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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글쟁이 나카브의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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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중·단편

나카브
작품등록일 :
2015.09.13 15:24
최근연재일 :
2015.10.17 19:45
연재수 :
3 회
조회수 :
1,501
추천수 :
9
글자수 :
43,611

작성
15.09.13 16:03
조회
480
추천
4
글자
26쪽

Boy meets girl

DUMMY

언짢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별이 저무는 시각에 눈을 떠서 차디 찬 밤공기를 들이마셔야 하는 것도,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무겁고 둔한 몸을 이끌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내가 어쩌다...”


불만을 토할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그 광경을 보고 벌써부터 추위가 찾아왔나 싶어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덜덜 떨며 움직이는 건 딱 질색인데. 당장이라도 따스한 잠자리로 돌아가 한 숨 더 잘까?


아니 그랬다만 이번엔 무슨 봉변을 겪을지 모른다. 어제 그토록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지 않았는가.


‘이놈! 너한테 검술을 가르쳐줄 스승을 모셔왔거늘 감히 수련을 게을리 하고 있단 말이냐? 내일부터 매일 해가 뜨기 전에 수련장을 정리하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할 준비를 해둬라. 안 그러면 네 놈을 쫓아낼 줄 알아라!’


그랬다. 더 잤다가는 나 ‘레옹 드 로리에’, 이 지역을 호령하는 영주의 아들이 오갈 데 없는 방랑자로 전락할 판국이다. 지금 졸린다고 드러누울 때가 아니다.


아 근데 억울하긴 하다. 겨울 오기 전에 물놀이나 실컷 즐긴다고 수업 몇 번 빼먹었더니. 내가 병사가 될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왜 이리 엄하게 구시나 몰라.


물론 아버지가 내 불만을 들으면 뻔한 소릴 늘어놓으시리라. 성 밖의 세계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난세다, 열네 살이나 된 사내 녀석이 언제까지 자기 목숨을 남에게 맡길 셈이냐 등등- 아니 그래도 검술은 놀면서 배워도 되는 거 아닌가?


“에휴.”


별 수가 없다. 내 나이 겨우 열네 살이라 독립해 사는 데에 한계가 있다. 당장 쫓겨나면 조금 버티다 거렁뱅이 꼴로 돌아와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사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 게 뻔하니 닥치고 아버지 말을 따르는 수밖에.


어느덧 언덕 위에 있는 수련장에 도착했다. 여전히 북극성 하나만 보이고 나머지 별들은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었다.


일단 뭘 해야 할지부터 고민했다. 아버지는 분명 내게 일거리를 준답시고 병사들에게 뒷정리를 하지 말라고 일러뒀을 것이다. 그럼 어지러뜨린 장비들 줍고, 찌르기 연습으로 흐트러진 허수아비들 바로 세우고, 땅도 편평히 골라두고 그런 작업을 내가 다해야 하려나. 젠장 일이 너무 많잖아.


그러나 불만을 내뱉으려는 찰나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횃불을 비치니 은근 깔끔히 정리된 수련장 모습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허-”


기쁜 마음이 들면서도 또 다른 불안감이 엄습했다. 적당히 수련장 정리하며 잠을 깨울 참이었는데 할 일이 없다니, 이러다간 깜박 잠이 들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스승님께 보였다간 해이한 놈이란 욕을 먹게 되겠지. 아버지도 알게 될 테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서 할 일을 찾아 잠을 깨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수련장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음?”


그러던 중에 묘한 상황이 눈에 띄었다. 훈련용 장비를 보관하는 곳에 가검 하나 들어갈만한 공간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미처 꽂아두지 않고 수련장에 내팽개친 거 아닐까?


하지만 가검이 어디로 갔을까 궁리하던 그 순간, 귓가에 자그마한 울림이 들려왔다.


붕, 붕-


공기를 매섭게 가르는 이 소리는 분명... 틀림없다. 누군가가 가검을 휘두르며 연습하는 소리다. 그런데 어째서 이 시각에? 호기심이 든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소리쳤다.


“누구야 거기?”


솔직히 이때까지만 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가검을 휘두르는 사람은 부족한 기량을 다듬기 위해 새벽부터 연습 나온 장정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횃불을 비춰보니-


“어라? 너 누구야?”


