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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마녀의 서고

에이든은 오늘도 용사를 만나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집필마녀
작품등록일 :
2023.05.14 01:16
최근연재일 :
2023.08.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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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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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장. 네리우스 교단(9)

DUMMY

그가 눈치채기 시작한 기점으로부터 이젠 눈에 띄게 세상이 부서지고 있었다.


“있을 수 없다. 이곳은 내 세상이다. 내가 만들어낸 세상!”


“알지. 네가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걸. 하지만 제아무리 강해도 성유물을 이길 정도는 아니란 소리야.”


“서, 성유물?”


그가 정신을 집중하여 이변의 중심을 두 눈으로 보았다.


“······엘프 대모라고 했나?”


그는 분노에 떨며 나를 노려봤다.


“애당초 나와의 싸움은 관심조차 있지 않았군.”


이졸탄은 분에 찬 나머지 입술을 깨물었고 곧 입가에 피가 흘렀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비록 넌 날 모를지라도 난 널 알아. 네가 얼마나 능력을 펼칠 수 있는지도.”


이졸탄의 마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렇게 큰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이런 걸 예전에 본 적도 있거든. 네가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대충 아티팩트, ‘미몽의 공간’쯤 되려나?”


정밀한 마력 조작 능력이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꿈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꿈 속의 아귀라는 보스에게 복속된 아티팩트였고 그걸 쓰러트리면 얻을 수 있었다.

여행길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으니 필수적인 아티팩트이기도 했다.


“어떻게······, 내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거지?”


“······.”


이졸탄 정도 되는 마인이라면 엘프 대모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더욱 의아할 것이다. 나엘리아에게 기척을 숨기는 능력은 없었을 테니까.


“······.”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퍼뜩 눈치챘다.


“네, 네놈, 그건 모습을 바꾸는 아티팩트가 아니라 인식 저해 아티팩트였던 건가?”


그랬다. 그 말대로 내 ‘은둔형 외톨이의 보물’은 지금 나엘리아의 목에 걸려 있었다.



아까 전.


“······제가 무얼 하면 되나요?”


나는 목에 걸려 있던 아티팩트를 벗어 나엘리아의 목에 걸어주었다.


“당신, 그 모습은······, 과연 그런 거였군요.”


이것으로 내 본모습을 아는 사람이 또 한 명 생겨버렸다.


“주목을 받는 걸 크게 바라지 않았거든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모순됐군요. 그럴 거면 그런 괴물들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될 일이었을 텐데. 세간에서 당신을 어떻게 보는 줄 알고 있는 줄 아시는가요?”


그래, 사룡부터 시작해서 그것보다 못하더라도 무수한 괴물들을 홀로 상대해왔다. 주목받기 싫어할 사람이 할 짓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나칠 수 없는 일들은 언제든 있잖아요. 대모님은 지금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요?”


이런 입에 발린 말을 해도 난 영웅 따위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내 안위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돈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누군가에게 있어서 희망이 된다면 충분히 그렇다고 말할 뻔뻔함은 있었다.

내 말을 들은 나엘리아는 내가 준 아티팩트를 꼭 쥐었다.


“당신이 제 그런 사람이 되어주신단 말인가요?”


“물론 그렇게 거창해지고 싶진 않습니다. 주제 넘는 짓이기도 하고요. 지금 저와 대모님은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대등한 관계면 충분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대모님은 스스로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나엘리아는 연약했다. 하지만 그게 결코 심적으로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렸지만 엘프들을 끝까지 지켰으니.

엘프들은 그런 나엘리아를 존경하고 선망하며 믿고 따랐다.

단지 그녀만이 모를 뿐이었다.


“엘프이시고 위대한 대모이신 당신이라면 이걸 좀 더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나엘리아에게 전했다.

이졸탄이 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아티팩트가 있을 테니 그것을 파괴하라고 말이다.

미몽의 공간은 정교한 아티팩트이다. 엘프나 뛰어난 마법사를 위한 것인 만큼 마력 조작에 능하지 않은 자가 사용하지 않으면 금방 망가져 버릴 만큼 말이다.

하지만 뛰어난 사람이라면, 나엘리아라면 그걸 아예 영구적으로 망가트릴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이 일을 만든 원흉의 시선을 끌겠습니다. 당신이 영웅이 되어 사람들을 구하는 겁니다.”


개입했지만 개입하지 않은 것처럼 나는 나엘리아의 자신감을 올려줄 기회를 주었다.


“할 수 있죠?”


나엘리아는 멍하니 내 눈을 보다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현재.



“네가 졌어, 이졸탄.”


“······.”


“마음만 먹으면 지금 여기서 널 죽일 수도 있어.”


“······자비라도 베풀겠단 소리인가?”


“그래,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는 소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면.”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그 말에 내가 그러겠습니다. 하고 그 말에 승복하기라도 할 줄 알았는가?”


