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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글쟁이 나카브의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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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브
작품등록일 :
2015.09.13 15:24
최근연재일 :
2015.10.17 19:45
연재수 :
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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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
추천수 :
9
글자수 :
4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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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1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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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쪽

Say good bye, good day

DUMMY

“안내 말씀 드립니다. 9시 25분 부산으로 가는 1384번 무궁화 열차가 곧 출발할 예정입니다. 열차를 이용하실 고객분들은 타는 곳 5번에서 탑승해주시길 바랍니다.”


부산행이란 말에 귀가 쫑긋 섰다. 저걸 타면 고향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겠지 싶어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걸 탈 수는 없다. 난 11시 26분에 출발하는 3589번 무궁화 열차를 예약했으니까.


아아, 내가 어쩌다 기차 시간을 착각하고 2시간이나 일찍 오고 만 것일까. 늦게 와서 기차를 놓치는 것보다는 백 배 낫지만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다니. 제때 왔으면 좀 더 푹 자고 올 수 있었을 텐데...


위잉, 위잉-

그렇게 울상을 지으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마치 ‘늦게 나왔어도 푹 자진 못했을 거다’고 비웃듯이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번호를 보니 아빠가 건 전화였다. 딸에게 할말이 있어 전화했나 보다.


이걸 받아, 말아? 어차피 말싸움할 게 뻔한데 그냥 신경 꺼버릴까? 잠깐... 그랬다가는 무슨 후환이 생길지 알 수 없다. 고향에 도착했더니 문을 안 열어줄지도 몰라. 하지만 전화를 받으면 분명 기분이 엉망진창이 될텐데 어쩌지?


위잉, 위잉-

한참을 고민하는 와중에도 진동이 끊이질 않았다. 시간은 9시 26분, 아빠가 전화를 건지 1분이나 지났다. 아무래도 딸과 꼭 통화를 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저 의지를 억지로 뿌리치려 한다면 분명 아빠도 실력 행사를 하고 말겠지.


그리고 전화를 안 받는다 해도 계속 걸어올테고... 어차피 고향 도착하면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다. 싫은 소리 들을 게 뻔하지만 피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데 눈 딱 감고 전화나 받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화면을 터치하는 순간, 싸한 느낌이 서려있는 아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미냐?”


“네 아빠.”


“일단 졸업 축하한다. 기숙사 짐은 다 정리했고?”


“들기 어려운 건 택배 보냈고요. 가면서 볼 책 몇 권만 챙겼어요.”


“읽을만한 책으로 골랐겠지? 유익한 것만 골라봐도 부족한 인생이다.”


또 잔소리. 속으로 울컥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뭐라 말을 잘못했다가는 아빠가 ‘또 책이라 할 수 없는 종이뭉치를 보고 있는 게냐’고 언성을 높일 테니까.


그 소리를 들으면 쓸데없는 종이뭉치라니 무슨 소리냐고 벌컥 화를 내겠지. 하나는 3D 디자인 관련 교재, 나머지 하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의 원화집이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겠다는 꿈을 품게 해준 소중한 보물들이다.


문제는 아빠가 이 책들을 불쏘시개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내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을 듯 하다. 이 책들의 가치를 부정당하는 건 나 자신을 부정 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그러니 아무 말 하지 말자. 내가 기차 안에서 이 책을 볼 거란 사실을 내색하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감정 소요를 막을 수 있으리라.


바로 그때, 스피커 너머로 예상하지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에 네가 보낸 거.... 포트폴리오라고 했냐. 네가 유학 가서 게임 만드는 거 공부하고 싶다며 보냈던 그래픽 작업물 말이다.”


포트폴리오라면 설마... 해외 게임 개발사에 취직하고 싶으니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게임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겠다며 만든 그 작업물 말인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용도로 만들었던 것인데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아빠에게도 보냈었지.


아빠는 보수적인 사람이라 내가 누구나 존경하고 부러워할만한 직업을 가지길 원하셨고, 내가 그림 그리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다. ‘그건 재능이 없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는 직종이다’라며 그림 그리는 데에 관심을 끊길 강요하셨지.


그래서 포트폴리오를 보내면 아빠한테도 인정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이 정도로 잘한다고, 이 정도로 재능도 있고 열정도 있으니 내 꿈을 쫓아가도 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생각을 하고 포트폴리오를 아빠 메일로 보낸 게 한 달 전 일이었는데, 드디어 아빠가 그에 대한 답을 하려고 생각하신 걸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예상한대로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하시려나? 아니면 꿈 같은 반전이 일어날까?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댄다. 고동이 점차 거세지고 그 진동이 머리 끝까지 올라와 귓가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능 치고 결과를 확인할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디자인과 교수에게 물어봤다. 그러니... 전공으로 배우지 않고 독학만 해서 그렇게 만든 게 대단하다더구나.”


순간 귀를 의심했다. ‘대단하다’니. 물론 아빠가 직접 말한 소감은 아니지만 아빠가 내 작업물을 보고 저런 단어를 말하는 날이 오다니. 잘못 들은 거 아닐까?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 아닐까?


“너 정도라면 조금만 더 공부하기만 하면 이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 애썼구나. 장학금 자격 유지하면서 독학으로 너 하고 싶은 걸 하고. 그러면서 유학 준비도 하고, 비행기 값도 벌고... 물론 그러느라 졸업이 늦어진 건 아쉽지만 말이다.”


가슴이 점점 더 빠르게 뛴다. 거기다 등줄기를 따라 짜릿한 감각이 올라오고 있다. 그동안 내가 하고 싶던 일을 이해하려고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아빠가 ‘애썼다’는 말을 해줄 날이 올 줄이야.


기뻐서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밀랍과 깃털로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올랐던 이카루스가 된 느낌이야.


헌데 그게 실수였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태양 가까이 접근할 정도로 높이 날아오른 이카루스가 어떤 운명에 처했는지 잊고 말았다.


