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안뇽하세용

앞점멸 소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윤코
그림/삽화
세씨
작품등록일 :
2020.05.11 12:39
최근연재일 :
2021.10.12 16:08
연재수 :
230 회
조회수 :
139,232
추천수 :
9,715
글자수 :
1,573,623

작성
21.06.20 23:58
조회
184
추천
9
글자
22쪽

도시의 기억

DUMMY

마법사의 기억은 빛과 함께 찾아들었다.


하늘색이 뭉치고 모여 새하얀 흰색이 되었을 때, 휘몰아치는 빛이 모여 온 세상이 하얀색으로 물들었을 때 론멕은 그녀가 위니의 잘려나간 이야기를 찾아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것은 몽환적인 주마등이었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겨본 론멕으로서는 꽤나 익숙한 감각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이자 영원의 파노라마를 보아하니 머피의 마지막 한 수가 제대로 먹혀든 듯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마주한 연극의 시작. 그 관객인 론멕은 눈 속에서 피어오르는 꽃처럼 몸을 일으켰다.


차디찬 공기를 맞이한 입가에는 입김이 피어올랐다. 사람의 몸이 생각보다 뜨겁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자욱한 입김은 위니의 옛 기억 속에 들어왔음을 확신하게 한 증거이기도 했다.


굵은 눈발이 흩날린다. 모든 것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한 함박눈이 소복이 쌓여 발목을 축축하게 만든다. 잘려나간 이야기의 배경은 눈 덮인 눈산이었다.


“어떻게 보십니까?”


론멕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뻣뻣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보고 서 있는 두 개의 털 뭉치가 있었다.


그들이 입은 것은 피아가 꺼내주었던 데블린제 외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잡한 동물의 외피였다. 마치 뱃머리에 발을 딛은 선장처럼, 절벽의 모서리에 선 채 눈산 밑의 풍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털 뭉치 하나가 말했다.


“무엇을 말이더냐.”


그것은 목걸이의 목소리였다. 꾹 눌러쓴 모자의 수북한 털조차 그녀의 뾰족 귀를 감출 수는 없었다. 위니의 잔잔한 되물음에 대답한 것은 짐을 잔뜩 짊어진, 그녀의 수행원처럼 보이는 건장한 사내였다.


“이곳이 정녕 도시를 세울만한 장소인가를 여쭤본 겁니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군.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 고작 그것뿐이라면 저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사내는 벙어리 장갑을 비틀어 최대한 자세히 무언가를 가리키려 애를 쓰고는 말했다.


“이곳은 정말 눈이 많이 내립니다. 도시의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화염 계열의 마법사들이 더 많은 마나를 소모해야 할 겁니다.”

“가문비나무 숲이 드문드문 울창하더구나. 역사적으로도 불을 피우는 데는 마나보다 땔감이 더 많이 쓰였고, 나는 지금도 그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단다.”

“농사를 지을 만한 기후가 아닙니다. 위니 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단순히 제국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임시 도피처라면야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도시라면 이건 중대한 결함입니다.”

“언제나 역사가 옳은 것은 아니지. 사냥할 때 활을 쓰는 것보다는 유도 화염구가 훨씬 낫지 않겠느냐?”


청년 시절의 위니의 입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모험심과 열망으로 빛나는 하늘빛 눈을 반짝이며 수행원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말했다.


“그리고 화염구로 사냥을 한다면야 사냥감을 굳이 익힐 필요도 없겠지. 안 그런가?”

“농담이라 믿고 싶습니다.”

“반응이 뭐 그렇느냐! 난 진심이었단 말이다!”


사내와 마찬가지로, 투박한 벙어리 장갑을 낀 그녀가 절벽 아래의 이곳저곳을 향해 손짓을 하고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가문비나무 숲에서 순록을 보았다. 순록이 질리면 눈토끼도 있다! 굳이 나물을 쳐먹어야겠다는 깐깐한 마법사들에게는 온실을 맡으라 하면 된다!”

“저는 그럼 온실을 맡으라 이거군요.”

