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물은 없고, 은신처는 있고.
002화-물은 없고, 은신처는 있고.
“뭔 소리야 이게?”
여전히 머릿속에 박혀있는 세 문장.
[이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크를 죽이세요.]
[오크를 죽일수록 당신은 진화합니다.]
오크를 죽이라니, 그 게임 같은데 나오는 돼지머리 오크를 말하는 건가?
아니, 지금 오크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춥다.
일단 물에 젖어서 벗으려던 옷을 마저 벗고... 불 피울 나뭇가지를 주워야, 주워야 하는데...
나무가, 나무가..! 미친 듯이 커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밀렵을 하고 있던 산에는 겨울 가지가 앙상한 3층 정도 높이의 활엽수 들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는 잎이 무성하게 달린 고층빌딩 높이의 나무가 끝없이 늘어서 있다.
고개를 한껏 들어서 올려다보는데도 나무꼭대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정도로 무식하게 큰 나무들이다.
[오크를 죽이세요.]
[오크를 죽일수록 당신은 진화합니다.]
이세계로 와서 환영한다는 문구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혹시 거대한 나무들을 보고 이세계에 온걸 실감했으니 사라진 걸까.
그런데 오크를 죽이라는 말은 그대로 남아있다.
오크를 죽이면 머리에 박힌 저 두 문장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에 이런 게 박혀있다니 혹시 내가 미쳐버린 게 아닐까 싶다.
아 추워.
먼저 추워서 미칠 것 같다.
일단, 몸을 좀 데우면서 생각하자.
***
동굴 입구 안쪽에 돌 몇 개를 둥그렇게 모아서 작은 화덕을 만들었다.
주변에 장작들이 충분히 많이 있어서 불피울 준비를 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파이어 스타터로 순식간에 불을 붙였다.
모닥불 옆에 나뭇가지 몇 개를 세워 박아두고 그 위에 젖은 옷들을 모두 널어서 빨리 마를 수 있게 해두었다.
옷이 타버리지 않도록 불과 옷 사이의 거리를 잘 조절해줬다.
방수 배낭 안에 들어있던 마른 옷을 꺼내서 갈아입었다.
담요도 하나 꺼내서 몸에 두르고 모닥불 옆에 앉아 몸을 데웠다.
얼음덩이 같던 몸이 조금씩 녹아내린다.
몸을 좀 녹이다가 배낭에 들어있는 장비를 모두 꺼내 바닥에 늘어놓고 점검했다.
다행히 잃어버린 장비는 없었다.
‘나는 지금 조난된 상태다.’
이세계니 오크니 하는 것들은 일단 후 순위로 밀어두고 무조건 생존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물건을 한 개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조난 되었을 때는 처음에 뭘 챙겨야 한다고 그랬지?’
머릿속에서 그동안 대충 쌓아두었던 캠핑, 서바이벌 관련 기억들을 최대한 끄집어내 본다.
‘온도, 식량, 물... 이었던가? 거기에 더해서... 은신처? 무기?’
이것저것 쓸 만해 보이는 지식들을 최대한 떠올려본다.
‘온도는.. 상당수의 조난자들이 얼어 죽는 경우가 많다고 그랬지?’
불 피울 장작이 무한하게 깔린 숲이 바로 옆에 있으니 얼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크게 불이 나서 불타 죽을 걱정을 해야 할 판이다.
모닥불을 잘 관리해야겠다.
‘식량은 아껴서 먹는다면 9일, 생존을 위해 여기저기 계속 돌아다닌다면 길어야 5일 정도인가...’
가지고 있는 식량으로는 일주일도 아슬아슬할 것 같으니 덫을 만들고 채집도 하는 등, 열심히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녀야겠다.
‘물! 물이 문제다! 겨우 이틀 치밖에 없으니 물이 가장 큰 골칫거리인데..’
‘그래, 일단 개울이라도 하나 찾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두고, 정 안되면 아침 이슬이라도 모아서...’
물 걱정을 한참 하다가 ‘물에 흠뻑 젖어서’ 모닥불에 말리고 있는 옷을 멍하니 보았다.
“아! 호수!”
내가 빠져 죽을 뻔했던 동굴 안 호수를 떠올리고는 동굴 안으로 다시 허겁지겁 들어가 봤다.
“아.. 제기랄...”
호수가 없어져 버렸다.
아주. 깔끔하게.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없어졌다.
물이라곤 전혀 없고 돌멩이만 굴러다니는 그냥 흙투성이 동굴이 되어버렸다.
“뭐, 이런 엿 같은 일이 다 있어?”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걸 보니, 정말로 이세계에 온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최소한 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더니..’
동굴의 물도 없으니 앞으로 식수를 어떻게 구해야 할지가 걱정이다.
그래도 은신처가 하나는 생긴 셈 쳐야겠다.
이렇게라도 생각해야지 어쩌겠어.
‘어려운 상황에선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비관적인 태도야말로 조난 시의 가장 큰 위험요소일지도 모른다.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동굴 안을 점검해보니 제법 지낼만한 곳이다.
적당히 살펴보고 밖으로 나와 주변 숲을 10분 정도 둘러보며 얇은 나뭇가지를 한 아름 주웠다.
오크를 만날지도 모르니 더 먼 곳까지 정찰하는 것은 준비를 확실히 한 후가 될 것이다.
먼저 은신처를 간단하게라도 정비해두어야 야겠다.
잘 부러지지 않을 정도의 얇은 나뭇가지를 반 뼘 길이 정도로 잘라서 한쪽 끝만 뾰족하게 깎았다.
이런 나뭇가지를 여러 개 만든 다음, 근처의 발길이 닿기 좋은 곳에 뾰족한 부분이 수직으로 서 있게끔 박아두었다.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 길이만 땅 위로 튀어나오게 심었다.
이 위에 낙엽을 살짝 덮어 놓으면...
‘송곳 지뢰 완성!’
튼튼한 신발을 신지 않은 생명체는 이걸 밟고 쓰러져서 비명을 지를 것이다.
‘독을 바를까?’
병 안에 담긴 독을 여기에 쓰면 어떨까 고민해 보았지만 그건 큰 낭비라고 생각했다.
이 독은 두 번 다시는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귀한 물건이니 아껴 써야만 한다.
확실하게 뭔가를 중독시킬 수 있고 꼭 그래야만 하는 상황 외에는 써선 안 된다.
바쁘게 송곳 지뢰를 모두 설치하고 허리를 세워 몸을 푸니 날은 어두워져 가는데 몸이 후끈해져서 살짝 땀이 날 정도였다.
‘이젠 동굴 입구를 숨겨야지.’
잎이 많이 달린 긴 나뭇가지들을 가져와 동굴 입구 주변에 꽂았다.
동굴 안에 피워둔 모닥불의 빛이 완전히 가려질 때까지 나뭇가지를 계속 가져다 꽂아서 가림막으로 만들었다.
몇 걸음 떨어져서 요리조리 확인해보니 빛이 전혀 새어 나오지 않는다.
‘이젠 아주 훌륭한 은신처가 됐어.’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더니 뭔가 좀 먹고 싶어진다.
‘하지만 오늘 저녁은 참자. 내일 물이라도 찾고 나서 뭘 먹는 게 더 좋아.’
뭘 먹어버리면 목이 마르게 되니까 물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먹지 않아야 한다.
거기다가 배낭 속 음식들은 보관 기간이 상당히 긴 것들이 대부분이니 최대한 아껴두고 내일 얻게 될 식량을 먼저 먹어둬야 생존에 유리하다.
배는 좀 고프지만 일단 오늘은 자고 내일 일어나서 주변을 탐색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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