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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하세용

앞점멸 소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윤코
그림/삽화
세씨
작품등록일 :
2020.05.11 12:39
최근연재일 :
2021.10.12 16:08
연재수 :
2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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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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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57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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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1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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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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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26쪽

그리고 꿈

DUMMY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론멕은 이 심연이 목걸이에 갇힌 위니의 기억인지, 아니면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눈을 있는 힘껏 크게 떴지만, 여전히 그녀에겐 그 무엇도 보이질 않았다.


정직한 감각은 오직 고통뿐이었다. 구속구가 심장을 쥐어짜는 아픔은 언제나 그녀와 함께했다. 그것은 거짓에게 받은 축복이었지만, 지금의 론멕에게는 그녀가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닫게 하는 닻과도 같았다.


감각이라는 이름의 밝아지는 어둠. 혈관으로 스며드는 뜨거운 열기가 피를 끓게 했다. 론멕은 뜬 눈의 눈가를 매만지며 소리쳤다.


“내 눈···! 내 눈!“

[진정하고 심호흡해. 심호흡!]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아무것도!”


그 이후로 느껴진 것은 섬뜩한 무엇인가의 숨결이었다.


똬리를 튼 용이 이룬 공동. 그 속의 론멕은 시체와 기계 부품 사이를 뒹굴었다. 그녀는 뱀처럼 휘적이는 꼬리만큼이나 팔다리를 주체하지 못했고, 위니는 그런 론멕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암룡의 숨결이야! 실명한 게 아니라고!]

“괜찮아요! 제가 여기에 있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론멕을 진정시키려는 것은 위니 뿐만이 아니었다. 열기의 암연 속에서 뒤늦게 정신을 차린 피아가 버둥거리는 론멕의 몸을 맹인처럼 더듬으며 다급히 외쳤다.


“진정하세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어어··· 어어어?!”


사실 그녀야말로 도움이 절실해 보였다. 일시적으로 눈을 멀게 하고,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검은 용의 숨결에서는 시체의 몸을 가진 피아조차 멀쩡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론멕과 마찬가지로 뜬 눈가를 매만졌고, 다른 한 손으로는 론멕의 몸을 더듬었다. 불쾌함에 꼬리를 세운 론멕은 어째서 매키니가 자신으로부터 가슴을 보호하는 데 그리 열심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 우··· 우애옹!”

[나가야 해! 어서!]


단말마의 비명을 신호탄 삼아, 점차 밝아지는 어둠의 광경이 론멕의 앞에 드러났다. 그것은 활짝 열린 고양이의 동공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론멕은 암흑 속에서 거대한 존재와 두 눈을 마주쳤다. 시뻘건 피로 물든 눈. 붉은자위의 중심에 놓인 파충류의 눈동자는 괴악한 취향을 가진 이국의 보석상이나 다룰 법한 기이한 원석과도 같았다.


동시에 그것은 조물주의 실수였다. 몸 안을 향한 드래곤의 머리를 마주한 론멕은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도망쳐야 해.]


론멕은 위니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단 말인가?


저건 단장이다. 무역상인 로만 데버즈다. 시뻘건 눈을 한 그가 용으로 변하는 모습을 분명 보았다. 그에게서 도망칠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아니, 그는 온몸을 비틀어 자녀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머피가 일으킨 신전의 자폭은 용병들의 내장을 헤집어 놓았을지언정 그들을 죽이지는 못했다. 그 증거로 론멕은 피아의 생명력 그릇이 온전함을 느꼈고


그 증거로, 피눈물을 머금은 용의 동공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론멕은 그제야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싫어!!!>”


불행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그녀는 죽은 용의 마지막 숨결로 가득한 암흑 속에서 절규했다. 그녀는 동료들의 시체 틈바구니에서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차원문의 피막을 열어낸 론멕은 여전히 맹인처럼 주변을 더듬거리는 피아의 손목을 붙잡았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매키니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싫어어어어!!!>”


그녀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공간의 상처 속으로 점멸했다. 파괴된 기계 신전과 동료들의 시체를 뒤로 한 채, 그녀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무너진 가족의 불행으로부터 도망쳤다.



