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안뇽하세용

앞점멸 소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윤코
그림/삽화
세씨
작품등록일 :
2020.05.11 12:39
최근연재일 :
2021.10.12 16:08
연재수 :
230 회
조회수 :
139,234
추천수 :
9,715
글자수 :
1,573,623

작성
21.08.09 23:48
조회
152
추천
10
글자
22쪽

신이 보는 곳

DUMMY

지저성은 드워프의 세상이자 루블란의 심장. 그것은 한 왕국의 수도임과 동시에 몇백 년이란 시간 동안 개발되어온 하나의 큰 광산이었다.


땅속의 성에는 말끔한 석재로 포장된 구불구불한 동굴이 수천 갈래로 뻗어 있었다. 개미굴처럼 동공과 동공을 잇는 길은 난쟁이의 몸집에 맞춰져 그 크기가 작았지만, 어딜 가나 예외는 항상 존재하는 법.


그 예외인즉슨 바로 왕의 모루가 위치한 드워프 왕의 왕궁이었다. 한때 드래곤이 드나들었던 통로라 여겨지는 거대한 동공의 입구는 왕궁의 대문조차 작게 여겨질 정도로 그 크기가 큰 것이었다.


압도적인 크기의 홀의 중심에는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분수가 땅속의 안개를 만들었다. 자욱한 김 속에서 일렁이는 한 난쟁이의 형상이 쿵쿵거리는 발걸음을 옮기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몰두린 전하를 알현해야겠소.”

“멈추십시오.”


온천수 분수의 곁에서, 베이지색 로브를 입은 사내가 손을 펼쳐 점점 커지는 형상을 막아 세우고는 말했다.


“이곳은 성역, 왕의 모루 앞에 서는 자는 우선 몸을 씻어야만 합니다.”

“그럴 시간이 없소. 긴급한 사안이니 지금 당장 전하를 알현해야겠소.”

“그 사안이 정당함을 밝히기 전에, 그대가 신의 뜻에 순종함을 먼저 보이십시오.”


그 말에 김 속에 몸을 숨긴 드워프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중갑을 절그럭거리며 모습을 드러냈고, 그런 그의 얼굴은 펄펄 끓는 온천수 못지않은, 난쟁이 특유의 화로 가득했다.


“난 미네데의 옥타 패트롤, 장군 게르니우스다.”


그의 키는 온천수를 관리하는 사내의 가슴팍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대놓고 이를 바드득 간 난쟁이가 사람에게 말했다.


“이 게르니우스가 묻는다. 도대체 언제부터 사제 따위가 옥타 패트롤을 막을 수 있게 된 것이지?”


그리고는 그의 턱을 찌를 기세로 두툼한 검지를 치켜세우고는 말했다.


“그리고, 도대체 언제부터 사람 새끼가 드워프를 막아설 수 있게 된 것이지?”

“진정하십시오 장군님. 이곳은 성역입니다. 열 명의 감시자다운 언행을 보여주시지요.”


넉넉한 소매를 느긋하게 펼친 사제가 가슴팍의 십자가를 내보였다. 지저성에 스며든 신의 상징물은 당당히 안개 속에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왕궁을 수놓은 수많은 십자가 중 하나, 황금으로 만들어진 십자가의 제작자가 누구인지를, 옥타 패트롤 게르니우스는 그것을 본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십자가를 만든 것은 틀림없는 국왕 몰두린이었다. 왕의 모루에서 두들겨진 금속은 그 기운부터가 남다른 것이었으니까.


“크으윽···”


그 사실이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게르니우스는 참담한 심정으로 역대 왕들의 작품들이 전시된 왕궁의 홀을 돌아보았다.


검과 망치, 수 많은 도끼와 (괘씸한 누군가에 의해) 비어 있는 액자의 뒤에는 왕실 역사상 처음으로 무기 대신 만들어진 거대한 십자가가 매달려 있었다. 그 기운에 힘입은 사제가 게르니우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언제부터 옥타 패트롤의 권위가 신의 뜻보다 앞서게 된 겁니까?”

“빌어먹을 네놈들이 지저성에 기어들어오고 난 후부터가 아니겠나?”


장군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질 생각이 없는 것은 사제도 마찬가지였다.


“저희가 전하께 직접 드워프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우리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저성에 널리 신의 뜻을 펼칠 뿐이지요.”

“돌 하나 부수지 못하는 사제 주제에 어디 뚫린 입이라고!”

