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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하세용

앞점멸 소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윤코
그림/삽화
세씨
작품등록일 :
2020.05.11 12:39
최근연재일 :
2021.10.12 16:08
연재수 :
230 회
조회수 :
139,233
추천수 :
9,715
글자수 :
1,573,623

작성
21.06.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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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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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32쪽

DUMMY

론멕이 수녀였던 시절, 고아원의 아이들은 용사 다리온의 모험을 정말 재미없어했다. 도무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론멕은 그 이유를 물었고, 어린아이들의 답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주인공이 너무 불쌍해요.”

“나쁜 일들만 일어나요! 그런 건 재미없어요!”


사실이었다. 용사 다리온에게는 불행만이 찾아들었다.


그가 여정 중 정을 붙였던 동료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것은 드래곤 토벌을 위한 값진 희생이었지만, 그는 희생에 대한 보답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에게 배신당해 고향의 가족들조차 모두 잃고 만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해냈다. 풀뿌리를 씹으며 루블란의 희망봉에 당도해 최후의 드래곤을 쓰러트렸다. 그의 죽음은 드래곤과의 동귀어진이라는 영웅적인 끝맺음이었고, 쓰러진 용의 몸뚱이에 깔린 개죽음이었다.


작중에서야 세계를 구한 용사로 추앙받았지만, 현실에서의 그의 취급은 그야말로 영웅 소설 속의 영웅이었다. 아무도 드래곤의 출현을 믿지 않았고, 아무도 용사 다리온이 실존 인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재미있지 않니?”


론멕은 그의 모든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독버섯이 화려해 보인다는 이유로 뒷산의 거의 모든 독버섯을 삼켜본 그녀로서는 다리온의 불행 또한 막연한 재미로 느껴졌을 뿐이었다.


“수녀님이 이상한 거에요!”


그 시절의 론멕은 생각했다. 비극 속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가? 불행 속에서도 놓지 말아야 할 숭고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낭만적이란 말인가?


가족을 잃고 동료를 잃고, 죽음 직전의 주마등에서 이야기의 진짜 주인인 위니의 기억을 마주한 론멕은 그것이 어린아이들보다도 한참 모자란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위니는 그녀의 집무실에서 제국의 황제를 독대했다. 그녀에게 기가 죽은 어린 황제는 절박함이 뚝뚝 묻어나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외부 대륙의 세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낙뢰와 폭풍, 지진과 산사태. 화산 폭발과 산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자연재해가 제국의 남부를 쑥대밭을 내놓았다.


천지가 요동치는 재앙에 의해 드워프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원이 땅속에서 기어 나와 피난길에 올랐다. 대체 땅속에서 무엇을 보았냐는 물음에,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검은 용. 암룡. 그것이 숨결을 내뱉을 때마다 지저성이 암흑으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그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숨통이 조이는 탓에 그것을 상대하기는커녕 모두가 다급히 도망쳐 나왔다는군요.”

“흥미롭군. 그들이 왕의 모루를 포기하면서까지 고향을 버렸다고?”

“그렇습니다. 사태의 심각함이 조금 느껴지십니까?”


사실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환상 속의 존재가 이 땅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위니에게 있어 술주정뱅이의 헛소리나 다름없었다.


모든 일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단 하나의 말.


드래곤이 나타났다. 이유도 원인도 알 수는 없지만 드래곤이 세 갈래 대륙에 출현했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자신을 루드비히 5세라 소개한 이 앳된 사내는 위니의 기억 속에 남은 루드비히 3세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직 군주로서의 위엄을 갖추지 못했지만, 얼굴이라는 피의 증거가 증명하는 명백한 토툽스의 황제로 보였다.


그와 동행한 제국의 마법사 또한 외부 대륙의 기준에서라면 무척이나 강력한 대마법사였다. 혹독한 에르딘의 설원을 넘어오는 것은 확실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가 직접 할 만한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제국의 어린 황제가 단신으로 에르딘에 찾아와 세계의 존속을 구걸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상황이란 말인가?