= = = = =



차원문의 출구가 열린 곳은 지상, 폭발의 여파로 폐허가 된 에르딘의 1지구였다.


한때는 운석을 개조해 만든 건물과 거대한 난로들이 있었던 첫 번째 땅. 한때는 붉은 에르딘이라는 야망으로 들끓었던 차가운 철과 기계의 땅.


도시의 심장. 회백색 탑의 밀림이었던 1지구는 건물의 잔해로 뒤덮인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하늘로 솟은 각진 탑들은 모두가 반쯤 무너져 온전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사람과 차가 다니는 도로는 이곳저곳에 균열이 일어 더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커헉! 쿨럭!”


폐허에는 점차 눈이 쌓이고 있었다. 허공으로부터 도로로 굴러떨어진 고양이는 얇은 막처럼 바닥에 덧씌워진 눈 위에 사람의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피아도 마찬가지였고, 기절한 매키니도 마찬가지였다.


감각이 선명함을 되찾은 이 순간에는 온 세상이 차가웠다. 론멕은 붉게 뜨고, 깊게 패어 눈물에 불어 터진 눈가를 비벼 용의 숨결을 몰아냈다. 지하로부터 뻗어 나간 폭발의 여파로 파괴된 에르딘의 도심은 그제야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아무것도···”


눈발이 휘날리는 폐허 속에서, 선명하게 눈을 뜬 론멕이 신음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네 눈은 멀쩡해.]


위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서글픈 표정으로 망가진 자신의 도시를 바라보며 론멕에게 말했다.


[검은 용. 암룡의 숨결을 맞으면 감각이 둔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질 않지. 내가 왜 투시 마법이 있음에도 생명 탐지의 시야, 하트비트 디텍션이란 주문을 굳이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

[저놈은 암흑 속에서 공격해 오거든. 저건 어둠이라는 자연재해야. 넌 그 영향을 받았을 뿐, 실제로 눈이 멀어버린 게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걸요.>


모든 것을 잃어 서로밖에 남지 않은 두 여인 중 붉은 머리를 가진 쪽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은 제게 말했어요. 마법사의 불행이란 것이 설령 있다 한들 자기가 막아내 주겠다고. 나는 그걸로 괜찮은 줄 알았어요. 당신의 말마따나 강한 사람들이기에 불행에 휘말려 죽는 일은 없을 줄로만 알았어요.>

[···]

<그런데 위니. 보세요. 결국은 모두가 불행해졌어요. 제 동료들도, 심지어는 단장님조차 죽음이란 불행을 피해갈 수가 없었어요.>


론멕은 피로 굳은 넬포의 머리끈을 움켜쥐며 스스로 목을 옥죄고는 말했다.


<···여기서 당신은 비살생주의자라 하셨죠? 미안해요. 저는 당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우리를 공격한 레지스탕스들을 제가 알고 있는 가장 고통스럽고 참혹한 방법으로 죽여 버렸으니까요.>

[그것참··· 유감이네.]

<이 광경도 보세요. 제가 이곳에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 꼴이 난 걸 보세요. 에르딘은 큰 실수를 했어요. 저라는 인간을! 아니! 역겨운 역병 쥐처럼 불행을 몰고 다니는 불행 덩어리인 저를 받아들인 큰 실수를 한 거라고요!>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숙인 론멕의 머리칼에 함박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시야를 되찾은 피아는 말없이 매키니의 몸뚱이를 수습하며 론멕을 바라보았다.


폭발 이후의 폐허는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불행이 휩쓸고 지난 침묵 속에서, 론멕은 계속해서 절규했다.


