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결자해지
3.
고순의 병력이 첨산성으로 떠난 지 3일 후, 엄백호는 손수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수춘으로 향했다.
고작 1,000명의 원술군을 치는데, 5만 명의 병력 동원은, 과한 면이 있었지만, 만사 불여튼튼, 세상일 알 수 없으니 대비를 해야 했다.
그리고 수춘 인근의 백성에게 나눠 줄, 식량의 수송도 동시에 해야 했기에, 대규모 병력이 필요한 면도 있었다.
“보고합니다. 선위장군이 진란과 뇌박의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엄백호가 고순의 승전 소식을 들은 것은, 수춘에서 10km 떨어진 곳에서 숙영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하하! 과연 함진영이라는 별명이 헛되지 않군!”
“그렇습니다. 주공. 고작 49명 희생으로 첨산성을 점령한 것은, 선위장군의 공성 능력이 특출함을 증명한 것입니다.”
예상을 웃도는 신속한 점령과 작은 피해에, 엄백호와 우번은 크게 기뻐하며, 고순의 능력을 칭찬했다.
“암 그렇지! 자!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끝맺음을 합시다.”
애당초 원술군 잔당을 두려워할 엄백호가 아니었지만, 뒤가 어수선한 것보다, 깨끗이 정리된 것이 마음 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날 오후, 엄백호의 본대는 수춘에 저항 없이 입성했다. 한때 양주의 중심지였던 수춘은, 원술의 수탈과 조조의 공격에 의해 파괴돼, 폐허 상태였다.
수춘의 화려했던 과거 모습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망가진 수춘의 현재 모습을 보며, 애잔한 감정이 들었다.
수춘에서 큰 시장을 열던 상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도 눈에 띄지 않았다.
걸어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 대부분은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그들의 행선지는, 자신들의 근거지인, 장강 이남인 강동이었다.
원술이 왕궁으로 삼은 수춘 중심지로 이동하자, 원술과 몇몇 수하가 엄백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하들의 행색은 한때, 중나라의 요직을 맡은 화려함은 간데없고, 알거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원술은 머리를 길게 풀고 조복을 입은 체, 엎드려 엄백호를 맞이했다.
그것은 과거 함양에 입성한 유방에게 진나라의 자영이 했던 항복 의식과 유사한 것이었다.
‘쯔쯔쯔······. 황제노릇 몇 년 하더니, 끝까지 요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네! 먹물이 예상한 것 그대로 하고 있군. 에라이 모자란 인간아!’
“후장군, 몸을 일으키시지요.”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표기장군.”
마음속 생각과는 다르게 엄백호는 예의를 갖춰 원술을 대했다. 엄백호는 원술이 건네준 상자를 열어보고, 그 안에서 전국옥새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전국옥새는 엄백호같은 군벌들에게 큰 유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엄백호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이고, 골치 아픈 일을 만드는 사고뭉치일 뿐이었다.
“이것은 본인이 받을 것이 아닙니다. 허창에게신 황제 폐하께 직접 바치십시오.”
“그 말씀은······.”
엄백호의 말에 원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은 자신이 살아서 수춘을 나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전국옥새를 들고 나가라는 말이었다.
엄백호의 말은, 원술이 바라지도 못할 만큼 관대한 처분이었다. 이것은 엄백호가 일정 부분 원술을 동정한 면이 있지만, 속사정은 엄백호군 내부에 있었다.
여강을 떠나오기 전, 보급품을 운반해온 장훈과, 본대에서 엄백호를 수행하던, 염상은 그들의 전 주공인 원술의 구명을 엄백호에게 청했다.
이에 엄여와 우번은 강력히 반대했다. 황제를 참칭한 원술을 살려준다면, 엄백호가 공범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엄여와 우번의 주장이 타당하기에, 염상과 장훈은 자신들의 주장을 더 내세우지 못했다. 하지만 곧바로 상황이 변했다.