“근데 세미야. 그 정도의 노력을 다른 데에 기울였다면 더 편하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단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면 안 되겠니.”


그랬지. 강렬한 태양빛을 받은 탓에 밀랍과 깃털로 이뤄진 날개가 녹아 흘렀고 이카루스는 추락해 죽고 말았었지. 그때 이카루스의 심정이 이랬을까. 아빠의 말을 칭찬으로 곧이곧대로 듣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기분에 취했다가, 실제 아빠의 의도를 눈치챈 뒤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곱씹게 된 나처럼 생각했던 것일까.


“아빠!”


“세미야. 이건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란다. 가족이니까 현실을 이야기해주는 거야”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된 나는 항의를 하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아빠가 비겁하게 가족이란 낱말을 들먹이며 내 말을 잘라버린 탓이었다.


“세미야. 네 성적 들고 가서 시험만 몇 번 치면 대기업에도 들어갈 수 있어. 여유롭게 생활하고 싶다면 대학교 교직원이 되면 그만이야. 제시간에 퇴근하는데다 정년이 보장된다고.”


“아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고생길이잖냐. 너는 좋아하지만 세상은 그 직업을 좋게 안 봐. 정부만 해도 게임을 중독물질이라고 하잖니.”


“아빠도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을 믿는 거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든 하지 않든은 중요하지 않단다. 세상이 그렇게 생각하니 별 수가 있니? 사회에서 두루 존경 받는 직업을 선택해야 인생이 편안해진단다. 헌데 그 직업은 적어도 부모되는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받을 게 뻔하잖니. 나도....”


“그만해!”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힌 나머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밉다. 어른들은 젊어서는 고생을 사서 한다고 말하는데, 왜 내 꿈을 위해서 고생을 사서 하겠다 하면 이렇게 말리는 것일까? 그 생각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아빠에게 대들었다.


“그러니 해외로 나가겠다는 거잖아. 내가 무슨 직업을 가지든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곳에 가서 열심히 살겠다 하잖아!”


바로 그때, 아빠가 내 약점을 찌르고 말았다.


“그 꿈 이루겠다고 낯선 곳에서 외롭게 살겠다고? 네가 지금까지 이뤘던 걸 버리고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하겠다고?”


치사하다. 허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내가 유학갈 준비하면서 계속 고민했던 점을 아빠가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네 페이스북 봤다. 친구를 정말 많이 사귀었더구나. 네가 내성적인 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 붙임성이 좋을지 몰랐어. 다시 봤다.”


“...”


“그중에는 확실히 흥미로운 직업을 가진 친구도 있고, 세상 바라보는 눈을 넓히는 데에 도움을 줄만한 친구도 보였다. 가능하면 네가 그 친구들과 오래오래 같이 지냈으면 한다. 그런데... 네가 해외로 가게 되면 그 친구들과 잘 지내기 어렵게 되잖니.”


“아빠.”


“거기다 네가 이룬 성적과 이력은 국내에서는 정말 쓸 데가 많단다. 하지만 유학을 가서 전혀 엉뚱한 계통인 게임 개발을 하게 된다면.... 영문학과에서 갈고닦은 영어 회화 말고는 쓸 수 있는 이력이 없어진단다. 네가 대학 생활하면서 쌓은 자산이 물거품이 된다고.”


“...”


“더군다나 그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을 수 있는 건 뭐니? 그쪽 이야기 들어보니 이직도 자주 하고 여러 모로 생활이 불안정해보이던데. 거기다 기술은 점점 발전하고 시장의 요구는 시시각각 달라지니 끊임 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도 있을 거 같아 걱정되는구나. 나중에는 너보다 젊고 세상 돌아가는 흐름도 빨리 읽고 일도 금방 배우는 사람들과 경쟁해야 할테고...”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 스스로도 내가 쌓아온 자산을 버리고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불안하긴 하다. 나도 이 꿈을 이루겠단 생각만 하지 않았어도 대학 생활 동안 쌓은 자산을 활용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으리라.


그렇지만 내가 내린 결정이라고. 아깝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이룬 것을 잊고 새로 출발해야 한다고 각오했단 말이야. 그 각오가 얼마나 깊은지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고. 안 그랬으면 게임 아카데미 입학 허가를 받기 위해 밤낮을 고생하는 수고 따윈 들이지 않았을 거라고.


헌데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왜 아빠는 인정해주지 않는 걸까. 그 정도의 각오를 다질 마음가짐으로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게 좋다는 딴 소리만 하는 걸까. 정말 듣지 싫다. 아빠고 뭐고간에 전화를 확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물론...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불만을 삼키는 것뿐이지만.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네가 정 하고 싶다면 나도 그만 말리마. 그래도 게임 만드는 전문대에 들어가겠다는 게... 마뜩잖긴 하구나.”


이윽고 전화가 끊어졌다. 통화 시간은 10분 남짓밖에 안 됐는데 어째 4시간짜리 시험을 본 것마냥 몸이 축 늘어진다. 완전히 지쳐버린 나는 벤치에 주저앉으며 아빠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무심결에 내뱉고 말았다. 아주 억울하고 분한 심정을 담아서.


“전문대라니... 게임 아카데미라고. L.A.G.A. 몇 번이나 말해도 기억을 못해.”


여담으로 저 ‘전문대’란 표현은 아빠의 편견이 반영된 낱말이다. 체통 있는 국립대 교수님인 아빠는 전통적인 학문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 기관을 취업 알선소로만 폄하하고, 그런 곳을 싸잡아 전문대라고 얕잡아 부르는 경향이 있다.


내가 천신만고 끝에 입학 허가를 받은 곳을 아빠는 저렇게 깔보듯 말하니 참....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혀 꿈쩍도 못할 것 같다. 하긴, 전문대 아닌 아카데미라고 반항했다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거 아니다’며 나를 더 비참하게 몰아갔겠지.