물론 이 상황에서도 개연성을 부여하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드래곤이 나타났다. 드래곤이 나타났다면 모든 상황이 그럴싸해졌다.


위니와 황제는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더 절박한 쪽은 황제였고, 그는 황제로서의 품격조차도 잊은 채 경박하게 손을 휘저어 가며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자세하게 말하기 위해 애를 썼다.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던 위니가 답을 내놓기까지는 대화보다도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사흘을 꼬박 굶은 황제가 배고픔으로 기절한 것을 전기 충격으로 억지로 깨우고 나서야, 위니는 외부 대륙에 나서기 위한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에르딘의 시민들에게 관광 여행을 하러 떠난다는 거짓말을 했다. 물론 시민들은 위니가 자신들을 버리거나, 혹은 그들이 위니를 버릴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순진히 그녀의 말을 믿고 그녀를 배웅했다.


그 뒤로는 모두가 론멕이 이미 아는 이야기들이었다. 용사 다리온의 모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위니는 황제가 엄선해 뽑은 각 분야의 최고 실력자들과 함께 원정대를 이루어 희망봉이라 불리게 될 루블란 왕국의 최남부, 용들이 점령한 땅을 향한 모험을 시작했다.


론멕은 주인공이 대체된, 각색이라는 거짓의 안개가 말끔히 지워진 용사 다리온의 모험의 완본을 끝까지 관람했다.


아이들의 말이 맞았다. 이런 건 재미가 없었다.


위니에게는 불행뿐이었다. 드래곤을 상대하는 위니는 머피가 만든 기계보다도 더욱 기계적으로 마법을 뽑아냈고, 헤레몬으로 그녀의 몸을 혹사시키며 용들을 무찔러 나갔다.


그 와중에도 유쾌한 동료들과 두터운 유대를 쌓아 갔지만, 하나의 용을 상대할 때마다 꼭 하나씩은 동료가 죽어 나갔다. 상실. 상실. 끝없는 상실이 그녀를 점차 망가지게 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언제나 단 하나의 목표뿐이었다. 드래곤의 출현은 누군가에게는 재앙이었지만, 위니에게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기회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목표라 함은 참으로 단순했다.


마법으로 세상을 구하는 것. 세상을 구한 마법사가 되어 무너진 마법의 인식을 바로 세우는 것.


그리하여 마땅히 되어야 할 미래로 세계를 이끄는 것. 위니는 참된 세상이라면 분명 그리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실제로도 그녀가 원정대 참여 조건으로 황제에게 내세운 것은 다름 아닌 제국의 마법 척결 종결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동료를 모두 잃고 홀로 남은 그녀가 마지막 용을 쓰러트리고 난 뒤로는 그 누구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겪어온 이야기들은 꿈속의 신기루보다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용은 여전히 미신이었다. 그걸 믿는 것이 병신이었다. 세 갈래 대륙의 한쪽 끝을 파괴한 자연재해는 드래곤의 침공 같은 미신이 아닌 신의 천벌로 여겨졌다.


그것은 에르딘의 설립자라는 신화적인 인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세상에 남긴 모든 흔적이 그야말로 의미 없는 것들로 대체되었다. 성국의 신앙을 따르는 신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에르딘의 도심 한가운데에서 위니 터미너스라는 이름을 울부짖으며 통곡했지만


그럴 때마다 잘려나감은 어김없이 일어났다. 세상은 진실에서 탈선한 지 오래였고, 마법 혐오는 더욱 거세져 이제 에르딘은 사상이 아닌 생존을 위해 은폐되어야만 했다.


그것이 위니를 텅 빈 존재로 만들었다. 그녀가 의미를 잃은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론멕에게 매우 익숙한 텅 빈 하늘빛이 되었다.




= = = = =




그 이후의 기억은 잘려나감 때문에 그 정확한 시간대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이 되고, 영원의 순간이 찰나가 되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론멕은 오랜 시간이 또다시 지났다는 사실만을 감 잡았을 뿐이었다.


