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이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001화-이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내가 날 봤을 때, 나 자신이 특별히 악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 나는 자발적 범죄자 일지도 모른다.
2시간이나 추위에 떨면서 찾아다녀도 보이지 않던 멧돼지 똥을 드디어 발견했다.
멧돼지 발자국도 옆에 딱 찍혀있다. 제법 선명한 발자국이다.
손에 들린 석궁과 허리춤에 달린 정글도를 다시 한번 점검한다.
두껍게 낙엽이 쌓인 겨울 산길을 발끝으로 밀어 헤치면서 발자국을 따라 올라갔다.
멧돼지를 잡으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귀찮고도 이상한 일이다.
멧돼지가 농가들에 끼치는 피해가 매년 수억 원이 넘어간다는데 많이 좀 잡아 없애 달라고 포상금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해악만 끼치는 잡것들을 자발적으로 고생하며 없애주는데도, 사냥 한번 나가려면 온갖 허가, 자격증 등이 필요하니 귀찮기 짝이 없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 몰래 깊은 산 속에서 밀렵을 하러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제발 가까운 곳에 있어라.’
운이 나쁘면 산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지도 모른다.
배낭 위에 달린 침낭이 잘 묶여있는지 확인해본다.
푸스럭-
무언가 낙엽을 바스락 이는 희미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순간, 발소리를 죽이고 석궁의 시위를 당겼다.
허리에 달린 화살집에서 화살 한 개를 꺼냈다.
투구꽃 등의 독초를 정제해서 담아둔 병에 살며시 담갔다가 석궁에 장전했다.
멧돼지가 독화살에 맞는다고 바로 죽지는 않겠지만 뒤를 쫓아서 추적해야 하는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최대한 몸을 숙이고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어갔다.
멧돼지 한 마리가 흙더미 위를 뒹굴고 있었다.
‘흙으로 목욕을 하느라 정신이 없군’
아주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석궁을 조준한다.
‘인생 마지막 목욕을 잘 즐겨라. 멧돼지야.’
침착하게 멧돼지의 목덜미를 겨냥한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살짝 얹는다.
숨을 참고, 아주 약간의 힘으로 손끝을 당긴다.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가-
꾸물럭-!
하필이면 멧돼지가 몸을 크게 뒤튼다.
화살이 목덜미가 아니라 엉덩이에 바느질하듯이 비스듬히 꽂힌다.
돼지 껍데기를 살짝 꿰뚫고 화살촉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뀌이익!!@#$%”
멧돼지가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이리저리 날뛰더니 산 비탈을 맹렬하게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아... 포기할까?”
이렇게 황당하게 사냥에 실패하기는 처음이다.
한숨만 나오지만 쫓아 올라갈 수밖에 없다.
화살로 어설프게 박음질 된 멧돼지를 어느 누군가가 발견하면 박음질을 해둔 밀렵꾼을 신고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석궁에 독화살을 다시 장전한 뒤 멧돼지의 흔적을 따라서 다시 산을 올랐다.
20분 가까이 따라가니 발자국이 한 동굴 안쪽으로 이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 멧돼지를 쫓아서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다만, 사람 키보다는 작은 동굴이어서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재수 없으면 칼을 써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왼손으로 칼을 뽑아 쥐었다.
오른손에 쥔 석궁은 왼쪽 팔뚝으로 아래를 받쳐 언제든지 화살을 쏠 수 있게 준비했다.
뭔가 움직인다 싶으면 석궁으로 쏴버리고 칼을 휘두르면 될 것이다.
동굴 안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좁았던 입구를 지나서 좀 더 깊이 들어가자, 통로가 조금씩 넓어지더니 제법 큰 공간이 나타났다.
안이 깊은 V자 계곡처럼 파여있고 바닥에 물이 제법 고여있었다.
멧돼지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질 않았다.
‘설마 저 호수 속으로 뛰어들진 않았겠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계곡 가까이 다가갔다.
‘발을 잘못 디디면 굴러떨어져서 물에 빠지겠군.’
낭떠러지 주변을 눈으로 살피는데도 멧돼지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내밀어 낭떠러지 밑을 살핀다.
‘멧돼지가 하늘로 솟아올랐나? 꼬랑지도 보이지를 않...’
후욱, 후욱-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뜨거운 공기가 몰려와 뒤통수를 데우는 듯한 느낌이 든다.
뒷덜미에서 소름이 으스스 돋는다.
아마도 내가 확인하지 못한 동굴의 어느 구석에 멧돼지가 숨어 있었을 것이다.
빠르게 몸을 돌려서 석궁을 쏜-
뀌이익-!
멧돼지가 우다다 돌진해 온다. 멧돼지의 어금니가 내 배를 찌르기 직전에!-
옆으로 뛰어서 피했다!
엄청난 반사신경이었다. 거의 운동선수급의...
그런데 급정거한 멧돼지가 몸을 뒤틀더니 다리를 털어내듯 껑충인다.
내가 방금 꽂아 놓았던 화살 뒤 꽁지가 내 배를-
쿡.
찌른다.
딱 한걸음.
뒤로 밀려났다.
“이런, 제기랄.”
이 말 한마디만 남겨놓고 그대로 낭떠러지를 굴러떨어졌다.
손을 뻗어 뭐라도 잡아볼까 하려는 찰나에 물웅덩이로 빠져버렸다.
“부그럭! 크헉!”
굴러떨어지다 명치에 뭔가 잘못 부딪쳤는지 숨이 턱 막힌다.
순간 전신이 굳으며 몸이 가라앉는다.
위아래가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떠지질 않는 눈을 억지로라도 가늘게 열어 본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빛이 보인다.
조금씩 풀리는 몸으로 최대한 힘을 쥐어 짜내며 팔다리를 휘저었다.
물을 힘껏 밀어내며 빛을 향해 나아간다.
“푸헉! 커허억! 우웩!”
간신히 물가로 기어 나와 기침을 하며 물을 토했다. 구역질까지 하며 물을 게워냈다.
“콜록.. 죽을뻔했네..”
망할 멧돼지를 반드시 잡아야겠다.
다행히도 석궁과 칼이 여전히 손에 들려있다.
석궁에 장전되어 있어야 할 화살은 물에 떠내려갔는지 없어져 버렸다.
다시 화살을 장전했다.
멧돼지를 사방으로 경계하며 낭떠러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조심조심하며.
천천히,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올라가니 진땀이 날 정도로 힘들다.
“이 씹어먹을 멧돼지, 화살 산적으로 만들어주마.”
겨우 낭떠러지를 다 기어 올라왔는데도 멧돼지는 보이지 않았다.
동굴 벽의 숨어 있을 만한 곳들을 모두 일일이 확인하며 밖으로 나왔다.
“으으, 추워!”
동굴 밖으로 나와 찬 바람을 쐬니 호숫물에 빠졌던 몸이 얼음장처럼 식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멧돼지는 잠깐 잊어버리고 차가워진 몸부터 덥혀야겠다.
아마도 멧돼지는 도망쳤을 것이다.
그래도 손으로 바로 잡아채서 쓸 수 있는 곳에 석궁과 칼을 내려두었다.
짐을 바닥에 내리고 물에 젖은 옷을 벗으려는데,
[이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크를 죽이세요.]
[오크를 죽일수록 당신은 진화합니다.]
머릿속에 문구가 박힌다.
소리로 들은 것도 눈으로 본 것도 아님에도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이게 대체 뭔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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