<머피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했어요. 그녀는 신과 계약을 했다 말했고, 당신의 존재 또한 인식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단장님은···>

[···]

<하하··· 하하하하! 용이었잖아? 그는 드래곤이었어! 엑시온은 그의 이름이었고 말이야! 위니! 이게 꿈이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제가 드래곤을 실제로 본 게 그저 꿈일 뿐이라고 어서 말해 주세요!>


광인처럼 울부짖은 그녀가 눈발을 담은 하늘빛 형상에게 고개를 돌리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하는 걸 제가 들은 것도! 스승님도! 토마도! 머피도 결국 죽어버린 이 현실이 꿈이라고 제발 말해 달라고!>

[···론멕. 난 몰랐어. 정말이야.]

<이게 현실이야? 왜 말을 못해!이게 다 꿈이라고 왜 말을 못 하는 거야!!!>


론멕은 힘없이 눈을 감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에 점을 찍듯 느껴지는 눈의 차가움은 그 누가 뭐라 해도 현실일 것이다.


동료와 가족들의 죽음도, 무역상인이 용이라는 사실도 물론 현실이었다. 미신이라 여겨왔던 용의 불행은 분명 실존했다. 꿈속에서 들려오는 금발 여자아이의 목소리처럼, 이 세상을 붙든 신의 뜻처럼.


마치 거짓말처럼. 론멕은 망가진 현실 속에서 푹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쉴 새 없이 마음에 내뱉었다.


<저는 지금껏 제가 이야기의 주인공인 줄로만 알았어요. 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내 동료들도, 내 가족들도. 제가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가 무사할 줄로만 알았어요.>

[···]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했던 건 대단한 모험 같은 게 아니었던 거에요. 저는 꿈을 꾸고 있었어요. 제 주변 사람들을 모두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면서, 저는 꿈속의 꽃밭을 거닐고 있었던 거에요.>

[···]

<그래요. 거인의 말이 맞았어요. 나는 꿈꾸는 자 론멕 데이드림. 나는 지금껏 모험이란 꿈을 꾸고 있었던 거에요.>


그녀가 마음속으로 말하는 사이에, 피아는 다시금 담요를 꺼내 도로 위에 누운 매키니의 몸을 덮었다. 흥분이 가라앉은 채로 맞닥뜨린 에르딘의 기후가 어찌나 차가운지, 론멕은 자신도 모르게 담요에 눈이 갔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몸을 따듯하게 하는 담요 따위가 아니었다. 이 차가움이라는 이름의 혹독함을 피부로 맞이해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그것은 죽어나간 가족들과 동료들에 대한 고해성사였다.


<말해요 위니. 이건 누구의 이야기죠?>


그 말에, 위니는 말없이 동반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론멕은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죄인처럼 주눅이 든 위니의 앞에서 말했다.


<분명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이게 나의 이야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나는 옛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거대한 이야기에 휘말린 거에요.>

[내가 피하려고 했던 일이고, 우리가 에르딘에 온 이유였지.]


휘날리는 눈발을 사이에 둔 채, 위니는 텅 빈 하늘빛 눈동자로 론멕을 응시하고는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론멕. 네 생각이 맞아.]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죠···?>


론멕은 으스러질세라 이를 갈았다.


<내 어머니. 성기사단 오빠들. 내가 돌봤던 아이들! 다들 피떡이 됐어요! 씨발 말 그대로 피떡이 됐다고요! 아아···! 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아아···>

[···]

<원장 수녀님··· 엄마··· 우리 엄마가···>


더는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론멕의 눈물샘은 그렇게 말라 버렸다. 남은 것은 이룬 실버호프, 그리고 기억 속 위니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한때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존재였음을 애처롭게 증명하는 퀭한 눈가뿐이었다.


그녀는 추웠고, 배가 고팠다. 텅 빈 위장이 그녀로 하여금 불쾌한 공복을 느끼게 했다. 고양이의 귀는 기계처럼 까닥였고, 팔꿈치까지 잠식한 왼손의 떨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빛을 잃은 죽은 눈. 그것이 지금의 론멕을 완성했다. 상실, 상실, 상실로 점철된 이야기 끝에 그녀가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것은 생기있는 눈과 자기 자신의 의미였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그녀는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밖으로 말했다.