위니의 흰 외투는 그녀가 소녀였던 시절에 입었던 넝마만큼이나 헐어 있었다. 안 그래도 갸름한 볼에 살이 빠진 그녀는 더없이 비루해 보였다.


연구실은 영상 속의 머피가 발굴해낸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골방. 대충 못을 박아 만든 허접한 책상. 그리고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휘황찬란한 왕좌. 위니는 그 왕좌의 팔걸이에 목과 다리를 얹은 채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


위니는 이제 정말 늙어 보였다. 긴 수명을 가진 엘프일지라도 이제는 중년이라 할 법한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 해도 론멕의 눈에 비친 그녀는 충격적일 정도로 늙어 보였는데, 그녀의 연구실을 둘러보던 고양이는 머지않아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연기가 자욱했다. 제대로 된 환풍 시설조차 없는 연구실에는 위니가 뱉어낸 헤레몬의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펼쳐진 책을 재떨이 삼았는지, 책상 위에는 담뱃불에 엉망이 된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광대 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으로 시선을 옮긴 론멕은 바닥을 수놓은 꽁초의 카펫을 발견했다. 이곳은 그야말로 헤레몬의 왕국이었고, 위니는 그 왕국에서 유유자적하는 이 세상 모든 폐인의 여왕처럼 보였다.


“...누구야?”

<네? 저 론멕이요. 어? 네?>


위니의 물음에 론멕은 꼬리와 귀를 파르르 떨며 반사적으로 대답을 내뱉었다. 위니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자신을 통과해 걸어가자, 론멕은 자신이 그저 기억의 관객일 뿐이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이때의 위니에게서는 공포 그 이상의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위험해 보였다. 대마법사의 위엄과 그녀 자신으로서의 짓궂고 유쾌함은 어느새 사라졌고, 그것을 대체한 말과 분위기에는 정도란 것이 없었다.


헤레몬 꽁초들을 발로 휘저으며, 정도 없이 거센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가만히 초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쩌어억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가 초 세기를 마치자마자 허공에서는 핏빛 막과 같은 공간의 상처가 열렸다. 이는 론멕에게 익숙한 혈마법의 차원문 주술이었다.


“오. 여기가...”

“<페네트레이트 엑서큐션>.”

-투콱 덜커덩


위니는 자비 없이 관통 처형의 주문을 읊었다. 차원문에서 발을 뻗은 누군가는 순식간에 밀려나 책장에 몸이 처박혔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그는 온몸을 덮는 회색 로브에 얼굴이 감춰져 있었다.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책들에 뒤덮인 그의 길쭉한 수염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비릿한 피냄새. 전장의 시체 구덩이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연구실에 퍼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찐득한 잼처럼 흘러내리는 피를 마주한 위니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혈마법사?”


노인 혈마법사는 대답을 하는 대신 멀쩡히 손을 움직여 그의 몸을 뒤덮은 책 무더기를 밀어냈다. 그의 심장이 있어야 할 곳은 뻥 뚫려 있었지만, 그가 손짓함에 따라 그것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아무는 상처 위를 덮은 것은 피부와 함께 복구된 로브였다. 그는 로브의 모자를 손으로 걷어내 얼굴을 드러내고는 위니에게 말했다.


“생명은 소중히 대해야 하지 않겠소?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지도 않았건만, 이런 끔찍한 주문으로 날 공격하다니!”

“하! 지금 나랑 농담하자는 거냐?”


위니는 마법보다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헤레몬 궐련을 꺼내 그것에 불을 붙였다. 타닥이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폐가 죄악으로 들어차자, 그녀의 흐리멍덩한 눈동자는 기어코 풀리고야 말았다.


“그래. 이름과 성씨를 밝히고, 네가 어디 살고 뭐 하는 놈인지를 밝혀라. 왜 나를 찾아왔는지는 묻지 않으마. 나는 그저 너의 성씨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들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토막낸 고기를 다른 성씨를 가지게 될 그들의 어미에게 먹일 것이다.”

