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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바수집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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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바수집
작품등록일 :
2022.05.18 02:49
최근연재일 :
2022.07.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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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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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9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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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 화

DUMMY

크레노프는 입을 다물고 창 너머의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장례식은 아침이었건만 어느덧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완만한 산등성이에 해가 뉘엿뉘엿했다. 하늘은 쇳물처럼 쨍한 주황빛이었고 아래에선 카란세 사제가 장례 의식의 마무리를 돕는 중이었다.


-영주님, 잠시 와주시겠습니까? 여기 마기 침식의 증상을 발견해서요. 저도 이 증상에 대해 안 지 얼마 안 됐습니다만······.


페이만 자작의 시신을 수습해준 카란세 덕분에, 크레노프는 삼촌의 팔에 새까맣게 남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문득 제 손의 얼룩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녀의 손은 삼촌의 것만큼이나 컸고, 그 없이도 자신의 얼룩을 가리고 다닐 줄 알았다.

이십 년도 전에 들었던 삼촌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긴 옷을 입어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단단히 가려. 신조차 이 저주를 모르도록.

-저주요?

-···그래. 이것은 저주의 증거다.


페이만 자작은 제 손으로 어린 크레노프의 작은 손을 감쌌다. 크레노프는 그의 서늘한 체온을 좋아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웃던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에게도 있던 그 반점을 저주의 증거라 말하면서, 삼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아.”


지친 한숨을 내쉰 크레노프가 집무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받아들여야지.”


크레노프는 서랍을 열어 턴헤임 후작의 서신에 대한 답신을 보낼 준비를 했다.

막힘없이 써내려간 그녀가 서신의 말미에 찍을 인장을 꺼냈다. 스물도 안 된 여자가 끼기에는 꽤나 투박하고 알이 굵은 반지였다.

그녀는 사이즈가 맞는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그 반지를 끼우고, 녹인 밀랍에 반지를 스탬프 삼아 눌렀다.

클레멘스 가의 상징인 독수리의 모습이 선명히 찍혀 나왔다.

그녀가 정식으로 ‘클레멘스 백작’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이걸 보면 열 꽤나 받겠어, 그 영감.”


옅은 미소를 띤 크레노프가 손아귀를 꽉 쥐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후 그녀는 집무실 한편에 놓인 소파로 시선을 돌렸다. 유령처럼 조용히 앉아 있던 레이턴이 그녀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그래서······.”


크레노프가 가볍게 운을 띄우고 물었다.


“클레멘스 백작이 된 내게 바라는 것이라는 게 뭡니까?”

“······.”


레이턴은 입을 다물고 턱을 까딱했다. 의미를 못 알아챈 크레노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요?”

“거기서 말씀하실 겁니까?”

“하.”


어찌나 뻔뻔한지, 이젠 우습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에 레이턴이 큰 도움이 됐다는 건 틀림 없었기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크레노프는 군말없이 레이턴의 맞은편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존대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리 보여도 실제 나이는 서른둘입니다. 결혼만 빨리 했어도 그쪽 만한 아들이 있다, 이거예요.”


크레노프가 볼멘소리를 하자 레이턴이 피식 웃었다.


“뭐가 웃깁니까?”

“결혼하지 않으신 지금도 있지 않습니까. 저만 한 아들.”

“······.”


크레노프가 썩은 표정으로 레이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소년의 표정으론 그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정식 입적이라도 바라는 겁니까?”


그녀가 다리를 꼬며 고압적으로 물었다. 다만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그 제안에 긍정할 각오는 하고 있었다.

분명 낯선 이를 양자로 들이는 건 위험 부담이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목표하는 바가 뚜렷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할 의지도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긍정할 줄 알았던 레이턴은 고개를 젓고 고쳐 말했다.


“꺼려지신다면 그저 이름만 빌려주셔도 됩니다.”

“이름을?”

“신분 보증인 겸 추천인이 되어주십시오. 플로에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습니다.”

“······.”


생각지 못한 말에 크레노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유가 있습니까?”

“영주님··· 아니, 클레멘스 백작님의 저주를 풀기 위해선 연구가 필요하니까요.”


레이턴이 목숨을 잃은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사후, 연구하던 모든 내용의 처분권은 플로에 왕립 아카데미에 넘어갔으리라.


‘숙부는 내 연구에 관심이 없었다. 개인적인 기록이야 소실됐겠지만, 당시 작성한 논문이나 연구 기획서는 플로에 아카데미의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을 터.’