“식량 수급에는 문제가 없다. 주변에 나무도 많고 돌도 많으니 건축 자재를 구하는 거야 일도 아닐 거다. 조금 춥긴 해도 이곳은 그래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봐라! 그 증거로···”


위니의 벙어리 장갑이 절벽 밑을 향하자, 론멕은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으며 그녀의 등 뒤를 향했다. 또 다른 인기척에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연극 속의 위니는 론멕 자신을 인지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위니는 이상하게도 갑자기 말이 없었다. 엘프의 키가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만큼이나 더 컸기에, 어깨너머로 기웃거리기를 포기한 채 그녀의 옆에 선 론멕은 머지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눈산에 난 거대한 동굴, 그 앞에 위치한 마을에는 참혹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나무 솔로 지붕을 얹은 원시적인 건물들의 중심, 광장이라 할 만한 눈밭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느냐.”


그들이 입은 것은 가공과정을 아예 거치지 않은 것 같았고, 옛사람의 외투보다도 더욱 조악한 것이었다.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쓴 그들은 순록과 인간을 함께 해체하고 있었다.


널빤지에 묶인 채 대(大)자로 나란히 뻗은 순록과 인간의 시체는 그 내장이 깔끔하게 발라져 있었다. 짐승과 사람을 구분할 수 없는 광경은 그것이 눈밭에 가려졌음에도 선명하게 론멕의 눈에 비쳤다.


물론 그것은 위니의 선명하고도 꽉 찬 하늘빛 눈동자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기운을 잃은 목소리로 말을 흐렸다.


“사람이···”


원시인 하나가 또 다른 시체의 배를 가르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것에 모여들어 갖가지 내장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저분한 피로 물든 그들은 창자나 심장을 구분할 것 없이 꼬챙이에 그것들을 꿰었다.


고기를 가진 자는 도망쳤고, 가지지 않은 자는 가진 자를 쫓았다. 그 과정에서 고기는 또다시 생산되었다. 이 고깃덩이의 선순환은 살아있는 모두가 포만감을 느낄 때까지 반복되었다.


절벽에 나란히 선 채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젊은 위니와 수행원은 역겹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비위가 약한 채식주의자 마법사가 마침내 고개를 돌리며 위니에게 말했다.


“저건 사람이 아닙니다. 저건 짐승입니다! 우우··· 우우욱!”

“···저 꼬라지를 보기 전에 점심을 먹은 게 참 다행이지 않느냐?.”


입술을 쥐어짜듯 입가를 문지른 위니는 서글픈 표정으로 식인종들을 내려다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둘러앉은 그들은 손질된 사람의 몸뚱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배가 부른 수컷들은 머지않아 암컷들에게 달려들었다. 텅 빈 존재들은 식욕 위에 번식욕을 눌러 담았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눈밭 위에서 몸부림치는 그들의 모습을, 론멕은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그 말은 결국 틀렸단다.”

“그럼 저런걸 보고 점심을 먹어야 더 맛이 난답니까? 육식주의자들이란 건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아무래도 너 같은 놈들을 지칭하는 말이 따로 있을 법도 한데··· 아무튼, 그거 말고!”


그녀의 고개를 돌려세운 것은 위니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청년의 것이었지만, 차츰 완숙미가 배기 시작한 그녀의 옆모습을 보니 이때 당시의 위니는 서른 살 즈음의 나이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키 큰 엘프가 슬며시 두 팔을 들어올렸다. 벙어리 장갑과 소매의 틈새로 새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털모자로 덮인 하늘빛 머리칼 위에는 어느새 떠오른 오망성이 느릿하게 회전하며 크기를 키웠다.


“저들 또한 사람이란다. 어쩌면 저것이 우리의 본모습일지도 모르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야만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법사입니다!”

“그래. 우리는 마법사가 아니더냐.”


위니는 대화를 이어나가듯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두어 번 사용된 메타 매직과 정도 없이 커져가는 마법진. 론멕은 언젠가 그 마법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우주에 떠다니는 멸종의 비석을 지상으로 부르는 종언의 노랫말이었다.


“저들은 약육강식이라는 대자연의 이치를 따른다. 그것은 우리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일 터. 그토록 칭송받던 황실 대마법사 아델릭 파우스트도 결국엔 누가누가 더 강하냐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타르타로스를 만든 것이 아니겠느냐?”

“그건 괴변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도륙내 그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한번 대답해 보거라.”