“피나무 맙소사 그게 대체 무슨...”

“멸족당한 일가의 유일한 생존자인 너는 깨달을 수 있겠지. ‘아! 남의 공간에 무단으로 들어오면 안 되는 거고,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 하면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것이 당연지사겠구나!’라고 말하면서 노크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려 노력하겠지. 근데 그거 알아? 그러면 때는 이미 너무 늦었어.”


비틀거리면서 노인에게 얼굴을 들이민 위니가 텅 빈 하늘빛 눈에 핏기를 세우며 속삭였다.


“너는 곧 늙어 죽을 거고, 비명횡사한 네 가족들도 절대로 돌아올 수 없을 테니까. 안 그래 침입자 양반?”

“세상에...! 대체 누가 혈마법사요? 그대는 광기에 삼켜진 혈마법사보다도 더 사악해 보이는군! 그리고 노크를 하라니?”


도리어 역정을 낸 노인이 책장의 감옥을 손으로 아우르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보시오. 노크를 할 만한 문이 대체 어디에 있소? 이곳을 찾아내는 데만 꼬박 석 달이 걸렸거늘, 그렇게 찾아낸 공간에 들어갈 만한 입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내가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혹시 아시오?”

“어? 그래? 내가 문을 안 달아뒀던가?”


마치 슬픈 소녀처럼 울상을 지은 위니가 머리를 긁적이며 희미한 기억을 되새겼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이 푹 한숨을 쉬자,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위니가 입을 열었다.


“나를 찾았다고?”

“그렇소.”

“내가 누군지 알아?”

“그대는 대마법사 위니 터미너스가 아니오?”


그 말에, 위니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헐렁해진 사탕 꼬치나 다를 바가 없이 흔들리던 눈은 머지않아 본연의 총명함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약기운이 확 깨는 일이었다. 콜록대며 연기를 내뱉은 위니가 되물었다.


“말해라. 내가 무얼 했지?”

“날 죽이려 했소.”

“그거 말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 너는 안단 말이냐?! 나는... 나는...!”


위니는 순간 발작하며 포식자를 경계하는 쥐처럼 주변을 돌아보았다. 잘려나감이 일어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은 멈춘 듯했다. 기분 나쁘게 해맑은 얼굴을 가진 노인은 얼어붙은 채 그 어떤 표정 변화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이런 씨발!”

-짝


위니는 홧김에 노인의 뺨을 때렸다. 고개가 돌아간 노인이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아내며 슬며시 인상을 썼다. 잘려나감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젠 내 쪽에서 화가 나려 하는군.”

“뭐야...? 왜 안 멈춰...? 왜 안 돌아가...?”


그의 기분을 신경조차 쓰지 않은 위니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노인의 고개를 돌려세우며 말을 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싸가지 없는 여인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소만.”

“나는... 나는 위니 터미너스... 토툽스의 황실 대마법사이자 반역자... 에르딘의 설립자...! 용 시해자이자 세상을 구한 영웅...!”


위니는 털썩 주저앉아 벌벌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헤레몬 기운에 붉어질 대로 붉어진 눈에서는 툭 떨어지듯 눈물이 삐져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머지않아 환희로 물들었고, 그녀의 머릿속은 희망으로 가득 찼다.


“이곳에서 수도 없이 생각했어. 에르딘의 시민들이 나를 기억하게 된다면... 나는 그들에게 무어라 말해주어야 할까? 그동안 무엇을 하다 왔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까...?”

“...”

“아니...?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겠지...? 나는 이것도 생각했어... 세계의 사람들이 내가 용을 물리쳤음을 기억하게 된다면... 그들은 나에게 무어라 말할까...?”


노인의 발치에 끌리는 로브를 부여잡은 위니가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짓고는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그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자신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들이 살아가던 땅과 함께 한순간의 종말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모든 것을 희생해 그것을 막아낸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을까...?”

“...”

“당연하지... 당연히 알아야지...! 옳게 된 세계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내가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만큼 그들도 나에게 고마워하고, 내가 원하는 걸 가져다 바쳐야지!”