자그마한 키에 한 손으로 움켜질 수 있을 정도로 가는 팔목, 긴 머리카락- 틀림없다. 여자애다. 키를 봐선 나보다 좀 어려 보였다. 도무지 검을 쥘 아이가 아닌데 어째서?


“여자애가 이 시각에 웬 검을 휘두르고 있어?”


내 물음에 화들짝 놀란 상대는 어쩔 줄 몰라했다. 너무 집중하느라 사람이 오는 줄 몰랐던 모양이다.


“도련님, 그러니까 이게-”


여자애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시종인가 보군. 근데 누구지? 횃불로 슬쩍 비춰 이목구비를 대충 살펴보긴 했는데 누군지 잘 모르겠다. 뭐, 이야기를 들어보면 답이 나오겠지.


“야야 안 잡아먹어. 천천히 이야기해 천천히.”


“그러니까 전....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시종입니다. 얼마 전 아스토르 영주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들어오게 됐어요”


“아버지가? 아.”


누군지 생각이 났다. 대략 3달 전에 아버지가 데려온 아이다. 한 마을을 구원해주러 군사를 끌고 갔는데 한 발 늦어서 마을은 이미 초토화돼 있었고 이 여자애만 살아있었다 했지. 아버지는 자기 탓이라며 여자애를 시종으로 쓰겠다 하셨으니...


아마 나름대로 깔끔히 정돈된 수련장도 이 아이의 작품이리라. 귀찮은 일거리를 줄여줬으니 고마워해야 하겠지. 헌데 내 입에서는


“그나저나 여기서 대체 뭐하는 거야? 여자애가 검이나 만지고 있고. 누가 그래도 된다고 했냐?”


전혀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갓 들어온 시종이 검 잡을 시간이 어디 있어? 그 시간에 가사일이나 더 배우라고.”


“하지만 도련님, 저는 어깨 너머로만 배우는 건 그만 하고 싶다고요. 그러니-“


“시끄러워. 정리 끝냈으면 냉큼 사라지지 왜 검을 휘두르고 난리야? 네가 수련한 뒤에 해야 할 뒷정리를 이 몸이 해야 되잖냐 번거롭게!”


“하지만 시간이 드는 뒷정리는 이미 마무리 지었습니다. 제 뒷정리는 금방 할 수 있으니 괜찮은 거 아닌....”


“수고가 얼마 들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야. 내가 귀찮아졌다는 게 문제라고!”


억지다.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이유다. 대체 나는 무슨 이유로 고마워해야 할 여자애에게 짜증을 내고 있을까. 하지만 그 본심을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너 같이 검을 배울 자격도 없는 애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스승님이 본다고 해봐. 그럼 내 입장이 뭐가....”


세 치 혀가 먼저 그 쪼잔한 본심을 이실직고했으니까. 그나마 그게 입에 담기 부끄러운 쪼잔한 소리임을 자각했는지 도중에 말을 멈췄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천만다행으로 그 여자애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못 들은 듯 하다만.


“...?”


“음... 커흠! 어쨌든 안 돼. 못 본 척 할 테니까 어서 가. 여자애답게 바느질이나 하란 말이야.”


그래도 여자애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련님은 검술을 배우고 있는 거죠?”


“당연하지. 이 몸이 워낙 잘나서 더 배울 것도 없는 정도라니까? 결코 게으름 피운다고 뜸하게 수련장 들리는 게 아니라고!”


“수련장을 정리하는 건 귀찮으시죠?”


“그럼 당연히 귀찮... 아, 아니다. 그냥 격에 안 맞는 일이라 안 하는 거라고! 내가 수련장 정리하는 거 귀찮아하느니 어쩌니하고 스승님한테 말했다간 가만 안 둬!”


“방금 전엔 귀찮다고 하시고는... 나중에 스승님한테 혼찌검날까봐 변명하는 거 봐.”


“너 왜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쫑알쫑알대고 그래? 너 나 욕했지 그렇-”


“저하고 거래 하나 안 하실래요? 새벽에 수련장 정리해야 하는 일은 제가 해드릴게요. 대신 검술을 가르쳐주세요. 꼭 부탁드려요!”