그러나 아빠가 저런 폭언을 한다 해도 시원하게 말대답할 수는 없는 법. 아무리 내가 돈을 저축했다 할지라도 그래픽 공부에 집중하려면 집안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아빠가 모진 말을 해도 꾹 참고 이성적으로 차근차근 설득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하아 진짜... 6년 동안 전공 공부하면서 그래픽 공부 같이 하고, 거기다 아빠 설득할 준비하는 노력을 딴 데다 기울였으면 벌써 독립하고도 남았겠다. 어쩌면 아빠가 그토록 준비해보라고 강요하던 외무고시도 합격할 수 있을지도...


“흑...”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울음이 새어 나온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고 세상만큼 자신을 혹독하게 굴리는 것은 없다지만 나는 왜 정반대인가 싶어 서러움이 복받쳐 오른 탓이었다.


세상으로부터는 충분히 인정받았다고. 일러스트 공모전 수상 경력도 있고. 원화 그리는 외주로 돈도 벌어봤고... 내가 그린 카드가 포함된 모바일 게임도 나름 잘 나가는 중이란 말이야. 내가 그린 카드는 죄다 애매한 등급뿐인지라 사람들이 반기지 않을 뿐이지...


3D 그래픽 쪽은 아직 공부하는 중이지만 그래도 싹수가 보인다는 칭찬은 받았단 말이야. 근데... 근데 세상은 날 인정했는데 가족인 아빠는 날 인정하지 않는 걸까. 어렸을 때 ‘넌 재능이 없으니 안 돼’란 꾸중을 듣고 열심히 능력을 쌓았더니, 이젠 ‘그 노력으로 다른 걸 하면 훨씬 더 편하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으니 안 돼’라며 날 막으려 든다.


근데 한편으로는... 아빠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도 좀 든다. 나 같은 괴짜는 마음 터놓고 지낼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고. 근데 천운이 뒤따라준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단 말이지.


특히 게임 동아리 사람들은 정말이지... 아무리 귀한 재화를 준다 해도 얻을 수 없는 귀한 관계다. 중증 덕후이긴 하지만 내게 3D 그래픽을 가르쳐준 승표 선배, 게임 BJ일하면서 틈틈이 내 그림 보고 귀한 조언을 던져준 유림이, 거기다 늘 투덜대지만 나와 늘 손발을 맞춰줬던 정우....


든든한 도우미들이었지. 아마 평생을 걸쳐 나한테 그렇게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다시 만나기 힘들 거 같아.


그런 걸 생각하면... 정말 국내에 눌러앉아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직장 잡고 틈틈이 친구들 만나며 즐겁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왜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거지. 이미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했잖아. 유학 갈 거라고. 그래서 어제 승표 선배와 유림이가 환송회를 해줬잖아. 응원하겠다며 말이야. 뭐... 정우 놈이 용무가 있어서 빠졌지만.


기껏 응원 받아놓고 마음이 약해지면 어떡하니. 정신 차려라 윤세미. 이미 아카데미에는 입학하겠다고 메일까지 보내뒀어. 아빠를 완전히 설득하지 못했다고 기 죽으면 어쩌라고.


그런데.... 그래도 왜이리 힘이 안 나는 걸까. 아무리 나 혼자 힘을 불어넣으려 해도 한계가 있다. 누가 좀 옆에서 끌어당겨줬으면 좋겠어.


바로 그 순간,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화면을 손가락으로 훑으니 예상 밖의 인물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출발했냐?]


발신자는 어제 내 환송회에 참여하지 못했던 정우였다. 이 녀석, 게임 웹진 인턴 기자로 뽑히자마자 러시아에 파견을 나가서 얼굴을 못 보나 했더니.


[뭐야? 러시아 게임사 취재 간 거 아니었어?]


[내가 언제까지 동토에 처박힐 것 같더냐? 새벽에 귀국했다]


[너라면 쿠빙카 박물관에서 탱크 구경한다고 며칠 더 눌러앉았다 올 줄 알았지. 하드코어 게이머에 밀덕이잖아]


[밀덕 아니다. 그리고 날 하드코어 게이머로 만든 게 누군데 시치미를 떼시나?]


조금 전까지 울상이었던 얼굴에 쓴웃음이 스쳐갔다. 그렇지. 이 녀석은 원래 게임의 게자도 몰랐던 범생이였지. 근데 내가 친구 초대 이벤트로 레어 아이템 받겠다고 이 녀석에게 억지로 MMORPG를 시켰고... 그 뒤로 장르별로 게임을 하나씩 섭렵해나가더니 게임 기자로 덜컥 취직해버렸지. 졸업 학점도 아직 덜 채웠는데도 말이다.


한 마디로 나 때문에 인생이 바뀐 사내다. 뭔가 뿌듯하면서도 씁쓸하군. 응응. 어쨌든 웬 일로 내게 문자 준 거지? 얘가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드문데


[무슨 일이야? 기사 쓴다고 철야 작업했을 텐데.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고]


답장은 금방 오지 않았다. 상대가 문자를 작성하는 중이라는 ‘...’ 표시만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길 반복했다. 이상하네. 이 녀석은 글로만 쓰는 리포트는 휴대폰으로 써버리는 변태인지라 장문의 문자도 재깍재깍 날려보내는데.


아, 생각났다. 있는 그대로 말하기가 쑥스러워 돌려 말할 표현을 고를 때 이런 패턴을 보이지. 그래놓고 누가 봐도 본심이 뻔히 드러나는 말을 해서 놀림거리가 되고. 우리 말로 하자면 새침데기, 승표 선배가 주로 쓰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츤데레라 하지.


그래. 이번에는 대체 무슨 표현을 쓰나 보자. 실컷 놀려서 정우 본인이 이불을 걷어차며 곱씹을 추억거리로 만들어주지. 그러나 문자가 언제 오나 싶어 휴대폰에만 시선을 집중하던 그 사이에


텁-


“헉, 헉... 찾았다. 크흠.”