그는 비아냥을 섞어가며 조소를 터트렸다.


“날 조롱하는 것도 같잖게 느껴지는구나, 인간 놈. 네놈도 알 거다.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내가 포기하지 못한다는 걸. 날 잘 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럼 내 목적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래, 넌 그러겠지.”


“그럼 닥치고 싸움의 종지부를 찍자꾸나. 알량한 마음으로, 나를 아래로 두는 것은 관두고 말이다.”


이졸탄은 다시 전투 자세를 취했다.


“······.”


솔직하게 말해서 이졸탄의 목적은 나도 잘 모른다.

그가 용사에게 접근한 이유도, 용사를 배신한 이유도, 그의 궁극적인 목적도 전부 말이다.

내가 아는 건 그저 그가 죽지 않으면 멈추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


뇌신의 모습을 벗어던진 이졸탄은 온갖 마법을 부려가며 나를 엄습했다.

형형색색의 절대적인 마법들이 한데 뒤엉켜 쏟아지는 재앙의 파도처럼 밀려 들어온다.

걸출한 영웅들도 저 공격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살아남더라도 큰 희생을 치러야 할 그런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온몸에 털이 곤두선다. 이건 일격에 죽는 그런 공격이었다.


“······후우.”


나는 심호흡했다.

이 세상엔 우습게도 버그도 함께 존재했다. 그리고 그건 인간인 내 몸으로는 상상도 못할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패링이라 불리우는 이 아티팩트는 이전에 설명했듯 졸렬한 기술이다. 실패하면 죽음이었고 성공하더라도 큰 리스크를 짊어지게 만든다.

몸에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무기가 가루가 되어서 사라지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꽈악.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을 견딜 수 있는 무기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조건만 없다면 상대가 누구라든 죽일 수 있었다.

지금 내 손엔 그런 무기가 들려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강대한 적을 죽일 수 있었던 비결.

어느 날 한 유적에서 얻은 내구성이 없는 버그 덩어리의 검은 검. 미스틸테인이 말이다.

이 검과 완벽한 타이밍.

조건만 갖춰지기만 한다면······.


“죽어라!!!”


그 이름처럼 상대가 설령 신에 가깝다고 할지라도 죽일 수 있는 최강의 기술이 존재한다.


「퍼펙트 패링(Perfect Parrying)!!!」


“?!!!”


이졸탄의 공격들이 한 점에 모이는 그 순간을 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코앞, 1평방 센티미터에 닿는 순간 내가 그것을 힘과 각도를 계산해내어 완벽하게 쳐냈다.

아마도 이 다음에 벌어지는 일은 이졸탄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경지를 벗어난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 이게, 뭐, 뭐─?!!!”


이졸탄의 공격들이 전부 상쇄됨과 동시에 갈려져 날아가고 있었다. 반사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범접할 수 없는 일격이 그대로 그를 덮쳤다.


“내, 내가?!!”


그리고 이졸탄도 말이다.

어느 날 보았던 만화의 한 장면처럼 이졸탄은 비명을 지르면서 그가 만든 세상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


내 손에 들린 검과 나는 상처 하나 없었다. 리스크를 모두 상쇄하는 기술과 함께 나는 떳떳하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후우, 그래도 오랜만에 쓰려니 영 힘드네.”


패링의 정수를 모은 기술이었지만


“에이든!”


세상이 붕괴 되어가던 중 멀리서 나엘리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엘리아······.”


비록 모습이 흐려지고 평범해졌지만 나는 그게 나엘리아임을 알았다. 나는 점점 어두어져 가는 세상 속에서 그녀를 보며 슬그머니 웃었다.


“이곳에서 제 할 일은 끝났습니다.”


나는 그 말을 남기고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세상이 암전되었고 다시 눈을 뜨자 그곳은 회장과는 전혀 다른 현실 세상이었다.



·········




한때 저택과 연회장에서 풍기던 불편했던 술자리와 호화로웠던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곳엔 이제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를 구분하기 바쁜 자들과 진상을 파악하기 바쁜 자들만이 남았다. 그리고 일부 측에선 사태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급하게 결론을 내리길 엘프를 포함한 인류의 중요 인사들이 모이는 이 연회를 노린 마왕군의 직접적인 테러라고 ‘확정’ 짓기에 이르렀다.

누구에게나 큰 상처가 남았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피해를 본 엘프들은 비통함에 이 사태에 대해서 의견조차 피력할 여지가 없었다.


“······.”


“대모님.”


그리고 수습한 엘프들의 시신 앞에서 애도를 하던 나엘리아의 곁에 엘프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어떻게 되었나요?”


“인간들은 비열하기 짝이 없더군요. 최대한 협조한다고 겉으로 말을 하지만······.”


“······.”


다음 답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역시 인간종은 믿을 게 못 되네요······.”


