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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바수집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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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바수집
작품등록일 :
2022.05.18 02:49
최근연재일 :
2022.07.03 12:00
연재수 :
3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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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48
글자수 :
142,665

작성
22.07.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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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제33 화

DUMMY

-33-


“하아. 이런 충고가 수석님 귀에 들어가기나 하겠습니까만은.”


크레노프가 레이턴의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레이턴이 플로에 왕립 아카데미의 입학식을 위해 출발하는 날로, 입학시험의 결과가 도착한 건 열흘 전이었다.

그 우편을 제일 먼저 확인한 크레노프는 순간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 클레멘스에게 입학식에서 신입생 선언문을 읽어달라는 요청이 동봉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플로에 왕립 아카데미의 입학시험 수석 합격자로서.


‘턴헤임 후작가의 자제를 제치고 선언문 낭독이라니.’


차석과 얼마나 차이가 나길래 이런 제의까지 들어온 건지, 크레노프는 내심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


뒤편에 서 있던 카힘이 조심스레 끼어들자 그 말을 들은 크레노프가 옆을 돌아보았다.

레이턴이 기숙사 생활을 할 때 필요할 옷가지와 물건, 그가 직접 챙긴 문헌을 필두로 그것을 옮기고 정리해 줄 고용인들까지, 마차는 거의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요. 갈 길이 멀 테니.”


크레노프가 한숨을 삼키고 물러났다. 소맷부리의 단추를 잠근 레이턴이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큰일을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그럼, 방학 때 뵙지요.”

“······.”


‘큰일이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저지르겠다는 건가?’


크레노프는 순간 말을 잃었지만, 그녀가 뭐라 딴지를 걸기도 전에 레이턴이 탄 마차의 문이 닫혔다.


‘그래, 어련하려고.’


그녀가 반쯤 포기한 얼굴로 마차 뒤꽁무니를 쳐다보았다.


***


“하암······.”


오는 길에 묵는 숙소가 아무리 좋다한들 며칠 동안 마차에 처박혀 이동만 할 뿐인 일상이 고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레이턴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했다.

마차에 함께 탄 것이 숙부였다면 그는 레이턴을 보며 못마땅한 기색으로 혀를 찼을 것이고, 레이턴의 오랜 호위기사인 글릭트 파시미안이었다면 그 입으로 제 주먹도 들어가겠다며 놀리는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마차에 타 있는 건 둘 중 누구도 아닌 마젤란이었다.

레이턴은 그의 웬만큼 저열한 도발도 받아쳐 줄 용의가 있었다.


“입 큰 거 봐라. 내 주먹도 들어가겠네.”

“······.”


‘아니, 이건 아니지.’


순간 레이턴이 고개를 털었다.

말의 내용이야 글릭트와 똑같았지만 그 안에 내재된 감정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가 무덤덤한 척 마젤란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마차 의자가 불편하다면 다시 딱딱한 말 안장 위로 내쫓아 줄 수도 있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입 다물고 있지요. 도오련님.”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유독 강세가 느껴진 것은 착각이 아닐 테다.

레이턴은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책을 한 페이지 넘겼다.

지금껏 겪어본 바에 의하면, 마젤란은 그의 무례한 언행과 별개로 제 임무는 나름 잘 수행해내는 자였다.

갈까마귀단이 그가 없는 시간을 노려 숙소에 들어왔던 것을 보면, 마젤란의 실력이 못 봐줄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긴 아무리 양자라 해도 클레멘스 가의 성을 가진 아이다. 크레노프와 카힘이 아무 기사나 붙여줬을 리가 없지.’


덜컹.

갑자기 마차가 급정차해서 레이턴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그가 책을 줍고 허리를 일으키자 마젤란은 그새 마차 문을 박차고 나가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 마젤란 님.”


휘하의 기사가 곤란한 듯한 기색을 띠었다.

레이턴이 마차 창문을 열어 밖의 상황을 살폈다. 다른 마차가 가까이 멈춰 있는 것을 보니 가벼운 접촉 사고가 있었던 것 같았다.

마침 저쪽에도 마차 창문 너머로 바깥 상황을 살피는 자가 있었다.


“마젤란? 참 나,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네.”


소녀가 다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하고는 마차 문을 열었다. 고양이처럼 치켜올라간 눈매와 새초롬한 입술이 인상적인 여자아이였다.

아이라고 해봤자 현재 레이턴의 겉모습을 고려하면 또래로 보였지만.


“···저는 클레멘스 백작가의 기사입니다. 제가 모시는 분은 안에 계시니 무례한 발언은 거두어 주시지요.”

“무례? 하, 백작가의 영애에게 무례한 발언이라 말하는 기사의 언행이야말로 무례한 거겠지.”


풍성한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코웃음을 치며 부채를 폈다. 부채에는 탐스러운 백합 자수가 놓여 있었는데, 마차의 인장과 같은 무늬였다.