어느새 달려온 정우가 내 어깨를 붙잡아버렸다. 나는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우를 쳐다보다가


“어... 이번 문자는 꽤나 참신한 패턴인데? 제 점수는요-“


“셧업. 그 입 다물라.”


반가운 기색을 감추기 위해 농을 걸었다가 정우에게 핀잔을 받고 말았다. 굴욕인데 이거. 평소와는 달리 정우에게 내가 당할 줄이야.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너 고향 들렀다가 로스엔젤레스로 간다는 거, 승표 선배하고 유림이도 어제 간신히 들었다며?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안 하고 말이야. 인정머리 없게...”


“너한텐 중요한 시기잖아. 기사 쓰는 감을 못 익혀서 절절 매다가 이번에 영어 잘 하고 밀덕질할 줄 아는 인력이 필요하다고 러시아 가게 됐잖아? 일에 집중하라고 말 안 했지.”


사실은 정우에게 알리려 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근데 그렇게 말하려니 쑥스럽잖아. 해서 이것저것 변명을 섞어봤는데


“야 윤쎔. 내가 들으면 일에 집중 못할 정도로 중대한 일이라면 말이야. 내가 못 들었을 때 굉장히 섭섭해할 거란 생각은 안 해봤냐?”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내가 정우한데 말빨로 밀린 적이 없었을텐데 왜...? 바로 그 순간, 정우가 티슈를 하나 던지더니 등을 돌렸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이건 왜?”


“필요할 거 같아서. 그 이상은 말하지 않을테니 거울 보고 직접 확인해봐.”


그 말을 듣고 휴대폰 카메라 앱을 실행해봤다. 그리고 여기저기 훑어보고 뭐가 문제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 아빠하고 전화하고 난 다음에 찔끔 흘렸던 눈물이 번져 있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이런 약한 모습을 보여주다니 내가 정신줄을 놨구나. 부끄러운 나머지 티슈를 듣어 후다닥 눈물을 닦았다. 그 동안 나를 등진 채 무심하게 서있던 정우놈이 입을 열더니


“아까 전화 연결이 안 되던데. 무슨 일 있었냐?”


눈물을 닦으라 할 때는 넌지시 돌려서 말하더니 이번에는 직구를 던졌다. 이 녀석, 섬세하게 대할 거라면 끝까지 섬세하게 대해주란 말이야.


하지만... 볼멘소리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아빠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어 응어리졌던 말들이, 봄바람에 녹아 흐르는 눈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게...”


있는 그대로 말해줬다. 내가 게임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했던 일들도, 게임 아카데미 교육 과정을 끝낸 뒤 해외 게임 스튜디오에 취직하겠다는 포부도, 집안의 도움을 받기 위해 내가 이 일을 잘할 수 있다는 점을 아빠에게 보였다는 점도, 그러고도 아빠는 마뜩잖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점도-


“근데 나도 참 별 수 없는 게.... 아빠 말에 반항심이 들면서도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들거든. 정말 이 길을 선택하고도 후회 안 할 수 있을까, 꿈을 이루기 위해 포기한 것들만큼 가치있는 걸 얻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


“각오는 정말 깊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려니까 마음이 흔들리긴 하다. 헤헷. 아빠 말대로 지금까지 했던 노력을 다른 데 투자했다면 더 편하게 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 거기다...”


“거기다?”


“가서 우리 동아리들처럼 마음 잘 맞고 손발도 잘 맞는 사람 구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솔직히 자신 없어. 나 같은 괴짜가 마음을 터놓고 지낼 상대를 찾긴 힘들거든. 동아리는 정말... 잭팟이 터져서 만들 수 있었던 인간 관계였고.”


아마 평생의 인복이 모두 터진 거 아닐까 싶다. 그러지 않고서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 한데 모일 리가 없잖아.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상처 받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해야 하는 그런 처지 말이다.


그렇네. 생각해보니 전부다 같은 처지였네.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로 분장하다가 프로 코스프레 팀으로 데뷔했고, 안 좋은 일이 생겨 팀이 흩어졌지만 다시 재도전하려고 노력하는 승표 선배.


방송 PD를 꿈꿨지만 관련 학과에 편입하는 데에 실패했고, 결국 그 꿈을 다른 방향으로 이루고 싶다며 게임 BJ 일을 시작한 유림이.


실용적이지 못한 공부와 취업 스펙 쌓는 데에 질려서 게임을 시작했지만, 그와중에 꿈을 찾아 게임 기자일을 시작한 정우.


그리고... 게임이 너무 좋아서 언젠가는 직접 만들고 싶다며 그래픽 디자인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한 나.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꿈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고, 이루기 힘들다는 꿈을 쫓으려 노력했지. 그랬기에 함께 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서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힘을 얻을 수 있었는데...


내게 긍정적인 자극을 주던 사람들을 못 보게 된다 하니 갑자기 자신감이 떨어지려 한다. 아빠와 통화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또 다시 막막한 감정이 밀려오려 한다. 헌데 그 순간-


꼬르륵.

거짓말할 줄 모르는 몸이 배고픔을 호소한다. 생각해보니 아침 안 먹고 나왔지. 그 모습을 보고 정우는 솔깃한 제안을 했다.


“나도 만사 제치고 공항에서 역까지 오느라 아무 것도 못 먹고 왔거든. 뭐라도 먹자.”


“음... 그래야겠네. 근데 뭐 먹지?”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대화가 이뤄졌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러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낯선 음식에 시달려서 말이야. 우리식으로 먹고 싶은데...”


“한식 먹자고? 1층으로 내려갈까?”


“무슨 소리야. 한국인은 치킨이지.”

진심으로 고백하건대 여기가 동아리실이었다면 ‘미친 놈아’라고 고함을 빽 질렀을 것 같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조선시대 선비 같던 놈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내가 한 몫하긴 했지만.