위니는 잠시 숨을 헐떡였다. 미소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내가 원한 건 참 별것도 아닌 일이었어.”

“...”

“마법이 불행을 불러온다는 미신을 그만 믿고, 마법사를 찾아내 족쳐야 한다는 정신 나간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것! 전후의 폐허에 축복을 한답시고 성직자들을 보내는 게 아닌, 무너진 삶의 터전을 재건할 유능한 마법사를 파견하는 그런 당연한 세상이 되는 것!”

“...”

“그런데 왜? 그 별것도 아닌 것에 모든 것을 바쳤음에도 왜 세상은 아직도 이 꼬라지인 거지? 왜 나는 내가 직접 세운 나의 고향인 에르딘마저 잃어야 했던 거지? 말해 봐. 말해 보라고!”


그것은 상실으로 점철된 불행한 이야기이자 의미의 붕괴였다. 위니로부터 전해져 오는 감정은 뿌리부터 썩은 고목의 곰팡내와도 같이 비참한 것이었다.


론멕은 그다지 슬프지 않았음에도 주룩주룩 눈물을 흘릴 수밖엔 없었다. 그것이 전이된 감정에 의한 불가항력이었음을 알아챈 그녀는 굳이 그 눈물을 닦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초연함을 되찾은 것은 위니였다. 그녀는 다 피운 꽁초를 버리기가 무섭게 새 궐련을 꺼내 들어 그것에 불을 붙이고는 왕좌에 털썩 등을 기대었다.


“...의자가 참... 분위기가 안 맞지?”

“나는 다양한 취향을 존중하는 편이오.”

“이거 말이야. 내 원래 집무실에서 떼온 거야. 나는 왕이니 황제니 이런 거 질색이라 최고 권위자의 이름도 그냥 대충 ‘최강의 마법사’라고 지었거든. 그런데 시민들은 바득바득 나를 여왕이라 불렀었고, 이 의자는 그들의 노력이 만든 부산물 중 하나지.”


마치 애벌레처럼, 흰 외투에 꽁꽁 몸을 숨긴 위니가 왕좌에 앉은 채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세상을 구하고 고향에 돌아오고 나니 시민들은 내 집무실을 무슨 성역처럼 보존해 놨었어. ‘설립자’라는 의문의 인물이 남긴 흔적이랍시고 말이야. 내 참... 멀쩡히 살아있는 본인이 그걸 지켜보고 있음에도 끝까지 나를 무슨 동화 속 인물 취급하더라?”

“...”

“그래서 말이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걸 그냥 떼 왔어. 사람들은 나를 아주 미친년 취급을 했지. 그래서 내가 말했어. ‘아니 씨발 내 물건 내가 가져가겠다는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라고. 그러자 잘려나감이 일어났지.”

“...”

“나는 그렇게 불러. 누군가가 나의 족적과 나와의 연결고리를 깨우치기만 하면 시간이 되돌아가. 그리고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은 그냥 없었던 일이 되는 거야. 나 자신조차 그걸 온전하게 기억할 수가 없어. 그야말로 세상에서...”


잠시 숨을 고른 위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잘려나간 거야.”

“...”

“나로서 존재했던 과거가. 그로부터 말미암은 현재의 내가. 당연한 현실이 되어야 할 미래의 내가 모조리 일관성을 잃고 떠도는 느낌. 그래. 이런 건 마법으로는 불가능해. 설령 이런 게 가능한 방법이 있다 한들 나로서는 감조차 잡히질 않아. 이건 꼭...”

“실로 신의 농간이라 할 법하지 않소?”


노인의 말을 들은 위니는 어두컴컴한 연구실의 돔형 천장을 올려다보며 침묵했다. 그녀는 책 무더기에 헤레몬을 비벼 끄고는, 혹사당한 책에 마침내 불이 붙은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이 세상에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똑똑히 기억해. 그 애새끼의 눈은 저 불처럼 이글거리더군.”