마법진은 어느덧 절벽 밑의 야만인들이 발견할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라 짐작되는 괴성을 내지르며 허둥지둥 짝짓기를 멈추었다.


위니의 눈은 마법진이 아닌 그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썹에는 촉촉한 성에가 눌러붙어 그녀를 슬픈 여인처럼 보이게 했다.


“너는 지금껏 마법으로 사람들을 몇이나 죽였지?”

“···위니님께서는 지금껏 먹은 식사의 횟수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 아니란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야만인들은 그림자에 뒤덮였다. 먹구름이 활짝 열리며 우주의 진공으로 벼려진 운석의 모퉁이를 드러냈다.


흘러내린 식은땀이 순식간에 얼어붙었기에, 그녀의 하늘빛 머리칼은 마치 조각상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마침내 운석의 궤도를 매듭지은 위니가 쉴 틈 없이 다른 마법을 준비하며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내게 죽어간 사람들의 최후의 표정을 말이다. 그들은 내 마법진을 보고 과연 어떤 생각들을 했겠느냐? 그러니 나는 되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려고 노력한단다.”

“···저것에 의한 충격이 보호막으로 막아질 거라고 보십니까?”

“당황 말고 기다리거라. 방법이 있으니 말이다. <메타 매직 - 딜레이 로직>.”


현세의 그 어떤 공격도 피해내는 위니의 무적기. 낙하하는 운석을 소환한 후 지연된 공간 이동으로 그것의 충격을 회피하는 이 연계는 타르타로스에서 괴조떼를 멸종시킨 원흉이었다.


그 광경을 한번 본 적이 있는 론멕으로서는 유난을 떨 이유가 없었다. 수행원 또한 겁에 질렸을 뿐 별 다른 반응을 없는 것을 보아하니 그도 위니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듯했다.


하지만 야만인들은, 동물의 탈을 쓴 식인종들은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무릎을 꿇어 운석을 경배하기 시작한 그들은 조금 더 경건해진 괴성과 아우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연신 넙죽대며 절을 했다. 그들에게 있어 운석은 드래곤의 강림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것은 인간이 일으킨 자연 재해였고, 머지않아 벼락같이 내리치며 그들을 덮쳤다.


<···>


잠시 세상이 암전하듯 빛을 잃었다. 위니가 직접 본 광경이 아니기에 그럴 것이라 생각한 론멕은 몽롱한 암흑 속에서 과거의 동반자가 공간 이동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운석 이후의 세계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럽게 그녀의 눈앞에 몰아닥쳤다. 눈조차도 새카매진 지옥의 광경이 그녀의 꼬리를 절로 솟게 했다.


타르타로스에서는 지옥이 지옥으로 변했을 뿐이었다. 그런 만큼 그와 비교되는, 눈밭 위에 떨어진 운석이 만들어낸 풍경 속에 야만인의 마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다리를 삐지 않게 조심하거라. 아무래도 산이 무너진 것 같구나.”

“···다리만 삔다면 그야말로 다행이겠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더 이상 절벽이 아니었다. 사선으로 무너진 돌 산은 운석의 분화구와 깔끔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자갈길처럼 모인 위태로운 바위의 파편 위에서, 위니와 수행원은 마법으로 반투명한 하늘빛 날개를 만들어 움푹 패인 대지의 경계를 향해 활강했다.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늘 위니를 놀려왔던 론멕이었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활강하는 위니는 꽤나 능숙하게 착지를 마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깊게 패인 눈가를 두어번 끔벅인 론멕은 머지않아 핏빛 날개를 펼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뒤집어 엎어진 대지에서는 마치 말라붙은 물감과도 같은 냄새가 났다. 결코 기분이 좋아지는 향은 아니었다.


“칼과 창을 맞대는 전쟁에는 이야기가 있지.”


열선 뻗힌 황토색 속살을 드러낸 분화구의 가장자리에서, 안색이 창백해진 위니가 헉헉대고는 입을 열었다.


“마법 전쟁에서 이야기란 건 신기루와 같단다. 마치 이 분화구처럼, 내 운석만큼이나 거대한 마법은 이야기고 뭐고 할 것 없이 모든 걸 날려 버려. 그래서 나는···”

“위니 님. 말씀을 그만두십시오. 마나를 너무 많이 쓰셨습니다.”