“...”


“왜? 뭐 그런 썩은 표정을 짓고 그래?”


“치킨은 한식 아니거든요? 러시아에서 낯선 음식 먹느라 고생했다는 사람이 치킨을 찾는다 하니 이상하거든요?”


“치킨 무시하냐? 한국 유학생과 한국에 체류해본 외국인이 가장 먹고 싶어하는 한국 음식이라고.”


“뭔 소리야 그게?! 그리고 역에 있는 치킨 매장이라고는 K*C밖에 없거든? 그거 미국식 후라이드거든?”


정우 놈의 뻘소리에 황당해진 나는 마구잡이로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이놈이 빙긋 웃더니


“잘 됐잖아. 네가 가장 좋아하는 패스트푸드 브랜드 아니었어?”


“어...?”


“학교 근처에 KF* 매장 사라졌을 때는 든든하게 치킨 하나 뜯고 하루를 시작하는 낙이 사라졌다며 징징거리던 애가... 사양하지 말고 일단 먹자고. 나 같은 수전노에게 얻어먹을 기회가 흔한 줄 아냐?”


확실히 이놈에게서 뭘 얻어먹는다는 것은 희귀한 경험이긴 하다. 그래서일까. 터무니없는 말장난에 놀아나 자리에 앉고 말았다. 놀림감으로만 생각했던 정우의 페이스에 말려들어서.


“주문하신 버거의 패티와 텐더를 새로 튀겨야 해서 시간이 걸릴텐데요. 기다려주실 수 있겠나요?”


“윤쎔! 기차 언제까지 타야 해?”


“어... 11시 25분?”


“1시간 넘게 남았네. 여유 있게 기다리자고.”


그러고는 속 편하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적당할 때 왔네. 갓 튀겨서 바삭바삭하고 따끈한 걸로 먹을 수 있겠어.”


그 소리가 이상하게 들린 탓일까. 나도 모르게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딴지를 걸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이 늦게 나오는 걸 더 반긴다니... 굉장히 역설적으로 들리네 그 말.”


그러나 녀석은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 했다.


“뭐 어때. 너도 인정했던 사실이잖아. 음식을 맛있게 먹는 법은 두 가지. 첫째는 갓 만든 음식을 먹을 것. 둘째는 충분히 기다려서 입맛이 돌 때 먹을 것.”


그렇게 운을 떼고 난 뒤에는 빠르게 세 치 혀를 놀려댔다.


“저거봐. 자글자글 끓는 소리가 근사하지 않아? 듣기만 해도 튀김옷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게 떠오르잖아.”


“뭐... 그건 그렇지.”


“거기다 중간중간에 톡톡 터지는 소리도 근사하고. 수분이 날아가면서 팝콘처럼 부풀어 오른 튀김옷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신호잖냐. 그 입에 넣으면 까슬까슬하고 바삭바삭한 감촉을 주는 그 모양새 말이야.”


“그런 걸까...?”


“물론. 어쨌든간에... 보기만 해도 맛나 보이네. 아마 씹는 순간 바삭바삭거리는 소리가 입 속에서 울리겠지. 그 근사한 소리에 절로 침이 고이고 손이 바삐 움직일 테고... 이윽고 튀김옷이 침에 적셔질 무렵에는 짭쪼롬한 맛과 은은한 후추향이 입 안 가득 퍼지겠지.”


“야 잠깐 뭔가 표현이 지나치게 거창해지는...”


“맛깔나는 향에 자기도 모르게 턱에 힘을 주겠지. 그럼 이가 단단한 튀김옷을 찢을 테고, 그 사이로 흘러나온 기름지고 고소한 육즙이 혀를 적시게 될 거야.”


꿀꺽.



“그 맛에 홀려서 좀더 육즙을 핥으려 드는 순간에는 결국 알아채고 말겠지. 부드러운 살코기가 혀에 감겨오는 황홀한 감촉을 말이야.”


“..”


“이건 갓 튀긴 닭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미리 만들어놓고 쟁여둔 닭을 사가는 사람은 결코 누릴 수 없는 행복이라니까? 이만하면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이 늦게 나오기를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냐?”


바로 그 순간, 카운터에 있는 직원이 나와 정우를 번갈아 보고는 풉하고 뿜어버렸다. 하긴 공공장소에서 저런 쓸데없이 장엄한 치킨 찬미가를 읊는 놈은 처음 보긴 하겠지.


물론 나도 뿜어버렸지만. 정우 녀석의 행동이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거니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범생이였던 놈이 이렇게까지 변해버렸단 사실도 우스웠으니까.


“너 참 많이 변했네.”


“어느 게임 좋아하는 여자애 때문에 말이지.”


“웃기는 소릴. 난 공공장소에서는 기행을 안 저지른다고. 자기가 덕후란 걸 감추지 못하는 승표 선배 영향을 받았겠지.”


“그 아저씨하곤 비교하지 말라고. 승표 선배에 비하면 난 정상이잖냐?”



그렇게 평소처럼 정우와 투닥거리려는 순간, 녀석은 주문한 음식을 받아들고는 이런 말을 내뱉었다.


“그래. 이제야 보기 좋아졌네. 역시 너한테는 울상 짓는 표정은 어울리지 않아. 화를 내든 웃음을 터뜨리든 날 놀리든... 그런 표정이 더 어울린다고.”


녀석의 엉뚱한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덕분에 아빠와 통화하면서 느꼈던 막막한 감정들이 뇌리에서 밀려났으니까.


설마, 이 녀석 무리수 두면서까지 내 관심을 돌리려 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봤자 가슴이 답답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는 잠시 접어두는 편이 낫겠다며 말이다. 하지만 직접 권유해봤자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내가 벙찔만한 뻘소리를 늘어놓은 것일까.