“저런···”


소매를 모아 십자가를 가린 사제가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금 장군의 발언은 심히 유감이군요. 지금 몰두린 전하께서는 희망봉에서 한 명의 사제로서 신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만···?”

“다 네놈들의 사탕발림만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지.”

“아니요.”


사제는 공손히 손을 내밀어 온천수를 가리키고는 말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다만 신께서는 지금 루블란을 보고 계신 겁니다.”


드워프는 말 없이 사제를 노려보았다. 샘솟는 온천수와 사제의 생글생글한 미소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머지않아 갑옷의 조임쇠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나체가 된 그의 얼굴은 온천에 채 발을 들이기도 전에 시뻘개져 있었다. 그는 손으로 온천수를 퍼내 보란 듯이, 그리고 대충 몸을 문질러 닦았다. 사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으로 둘은 타협을 보았다.


당당하게 고간을 드러낸 채 분수에서 걸어 나온 드워프에게 사제는 그가 입은 것과 마찬가지로 잘 개어 접힌 한 벌의 베이지색 로브를 건넸다.


드워프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천 옷이었다. 작은 체구에 맞춤 수선된 사제복을 입은 장군이 사제의 곁을 스치며 말했다.


“땅속에서 광석을 캐내 본 적이 있나?”

“···”

“그걸 용광로에 녹여 제련해, 망치로 두들겨 간단한 도구라도 만들어본 적이 있나?”


사제는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장군이 거대한 대문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그런 걸 한 번이라도 해 봤다면, 이 모든 일이 신의 뜻이라는 말은 못 할 거다. 이 세상은 언제나 드워프의 뜻대로 움직여 왔다.”

“그러니까···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 왔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기랄. 내가 사람 새끼와 무슨 얘기를 나눈다는 건지.”


게르니우스는 큰 헛기침을 하며 왕궁의 문을 열었다.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홀을 감싼 두 갈래의 계단, 망치를 든 거대한 드워프의 석상과 낡아빠진 모루,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비어 있는 왕좌였다.


돌로 조각된 대문이 저절로 닫히며 육중한 마찰음을 내었다. 점점 좁아져 가는 문의 사이로 멀어져 가는 게르니우스를 묵묵히 바라보던 사제가 입을 열었다.


“보석, 그리고 광석이 어째서 인간에게 발견될 그 위치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잊지 마십시오 장군님. 그것이 신의 뜻임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큼!”


그로서는 들어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절로 닫히는 문을 멈추어 사제의 헛소리를 들어줄 시간과 인내심이 부족했다.


그는 왕좌와 왕의 모루를 향하는 대신 계단을 올랐다. 오르면 오를수록 가팔라지는 계단은 그를 땅 위로 인도하는 듯했다.


“···”


거대 드워프 석상의 초점 없는 눈을 지나친 그는 그것의 뒤로 펼쳐진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그것은 왕궁과 직접 연결된 계단임에도 불이 밝혀져 있지 않았다. 암흑으로 찬 옛 계단이 점차 투박한 동굴이 되어갔음에도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게르니우스는 마침내 빛을 발견했다. 남쪽 바다의 거친 바닷바람에 가만있질 못하는 수염을 가다듬은 그는 어느새 무릎 꿇은 누군가의 뒤에 서 있었다.


“···전하.”


그의 것보다 화려한 사제복을 입은 채, 주저앉아 두 손을 모아쥔 난쟁이에게서는 대답 대신 중얼거리는 듯한 신음만이 들려왔다.


몰두린은 후드 속에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동굴과 연결된 절벽, 그 앞에 보이는 망망대해만큼이나 드넓은 드워프의 등짝에는 그가 직접 제련한 황금 십자가가 박혀 있었다.


드워프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국왕의 모습이었다. 슬픈 눈으로 몰두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군이 말했다.


“미네데에 브레이브본이 나타났습니다. 그녀가 병사들을 살해하고 지저성의 입구로 향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브레이브본이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단 말입니다.”

“··· ··· ···”

“제 말씀이 들리십니까?”