“···아니. 이 광경을 본 너이기에 꼭 말해줘야 하는 것이다.”


다리가 풀린 위니는 그만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채식주의 마법사는 짐을 내팽개친 채 그녀를 다급히 부축했다. 그는 건장한 사내였기에 엘프 여인에게 안성 맞춤인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래. 저들은 사람이 아닌 짐승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다! 내 손에 죽어나간 모든 마법사 색출관들! 우리들을 저지하기 위해 착출된 토툽스의 병사들! 신을 믿는 우매한 성직자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압니다! 살인이 고통스러운 것이겠지요! 그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것이 짐승인 저들과 우리를 구분짓습니다!”

“뭐? 살인이 고통스럽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더냐?”


식은땀처럼 스며나오는 위니의 표정을 본 수행원은 흠칫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바들거리는 입술을 밀어올려 미소지은 채 말했다.


“난 재미있는데? 넌 그렇지 않느냐?”

“···”

“내가 저들보다 우월함을. 나를 넘어서지 못한 모든 이보다 우월함을 느끼는 것이 기쁘지 않더냐? 이걸 보렴. 나는 운석 하나로 저 마을을 아주 없애 버렸지. 남자.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이 세상에 이야기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 거야!”

“···위니 님.”

“바로 마법사 위니 터미너스에 의해서! 그 사실을 음미하다 보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더냐? 마치 신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지 않더냐!”


론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한 눈에 알아챘다. 거짓의 대행자인 그녀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나 그녀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중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눈썹에는 성에가 더욱 무성히 쌓여 있었으니까. 위니는 덕지덕지 얼어붙은 눈물을 떼어내려다 그만 눈썹 몇 가닥을 뽑고 말았다.


“거짓말 하지 말거라. 우리들은 대폭발의 자식들이며 전후의 세대다. 폐허라는 비극 속에서 태어난 우리에게 살인이 고통스러울 리가 없지 않느냐. 그것은 교육의 문제지,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고.”

“···”

“저들은 인간이다. 저들이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가 짐승인 거야. 우리 인간만큼 약육강식에 충실한 존재가 또 있더냐? 우리가 이곳에 잠든 저 야만인들만큼이나 약육강식에 충실하더냐?”

“그건···”

“당연하지! 마법사란 건 그런 존재다!”


위니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분화구 속에 우뚝 선 멸종의 비석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인간은 짐승보다 더한 존재란다. 그리고 우리 마법사들은 인간보다도 더욱 지독한 족속들이지. 그것을 나누는 건 네가 말한 공감 능력 따위가 아니야. 만족을 아느냐 모르느냐. 그것이 짐승과 인간, 그리고 마법사를 나눈다.”

“···그만.”

“짐승은 배가 부르면 먹지 않는다. 인간은 배가 충분히 부름에도 간식을 찾지. 그리고 우리 마법사들은··· 배가 터져 죽을 지경임에도, 내장이란 내장에 전부 음식물이 차 있을 때에도 아가리에 먹을 걸 집어넣을 족속들이란 말이다! 자기가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세상이 멸망해도 신경쓰지 않을 족속들이다!”

“···그만 하십시오!”


채식주의 마법사가 위니를 밀쳤다. 지친 위니는 맥없이 쓰러졌고, 수행원은 그런 그녀의 위에 올라탄 꼴이 되고 말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에게, 가쁜 숨을 고르던 마법사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겁니까? 저같이 멍청한 마법사는 당신 같은 대마법사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우리가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아니지! 마법사는 짐승보다도 더 한 존재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당신이 마나 고갈에 빠진 지금 당신을 범하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러기 싫습니다!”

“···무겁다. 저리 비키거라.”


수행원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감싼 그가 아직 누워있는 위니에게 말했다.


“제국에 반하는 우리 마법사 연합에 유독 고기를 못 먹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

“역겹습니다. 역겹다고요! 다진 고기를 보기만 해도 우리의 마법이 만든 수 많은 시체들이 생각납니다! 숯덩이나 다를 바가 없는 상태로 익혀도 희미하게 남은 비릿한 피 향이 여지없이 악몽을 불러옵니다!”