“크흠. 자, 일단은 먹자고. 배고프잖냐. 이야기는 조금 있다 나누자고”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로 향했다. 저 반응 보니 설마가 사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 나한테 표정 안 보일 때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등을 돌리는 버릇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고마워해야 할 거 같다. 덕분에 기분 전환은 제대로 했으니.

.

.

.

어느덧 기차 출발 시간이 20분밖에 안 남았다. 식사를 마친 나는 정우와 함께 승강장으로 나왔다. 눈이 살짝 흩날리고 있었지만 뭐 어때. 적당히 추운 편이 기분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데에 도움이 되는걸. 이렇게 겨울 날씨의 힘을 빌려 머리를 식혀 차근차근 아빠를 설득할 방법을 생각해봐야지.


으음, 근데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정우와 만나기 전처럼 막막한 기분은 들지 않는데 그래도 가슴 한 켠이 답답한 게 사실이다. 어떻게 할까. 녀석이 쓸모가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일단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는 편이 나으려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길한 예상이 맞아떨어지고 말았다.


“네 아버지? 으음,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너도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지 않았어? 갑자기 게임 기자 하겠다고 전공 버렸잖아. 나하고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데 네가 어떻게 했는지 이야기해봐. 참조 좀 하게.”


“어... 나 아직 집안에 이야기 안 했는데? 아마 이야기하면 어머니가 호적에서 내 이름을 파내려 들걸?”


이런 도움 안 되는 자식 같으니라고. 근데 딱히 뭐라 할 수는 없다. 이 녀석이 나한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나도 모르겠는걸 데헷?’하고 넘어간 경우가 많았으니. 뿌린대로 거두리란 말대로 된 거다 하고 포기해야지 원.


“하는 수 없지. 그럼 두 번째 질문. 전공과는 완전히 상관 없는 일을 시작했잖아. 그거 때문에 마음 고생하지는 않았어?”


“많이 했지. 지금도 고생하고 있고. 기사 쓸 때마다 계속 혼나고 그러고 있는 걸. 하핫. 주변 사람 경험담이라도 참조하고 싶은데 딱히 그럴만한 사람도 없고 영 고생하고 있지”


으음 역시 도움 안 되는 녀석이야.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내 마음도 무거워지잖아. 나도 전공 버리고 맨주먹으로 출발해야 하는 상황인데... 힘들지만 그래도 잘 적응하고 있다느니 너도 그렇게 될 거라느니 입에 발린 말이라도 해주면 어디 덧나나.


“고생 실컷 하고 있는 거네.... 그럼, 포기하고 다시 전공 살릴 생각은 안 들어?”


녀석의 이야기로는 위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일까. 나도 모르게 심술이 섞인 말을 내뱉고 말았다. 허나 녀석은 거침없이 응수해줬다. 내가 줄곧 했던 말이면서 잊고 있었던 말로 말이다.


“아니 딱히. 지금 하는 일이 적성에 맞는지는 몰라도 계속 하고 싶으니까. 그리고 힘들긴 하지만 내가 먼저 그만둘 생각은 없어. 가장 재미있고 짜릿한 순간이잖냐.”


“재미있는 순간...?”


“네가 그랬잖냐. 가장 신나는 때는 새로운 걸 해보는 순간이라고.”


“음? 그런 말 했었나?”


“했어. 네가 한 게임만 매달려 하지 않고 이 게임 저 게임 옮겨다니는 걸 보고 왜 그러냐 물었더니 그랬잖냐. 새로 키울 때가 가장 재미있고 두근두근하니 그렇다고.”


아, 맞다. 그런 말 했었지. 하지만 딱히 의미를 두지 않고 한 말이라 잊고 있었다. 근데 이 녀석은 그 말을 자기 인생에까지 적용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게임하면서 대충 던졌던 말을.


“그리고 그 말도 했잖냐. 게임 옮길 때마다 그 전에 하던 게임에서 키워뒀던 캐릭터를 버리게 되는 셈인데 아깝지 않냐고 물었더니...”


“이미 시간을 쏟아 부은 게임이 아깝다며 새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는 건 더 아까운 짓이다, 라고 했었지.”


“바로 그거. 꽤나 인상 깊었다고 그 말.”


씁쓸해지네. 나는 가볍게 말했던 말인데 이 녀석은 그 말을 인생 전체에 적용하고 있는 상황을 곱씹어보니. 난 대체 이 녀석 인생을 얼마나 바꿔버린 거야. 범생이를 하드코어게이머로 만들고, 졸업해서 공무원이나 할까 하던 녀석을 게임 기자로 만들어버리고...


바로 그 순간, 정우 녀석이 가볍게 주먹을 쥐고는 내 어깨에다 툭 갖다 댔다. 익숙한 행동이다. 정우 녀석이 자기 사고관으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목격해서 멘탈이 나갈 때마다 내가 해줬던 행동이지.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줬던 게 바로 너야. 분명 잘할 거야. 낯선 곳에 간다 해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 해도...”


“하지만...”


“대학 입학할 때 생각해봐. 처음부터 네가 지금의 인간 관계, 지금의 이력을 쌓고 들어온 건 아니잖아?”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서울역 로비로 향하는 계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6년 전 같은 장소에 한 여자애가 서 있었지. 홀로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니며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주변을 기웃거리던 여자애가.


그 여자애는 정말 불안해하고 있었지. 서울에 있는 대학만 가면 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부모님의 말에 따라 죽어라 공부했지만 정작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어. 고향 땅을 떠나 아는 사람도 없고, 낯설기만 한 기숙사에 들어가 생활하려 하니 막막했고, 전공은 자기 관심사와 거리가 멀었고.


그래서 서울역에 한참 주저앉아 멍하니 있었지.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잊어버리고 있었네.


만약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일단 꼭 안아주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할 거다. ‘괜찮아, 모든 게 잘 될 거다’라고. 실제로 그렇게 됐으니까. 사람도 많이 사귀었고, 결국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결심해서 게임 아카데미 입학할 준비도 해냈고.