국왕의 중얼거림이 멈춘 것은 찰나의 일이었다. 게르니우스는 정신이 나간 듯해 보이는 그의 곁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압니다. 겨우 도적 나부랭이 하나가 무슨 위협이 되겠습니까? 수백 년간 수십만 드워프의 헤아릴 수 없는 망치질을 견뎌낸 외벽과 성문을 어찌 단검 하나로 뚫겠습니까? 다만···”

“··· ··· ···”

“이번의 침략자는 어딘가 범상치 않습니다. 고양이의 귀와 꼬리가 달린 미지의 종족이고, 마법사일 뿐만 아니라 피의 주술까지 사용한다더군요. 땅밑 최고의 전사들이 단 하나에 의해 순식간에 전멸했다 하니 그 강함이 짐작되질 않습니다.”

“··· ··· ···”

“그리고··· 우리는 앞서 말한 것들 없이 단검 하나만을 가진 자에게도 왕궁을 허락한 치욕스러운 전례가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단 하나에 의해···”


몰두린의 신음은 더욱 거세져만 갔다. 그것은 방해되니 조용히 하고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고집이 센 장군은 침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드워프들이 침묵할 수 없는 재앙과 불행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대비해야만 합니다.”

“···! ···! ···!!”

“군대를 모으고 전열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바위 정령들에게 공양하고, 석상들을 깨워 그들로 하여금 전선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 ···! ···!!”

“제 말을 듣고 계신 것을 압니다! 전하께서 선대의 걸작을 빼앗긴 것에 분노하고 계심을 압니다! 그 불타는 복수심이 제게는 느껴집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째서!”

“···! ···!! ···!”

“도대체 어째서 아무것도 하질 않고 계시는 겁니까!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소서! 국왕이시여···!”


장군은 감히 왕의 어깨를 덥썩 움켜쥐었다. 그 즉시 중얼거림은 멈추었다. 홱 고개를 돌려 악으로 가득 찬 눈을 부라린 몰두린이 소리쳤다.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

“···”

“그래서, 신께 기도를 드리고 있질 않은가!!!”


그 기세에 놀란 장군이 황급히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적지 않게 당황한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본 국왕이 혀를 차고는 바닷가로 고개를 돌려 다시금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절박한 광기였다.


그것은 드워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국왕의 모습이자, 동시에 동생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엇나간 형의 모습이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은 게르니우스가 입을 열었다.


“···형님.”

“··· ··· ···”

“그런다 해서 도대체 뭐가 달라지는 거요?“


몰두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뒤에서, 코를 훌쩍이며 인중에서 짠내음을 몰아낸 장군이 슬픔으로 붉어진 눈을 끔벅였다.


그의 눈에 비친 형이자 국왕은 어딘가 미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어지는 몰두린의 대답에 이를 확신한 게르니우스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천사가 온다.”

“형님 지금 뭐라고 하셨소?”

“천사가 온다 하였다.”


후드를 벗은 국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광기에 게르니우스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이 순간 그에게 헐렁한 사제복은 중갑보다도 더 무거운 것이었다. 어깨를 짓누르고, 심장을 조여오는 불행이 그에게 들이닥쳤다.


“아우야. 신께서는 지금 루블란을 보고 계신다.”

“형님··· 저 미치광이 사제 놈들의 말을 정말 믿기라도 하는 거요?”


다급히 몸을 추스른 장군이 자신이 나온 거대한 동굴의 속을 가리키며 말했다.


“용이 강림한다니! 형님은 다섯 살 코흘리개 시절에도 용을 믿지 않으셨잖소! 아니 게다가, 용이 희망봉에 강림하면 그게 기적이오?”

“아우야. 다른 왕국들이 신을 의심하고 경계할 동안, 그 믿음을 지켜온 것은 오직 이 나만이 유일하단다. 그러니 신께서는 분명 루블란을 보고 계실 것이다.”

“헛소리!”


게르니우스는 동굴의 돌을 걷어차며 그가 걸어 나왔던 암흑 속을 향했다.


기우는 해가 절벽 위의 동굴을 비추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빛의 반원에 장군은 암흑과 자신의 발을 잇는 그림자를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제가 막겠습니다 전하. 늘 그랬던 것처럼.”

“아우야.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겠더냐?”

“그게 대체 무슨···”


순간, 게르니우스는 암흑 속에 뒤덮였다. 거대한 그림자 위에 짓눌린 그의 그림자는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더욱 거세진 듯한 바닷바람이 그의 땋은 머리를 휘날리게 했다. 저 멀리서, 아니, 어쩌면 가까이서 들려온 소리라는 이름의 저주, 무언가의 육중한 울음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천사가 온다.”

“···!!”