“내 이야기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거지···?”

“···”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고향으로 돌아갈까···?”


휘둥그레 눈을 뜬 론멕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도로 위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돈 그녀가 하늘 위로 만세를 하며 소리쳤다.


“아하하핫! 내가 고향이 어디 있어?! 나도 참 거짓말쟁이라니까?!! 아니면, 진짜 방금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구제 불능의 멍청이라던가!”

“론멕···?”


주춤주춤 일어난 피아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매키니의 몸뚱이를 사이에 둔 채, 그녀에게 고개를 들이민 론멕이 비명을 질렀다.


“내가! 고향이!! 어디 있냐고!!! 이 시파알!!!”

“···”

“성당은 불탔어! 엄마는 밟혔어! 너도··· 너도 봤잖아? 용이 우리 엄마를 밟았어··· 히히··· 히히히히히! 이제 악동 수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내가 기억하던 고향이란 공간도 이제는 없어! 나는··· 이제···”

“···”

“할 것도 없고··· 갈 곳도 없는 거야··· 나는···”


애처로울 정도로 퀭한 눈동자를 끔벅인 론멕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벌떡 고개를 일으켜 붉은 에르딘의 행정부 건물이 있었던 폐허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피아를 등지니,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있는 이는 오직 위니뿐이었다.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도 위니가 유일하리라.


그 이유라 함은 기시감일 것이다. 위니는 론멕에게서 섬뜩한 기시감을 느꼈다. 방법은 달랐지만, 론멕은 분명 과거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상실로 점철된 이야기를 겪고 있었다.


[···론멕.]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위니는 확신했다. 지금 이 순간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과 론멕을 동시에 상처입힐 것이 확실했다.


[···그 기분, 나도 잘 알아.]


신에게 놀아난 이 불행한 소녀를 보고 위니가 느낀 감정은 동병상련에 기인한 기쁨이었다.


모험을 동경하는 수녀. 깨끗한 백지와도 같은 순수한 존재는 이제 자신과 마찬가지로 신의 뜻이라는 수렁 속에 빠져 괴롭고, 비통하고, 비참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머릿속을 씻어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위니는 스스로를 저주하며 말을 삼켰다.


설령 위로를 한다 한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위니로서는 그저 침묵을 고수할 뿐이었다.


[···]


기시감.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유사한 흐름을 가진, 용으로 끝나는 한 여인의 이야기.


이는 분명 우연이리라. 론멕이 자신과 비슷한 절차를 밟으며 상실을 겪어가는 것은 분명 기막힌 우연이리라.


마법사 척결에 나선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시절의 위니는 그들의 논리를 논파하기 위해 성국의 교리를 공부했던 적이 있었고, 그런 위니였기에 그녀는 이를 도저히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말한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건 없다고. 이 세상의 일들은 우연처럼 보일지는 모르나 모두가 신의 뜻이라고 성직자들은 주장한다.


이를 우연이라 볼 수는 없었다. 우연이라 할 만한 미신과도 같은 일들이 멀쩡히 일어나는 이 망가진 세계 속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이는 분명 신의 뜻이다.


위니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페트나 베리미온. 음유시인은 설마 론멕을 위한 조악한 연극이라도 마련해 두었단 말인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론멕은 그녀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긴 하지.]


지긋이 눈을 감은 채, 의혹을 가슴 속에 담은 위니가 마침내 론멕에게 말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말이야. 네가 나와 함께하는 건 오로지 너의 선택에 달려 있··· 아. 그것도 아니구나. 내 연구실이 박살났지 참?]