뭐... 아직 부모님에게 내 진로를 허락받지 못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본래 목표한 것의 9할은 달성하지 않았는가.


그래. 세상물정 모르던 고등학생이 이렇게까지 훌륭히 성장했다. 그렇다면 자기 하고 싶은 일 하겠다며 홀홀단신으로 유학길에 오른 여대생도 유능한 그래픽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하루 종일 힘이 들어가던 미간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표정에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근데 거울을 봐서 확인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내 얼굴을 보던 정우가 빙긋 웃고는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걸 봐선, 분명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겠지.


“그런 거야. 처음부터 만렙으로 시작하는 게임은 없는 법이야. 인생도 그렇거니와.”


“...게임 폐인 다 됐네. 게임과 인생을 같은 선에 놓고 말하다니 네가.”


“인생을 부캐릭터 없는 MMORPG라 말한 건 네가 먼저라고, 윤쎔.”


“뭐야 그거, 오글오글해.”


“틀린 말은 안 했잖아. 넌 진짜 그런 말을 당당히 하던 애였다고. 그리고... 난 그런 말을 병신 같지만 멋있어라고 생각했던 놈이고.”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11시 26분 부산으로 가는 3589번 무궁화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열차를 이용하실 고객 분들은 타는 곳 5번에서 탑승해주시길 바랍니다.”


기계 소리가 섞인 안내 방송이 나오기 무섭게 열차가 진입해왔다. 아마 5분 정도 대기하고 서울역을 떠나리라. 하지만 너무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짐을 실으려면 지금 타는 게 여러 모로 편할 테니까.


근데... 벌써 타려니 조금 아쉽네. 이젠 정말 정우와 작별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니.


그런 아쉬운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 녀석은 내 등을 떠밀어줬다.


“가라. 지금 타서 짐 실어두는 게 여러 모로 편할 테니까.”


“뭐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출국할 때 다시 연락해라. 문자로라도 배웅해줄 테니까. 그리고...”


녀석은 자기 가방 속을 열심히 뒤지더니, 종이 봉투에 담긴 뭔가를 꺼냈다.


“이건 뭐야?”


“너한테서 빌린 책. 잘 봤다. 여러 모로 도움 됐어.”


안 돌려줘도 상관 없는데. 하여간에... 기자 되면서 성격이 많이 변했나 싶었는데 융통성 없는 건 고쳐지지 않았나 보다.


“자 그럼 잘 지내라고 정우. 나 없다고 심심해하지 말고.”


“심심할 겨를이 없다. 너나 물 건너가서 외롭다고 징징대지 마라.”


“흥, 나도 그럴 겨를은 없을 거라고!”


이윽고 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창문 너머에는 한발짝 물러난 채 손을 흔들어대는 정우의 모습이 보인다.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녀석은 나더러 힘내라고 말했으니까. 지금 쓸쓸한 표정을 짓는 건 정우의 노력에 배신하는 꼴이니까.


그래, 나의 둘도 없는 조력자의 정성을 받아들여 좋은 생각만 하자. 어쨌든 내 꿈을 이루러 떠나는 길이니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아빠도 내가 뜻을 꺾지 않으면 말리지 않겠다고 말은 하지 않았는가. 아빠가 삐쳐서 집안의 지원을 못 받게 되더라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현지에서 돈 벌면서 배우기라도 할 생각이니까.


그래. 그러니 홀가분하게 떠나자. 서글픈 생각도 외롭다는 생각도 모두 놓아버린 채, 맨주먹으로 새로이 시작할 나날을 기대하자.


그나저나... 정우 이 녀석 대체 무슨 책을 돌려준 거지?


부스럭.

눈에 젖지 말라고 싸둔 종이 봉투를 펼친 순간, 내 입가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아, 이 책. 정우 녀석 격려해준다고 빌려줬던 책이로구나. 근데 공교롭기도 하다. 어째 내 상황에 읽으면 딱 어울릴 법한 책이 지금 이 순간, 시기적절하게 돌아올 줄이야.


책 제목은 ‘갈매기의 꿈’.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 싶어하던 갈매기가 꿈을 이루는 이야기였다.

.

.

.

윤세미가 떠난 뒤, 하정우는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본래대로라면 서울의 사무실로 돌아가야 남은 원고를 마감해야 한다는 처지 말이다.


정우는 2박 3일 동안 러시아 게임사가 모스크바에서 주최한 행사를 취재하고 귀국했다. 행사장 포토 뉴스는 진작에 올려뒀지만 아직 인터뷰 기사는 마감을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시니어 기자가 짐을 풀 겸 사무실에 들러서 원고 마감하고 주말에 쉬는 게 어떻겠냐고 지침을 내렸는데...


[긴급. 윤쎔이 미국으로 유학간다 함. 고향 내려가기 전에 얼른 붙잡을 것. 안 그럼 후회할 수 있음]


이런 문자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온 것이다. 그래서 정우는 시니어 기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울역으로 후다닥 달려온 건데... 양해를 구하는 과정이 썩 좋지 못했다.


“뭐야 신입? 무슨 일 있어?”


“서울역으로 급히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음? 왜 고향에 무슨 일 있어? 급한 일이야? 인터뷰 엠바고는 월요일까지니 갔다 와도 상관 없긴 해.”


“감사합니다 선배! 고향에 무슨 일은 있는 건 아닌데 여자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뭐? 여자...? 야 너 스톱. 가지마 이눔아!”


하필이면 아직 솔로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니어 기자를 상대로 ‘여자 때문에 잠깐 기사를 미루겠습니다’라는 소리를 해버린 것이다.


‘일 났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정작 세미를 만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일이 크게 꼬였다. 유학 가는 게 정말 좋은 선택일까,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상담만 실컷 해주고 본인의 감정을 세미에게 전달하는 걸 까먹은 것이다.