“...”

“그리고 나는 기다렸지. 누군가가 나를 분명 찾아올 테니까. 그게 그년의 추종자인 성직자든, 그년의 또 다른 피해자인 마법사든, 드래곤 뿐만이 아니라 눈앞에서 신이란 존재를 목격한 그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리라 믿었어. 그런데... 성직자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닌, 혈마법사라?”

“현실은 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잖소?”


위니는 새로운 수수께끼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입을 연 그녀는 피곤해 모든 게 귀찮다는 듯이 행동했지만, 그녀의 뾰족 귀는 연신 쫑긋거리며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넌 어디서 뭐 하는 누구고, 네 이름은 뭐냐.”

“나는 그대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소. 사람들은 나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지. 이름이란 것은 그런 것이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닌, 그 이름이 가진 의미를 거머쥔 자에게 있소.”

“난 현명한 자와 빠른 대화를 나누고 싶다.”

“머지않아 그리될 것이오.”


추레한 노인이 삐쩍 마른 가슴팍과 수염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나는 피나무의 조경사, 왕 중의 왕. 그대를 위한 길잡이인 페레그레이드의 혈마법사 프레드릭 언더우드라 하오.”

“그래. 노망난 은발 노인네 정도가 좋겠군.”


프레드릭은 그 말에 미소지은 입가를 씰룩였다. 은발이란 말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였다. 그가 심기를 불편해하는 모습에 위니가 즐겁다는 듯이 냉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은발. 난 에르딘의 설립자, 용을 시해한 마법사 위니 터미너스다. 뭐야? 정말 잘려나감이 일어나질 않잖아? 그 미친 꼬맹이의 저주가 드디어 풀리기라도 한 거냐?”

“그건 저주가 아니오.”


그는 마치 바다와도 같은 깊이를 가진 푸른 눈동자를 천천히 끔벅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축복은 더더욱 아니지. 그것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역시 노망난 게 분명하군. 알기 쉽게 말하라는 내 뜻이 그렇게도 알아먹기가 어려웠나?”

“그대가 한 것은 계약일 뿐.”


그가 끈적한 피를 가진 비루한 노인 혈마법사였음에도, 그의 언행에는 영문모를 생기가 느껴졌다. 그런 길잡이가 내뱉은 말은 폐인이 된 위니를 다시 한번 일으켜 세웠다.


“설립자여. 이 세상은 진실과 거짓이라는 두 개의 칼날 위에 얹혀 있소.”




시간은 흐르고 흘러 한 해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 있었다. 위니는 자신을 프레드릭이라 밝힌 혈마법사에게 맥락 없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치와 논리를 중시하는, 태생부터가 마법사인 그녀로서는 기적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고밖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는 그녀를 잘 아는 론멕의 생각이었고, 그녀는 만약 자신 말고도 위니를 아는 자가 있다면 모두가 그리 생각했을 거라 확신했다.


피와 감정. 사랑과 우정. 인간의 주관이 관여하는 싸구려 예언들은 어엿한 혈마법사인 론멕으로서도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위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그녀도 혈마법사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론멕은 그녀의 생각을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박함.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잘려나감이 시작된 이후로 이 기묘한 현상을 끝낼 방법에 대해 수도 없이 연구해 왔지만, 그것은 결코 마법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것이며, 애초에 마법과는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잘려나감 속에서 잘려나감을 아는 자를 찾아 나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 위니는 기적을 기다려 왔다. 옳게 된 세상이라면 마땅히 그녀에게 떨어질 구원의 동아줄을 학수고대해 왔다. 이해하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프레드릭은 음유시인이 약해지기까지 500년이라는 시간을 제시했다. 자욱한 헤레몬의 연기에 취했는지는 몰라도, 길잡이는 정말로 노망이 난 듯한 언행을 하며 위니에게 예언이라는 길을 선사했다.