<···>

[저기 론멕. 우선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주고 싶은데. 나는 네가 자결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어. 너는 내 소중한 친구니까 그럴 수 없을 거고, 애초에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

[미안하지만 난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을 생각은 없어. 그렇다면 네게 남은 건 오직 단 하나의 선택지 뿐이겠지.]

<말해요.>


붉은 머리칼에 얼굴을 숨긴 론멕이 마음속으로 말했다.


<말해요. 이제 말해줄 때가 되었어요. 이제 나는 알아야만 해요.>

[궁금한게 뭔데?]

<당신이 하려는 그 빌어먹을 목적이란 건 뭐죠?>


그 말에, 위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신 죽이기.>

[···]

<미안. 1년간 뜸을 들인 것 치고는 참 별거 없지?>

[아뇨. 재미있겠네요.]


다시금 얼굴을 드러낸 론멕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론멕의 옆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위니가 씁쓸함을 머금은 입을 열었다.


[울어.]

<하도 울어서 눈물이 안 나와요.>

[그래. 이제 우는 법을 연습해야 될 거야. 그런 상황 속에서 500년간 아무도 없는 심연 속에서 갇혀있다 풀려나지 않는 이상 눈물을 되찾기는 쉽지가 않으니까.]

<경험담처럼 들리는데요?>

[우연일 거야. 다 신의 뜻이지 뭐. 빌어처먹을 신의 뜻 말이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제는 감이 좀 오지?]


폐허 속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귀를 쫑긋인 론멕이 홱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남루한 차림의 노인 마법사, 레지스탕스의 유일한 생존자인 크세딘이 서 있었다.


그를 본 론멕은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눈은 언제나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론멕이 희번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이에, 먼저 움직인 것은 피아였다.


“멈춰라! <그림자가 네 발을 묶을지니!> 그걸 풀고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다면 그대로 말라 비틀어져 죽을 줄 알아!”

“···아. 알겠습니다.”

“···그래. 아까의 전장에서도 네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넌 무슨 속셈으로 감히 우리를 찾아온 거냐! <거짓말은 이제 그만!>”


피아의 대처는 신속했다. 그녀는 그림자로 크세딘을 결박하고 심문 주술의 혈마법진을 펼쳤다. 당황한 듯이 멀뚱멀뚱 핏빛 오망성을 바라보던 노인은 이내 사태를 짐작하고는 입을 열어 말했다.


“지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 후예님께 여쭤 보려고 왔습니다.”

“헛소리! 넌 분명 중직을 맡고 있는 듯했어! 그런 네가 아직까지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 되나? 어째서?”


밝은 빛을 발하며 참을 가려낸 주술을 노인보다도 더욱 당황스럽게 마주한 피아가 론멕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불행함에 몸서리쳤다. 확실히 론멕은 공동 경비 구역에서의 첫만남과 비교하자면 눈에 띌 정도로 이곳저곳이 망가져 있었다.


그런 론멕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피아는 곧 죽을 목숨이 될 이 죄없는 노인의 생명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용해 먹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용의 유언이나 좀 들어줄 생각인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좋아요. 좋은 생각이에요. 물론 그리 되어야 할 거에요.>


위니와 론멕은 이미 그에 대한 셈을 끝마친 상태였다.


론멕은 세상을 파멸시킬 거대 로켓과 그것을 탐한 이룬 실버호프, 그리고 그녀로 인한 레지스탕스와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행될 때마다 노인의 눈은 점점 비어 갔다. 론멕은 그가 썩 괜찮은 눈을 하고 있음에 만족했다.



= = = = =



무역상인 로만 데버즈. 최후의 드래곤인 엑시온의 유언은 실로 간단했다.


그는 매키니가 더는 론멕과 함께 하지 않기를 원했다.


위니로서는 유언에 담긴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는 그녀가 론멕을 대했던 심정으로, 단장은 매키니가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용병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에 속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로서는 마치 전쟁터에서 아이들을 몰아내는 어미와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론멕은 그가 뭍혔으리라 짐작되는 땅 속 너머를 응시하며 신음하듯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단장님.”