엄여와 우번의 생각이 바뀐 것은, 원술이 가지고 있는 전국옥새의 마력이 미치는 폐해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전국옥새’는, 한 국가에 국한된 것이 아닌, 대대로 패권국으로 전해지는, 천하의 주인이 사용하는 옥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국옥새는 태생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그 시작은 초나라의 화씨가 커다란 옥 원석을 발견하면서 부터였다. 화씨는 초나라 두 명의 왕에게 옥 원석을 바쳤는데, 옥이 아니고 돌멩이라 여겨져, 왼쪽 발꿈치와 오른쪽 발꿈치를 절단당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리고 3대째 문왕 때 가서야, 자신이 발견한 것이 진짜 옥이라는 판명을 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화씨의벽’이다.
진시황은 화씨의벽을 입수한 후, 옥 그대로 쓸모가 없으니, 도장을 만들라고 했다. 이것이 전국옥새다.
진시황 이후, 전국 옥새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옥새가 됐으며, 왕망이 잠시 탈취했다가, 다시 한나라에 돌아가기도 했다.
한나라 말기 전국 옥새는, 낙양에서 분실됐다가, 손책, 원술을 거쳐 조조의 손에 들어갔다.
전국옥새는 힘과 권위의 상징이지만, 그 자체로 피바람과 풍파를 일으키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조 이후에도, 후당 까지, 여러 국가와 효웅들의 손을 거치며, 혈겁을 몰고 다니던 것이 전국옥새였다.
엄백호는 애초부터 황위 참칭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우번은 한 황실에 우호적인 자세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엄여를 비롯한 부하 장수들도 딴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원술의 세력이 사실상 소멸하면서, 엄백호가 전국옥새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자, 여기저기서 욕망에 찬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덕왕 이신 주공께서, 이제 황위에 오를 때가 됐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주공께서 황제가 되지 않으면, 누가 황제가 된다는 말이오?”
“주공께서 황위에 오르는 것은 민심이며, 천명입니다.”
얼마 전까지 아주 멀쩡한 인간들이, 며칠 만에 원술의 부하들이 했던 짓과 유사한 수작을 벌이고 있었다.
“중상선생, 요새 제장들이 할 일이 없어 그런지, 헛소리를 자주 하는데, 아주 귀찮소이다. 단체 집합시켜서, 귀싸대기라도 갈겨야 하는 거요?”
“형님, 충성스러운 부하들의 충언입니다. 너무 매도하지 마십시오.”
“야! 너도 정신 못 차리냐? 전국옥새 가지고 황제 놀음하다가, 쪽박 찬 원술을 보고도 그 소리가 나와?”
“원술하고 우리는 다릅니다!”
‘아이고, 이놈도 완전히 홀렸군! 이것들 싸대기로는 안 되겠는데!’
“주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 우리나 원술군이나 다를 것 하나 없습니다. 보국장군께서는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직책의 의미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엄여 마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우번이 단호한 자세로, 장수들의 헛된 욕심을 비판했다.
엄여와 우번은 엄백호군의 공동 서열 2위에 해당하는 인물들로, 평소에 상호 공대와 협조를 유지하던 관계였다.
우번이 엄여에게 대놓고 쓴 소리를 하는 것은, 그만큼 사태가 심각함을 의미했다.
스스로 벽을 깬 우번은, 한 황실에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건이 되면, 우번이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주공인 엄백호를 황위에 올릴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엄백호가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다고 하나, 고작 4년이며, 지역도 강동에 국한돼 있다.
엄백호군이 가진 무력으로, 영토의 침탈은 가능할지 지 몰라도, 지금 당장 400년의 역사를 가진 한나라에 대한 백성의 충성심을 지울 수 없다.
엄백호가 황위에 오르려면, 시간과 추가적인 명성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고 지금, 전국옥새를 가졌다고, 황제를 참칭한다면, 원술이 걸어온 몰락의 길을 답습할 것이 분명했다.
“그대들이 보기에 지금 상황이 어떻소?”