오히려 여자애는 내게서 검술을 배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대체 왜? 혼자서 자기 몸과 자식을 지켜야 하는 여자라면 모를까, 우리 가문의 보호를 받는 시종이 구태여 왜 검을 배우려 한단 말인가?


“네가 직접 싸울 일은 없어. 근데 왜 그리 필사적이야?


“...하고 싶지 않아서요.”


“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요. 제가 어리고 약하지만 않았어도... 엄마 아빠를 잃지 않았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 건가. 분명 이 아이는 전쟁에 휘말려 부모를 잃었다 했지. 그리고 반응을 보니 부모의 죽음을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어째 측은해 보여 내뱉으려던 독설을 삼키고 말았다.


“....너.”


하지만 측은해하는 마음도 잠시, 나는 여전히 이 여자애가 검술을 배워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종에 불과한 여자애도 검술을 배운다는 소문이 돌면 ‘이런 아이도 열심히 하는데 너는 왜 게으름 피우냐’는 꾸중을 아버지와 스승님께 듣게 되리란 걱정이 앞섰던 탓이다.


“좋아, 소원이 그렇다면 가르쳐주지.”


“도련님!”


“지금 당장 네가 날 이길 수 있다면 말이야.”


“네?”


“재능이 없는 얘는 가르쳐봤자 소용이 없거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덤벼서 날 이길 정도는 돼야 가르칠 가치가 있지.”


이런 말 들으면 포기하겠지.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실력으로 감히 이 몸에게 도전하겠어? 겁을 줘서 검술을 배우겠단 소릴 못하게 막아버려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기면 가르쳐줘요?”


“어?”


“그럼 한 수 부탁할게요. 사내 대장부니 말 무르기 없기에요”


여자애는 예상과 달리 내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보기와는 달리 맹랑하네. 하지만 그래봤자다. 눈앞에 별이 번쩍일 정도로 때려주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좋아, 어디 힘껏 덤벼봐. 그래 봤자 너 따위는 한 손 감이지만!”


늘 가지고 다니던 가검을 요란스럽게 뽑았다. 흉흉한 울림으로 여자애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자 그럼 먼저 덤비라고. 선제는 양보해줄 테니까 어디 마음껏 덤벼봐.”


그리고 여자애를 도발해봤다. 어차피 풋내기일 테니 공격하러 오면서 틈을 보일 게 뻔하다. 그때 적당히 아플 정도로 툭 때려주고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여자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기회를 줬는데 뭘 망설여?”


짜증이 치밀어 여자애를 재촉해봤다. 그런데도 여자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련님, 분명 저보다 검술 실력이 뛰어나시죠?”


“응? 뭐 그렇지. 설마 너보다 못하겠냐?”


“그런데 왜 먼저 공격할 생각을 안 하세요?”


“그거야 되도록 공평하게 겨뤄야 네가 억울해 하지 않...”


바로 그 때 소녀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려 내 말을 자르고는


“왜요? 먼저 공격하기는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고?”


아니 이 기지배가...!? 놀아주려 하니까 맞먹으려 들어? 지 분수도 모르고?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게!”


살살 갖고 놀아주려 했더니 기분을 잡쳐버렸다. 불문곡직으로 달려가 바로 한 방 먹여주마. 내 시종이 아닌 아버지 시종이라 해도 살짝 쳐주는 정도는 문제 없을 터.


카앙!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살벌하게 울려 퍼진다. 너무 감정을 실어 때렸나? 하지만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눈 앞의 소녀는 보기 좋게 공격을 막아냈으니까.


“어쭈?”


대신 너무 세게 때렸나 싶어 미안했던 감정이 쏙 들어가고 전의가 솟아났다. 이 맹랑한 계집애를 어떻게든 무릎 꿇게 만들고 싶었다. 그리하여 검을 좌우로 휘두르며 소녀의 머리 옆을 노렸다.


휙하고 검끝이 바람을 가르며 소녀의 눈 앞을 스쳐가길 여러 번. 아무리 날이 없기로서니 흉기는 흉기, 그런 물건이 눈 앞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겁을 안 먹을 리가 없다. 조만간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떨구겠지.