“그······.”


마젤란이 제 나이의 반도 안 될 것 같은 소녀에게 쩔쩔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였기에 레이턴은 조금 느긋하게 나섰다.


“아이샤호 영애께서 골이 나신 모양이군요.”


막 마차 문을 열고 나온 레이턴이 장갑을 착용했다.

소녀가 앙칼지게 눈을 치켜 떴다. 앳된 티가 남은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사교계에 한참 몸을 담은 귀부인의 것 같았다.


“골이 나요?”


리지 아이샤호가 탁 소리 나게 부채를 접었다. 끽해야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저를 아이 취급하는 것이 영 언짢았기 때문이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그녀 주위를 맴돌았지만 레이턴은 아랑곳 않고 예를 갖췄다.


“무례하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영애. 상대의 지위도 묻지 않고 다짜고짜 감정을 드러내시기에 그리 생각한 것뿐입니다.”

“······.”


첫 사교계 진출을 뜻하는 데뷔탕트는 보통 열다섯 살 전후로 이루어진다.

막 열셋이 된 리지 역시 사교계 정식 데뷔는 아직이었으나 그에 관련된 공부를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저 마차의 가문 인장, 독수리잖아? 저번에 배웠어. 플로에 신성제국에서 독수리를 인장으로 삼은 가문!’


그때 암기한 가문 중에 그녀 또래의 아이가 있는 집안은 남작가와 자작가뿐이었고, 그녀의 아이샤호 가문은 그보다 높은 백작가였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이 취하는 태도는 자작가나 남작가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 둘이 아니라면··· 설마 백작가의? 하지만 클레멘스 백작가엔 자식이 없을 텐데?’


리지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레이턴이 그에 응답이라도 하듯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클레멘스 백작가의 레이 클레멘스라고 합니다. 영애의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리지 아이샤호입니다. 아이샤호 영애로 충분해요.”


리지가 다시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시선이 레이턴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었다.


“실례했습니다. 클레멘스 백작가에 제 또래의 아이가 있는 줄은 몰랐군요.”

“괜찮습니다. 저도 아이샤호 백작가에 기사의 명예를 존중할 줄 모르는 레이디가 있는 줄은 몰랐으니까요.”


표정과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부채를 쥔 리지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그게··· 무슨 뜻인지요?”


똑같은 백작 출신이라면 백번 리지의 실수였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남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은 귀족의 화법에 어긋나는 짓이 아닌가.


“아, 실례. 귀족의 소양이 부족한 자를 레이디라 칭하기엔······. 크흠.”


레이턴이 말실수를 했다는 듯 목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저게 진짜 말실수일 리가.

뒤에서 그들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마젤란이 혀를 내둘렀다.


“레이 클레멘스 님!”


별안간 리지의 언성이 높아졌다. 마젤란은 제 이름이 불린 것처럼 긴장했다.

아이샤호라는 가문명은 들어본 적 없지만 그럼에도 클레멘스와 동등한 위치의 백작가였다. 적이 늘어나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리지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부채를 접고 치맛자락을 들어 예를 갖췄다.

그녀가 자세를 낮추며 마젤란을 똑바로 응시했다.


“제 부덕함으로 귀공의 기사님께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 해주시겠습니까!”

“어린 나이에는 누구나 미숙하기 마련이지요.”

“하해와 같은 은혜, 감사합니다.”


바라던 대답을 얻은 리지가 곧장 몸을 일으키고 마차로 쏙 들어갔다. 뒤늦게 상대 쪽 기사가 나와 마젤란에게 말을 걸었다.

사고에 대한 책임 소재가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다.


“부담금은 각 가문에서 절반씩 나누어 처리하시지요.”


레이턴이 마젤란의 어깨 너머에서 짧게 덧붙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입학식을 앞두고 관련 인사들의 발걸음이 쏠리는 데 비하면 이곳의 도로가 좁아 일어난 사고였다.


‘이 정도로 마무리지을 수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샤호 백작가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씀대로 마무리했습니다.”


마젤란이 마차 문을 열고 보고했다.

레이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젤란이 엉거주춤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다시 나가란 말이 없는 걸 보니 이번에도 그의 동승을 허락해주려는 듯했다.


“거, 애한테 좀 심했던 거 아닙니까?”

“저는 애가 아닌 것처럼 보이십니까?”

“······.”


뻔뻔한 대꾸에 마젤란이 순간 말을 잃었다.


“···됐수다.”


결국 그가 먼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턱을 괴는 척 미소 띤 입가를 가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오련님도 참. 아닌 척 하면서 멕이는 거 참 잘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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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제26 화 22.06.18 23 1 9쪽
25 제25 화 22.06.18 25 0 9쪽
24 제24 화 22.06.18 21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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