그런 나엘리아의 손에는 ‘그’가 주고 간 아티팩트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걸 한참이나 멍하게 바라봤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대모로서 계승 받은 것 중 나엘리아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용을 쓰러트린 그 사람이 일깨워주지 않았더라면 한참 오래 걸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곳에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그녀는 인간들을 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불신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렇게 보고 있자니 막상 자신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대모님?”


옆에 선 엘프가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끄는 샹그리아의 엘프들의 눈에도 불신과 두려움이 한가득이었다.


‘다르지 않다.’


“협조하는 사람들과 만나겠습니다.”


“네?”


나엘리아는 품에서 다른 걸 꺼내었다.


‘미몽의 공간’


그가 파괴하라고 했던 마족의 아티팩트.


“우리 엘프들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도 많습니다. 의심만 가지고 배척하기엔 이미 늦은 때라고 전 생각해요.”


선입견을 떨칠 때였다.

의심은 필요했지만, 화합도 필요했다.


“대모님······.”


그녀가 당당히 앞장서자 반신반의하던 엘프들도 하나 둘 그녀의 뒤를 따랐다.



·········



“부단장님, 지금까지 어디 계셨나요? 걱정했어요!!”


“좀 떨어져, 귀 아프니까.”


아나스타시아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회장에 나타났다.


“사상자는······?”


“그게······, 부상자 3명, 사망자 35명입니다.”


“······많이도 죽었네.”


아나스타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많이도 죽어버렸어.”


아나스타시아는 침울한 얼굴을 했다.


·········

······

···

사건이 일어나기 전.



“너는 교단에서 몇 석쯤 되니?”


주변에 보이는 건 핏자국뿐이었다. 시신은 하나도 없이 오로지 핏자국만 남아 있는 골목에서 이블린과 네리우스 교단의 간부로 보이는 인물이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태가 이상했다. 대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교단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기 싫니?”


빠각.


“?!!!”


교단원의 손가락이 엉뚱한 방향으로 휘어졌다. 하지만 비명은커녕 신음조차 지르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어머, 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입을 막아놔서 그랬던 거였구나. 미안해.”


“흐아!”


그녀는 웃으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포박된 교단원은 숨통이 트며 입을 열었다.


“시, 시발! 대, 대체 너, 네년은 뭐 하는 년이길래?!!”


“음, 듣기 좋은 음색은 아니네.”


이블린이 한 번 더 손짓하자 교단원의 입이 재차 묶여버렸다.


“역시 너보단 아까 전부터 나를 열심히 관찰하던 아이와 대화하는 게 더 재밌을 것 같네.”


이블린이 눈짓을 보냈고 그 시선을 눈치챈 감시자는 과감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상상도 못한 손님이 나를 만나러 오셨네?”


“날 알아?”


“그야 모를 리가 없지. 오밤중에 빛나는 기운을 숨기긴 힘들잖아, 안 그래? 벨라라의 아나스타시아.”


“······.”


“솔직히 의외야. 한참을 열렬한 마음을 가지고 에이든을 지켜보길래 그를 좇아갈 줄 알았는데 설마 나를 쫓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너, 뭐 하는 놈이냐?”


“음, 방금 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받은 거 같은데······?”


이블린은 교단원을 보며 조소를 흘렸다.


“뭐, 너에겐 크게 제약이 걸려 있지 않으니 괜찮을지도 모르려나? 하지만······.”


이블린이 말하는 도중이었을 거다. 갑작스레 교단원의 머리가 피를 흩뿌리면서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이놈은 아니지.”


곧이어 몸통이, 다리가 사라져버렸다.


“아, 맛없어. 매일 이런 것만 먹자니 속에 영 좋지 않단 말이지.”


이블린의 눈이 붉게 빛났고 입가엔 찐득한 피가 묻어나왔다.


“윽?!”


이에 아나스타시아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왜 그래? 벨라라, 아니 그걸 넘어 인류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성전 기사단의 아나스타시아가 이 정도로 놀라면 안 되지.”


“······괴물.”


“괴물이라······, 레다의 종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된 것도 간만이네.”


“······레다?”


“아, 지금은 레이나였나? 어쨌든 그 조그만 꼬마가 참 많이도 컸어. 이렇게 추앙받고 말이야.”


웃으면서 얘기하는 이블린 앞에서 아나스타시아는 이미 성창을 꺼내든지 오래였다. 여차하면 전투를 할 심산이었다.

그도 그럴게 이블린이라는 괴물은 아나스타시아의 눈에는 규격 외의 존재였으니까.


“다시 한 번 묻겠다, 괴물. 정체가 뭐지? 무슨 연유에서 그 남자 곁에 붙어 다니는 거지?”


그러면서 그녀가 품은 본래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에이든이 어떤 사람인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였다.