“···”


그리고, 그림자의 주박에 묶인 채 그녀의 등 뒤에 선 크세딘 또한 이룬이 뭍혔으리라 짐작되는 땅 속에 눈을 두었다.


그의 수염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론멕은 그가 이룬과 어떤 관계였는지에는 조금의 신경도 쓰질 않았지만, 보아하니 그는 수장의 부고 소식에 꽤나 충격을 받고, 슬픔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론멕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눈앞에서 들려온 노인의 말을 들은 그녀는 그의 용기를 높게 샀다.


“···온건파. 그리고 레지스탕스를 대표해서.”

“···”

“···후예님께, 동료분들의 죽음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이것은 못난 저희의 잘못이오,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 그들보다도 더 못난 제 잘못입니다.”


크세딘은 허탈한 탄식을 내뱉고는 말했다.


“말렸어야 했습니다. 이룬의 눈에서 보인 어두움을 보았음에도 제가 한 것이라고는 오직 입을 놀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

“어쩌면··· 저 또한 확신이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녀가 과연 비뚤어져 있는지를. 그녀가 상상한 세계가 옳은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에 그리 소극적이었던 게지요. 저는 오히려 그녀가 만들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론멕은 형체인 상태에서 들려왔던 이룬의 뜻을 돌이켰다.


머피의 걸작, 진실 멸망의 쐐기를 보고 그녀는 이 세상 모두가 멸망의 신호탄을 나눠 가진 세계를 꿈꾸었다. 이는 과연 옳은 생각인가?


세계의 평화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론멕으로서는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논제였다. 그녀는 그저 매키니가 짓이긴 이룬의 머리통을 상상하며 피식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녀의 미소를 본 크세딘의 이마에는 주름이 잡혔다. 묵묵히 론멕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후예님께 패했음은 결국 그녀의 뜻이 그릇되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한낱 겁쟁이인지, 아니면 죄인인지에 대한 문제의 답이 나오는군요.”

“···”

“저는 죄인입니다. 제게 죽음이라는 합당한 벌을, 동료들과 함께 하는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요.”


눈발로 젖은 눈썹을 끔벅인 피아가 외투 속 검은 원피스에 수놓인 심문 주술의 오망성을 들여다보았다. 론멕은 그녀의 외투 속이 검붉게 빛나고 있음에도 굳이 고개를 쳐박는 피아의 지능을 의심했다.


아니, 어쩌면 혈마법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도 같았다. 크세딘이라는 노인은 그만큼이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담백하게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론멕은 푹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 눈에 온기를 전하려는 듯, 눈가를 손가락으로 누른 그녀가 말했다.


“네게 벌을 주겠다.”

“···이왕이면 설립자의 마법에 죽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마법진이 보고 싶···”

“닥치거라. 널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그녀는 잠시 아련한 눈빛으로 담요에 덮인 채 색색 코를 고는 매키니를 바라보았다.


연보랏빛 머리칼이 산발이 되었음에도 그녀는 론멕이 봐왔던 그 어떤 여인들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론멕은 그렇게 이별이라는 새로운 상실에 차츰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소곳이 쪼그려 앉은 론멕이 매키니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자신과 함께 했던 모든 일들이 꿈이라 여기길. 그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 론멕이 입을 열었다.


“너는 얼마 남지 않은 일생을 이 여인을 보필하는 데 바치도록 해라.”

“···”

“매키니 테쉬. 빠른 눈의 기사. 이 여인이 이룬 실버호프의 목숨을 거두었다. 네게서 가장 소중한 이를 빼앗은 원수다. 크세딘 아르겜. 네가 정녕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한다면···”


론멕은 체념하듯 돌아서며 노인에게 말했다.


“이 내가 주는 탁란의 벌을, 속죄의 기회를 주는 자비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거라.”

“···제가 정확히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떠날 것이다. 아마 에르딘은 엉망이 되겠지. 그런 혼란 속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은 참으로 간단하다.”