“용이 강림한다. 믿음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이 모든 게 정말로···”


게르니우스는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조상에게 낙인찍힌 공포가, 피라는 강물로 세대를 넘어온 원초적인 공포가 그를 신음하게 했다.


“신의··· 뜻이었던 게다··· 오오···”

-펄럭


오금이 저리는 것은 몰두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떨리는 눈동자로 희망봉의 절벽을 아득히 메운 그림자의 근원을 마주보았다.


그것은 구름 속으로부터 활강해 부드럽게 절벽을 움켜쥐었다. 그 어떤 위대한 장군의 깃발도 그것의 목보다 아름답게 휘날리지는 못할 것이고, 그 어떤 태고의 방벽도 그것의 날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리라.


드래곤. 연녹색 드래곤이 피로 물든 붉은자위를 끔벅이며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본 드워프 중 좀 더 정신이 또렷한 쪽이 두 팔을 펼치고는 신음했다.


“아아··· 천사님··· 이 광경을 기적이 아니라면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 기적?”


태양의 후광에 얼굴이 가려진 사내가 용의 움직임과 함께 흔들리며 힘겹게 고삐를 고쳐 잡았다. 그가 길쭉한 팔로 모자의 헌 챙을 들어올리자,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주홍빛 머리가 바닷바람을 맞아 휘날렸다.


“아아. 맞는 얘기지. 당신 말이 전부 맞습니다. 드워프 왕 양반.”


그는 한 손으로는 용의 고삐를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등에 묶인 검을 뽑아들었다. 아니, 그것은 손잡이와 검신의 구분이 없는, 마치 거대한 시계의 시침과도 같은 기괴한 날붙이였다.


그것을 한 바퀴 돌린 그는 고개를 조아린 몰두린과 반쯤 정신이 나간 채 헉헉대는 게르니우스를 만족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용의 안장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제르니모. 용과 시간의 사도. 그대의 기도를 굽어살피신 신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제르니모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루블란에 내가 해결할 골칫덩이가 있다면서요?”



= = = = = =



“론멕.”

“응?”

“하고 싶은 말이 좀 있는데. 어엇?!”


피아는 그녀를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드는 망치를 가까스로 피해냈다. 난쟁이 병사의 일격이 땅에 꽂히자, 그 울림에 잠시 비틀거린 피아가 연이어 날아드는 도끼에 사색이 되어 말했다.


“우선 첫째. 나는 데블린의 왕녀라는 거.”

“혹시 그 다음 것들도 내가 이미 아는 사실들이야?”


론멕은 난쟁이의 목에 꽂힌 단검을 빼냄과 동시에 한 바퀴 몸을 돌려 병사들의 틈새로 섞여들었다. 그녀는 호를 그리는 망치를 피해 고개를 숙였고, 동료의 공격에 그녀 대신 절명한 불쌍한 병사를 발로 밀어내며 말했다.


“그러면 그냥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두 번째는 네가 모르는 거야! 이 바보야!”


론멕이 어디론가 점멸해 병사들을 휩쓰는 사이에, 고함을 지르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난쟁이 하나를 위태롭게 잠재운 피아가 송곳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둘째! 내가 이 사람··· 아니, 드워프들을 죽이든 이들이 나를 상처입히든, 뭐라도 일어나기라도 하면 그건 루블란과 데블린의 외교적··· 우와앗! 분쟁으로 이어진다는 거!”

“그래도 일어날 일이라면 전자가 더 낫지 않아?!”


론멕의 목소리는 저 멀리서 병사들의 고함과 함께 들려왔다. 그녀가 몸을 숙이고, 팔을 휘두를 때마다 난쟁이들의 고함은 점차 비명으로 대체되어 갔다.


이윽고 피아는 경쾌한 폭발음에 귀가 멀어 인상을 찌푸렸고, 그녀의 곁으로 점멸한 론멕은 방진을 이룬 병사들의 한 가운데에서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게 방법이 있어.”

“안 들려. 그리고 넌 최악이야. 저리 꺼지지 못해?”

“저런. 난 네가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보는데?”


론멕은 연신 귀를 쫑긋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투박한 나무 방패와 묵직한 둔기, 중갑을 입은 난쟁이 병사들은 그 수가 줄었음에도 완벽한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발광을 하며 달려들었던 방금과는 달리 신중하게 론멕의 주변을 돌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곳 저곳이 박살이 난 돌길 위에서, 피아의 주술에 잠들었던 드워프 장군은 그 틈을 타 벌떡 일어나고는 그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죽여라!!!”