스스로를 천재라 여긴 적 없는 레이턴도 자신이 하던 연구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는 알고 있었다.

그 외에도 합법적으로 연구할 장소, 연구 재료를 편히 공수하기 위한 경로 등, 모든 것을 고려해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크레노프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그런 이유라면 차라리 미르와에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미르와 신학교 말입니까?”


레이턴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르와는 플로에 신성제국에서 모시는 신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주 교단과 성직자 양성 목적의 신학교뿐이었다.


‘설마 지금 내게 사제가 되라고 권하는 것도 아닐 테고······. 혹시 내 소개를 할 때 카란세 사제의 조카라 했던 것 때문인가?’


그러나 레이턴의 추측은 애초에 틀린 모양이었다.

크레노프가 뒤늦게 설명했다.


“···미르와 신학교는 세미너리로 개편된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귀족들도 아카데미처럼 이용할 수 있죠. 플로에 왕립 아카데미와 시스템도 비슷하고요.”


세미너리라면 종교를 바탕으로 가르치는 것 외엔 아카데미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이었다.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레이턴이 그제야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참 나, 시간 여행이라도 하신 겁니까? 이상한 부분에서 상식이 부족하시군요.”

“크흠.”


어떤 의미에선 정곡을 찌르는 말에, 크레노프의 곁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카힘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정작 레이턴은 뻔뻔하게 대응했다.


“그래도 세미너리보다는 아카데미가 마음 편합니다. 신학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스스로를 교황청에서 나왔다고 말하던 그 꼬마가 맞는가, 잠시 제 귀를 의심한 크레노프가 이내 고개를 털고 다시 권했다.


“그럼 제국 동부 아카데미나 서부 아카데미는요? 연합국에서 운영하는 글란타 아카데미도 평이 괜찮던데요.”


이쯤 되니 레이턴도 꺼림칙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연구할 것이 레이턴 클레멘스의 논문이라 그가 교수로 있던 플로에 왕립 아카데미에 가겠다는 건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


그러자 크레노프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힘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굳이 아셔야겠다면 설명드리지요. 함구령이 내려져 있으니 제게서 들었다는 말은 마시고.”

“유념하겠습니다.”


레이턴이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노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뗐다.


“삼 년 전, 앗시오 황제에 의한 숙청이 있었던 곳입니다.”

“···숙청이요?”


레이턴이 되묻는 것을 보고 크레노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함구령이 내렸다고는 해도 사태가 워낙 심각했었기에 수도권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었다.


“교황청에 계셨다길래 소문 정도는 들으셨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처음부터 설명해야겠군요.”


그녀가 손가락을 펴고 테이블을 짚었다.


“플로에 신성제국에서 최고(最古)의 역사를 자랑하는 플로에 왕립 아카데미는 본래 그 명성이 뛰어났습니다. 레이턴 클레멘스 백작님이 교수직에 계셨을 때가 그곳의 전성기였지요.”


레이턴이 고개를 끄덕여 호응했다.


“하지만 이후 플로에 아카데미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유구한 역사가 말해 주듯 황권의 약화는 교황청의 권력 강화를 가져왔고, 미르와 신학교는 세미너리로 시스템을 바꿨습니다.”


줄리어스 교황 때만 해도 레이턴이 논문을 내면 미르와 신학교에서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았다.

그것을 좀 더 본격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려니, 레이턴은 당시 교황청의 심산을 대충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황가는 오랫동안 교황청의 그늘에 가려 지냈습니다. 백 년간 황제가 다섯 번이나 바뀌었을 정도니까요.”

“다섯 번이나······.”


카란세에게서도 들은 적 있는 말이었다.

레이턴이 맞장구치자 크레노프가 한층 목소리를 낮췄다.


“네. 암살이든 병사든, 병사로 위장된 암살이든.”

“······.”


아무튼 하나같이 꺼림칙한 정황이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하락 일변이던 황권을 다시 일으키려 하는 게······.”

“지금의 앗시오 황제라는 거군요.”


레이턴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크레노프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분이 왜 플로에 아카데미를 숙청의 시작으로 잡았는지도 설명해야 할까요?”


레이턴이 대답 대신 입을 열었다.


“···학교를 장악하는 것은 미래의 귀족 세력을 장악하는 것과 같다.”


정치학 시간에 배운 내용이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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