헌데 바람 가르는 소리가 여섯 번 나고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여덟 번이나 났음에도 원하는 광경을 볼 수 없었다. 놀랍게도 눈 앞의 여자애가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탓이었다. 그것도 눈을 똑바로 뜬 채.


“이게...!”


맹랑한 여자애를 향해 발을 깊게 디뎌 참격을 날렸다. 최대한 넓고 깊게, 슬쩍 몸을 트는 것만으로는 피할 수 없고 그렇다고 막아냈다가는 칼을 놓치게끔 아주 세게.


쿠당탕탕!


덕분에 여자애는 일격을 피하느라 몸을 너무 뒤로 날렸고 보기 좋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헷, 꼴 좋다! 진흙탕에 엎어진 개구리 같아 보이는 게 딱 어울려!”


기회를 잡은 나는 여자애를 한껏 약 올렸다. 자존심을 확 긁어서 울음보를 터뜨릴 심산이었다. 그러면 자연히 상대는 포기하고 물러날 거라 생각했으니.


그러나 여자애는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무렇지 않게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검을 나한테 겨누고 하는 말이-


“넘어졌다고 진 건 아니잖아요? 베거나 찔러야 끝이잖아요.”


“허 이 맹랑한 거 보게. 이게 실제 상황이었으면 넘어지자마자 찔려 죽었을걸? 넌 진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 말할 시간에 한 대 치러 오시면 깔끔하지 않아요?”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러고 싶은데.... 아까 보폭을 너무 넓게 벌린 탓에 가랑이에 쥐가 걸리고 말았다고. 이야기를 주고 받는 척하며 시간을 끌어야 하나 제길...!


“오기 싫으면 제가 갈까요?”


안돼 오지마.


“웃기는 소릴. 딱 보니 어깨 너머로 배운 실력 같은데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야. 그러고보니 너 이런 거 할 줄 아냐? 검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검 궤적 정도는 자유자재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고. 이 정도 상식도 모르고 덤벼들면 다친다?”


그러면서 얼추 배운 검격을 사방팔방으로 자유자재로 휘둘러 봤다. 딴에는 여자애의 기를 누르려 한 짓이지만 실상은 시간 끌기일 뿐. 저릿저릿한 가랑이를 회복시키기 위한 꼼수였다. 어쩌다 내가 여자애 상대로 꼼수를 쓰게 된 것인가 하아.


다행히 여자애는 공격하러 오지 않았다. 좋아, 이제 가랑이가 아프지 않네. 다시 몰아붙여야겠어.


“자 그럼 간다. 이번에도 재주껏 막아보라고!”


이 말은 괜히 했다. 여자애가 정말로 재주껏 내 공격을 받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대 여섯 번 휘두르면 끝나겠거니 했는데 열 번 이상 검을 휘두르게 됐고 어느덧 스무 번, 서른 번의 공격을 퍼붓고도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했다.


뭐야 이거. 정말 어깨 너머로 배운 게 맞아?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과 싸우는 듯한 느낌이다. 실력을 숨긴 걸까 아니면 재능이 있어 빨리 적응하는 걸까.


이대로 가다가는 스승님이 오실 때까지 끝을 못 낼 판국이다. 별 수 없다. 제대로 배운 게 아니라 될까 모르겠지만...!


“흐압!”


기합을 지르며 검의 궤적을 급격하게 꺽었다. 그전까지는 소녀가 막지 못할만한 빈 공간을 노리는데 급급했는데 이번에는 뻔히 막히는 곳을 향해 검을 날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 검날은 소녀의 검에 얽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래, 검 날은 말이다. 검 날만 그렇게 됐을 뿐이다.


‘걸렸다!’


카드득!

손목을 돌려 검 끝을 내세운다. 그리고 상대의 무기에 얽힌 검을 강제로 전진시킨다. 검은 이윽고 여자애의 칼날을 타고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검과 검이 마주쳐 팽팽히 대치하는 상황- ‘바인딩’을 타개하는 비책이다. 순발력 있게 얽힌 검을 풀어내지 않는 한 상대는 자기 검 날 위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검 끝에 속수무책으로 찔리게 될 터.