“주공, 솔직히 말하면, 과거 공로님의 휘하에서 벌어진 일과 판박이입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주공, 빨리 군심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원술의 실패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염상과 장훈은, 엄백호군 내부에서 횡행하는 이상기류를 바로잡으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행히도, 엄백호가 칭제를 강하게 거부하고 있기에, 염상과 장훈은 솔직한 심정으로 직언했다.
“그러면, 해결책이 뭐라고 생각하오?”
“모든 사달의 원인이 전국옥새입니다. 주공께서 전국옥새를 취하지 않고, 허창의 황제 폐하께 바친다는 선언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으로 되겠소? 일단 원술로부터 전국옥새를 받으면, 허창에 보내지 말라고, 제장들이 더 난리 칠 것 아니오?”
“흠······. 주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헤헤헤헤! 나도 놀기만 하는 놈이 아니야! 상황판단도 잘한다고! 오랜만에 염상이 당황하는 걸 보는군!‘
엄백호의 발언이 매우 시의적절한 말이라, 염상은 마땅한 대답을 못 하고 말을 흐렸다.
“주공, 차라리, 공로님이 직접 전국옥새를 허창의 황제 폐하께 바치게 하는 것은 어떨지요?”
그러나 염상은 곧바로 자신의 주특기인 결정 능력을 사용해, 원술을 살리면서, 엄백호군의 난국을 해소할 방안을 제시했다.
“오! 그렇군! 그 방법이 최선일 것 같소. 중상선생 생각은 어떻소?”
“저도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황제 폐하께서 오해가 없을지 우려됩니다.”
‘거참! 먹물아. 유협 그 꼬맹이에게 내가 준 재물이 얼마인데, 이깟 일로 걱정을 해?’
“허험! 황상 폐하께서 나이 어리시지만, 바른 판단을 하시는 분이니, 우리의 충정을 믿으실 거라 생각하오.”
엄백호는 원술에게 악감정이 없었고,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원술을 구명할 방법이 보이자, 밀어붙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적으로 엄백호군의 혼란을 잠재울 최선의 방안이기도 했다.
설령, 우번의 우려대로, 유협이 엄백호에게 분노를 표한다고 해도,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해소할 수 있지만, 현재의 분란은 지금 막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우려가 있었다.
엄백호는 모든 무장과 무관을 호출하여 모아놓고, 자신의 방침을 하달했다.
무관을 중심으로 수하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엄백호는 ‘계급강등’, ‘녹봉삭감’과 같은 처벌을 언급하며, 불만을 잠재웠다.
“본인은, 후장군께서 누구보다 황상 폐하를 인정하고 옹립하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안 돼 꼬인 것이지요. 이제 장군 스스로 매듭을 풀 때가 된 것입니다.”
“왜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십니까?”
“선주를 생각하는 훌륭한 부하들을 둔 덕분이지요.”
원술은 장훈과 염상의 의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만약 엄백호가 여강을 치지 않았다면, 원술은 이복형 원소에게 전국옥새를 바치고, 몸을 의탁할 생각이었다.
‘원소를 황제 만들려고 내가 이 일을 벌인 것인가? 엄백호의 말대로 꼬인 문제를 풀려면, 황상께 전국옥새를 바쳐야 해!’
물론 이것은, 엄백호가 자신의 속사정을 말하지 않고, 원술에게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는 모양새를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이로 인해, 원술에게 한 가닥 구명의 기회가 생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원술은 엄백호로부터, 약간의 식량을 얻은 후, 식솔들과 남아있던 수하들을 이끌고 허창으로 향했다.
수춘과 허창은 물길로 이어져 있기에, 원술 일행은 배를 이용해, 어려움 없이 허창에 당도할 수 있었다.
허창성 남문 밖에서, 황제 유협은 1만 명 금군과 3,000명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원술의 도착을 기다렸다.
이 병력은 유협의 직속부대로, 외부의 침입은 물론이고, 조조와 같은 권신의 횡포로부터, 유협을 지키는 튼튼한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황제 유협이 허창성 밖으로 나온 것은, 원술에 대한 처분에 조조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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