수행원이 봇짐을 풀어헤치는 사이에, 상체만을 일으킨 위니는 멸종의 비석 그 너머에 있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대륙의 극서부이자 가장 추운 곳. 곧 눈이 될 수분을 가득 머금은 시커먼 먹구름에는 운석이 만든 구멍이 아직도 뚫려 있었다.


그곳에는 햇살이 비쳤다. 차디찬 기후에도 불구하고 햇살만은 따듯했다. 눈썹에서 녹아내린 성에가 눈물을 이루었고, 가까이서 들려오는 수행원의 말은 계속되었다.


“위니님이 맞습니다. 전쟁에서 마법을 쓰는 것이 재미가 없다 하면 그것은 거짓말일 겁니다. 화살은 보호막을 뚫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갑옷은 애초에 마법을 막을 수가 없으니까요. 전장 속에서 저는 말씀하신 대로 마치 드래곤이라도 된 기분이었습니다.”

“···”

“하지만 저는 그 이후로 고기를 못 먹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제 영혼이 상처입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마법사의 도시를 세우겠다는 당신의 뜻에 따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영혼이 상처입었다니. 마치 혈마법사나 할 법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 말을 깔끔히 무시한 채식주의 마법사가 봇짐 속에서 무거운 석판을 꺼냈다.


그것에 새겨진 것이 무엇인지를, 론멕은 단박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에르딘의 텔레포터 오브. 행정 구역의 단위인 지구와 지구를 잇는 고대의 석판이자 기계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멀쩡히 쓰이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


수행원이 그것을 땅에 박아넣고 무어라 주문을 외우는 모습을 본 론멕은 어째서 위니가 에르딘을 향한 텔레포터 오브를 발견했을 때 그렇게나 기뻐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500년 전의 추억이 깃든 기물을 마주한 기분은 어떨까? 론멕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기억이라는 이름의 역사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 말 또한 모순적이었군요. 그것을 즐기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워한다라··· 말하고 나니 이게 뭔 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그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

“그토록 모순된 존재이기에 사람인 것이겠지요. 저는 이것이 갈림길에서의 선택이라 봅니다. 사람으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짐승이 될 것이냐에 대한···”


채식주의 마법사가 땀으로 젖은 벙어리 장갑을 힘겹게 뽑아들며 두 손을 털었다. 그 사이에 완전히 몸을 일으킨 위니는 팔짱을 낀 채 그의 등 너머로 최초의 텔레포터 오브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본 위니님께서는 분명 사람이십니다. 그러니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자책하는 것은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엘프.”

“아. 예. 그러니까 인간이지요.”


위니는 기운을 차린 듯했다. 마법사란 참으로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족속이었다.


“우리의 도시는 마법사들의 선택을 도울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 모두가 인간으로 남기를 원할 거라 확신합니다. 그러니 이곳은 인간을 위한, 평화를 위한 마법의 성지가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유난떨지 않아도 좋다. 기분은 다 풀렸으니까.”

“누가 위니 님의 기분을 신경썼답니까? 저는 그냥··· 가슴이 들뜨는군요. 보십시오!”


수행원이 분화구와 그 주변의 대지를 손가락으로 아우르며 말했다.


“눈으로 얼어 있을 때는 몰랐는데, 토양이 생각보다 비옥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온실을 연구해볼만한 환경이 되어줄 것 같습니다.”

“···”

“뭐, 그래도 무지막지하게 춥긴 하지만, 칼날바람 산맥의 정상보다야 여기가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이곳이라면 충분히 제국의 눈길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지긋지긋한 마법사 색출관들과 이제는 안녕이란 얘기로구나.”


혹독하고도 오랜 여정 끝에, 두 마법사는 그들의 안식처가 되어 줄 만한 장소를 찾아냈다. 운석의 분화구로부터 시작된 도시는 머지않아 왕국과 다를 것이 없는 규모를 갖추게 되리라.


먼 훗날의 미래를 알고 있는 론멕으로서는 감격적인 광경이었다. 그 당사자들은 오죽했을까? 채식주의 마법사는 마치 왕을 모시듯 꾸벅 허리를 숙였고, 텔레포터 오브를 향해 안내하듯 손을 내민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이름을 정해 주셔야 합니다. 여왕이시여.”

“여왕이라니? 그냥 최강의 마법사 정도로 하자고 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왕국을 세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도시에 여왕은 무슨 여왕?”