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대에게 쓰기에는 너무나 고급스러운 기술이지만 뭐 어떤가. 날 약 올린 벌을 받아야지. 어디 깜짝 놀라봐라.


허나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분명 나는 여자애 가슴팍을 찌를 생각이었다. 뭉뚝하기 그지없는 가검의 끄트머리로 찔러봤자 여자애가 크게 다치지 않을 거라 확신했으니까. 그런데...




“잌....!”


바보 같은! 여자애가 나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았다는 걸 왜 깨닫지 못했을까. 이래서야 영락없이 눈을 푹 찌르는 꼴이 되잖아!


뒤늦게 검을 거두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한 짓이라곤 그저 눈을 질끈 감는 것뿐- 얄밉긴 해도 죽을 죄를 지은 건 아닌 여자애를 내 손으로 해치는 상황에서 도피하려는 비겁한 짓뿐이었다.


“읏!”


눈을 뜬 건 여자애가 괴로운 숨을 토하는 소리를 낸 뒤였다.


“너...”


시야에는 오직 소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왼쪽 눈을 감싸쥔 채 뒤로 물러서는, 그런 주제에 오른쪽 눈을 뜬 채 내 검끝을 계속 응시하는 맹랑한 소녀 말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소녀의 모습에 안색이 파랗게 질리려는 순간-


“...다고요.”


“뭐?”


“안 졌다고요 아직! 눈가만 살짝 찢어졌을 뿐이에요”


그 와중에도 소녀는 정타를 허용하지 않았노라고 나한테 선언했다. 마치 선전포고라도 하듯 당당하게.


“수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들었어요. 실전이었다면 뼈가 잘리거나 심장이 뚫릴 정도로 제대로 맞지 않았다면 계속 대련을 진행해도 된다고요. 맞죠? 저 아직 안 진 거죠?”


그 모습에 나는 멍하니 정신을 놓다가 의미 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너 몇 살이냐?”


“올해 열두 살요.”


의미 없는 질문에 성실히 답하는군. 하지만 질문이 의미 없으면 답도 의미 없어야 하기 마련인데, 소녀의 대답은 그 어떤 것보다 나를 궁지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두 살이나 적은 소녀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도전을 신청했단 말인가. 그리고 하마터면 눈을 잃을 뻔한 상황에서 저렇게도 씩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의문이 들면서 내가 한없이 작고 철없이 보이기 시작한 탓이다.


더군다나 날이 점점 밝아져 소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면서, 나는 한층 더 깊은 궁지에 빠졌다. 덜덜 떠는 와중에도 뭔가를 계속 웅얼거리는 소녀의 입술을 읽게 된 것이다.


그 입술은 이런 말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었다.


눈 돌려선 안 돼, 눈 감으면 안 돼. 눈 크게 뜨고 앞을 바라봐야 해-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소녀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달래며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배움의 기회를 갈구하고 있는지를.


내가 논다고 소홀히 했던 그 배움의 기회를 말이다.


“칫, 재미없어졌다. 이만 끝내자.”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여전히 소녀를 밀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왜 그럴까. 여자애를 상대로 승부를 질질 끌고 있는 게 짜증나서? 혹시라도 스승님이 와서 이 상황을 보기 전에 끝내고 싶어서? 그래서 없던 일로 덮어두고 싶어서?


답을 내지는 못했다. 내가 왜 그러는지 떠올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앞으로 튕겨져 나갔으니까. 찜찜한 기분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카앙!

검과 검이 또 다시 마주치는 순간, 나는 한 손만으로 이겨주겠다는 맹세를 깨뜨렸다. 양손으로 검을 잡은 여자애의 두 팔 사이로 팔을 넣은 뒤 꺾어서 옴짝달싹도 못하게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패착일 줄은 모르고 말이다.


“!!”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 똑똑히 보였다. 소녀의 팔이 얼마나 가냘픈지, 소녀의 몸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그리고 소녀가 얼마나 야위었는지.


이런 몸으로 검술 하나 배우겠다고 내게 덤벼들었단 말인가. 누가 봐도 순 억지인 내기 조건을 걸었는데도 배움의 기회를 얻겠다고 이렇게 무리를 했단 말인가.


