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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바수집 님의 서재입니다.

영웅 대접은 사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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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바수집
작품등록일 :
2022.05.18 02:49
최근연재일 :
2022.07.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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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42,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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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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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제25 화

DUMMY

-25-


‘본채에 있겠지.’


별채의 입구에 도달한 레이턴이 본채를 중심으로 제 마력을 넓게 퍼뜨렸다.

깊은 호수처럼 잠잠하던 기운에 딱 한군데,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막 되살아났을 때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야. 마물과 싸우며 각성이라도 한 건가?’


각성이라니, 영웅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레이턴은 스스로의 생각에 피식 웃었다.


***


밤새 이슬비라도 내린 듯 공기는 축축했고 분수대 주변엔 옅은 안개가 껴 있었다.

레이턴은 인적이 드문 숲길을 골라 본채까지 걸었다.

감이 좋은 기사 몇몇은 그의 기척을 눈치채기도 했으나, 파티 중이니만큼 밀회를 즐기러 나온 귀족이겠거니 생각해 수풀까지 나와 보는 이는 없었다.


‘저 위인가.’


본채 뒤뜰에 서서 올려다 보자 유일하게 닫혀 있는 창문이 보였다. 그는 창문에 제일 가깝게 가지를 뻗은 나무 밑에 섰다.

타닷.

레이턴이 잠깐 몸을 웅크렸다가 도약했다.

그가 나무를 밟자 찰나의 순간 동안 그의 신발과 나무 사이는 얼어붙었고, 다른 발을 올렸을 땐 방금 있던 얼음이 성에도 없이 사라졌다.

쩌적. 탁. 부스럭.

얼음 어는 소리와 작은 발소리, 이파리 스치는 소리.

담장에 뛰어오르는 고양이처럼 날쌔게, 목표 높이에 다다른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얼음 조각이 반짝이더니 금세 불이 붙었다. 얼음이 기화하며 가늘고 날카로운 바람이 쏘아졌다.

덜컹.

창문이 열리고, 레이턴은 조용히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내게 암살자가 오기는 처음이군. 그것도 이렇게 어린아이라니.”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레이턴의 방문을 맞아 주었다.

레이턴이 그를 향해 서서히 돌아섰다.


“깨어 계신 줄 알았다면 수고를 덜었을 텐데, 유감이로군요.”

“허허.”


초로의 남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방 안은 적당히 화려했고 그럭저럭 안락했다.

배신을 하고 얻어낸 것이라기엔 초라하고 감금 협박을 당했다고 하기엔 호화로운, 딱 그 정도다.


“못 주무셨습니까?”


레이턴의 말투엔 평범한 침입자답지 않은 예의가 묻어났다.

창밖의 기척을 듣고 일어나 있던 페이만 자작은 아직 제게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알아채고 티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랬지. 크레노프가 왔다는 말을 들었거든. 내가 그 아이를 본 지도 이십 년 가까이 흘렀군. 뭐, 어차피 달라진 것도 없겠지만.”

“······.”


크레노프가 알려준 페이만 자작의 특징은 강렬한 붉은색의 머리카락이라 했다.

피처럼 새빨갛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녀의 기억도 오래 전의 것이었던 듯, 레이턴이 보기에 페이만 자작의 머리카락은 단풍처럼 그윽한 색이었다.


“자네도 앉겠나?”

“괜찮습니다.”


레이턴이 거절하자 그는 더 묻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형을 기다리는 죄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턴이 입을 열었다.


“멍청하기 때문이 아니더군요.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걸 보면 권력 욕심 때문도 아닌 듯하고.”

“무슨 말인가?”

“클레멘스 가를 등진 이유 말입니다.”


-그래서 배후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그냥 사람이 멍청해서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 말을 하며, 사실 레이턴은 그 삼촌이라던 자가 멍청했기를 바랐다. 배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탐하는 욕심쟁이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페이만 자작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클레멘스 백작 부부의 최후를 보셨습니까?”


레이턴이 묻자 페이만 자작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레이턴의 반응은 여전히 담담했다.

자작이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신의 사자라도 되는가? 모르는 게 없군.”


레이턴은 웃지 않았다. 우습게도 사후의 그가 성자로 불리고 있으니, 어쩌면 그 비슷한 것쯤은 될지도 모른다.


“자네 말이 맞네. 저주라는 말이 괜히 퍼진 게 아니라는 거지.”


그는 백작 부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사람이었다. 크레노프가 태어났을 때도, 그녀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도, 부부가 마석으로 불법적인 연구를 할 때도 그는 백작성에 머물고 있었다.

물론 백작 부부가 마기 침식으로 정신을 잃고 병상에 누웠을 때도 말이다.


-이것 놓거라! 저 괴물을 당장 죽여야 해!