“최강의 마법사? 그건 너무 멋이 없잖습니까? 대체 어떤 멍청이가 생각해낸 이름이면 그렇게 무색무취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최강의 마법사를 놀리면 도시에서 추방될 줄 알거라.”


위니는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텔레포터 오브에 밀어넣었다. 조각된 오망성이 마치 물길을 머금듯 하늘색으로 빛나며 그 광채를 더해갔다.


“고맙구나.”

“그게 도시의 이름입니까?”

“아니··· 고맙다고. 너와 다른 마법사들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제국에 대한 반역도.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도 말이다.”


석판에 손을 펼친 위니가 멸종의 비석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운석을 본 마법사에게서는 두 가지 반응이 나오지. 이 마법만 있다면 제국도 몰락시킬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부추기는 자와··· 제국에 반함에도 나를 괴물 보듯이 하여 나를 기필코 죽여 없애려는 자.”

“제가 위니 님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게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놀랍기보단 아이러니하지 않느냐. 결국 나와 함께 하게 된 것은 후자이고, 운석 위에 그들과 함께 도시를 세우게 됐다는 것이··· 참···”


위니는 석판으로부터 솟은 하늘빛의 빛무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러니해···”

“그게 도시의 이름입니까?”

“아니 재촉 좀 하지 말거라! 옛날부터 생각해온 이름이 있단 말이다!”

“그게 뭔데 그렇게 폼을 잡으십니까?”


그 말에, 밝은 미소를 지어보인 위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에르딘.”


작가의말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17 ar******
    작성일
    21.06.21 02:56
    No. 1

    이 주마등 속에서 잘려나감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페트나의 의지일지, 아니면 찰나의 순간 그 제어에서 벗어난 틈이 생긴 것일지, 또 아니면 그냥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려나간 후 폭발 직전으로 돌아가게 될지...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8 윤코
    작성일
    21.06.21 20:40
    No. 2

    유심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앞점멸 소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앞점멸 소녀를 봐주신 모든 여러분들께 +6 22.01.20 737 0 -
공지 (21.06.14) 독자님께서 팬아트를 그려주셨습니다 :)))))) +4 21.06.14 353 0 -
공지 무역상의 마차 (2) +7 20.12.13 762 0 -
공지 앞점멸 소녀는 정상연재됩니다. +22 20.10.07 1,651 0 -
공지 팬아트를 받았습니다 :)))) +13 20.06.11 2,459 0 -
공지 후원자들을 위한 무역상의 마차입니다. +28 20.06.10 2,234 0 -
공지 3일에 한 번 연재됩니다. +6 20.05.13 1,724 0 -
230 비장의 한 수 +6 21.10.12 293 11 56쪽
229 미친 신의 성기사 +8 21.09.28 188 11 29쪽
228 소리라는 이름의 저주 +4 21.09.10 145 10 32쪽
227 국왕시해자 +5 21.08.31 163 10 37쪽
226 고해성사 +9 21.08.17 162 11 28쪽
225 신이 보는 곳 +2 21.08.09 152 10 22쪽
224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9 21.08.04 161 12 16쪽
223 대도 애옹론멕 브레이브본 +11 21.08.02 126 15 24쪽
222 도적들의 항구 +3 21.07.27 133 8 23쪽
221 뿌리내린 예언 +6 21.07.23 139 10 24쪽
220 최악의 상견례 +3 21.07.19 167 11 24쪽
219 예언자 왕과 고대의 존재 +4 21.07.15 183 10 21쪽
218 불편한 조우 +6 21.07.13 137 9 13쪽
217 녹아내린 시간 +5 21.07.08 160 14 18쪽
216 피아의 일기 +5 21.07.06 177 8 23쪽
215 그리고, 길잡이 +8 21.07.04 154 9 20쪽
214 그리고 꿈 +2 21.07.01 163 9 26쪽
213 +5 21.06.26 188 12 32쪽
212 마법사의 기억 +3 21.06.23 166 9 17쪽
» 도시의 기억 +2 21.06.20 185 9 22쪽
210 엑시온 더 드래곤 +7 21.06.17 187 10 35쪽
209 어머니는 밟혔다 +3 21.06.14 166 10 20쪽
208 의미의 붕괴 +6 21.06.11 213 11 2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