“우오오오오!”


난쟁이들은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방진이 좁혀들어 도끼와 창이 모인 곳에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으깨진 살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 갔···”

“위다!”


그들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새카만 원피스의 치마를 부여잡기 위해 애를 쓰는 피아가 있었다.


낑낑대며 애를 쓰던 왕녀는 허벅지에 송곳을 꽂아넣어 치마를 고정했다. 핏빛 날개를 펼친 채 허공으로 날아오른 그녀가 다급히 길 위를 향해 손짓하며 소리쳤다.


“아니! 아래에요!”

“?저게 뭔 소리···”

“크허억!!”


그러자 순간, 길게 뻗어나가 원을 그리며 사그라든 검기가 그들의 무릎을 잘라냈다.


다리를 잃고 길바닥으로 추락한 그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리는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서, 마치 그 광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귀와 눈동자를 돌리던 론멕이 나지막이 말했다.


“참 간단하지. 이 일을 겪은 당사자들이 모두 죽는다면, 누가 이 일을 기억하겠어?”

“흐어억··· 흐이익!! 흐으아아!!!”

“이 일을 본 사람이 전부 사라진다면··· 그 누가 이 이야기를 입에 담을 수가 있겠어?”


해맑게 웃은 그녀에게서는 숨통을 조여오는 불행이 화산처럼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얼어붙은 난쟁이들은 그것을 그저 살기로 여겼을 뿐이었지만, 허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피아는 그들과 생각이 많이 달랐다.


피아는 농후한 기시감에 몸서리쳤다. 그녀는 문득 공동 경비 구역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병사들을 떠올렸다.


정신을 차리고 난 이후로 그곳에 남은 것은 오직 그녀 자신뿐이었다. 그 후로도 외교적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동 경비 구역에는 이 대량 실종에 대한 섬뜩한 괴담만이 남았을 뿐.


<마치... 거짓말처럼...>



론멕은 고개를 들어올려 피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이글거리는 황금빛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피아가 세차게 고개를 젓자, 론멕의 눈은 어느새 평범한 고양이의 눈이 되어 있었다.


“아. 물론 너랑 나는 빼야지.”

“···론멕.”


그것은 분명 환각이었을 것이다. 밀려드는 혈기의 황홀함에 흐려진 단편의 시야였을 것이다.


피아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슬픔을 삼키며 허공으로부터 착지한 피아가 론멕에게 다가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드워프들은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다. 불나방과는 다르게 그들은 이성이란 것을 갖추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며 무기를 고쳐 잡은 그들을 슬픈 눈으로 돌아본 피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 말이 맞아. 그러니까 그냥··· 빨리 끝내 줘.”

“미안해.”


그 말을 들은 론멕은 방진의 너머로 몸을 숨긴 장군을 돌아보았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짙고 어두운, 그리고 끓어오르는 듯한 뜨거운 기운에 수염을 떤 난쟁이는 생각했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드워프는 강인한 인종이고, 그가 지휘하는 병사들은 그중에서도 최고만을 엄선해 뽑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심지어 그들이 착용한 무구는 특수한 광물로 제작되어 마나를 분산시키고, 흩어지게 하는 신통한 물건이었다. 제아무리 강인한 전사라 할 지라도, 하물며 마법사라 할 지라도 백 명에 가까운 드워프 군대를 홀로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도대체···”


그러나, 눈 앞에 보이는 이 여인 하나에 의해 병사들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궤멸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수 없이 많은 전투를 치러온 그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마법 흡수 무구를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마법으로 공격해오지 않았다. 그녀는 주술인지 마법인지 모를 괴이한 능력으로 이곳 저곳을 점멸했고, 손쉽게 갑옷의 틈을 찾아내 그것을 베었다.


무엇보다도, 이 이종족 고양이 수인에게 타격을 가한 자가 없었다. 그녀는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모든 공격을 마치 놀이를 하듯 피해냈다.


“이··· 이게 대체···”


강함이란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


그 정도를 뛰어넘은 자. 제아무리 군대를 끌고 온다 한들 상대는 커녕 싸움이라 할 만한 마찰조차 일으킬 수 없는 자.


“···”


장군은 순간 비범인이라는 말을 가까스로 삼켜냈다. 이미 패한 전투였고, 적의 기세를 더 끌어올릴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는 말해야만 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이 상황을 입밖으로 내뱉어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타인에게 증명받아야만 했다.