그렇게 진지하게 배움의 기회를 구하는 소녀에게 나는 어쩌자고 힘 자랑할 생각을 했단 말인가. 꼴 사납게-


바로 그 순간, 과도하게 붙잡아버렸다고 생각했던 상대로부터 의외의 기습을 받고 말았다. 소녀의 이가 내 팔뚝에 박힌 것이었다.


“아악!”


기습은 그걸로 끝이 나지 않았다. 내가 비명을 지르느라 정신을 놓은 사이 소녀의 다리가 내 발에 얽혔고-


콰당!


이윽고 세상이 뒤집어졌다.


“아고고...”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신음을 토했지만 그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할 수 없었다. 나와 함께 넘어진 소녀가 내 가슴팍을 향해 검 끝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이긴... 거죠? 그렇죠?”


“...”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을 해서 뭐하랴. 이 광경을 보고 누가 이견을 제기하겠는가. 그나저나 아파죽겠네. 어찌나 세게 발을 걸었는지 넘어지는 충격만으로 주변의 민들레 씨앗이 흩어질 정도잖아.


하지만 불만을 토로하려니


“헤헤, 이겼네요. 이제 가르쳐주는 거죠? 스승님한테도 추천해주실 건가요?”


입도 뻥끗 못 하고 소녀를 향해 고개만 천천히 끄덕이기만 하고 있었다.


그 어떠한 위기에도 감지 않았던 짙푸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절대 눈 돌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되뇌던 분홍빛 입술로 미소를 머금으며

추수할 무렵의 밀밭과 같이 포근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방울방울 쏟아내는 주제에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 마냥 행복하게 웃는 광경에 넋이 나가고 말았으니까.


.

.

.

그로부터 3주 뒤.

아직까진 내가 직접 소녀를 가르쳐주고 있다. 스승님한테 추천하려니 ‘여자애에게 무슨 검술을 가르쳐주냐’는 소리가 나올까 싶어서였다. 차라리 어느 정도 요령을 가르쳐주고 스승님한테 소개하는 게 나으리라. 그러면 스승님이 ‘재능이 있어 보이니 예외적으로 가르쳐주마’라고 할 가능성이 높으니.


그래서 한 2주 정도 가르쳐준 뒤 스승님께 소개해주려 했다. 그런데 어쩌다 3주 째인데도 스승님께 추천을 못해주냐 하면-


“야 너, 막는 건 잘 하는 주제에 공격은 왜 그리 못해?”


의외로 소녀가 방어만 잘 할 줄 알지 공격은 제대로 할 줄 몰라서였다.


“에헤헤, 아직 초보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난 어쩌다 이런 애한테 진 걸까....”


“아 그거요? 사실은 말이죠. 딱 하나 믿는 구석이 있긴 했어요”


소녀는 누워있는 내 귀에다 입술을 가까이 대고는 숨겨놓은 비밀을 조심스레 털어놨다.


“뭐?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야?“


“놀린다뇨?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사람은 흥분한 나머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도련님이 먼저 공격하라 할 때 ‘먼저 공격하기는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한 거라고요.”


“도발하면 내가 공격만 하게 될 거라고 믿었고...”


“그럼 막을 줄만 아는 제가 시간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무턱대고 제가 먼저 공격했다 반격 당하면 질 게 뻔했으니까요. 에헷.”


혀를 쏙 빼물고는 능청스럽게 날 쳐다보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는 할 말을 잊었다. 하긴 그런 얄팍한 술수에 걸린 내가 바보지 누굴 탓하겠냐.


좋아. 내가 진 이유는 알겠다. 하지만 공격도 잘 못하는 소녀가 어떻게 막는 건 그렇게 잘 했을까?


“뭔가 이상한데? 검술은 공방일체의 기술이라고. 공격은 못하고 방어만 잘 한다는 건 상식에 맞지 않아. 그리고 막는 자세는 어깨 너머로 보고 배웠다 치더라도 빠릿빠릿하게 반응하려면 경험이 쌓여야 하는데...”


“하지만 옆에서 듣기로는 그렇다던데요. ‘눈 똑바로 뜨고 상대의 공격을 지켜볼 수만 있으면 막는 건 별 일 아니다’라던데.”


