 20.01.24 49 1 13쪽
161 천리마의 고삐 3 20.01.24 50 1 13쪽
160 천리마의 고삐 2 20.01.21 52 1 12쪽
» 천리마의 고삐 1 20.01.21 56 1 13쪽
158 앞으로 잡는 도둑 9 20.01.17 48 1 11쪽
157 앞으로 잡는 도둑 8 20.01.17 48 1 11쪽
156 앞으로 잡는 도둑 7 20.01.14 46 1 11쪽
155 앞으로 잡는 도둑 6 20.01.14 49 1 14쪽
154 앞으로 잡는 도둑 5 20.01.10 49 1 14쪽
153 앞으로 잡는 도둑 4 20.01.10 48 2 15쪽
152 앞으로 잡는 도둑 3 20.01.07 48 1 13쪽
151 앞으로 잡는 도둑 2 20.01.07 56 1 11쪽
150 앞으로 잡는 도둑 1 20.01.03 52 1 12쪽
149 양 가문 한 집 4 20.01.03 52 1 17쪽
148 양 가문 한 집 3 19.12.31 51 1 11쪽
147 양 가문 한 집 2 19.12.31 53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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