그녀의 강함은 비범인이라는 이름으로 증명되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따로 있었다. 마치 불량배들을 상대했을 때처럼, 숭고한 결투를 하듯 천천히 반호를 그리며 단검으로 그를 겨눈 론멕을


아니, 그녀의 손에 잡힌 단검을 본 장군이 넋이 나간 채 입을 열었다.


“블랙미스릴···?”

“아. 이거요?”


입가를 삐죽이며 참값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한 론멕이 말했다.


“루블란산 흑철로 만든 거라고 듣긴 했는데. 이걸 블랙미스릴이라 부르나 보죠?”

“그··· 그걸 누구에게서 얻은 거냐!”


그 말을 들은 론멕이 단검을 고쳐잡고는 말했다.


“선물받았어요. 누구한테 받았는지는 알 거 없···”

“인커스··· 노이스···?”

“···<대장장이의 손>.”


순간, 매서운 눈을 번득인 론멕이 떨리지 않는 손을 들어올려 주술을 읊었다. 그러자 그녀의 날갯죽지에서 솟아난 핏빛 손의 형상이 눈에 띄게 규모가 작아진 드워프들의 방진을 향했다.


“커허어억···! 으어어어!”

“이것 봐라?”


마치 냇가에서 예쁜 자갈을 골라내듯, 난쟁이 장군을 움켜쥐어 들어올린 론멕이 공포에 질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그 분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야?”


작가의말

봐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46 두강
    작성일
    21.08.10 02:16
    No. 1

    세상에 인커스좌 여기서 재등판하네... 까먹고있어따! 론매기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인물인디... 뭔사이지ㄷㄷ 잘보고가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ar******
    작성일
    21.08.11 22:29
    No. 2

    인커스는 Incus인가요? incus=모루뼈=Anvil 이고 대장장이 모루라는 뜻이네요... 이제보니 이름에 다 뜻이 있었군요. 과연 다른 인물들에는 어떤 뜻이 담겨있을지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앞점멸 소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앞점멸 소녀를 봐주신 모든 여러분들께 +6 22.01.20 737 0 -
공지 (21.06.14) 독자님께서 팬아트를 그려주셨습니다 :)))))) +4 21.06.14 353 0 -
공지 무역상의 마차 (2) +7 20.12.13 762 0 -
공지 앞점멸 소녀는 정상연재됩니다. +22 20.10.07 1,651 0 -
공지 팬아트를 받았습니다 :)))) +13 20.06.11 2,459 0 -
공지 후원자들을 위한 무역상의 마차입니다. +28 20.06.10 2,234 0 -
공지 3일에 한 번 연재됩니다. +6 20.05.13 1,724 0 -
230 비장의 한 수 +6 21.10.12 293 11 56쪽
229 미친 신의 성기사 +8 21.09.28 188 11 29쪽
228 소리라는 이름의 저주 +4 21.09.10 145 10 32쪽
227 국왕시해자 +5 21.08.31 163 10 37쪽
226 고해성사 +9 21.08.17 162 11 28쪽
» 신이 보는 곳 +2 21.08.09 153 10 22쪽
224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9 21.08.04 161 12 16쪽
223 대도 애옹론멕 브레이브본 +11 21.08.02 126 15 24쪽
222 도적들의 항구 +3 21.07.27 133 8 23쪽
221 뿌리내린 예언 +6 21.07.23 139 10 24쪽
220 최악의 상견례 +3 21.07.19 167 11 24쪽
219 예언자 왕과 고대의 존재 +4 21.07.15 183 10 21쪽
218 불편한 조우 +6 21.07.13 137 9 13쪽
217 녹아내린 시간 +5 21.07.08 160 14 18쪽
216 피아의 일기 +5 21.07.06 177 8 23쪽
215 그리고, 길잡이 +8 21.07.04 154 9 20쪽
214 그리고 꿈 +2 21.07.01 163 9 26쪽
213 +5 21.06.26 189 12 32쪽
212 마법사의 기억 +3 21.06.23 166 9 17쪽
211 도시의 기억 +2 21.06.20 185 9 22쪽
210 엑시온 더 드래곤 +7 21.06.17 187 10 35쪽
209 어머니는 밟혔다 +3 21.06.14 166 10 20쪽
208 의미의 붕괴 +6 21.06.11 213 11 2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