그렇다. 쉽게 말해 정우는 선배에게 찍힐 걸 각오하고 서울역으로 부랴부랴 이동해놓고는 본래 용건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위잉, 위잉-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시니어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우는 암담한 심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래 출장 갔다오자마자 선배는 내버려두고 연애질하러 간 신입, 소원은 이뤘나?”


“아니오. 놓쳤습니다. 올해 크리스마스도 혼자 지내야 할 거 같네요.”


‘놔줬습니다’라고 말하려다 말을 바꿨다. 솔직히 세미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정우는 본심과 달리 세미에게 유학을 가라고 격려를 해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 그녀에게, 그녀의 꿈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건 굉장히 이기적인 짓 아닌가.


그래서 별말 없이 세미를 보냈다. 자기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진심을 전하지 못한 채.


다만... 그 판단이 의미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정우의 직장 생활에는 큰 도움이 될만한 선택이었으니까.


“푸핫, 그래? 그렇게 됐단 말이지? 좋아 봐준다. 오늘은 그냥 쉬어라 신입. 말한대로 기사는 월요일에 나가야 하니까 내일까지 마감해도 상관 없어. 실연의 아픔이나 잘 달래라.”


“저기 선배. 놓치긴 했지만 실연을 당한 건 아니...”


“네놈이 커플이었으면 죽어라 굴렸을 텐데, 마음에 들었어! 당분간은 좀 설렁설렁 굴려주마. 꺄하핫! 아 물론, 국장님한테는 오늘 일 비밀로 해주마.”


뚝.

통화가 끊겼다. 정우는 복잡한 심정에 머리를 벅벅 긁었지만, 이내 편히 마음 먹기로 결심했다. 적어도 오늘 저지른 일로 혼날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됐으니까.


“후우...”


길게 한숨을 뿜는다. 마치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듯이, 마음에 응어리지려는 상념을 풀어내기라도 하듯이. 그러고는 정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북미 게임시장 전문 기자가 되야 할 거 같네. 그러면 세미 다니는 회사에 인터뷰하러 갈 수 있으려나...”


그리하여 좋아하던 여자를 놓쳐버린 남자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방향으로 자기 진로를 재설계하겠다는 터무니없는 목표를 가지게 됐다.


작가의말

어쩌다 생각한 장편 기획 ‘겜덕후 그녀‘의 인물과 설정을 적당히 차용해 단편을 썼습니다. 게임을 전혀 모르는 범생이 남자가 하드코어게이머 여대생에게 코가 꿰여 게임에 입문한다는 내용인데, 아직 장편을 손댈 여력이 나지 않는지라... -_- 역량도 여전히 부족하고요. 


그리고 여력이 생기면 에어본 나이트와 그 시퀄인 리피 드 라헨부터 써야지 인석아

단편에서는 게임 개발에 참여하고 싶어서 3D 그래픽을 배운 여대생 ‘윤세미’가 아버지의 반대를 받아 풀이 죽었다가, 동아리 친구의 격려를 받고 각오를 다시 다지는 과정을 표현하려 했는데요. 근데... 


망했어요 으하하;


주변에서 피드백을 받아봤는데 반응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갈수록 호흡이 지나치게 빨라져서 결말이 별로 남지 않는다는 의견이 다수 나왔습니다. OTL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분명 여자애에게 집중하고 있었는데 다 읽고 나니 치킨밖에 기억 안 나더라는 말을 하고 (...)

변명을 하자면... 똑같은 소재로 원고를 썼는데 제가 봐도 너무 재미가 없어서  갈아엎었거든요. 근데 더 이상 이 단편 하나에 시간을 쏟아부을 수 없겠다 싶어서 결말을 빨리 맺어버린 탓에....; 약 1만 9천자의 기승전결 갖춘 단편을  9시간만에 후다닥 썼으니 당연 호흡이 엉망일 수밖에요 ㅠㅠ 

이번 건 그냥 타산지석으로 교훈 얻었다고 생각하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후반 부분 호흡을 좀 가다듬어봐야겠네요. 

언제나 그렇지만 피드백은 늘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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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92 제국의황제
    작성일
    15.10.17 20:44
    No. 1

    개인적으로 처음에는 어떤 분야의 소설인지 전혀 감을 못잡다가 중간쯤에 정우가 못왔다는 부분에서 로맨스가 될거같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서 약간 가벼운(?),허무한(?) 느낌이 들어서 김이 빠진거 같달까요. 그래서 그런지 다읽고도 크게 달달한 느낌을 받지는 못한거같아요.
    이번엔 생각좀 해서 댓글달아봅니다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8 나카브
    작성일
    15.10.17 23:34
    No. 2

    이번에 정말 크게 삽질했죠. OTL 일단 장편 기획의 인물과 설정을 단편에 맞춰 최적화하지 않았고, 한 번 뒤엎고 난 다음에 마음이 급해져서 무조건 빨리 쓴다고 완급 조절도 엉망으로 해버렸고 OTL 여러 모로 반면교사로 삼을 결과물이 나온 듯 합니다.

    변변찮은 습작 읽어주셔서 감사하고요. 그리고 의견 주신 점 또한 감사드립니다. :) 즐거운 주말 되시길.


    덧. 지인이 '넌 전투씬보다 쳐묵쳐묵하는 걸 더 잘 쓰는 거 같아'라고 놀려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먹방 소설을 기획할까 싶네요. -_-;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새미기픈물
    작성일
    15.10.17 23:40
    No. 3

    음...허당기질이 좀 있는 것 같음.....잘 읽고 갑니다. 전에 아프리카 먹방 이야기 자전소설 본 기억이...먹방소설 기대기대...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8 나카브
    작성일
    15.10.18 00:04
    No. 4

    언제 쓸 수 있을지는 몰라요 ㄷㄷㄷ 연습용으로 단편만 조금씩 쓰고 있는 상황이라 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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