-안 됩니다! 어찌 백작님을 해하려 하십니까?

-네 눈에는 저게 사람으로 보이더냐? 저게, 저게 어떻게!

-아가씨가 깨실 수도 있습니다, 자작님. 제발 마음을 다스리시고!

-주신 미르와시여, 그 상냥하시던 백작 부부께 왜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아비규환이던 당시의 상황은, 피부를 덮은 화상처럼 선명하고 쓰라렸다.

노인의 눈동자에 수많은 회한이 스쳤다.


“자작님. 제게 크레노프 영주님의 저주를 풀 방법이 있습니다. 실은 이미 열일곱 살 정도는 되어 보이시죠. 전대의 클레멘스 백작 부부가 변이한 원인도,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막는 방법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순간 자작의 시선이 떨렸다.


“···사실대로 털어놓으시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겁니다.”


레이턴은 그가 생각 정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요량으로 덧붙였다.

후작의 작전을 망친 뒷감당은 온전히 그와 백작가의 몫이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리라.


“하하, 고마운 말이지만 됐네.”


그러나 페이만 자작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백작 부부를 죽인 것은 나일세. 그러고는 차마 죽을 용기가 없어 누군가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지도 못했지. 이미 내 팔은 이렇게 되어 있었거든.”


페이만 자작이 긴 소매를 걷어 팔을 내보였다. 상완부터 어깨까지 검정색의 얼룩이 넓게 퍼져 있었다.


“여동생 부부의 목숨을 빼앗은 내가 조카딸의 얼굴을 어찌 보겠는가.”


레이턴은 놀라지 않았다. 백작 부부가 마기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미 예상한 상황이었다.

그가 페이만 자작의 거처를 알아낸 것도 후작저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마기를 감지한 덕분이었으니.

페이만 자작은 씁쓸히 웃으며 몸을 일으키고, 레이턴의 앞에 서서 말했다.


“죽이거라.”

“······.”


레이턴은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의 눈동자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손끝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몸을 의탁하고 턴헤임 후작의 뒤에 숨은 것일 테니까.

페이만 자작은 마기에 침식 당한 클레멘스 백작 부부가 마물로 변이한 모습을 직접 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크레노프의 나이는 겨우 일곱이었다. 자작은 그녀에게 차마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으리라.

그 와중에 자신의 몸에마저 똑같은 자국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을, 그가 어찌 멀쩡한 정신으로 볼 수 있었겠는가.


“그럼.”


레이턴은 그의 결심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손바닥을 카펫과 평행하게 펼쳤다.

그의 손 밑에 청백색의 얼음 창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남기실 말이 있다면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린아이가 마법을 쓰는 모습을 큰 놀람도 없이 흘려 보던 그가 레이턴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내가 한 짓을··· 아니, 그들이 마물로 죽었다는 사실을, 조카딸에게 비밀로 해줄 수 있겠나?”

“약속드리겠습니다.”

“고맙네.”


그는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레이턴의 얼음 창이 그의 목을 꿰뚫는 순간 자작의 입술이 달싹였다.


“조카의 나이든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군.”


털썩.

작은 미련의 조각만을 남긴 채, 노인의 몸은 허물어지듯 카펫 위에 쓰러졌다. 어두운 카펫에 그의 핏물이 스며 진한 얼룩을 남겼다.

얼음 창을 없앤 레이턴은 문득 창문이 난 동쪽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덧문 너머로 붉은 빛이 들어왔다. 동이 터 오고 있는 것이다.

페이만 자작의 머리칼이 그 빛을 받아 반짝였다. 크레노프가 묘사한 대로, 살아있는 것의 피처럼 새빨간 색이었다.


“···차라리 멍청한 자였다면 나았을 텐데.”


나지막히 읊조린 레이턴이 금세 사라졌다.

열세 살 아이의 생일 케이크가 옮겨지던 시각, 그저 나약했을 뿐인 평범한 노인은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


-내일 네 친구들의 입장을 조금 미루거라. 그 전에 네게 인사시켜 줄 아이가 있으니.


다니엘 턴헤임.

그는 턴헤임 후작가의 차남이자 오늘 열릴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데이지. 혹시 오늘 인사하러 오는 아이가 누군지 알아?”

“도련님의 친구분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다니엘의 옷차림을 살펴 주던 하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아이’의 정체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으음, 아무것도 아냐.”


다니엘은 대충 얼버무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인이 흐트러진 머리를 곧장 다시 정리해 주었다.


‘대체 파티날 아침에 개인적으로 만나 인사해야 될 애가 누구지? 그렇게 중요한 가문의 사람이라면 벌써 수십 번은 봤을 텐데.’


다니엘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 말고 헉 소리를 냈다.


“설마, 내 결혼 상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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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5 화 22.06.18 25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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