“말이 쉽지 야. 초보자가 어떻게 칼이 여기 저기 날아드는 상황에 두 눈 똑바로 뜬 채 싸우냐? 어지간히 연습해도 그게 안 되서 고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뭐, 어쩌다보니 눈을 돌릴 수 없는 저주에 걸린 여자애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거 같아요. 에헷.”


소녀는 알쏭달쏭한 답변으로 내 의문을 받아쳤다. 그런 저주가 어디 있냐고 따지려 들었지만 어째 끝이 없을 거 같다. 어째 소녀가 쓸쓸한 미소를 짓는 걸 보니 더 물으면 안 될 듯 하고... 귀찮으니 눈이나 감아야지.


잠시 뒤, 이번에는 소녀가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도련님은 왜 계속 일찍 나오세요?”


“음?”


“좀 더 주무시다가 해 뜨기 직전에 나와도 되지 않아요? 어차피 수련장 정리는 제가 해드리는 거고, 스승님은 해가 뜬 다음에 나오니 도련님이 정리한 줄로만 알 텐데.”


맞는 말이다. 어차피 새벽에 나와 수련장을 정리하는 일은 소녀가 맡아주기로 했다. 나는 집에서 좀 더 늦게까지 잠을 자고 스승님이 나올 때쯤 와서 청소하는 시늉만 하면 된다.


헌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굳이 수련장까지 와서 건초더미 위에 누워 모자란 잠을 보충하고, 소녀가 정리를 끝내면 검술을 가르쳐주는 번거로운 짓을 늘 하고 있었다.


귀찮게 왜 이러는 걸까? 어쨌든 소녀에게 대답은 해줘야 할테니 대충 말해보자. 집에서 푹 자다 나오려다 늦잠을 자버리면 일이 꼬인다고, 내가 나오지 않았는데 수련장은 깨끗이 정리돼 있는 꼴을 보면 스승님이 의심할 거라고. 음 좋다, 이렇게 대답하면 되겠군.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그거야 일찍 오면 널 볼...”


“...?”


어이쿠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네. ‘수 있잖아’까지 내뱉었다면 빼도 박도 못 했겠다. 이건 내 진심이 아니야. 결단코 아니라고!


“에고, 바람소리 때문에 제대로 못 들었어요. 다시 이야기해주실래요?”


“...칫.”


근데 이상하다. 본심에서 나온 말도 아닌 엉뚱한 말을 얘가 못 들었다고 하면 다행이라 생각해야 정상인데, 왜 이리 섭섭하지?


“됐고 너. 오늘은 좀 자세 좀 잡아보자고. 공격은 대충 할 줄 알아야 스승님께 소개하든 말든 할 거 아냐? 그러니까.... 어?”


묘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화제를 전환했다. 바로 그때, 나는 3주 동안 잊고 있었던 뭔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얘를 스승님께 소개할 때 누구라 말해야 하는 거지?


“네? 무슨 일이세요?”


“...줘.”


“음?”


“이름, 알려달라고. 언제까지 너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시시한 질문인데 왜 이리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걸까. 하지만 그 질문이 꽤나 기뻤는지, 소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흔쾌히 답을 해줬다.


“..레르.”


“음?”


“클레르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도련님.”


클레르. 샹도르 원어의 낱말로서 청명하고 맑음을 뜻하는 말.

발음에 걸맞는 뜻을 가진 단어이자 이 소녀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작가의말
완결을 못하는 병을 고치기 위한 첫 시도 되겠습니다. -_- 기승전결 형식을 갖춘 짧은 이야기를 쓰다 보면 장편 쓰는 데에도 도움이 될 듯 싶어서. 

컨셉은 철부지 도련님이 수련장에서 한 여자애를 만나 반한다는 이야기였는데... 정줄 놓고 쓰니 전투씬이 들어가 있는 마법이 일어났네요. 작가가 전투씬성애자라니

혹시 읽으신 분 중 흥미가 있으시다면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 별로였던 점은 무엇인지 괜찮았던 점은 무엇인지 자유롭게 말씀해주세요. 

*덧. 여담으로 신분제는 좀 헐렁하게 설정했습니다. 엄격하게 신분제를 적용하면 여캐를 등장시키는 게 번거로워지기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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