그가 과연 그녀가 바라던 영웅에 어울리는 인물일지 그게 아니면 그저 괴물에게 휘둘리는 새로운 적인지 확실하게 구분 짓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녀는 영웅으로서 눈앞에 괴물이고 에이든이고 얼마든지 적대할 용의가 있었다.


“흐음.”


이블린은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내 정체, 말이지?”


이블린은 한참을 고심한 끝에 조용히 첫 마디를 입 밖으로 내었다.


“음, 이 정도는 괜찮은 것 같네.”


“······.”


“······그럼 간략하게 말해줄게. 세상엔 말이지. 운명에 따른 인과라는 것이 존재해. 그리고 그걸 관장하는 것이 신들의 역할이지. 여기까진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신들은 제 역할에 따라서 균형에 점지받고 태어나.”


이블린은 손을 펼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인 것이 세상의 이치인 법. 나는 그런 신들과 그 아래 피조물들에 대한 조율을 위해 태어난 존재이지.”


“조율이라고?”


“너도 살면서 나를 본 적이 있을 거야.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보기 마련이지. 내 본모습을······.”


이블린은 펼친 손 하나를 접어 한 곳을 가리켰다.

아나스타시아가 그 선을 따라가 보았고, 그리고 하나의 거대한 것이 눈에 띄었다.


여덟 개의 다리를 가졌고 산을 뒤덮고 구름을 뚫을 듯한 거대한 거미의 시체를······.


약 14년 전의 일이었다.

아나스타시아도 틀림없이 기억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세상의 경계를 한없이 돌아다니며 여덟 개의 눈동자로 세상을 지켜보던 거대한 거미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순간을.

세상에 사는 모든 존재가 그 광경을 보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말이다.


“설마 네가?”


그 말을 듣자 이블린이 웃었다.


“그래, 난 너희들이 입을 모아 말하던 그런 존재야.”


‘세상을 조율하는 여덟 개의 다리.’


실체가 존재하는, 다르게 말해 현신한 ‘신’으로 추앙받던 고대의 생명체였다.


“이 세상은 네가 보는 것 이상으로 많이 망가져 있어. 마왕의 등장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겨버렸지. 조율해야만 하는 내 입장에선 선택해야만 했어.”


“그 선택이 그런 모습이라는 거냐?”


“이 유약한 모습은 그저 희생의 대가일 뿐이야. 많은 걸 희생한 덕분에 난 개변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었지.”


“그 남자는 너에 대해 알고 있고?”


“아마 모르지─, 쿨럭.”


“?!!”


질문에 답하려던 이블린이 갑자기 검은 피를 울컥 토해냈다.


“아, 미안. 방금 질문은 그와 관련되어서인지 제약에 걸리는 모양인가 봐. 균형이라는 놈이 영 예민해서 가끔 이렇게 재수 없게 걸려버리거든.”


순 모르는 얘기 투성이었다.

이블린의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문제라는 것이 비단 단순히 마왕 하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아, 주연이 아닌 네게도 얘기하는 게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상당히 뼈 아프네.”


“그게 네 희생의 대가로군.”


이블린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


무엇이 어찌 됐든 이제 그녀를 평범한 괴물이라고 치부하기에 어려운 존재였다.


“내가 주연이 아니라고 했었지? 그럼내 운명도 정해져 있단 소리인가?”


이블린에게서 더는 답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약에 걸리게 된 이상 웬만한 질문에도 답하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쯧, 개 같은 얘기만 들어버렸네.”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나스타시아 라도라. 네 운명의 끝은 나도 몰라. 아마 균형조차도 모를 테지. 정말로 넌 주연은커녕 조연밖에 되지 못하거든.”


“······.”


“하지만 넌 오늘 의외의 행동을 보여줬지. 원래라면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은 순전히 네가 해결할 문제였거든. 누군가의 인과가 바뀔 일도 없이 말이야. 하지만 네가 변수를 보여줬어. 그러니 이번 기회에 주연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운명이고 지랄이고 난 그딴 거 믿지 않아.”


“종교에 귀의한 기사가 믿음이 참 없네. 하지만 알아. 아나스타시아 라도라는 그런 영웅이니까. 제 신념이 확고하지. 그러니 이번에도 그 신념에 맡기고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어느샌가 이블린은 피를 흘리면서도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점점 모습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잠깐, 야! 나 아직 질문이 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곳에선 조금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시발, 좆 같네.”


·········

······

···

다시 현재.



여전히 의문 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에 잠긴 아나스타시아는 마리샤와 제 기사들을 보았다.


“후우, 뭐가 영웅인지······.”


그렇다고 이 아수라장에서 에이든을 찾을 순 없었다. 찾으려고 한들 이미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


부하들의 시신을 본 아나스타시아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운명이니, 영웅이니······.”


얼핏 달 것 같지만 쓰디쓸 뿐이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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