피아는 그녀를 등진 론멕을 보며 신의 기운보다도 더한, 섬뜩한 불행의 대한 예지에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론멕은 마치 홀로 떠나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머지않아 그 예상이 들어맞았음을 깨닫고는 그만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 여인을 지켜라. 그녀로 하여금 안락한 생활을 향유하게 해라. 그녀가 꿈이 있다면 너도 같은 꿈을 꾸되, 네 지혜로 그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라.”

“···마치 제 여식으로 삼으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매키니를 안쓰러운 눈길로 내려다보던 노인이 론멕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그의 심정이 묻어나듯 이곳저곳으로 뻗힌 주름살이 만연해 있었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하겠지요. 후예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저는 저 여인에게 동료를 죽인 적의 부대장격인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싫다면 네게 분명 총을 쏘겠지. 그럼 그때 가서 달게 죽으면 되지 않겠나?”

“오호! 그렇군요!”


손가락을 튕긴 노인은 경쾌한 행동과는 다르게 여전히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놓이질 않은 론멕이 덧붙여 말했다.


“이는 네게 한없이 큰 영광일 것이다.”

“어째서입니까?”

“그녀는 드래곤의 딸이니까.”


크세딘은 굳이 되묻지 않았다. 그것이 되물을 가치가 없어서인지, 실제로 그것을 믿어 충격을 받서아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어지는 론멕의 말을 들은 그가 협박이라는 의중을 확실히 알아들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동시에 나의···”

“···”

“나의··· 소중한 동료니까··· 어쩌면 설립자의 뜻보다도 훨씬 중요한··· 그러니 만약 훗날 내가 에르딘에 돌아왔을 때 이 여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에르딘의 종말이겠지요. 잘 알겠습니다.”


크세딘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론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답했다. 허둥대는 피아를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마법진을 펼친 그녀의 귀에는 노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후예님.”

“말하라.”

“후예님의 눈에서 이룬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어둠을 보았습니다. 그 칠흑 같은 어둠이 이 여인을 보았을 때에는 비가 온 다음 날처럼 말끔히 개더군요.”


다소곳이 소매 속에 손을 모은 그가 말했다.


“분명 후자가 후예님의 본모습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뵐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

“그··· 마지막으로 말입니다. 방금 이 여인이 드래곤의 딸이라 하셨는데 그게 정말입···”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텔레포트>!”


론멕은 오직 자신만을 휘감은 공간 이동의 빛줄기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폐허에서, 매키니와 크세딘을 난처하다는 듯이 돌아보던 피아가 다급히 혈마법의 차원문을 열었다.


작가의말

에르딘에 남은 매키니의 이야기는 외전에서 다뤄질 것 같습니다.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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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대도 애옹론멕 브레이브본 +11 21.08.02 126 15 24쪽
222 도적들의 항구 +3 21.07.27 133 8 23쪽
221 뿌리내린 예언 +6 21.07.23 139 10 24쪽
220 최악의 상견례 +3 21.07.19 167 11 24쪽
219 예언자 왕과 고대의 존재 +4 21.07.15 183 10 21쪽
218 불편한 조우 +6 21.07.13 137 9 13쪽
217 녹아내린 시간 +5 21.07.08 160 14 18쪽
216 피아의 일기 +5 21.07.06 177 8 23쪽
215 그리고, 길잡이 +8 21.07.04 154 9 20쪽
» 그리고 꿈 +2 21.07.01 163 9 26쪽
213 +5 21.06.26 188 12 32쪽
212 마법사의 기억 +3 21.06.23 166 9 17쪽
211 도시의 기억 +2 21.06.20 184 9 22쪽
210 엑시온 더 드래곤 +7 21.06.17 187 10 35쪽
209 어머니는 밟혔다 +3 21.06.14 166 10 20쪽
208 의미의 붕괴 +6 21.06.11 213 11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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