“거짓이 그녀의 상처를 감당할 수 없으메

시작과 끝, 마루와 골의 행진이 드디어 끝을 마주할지니

오오 보라. 이는 균형을 이룬 천칭이오, 공포도 불행도 없는 낙원이로다.

우리의 손으로 일궈낸 인간의 터전이로다.”

“너 진짜 노망난 거 아니야?”


위니는 분명 기적과도 같은 인내심으로 그의 모든 이야기를 받아들이려 애썼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아니다. 사실 그녀는 예언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겐 더욱 확실한 이정표가 필요했다. 위니는 변하지 않았고, 프레드릭은 그녀를 위해 변해갔다.


“우선 그대의 메타 매직으로, 혈기와 마나를 엮는 방법을 알아내야 하오.”

“어. 방금 만들었다. 또 뭘 하면 되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믿겠소. 그렇다면 이제 그대는 할 것이 없소. 이제는 내가 움직여야 하오.”

“그러니까 도대체 네가 뭘 하려는 거냐고.”

“...500년.”


그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피부를 찍어 찐득한 피를 보이고는 말했다.


“그 몸을 벗어나, 500년 이후에 새 몸을 얻어 활동할 수 있도록 주술의 의식을 펼칠 것이오. 내가 의식을 준비하는 동안, 그대는 그대의 영혼이 담길 그릇이 될 장신구를 선택하시오.”

“하. 장신구?”


그 말을 들은 위니는 코웃음을 쳤다.


“이봐. 난 마법 전쟁의 폐허에서 태어났어. 태어나서 몸에 보석 달린 물건은 단 한 번도 붙여본 적 없다고.”

“저기 있잖소?”


프레드릭은 에르딘의 왕좌를 가리켰다. 그러자 위니가 전보다 선명해진 눈알을 굴리며 탄식했다.


“저 의자에 내 영혼을 넣겠다고? 장난하냐? 그럼 나는 저기 앉은 놈의 궁둥이를 통해 달라붙게 되는 거 아니야?”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않소? 저런 권위적인 의자에 앉은 사람인 만큼 그 능력 또는 재력이 출중한 자일 터인데...”

“아. 개소리 마.”


위니는 마법진을 펼쳐들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왕좌를 장식한 자수정과 금조각들이 떨어져 나와 그녀의 눈앞을 향했다.


세공되고 조각되고, 연결되고 합쳐지고.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그녀가 만들어낸 것은 금줄 자수정 목걸이였다. 그것을 본 프레드릭은 어깨를 으쓱였다.


“목걸이로 할 거야. 숙주란 게 쓸모가 없으면 그대로 조여들어 목을 베어버릴 수 있게 말이지.”


그 말을 들은 론멕은 사색이 되어 뒷목에 뿌리내린 금줄을 더듬었다. 콩닥대는 그녀의 심장을 잠재운 것은 한숨을 내쉰 프레드릭의 말이었다.


“숙주가 죽으면 그대도 죽소. 그러니 죽일 거라면 대상을 지배하고 나서 죽이시오. 내 당부하오.”

“뭐야? 귀찮은 과정이 하나 더 추가된 것뿐이잖아?”

“숙주를 무시하지 마시오. 만약 그 누군가의 정신력에 밀린다면 망각의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은 숙주가 아닌 그대일지니.”

“...이봐.”


위니는 이제야 론멕이 아는 그 모습이 되었다. 엘프는 여전히 젊었고, 볼에는 살이 올랐다. 그녀는 희번득한 텅 빈 눈동자를 부라리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대마법사 위니 터미너스야. 난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내. 이런 나를 정신력으로 이길 자가 또 있을 거라 생각하나?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금줄에 매달린 자수정을 두 손으로 꼭 모아쥔 론멕은 그 말을 듣고는 그만 픽 웃고 말았다.




= = = = =




주술의 의식은 성공적이었다. 혈기와 마나를 엮어 주문과 주술을 증폭시키는 위니의 새로운 메타 매직, 하이브리드 로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프레드릭이 원한 것은 그가 사용하는 주술의 증폭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위니의 마나와 자신의 혈기가 연결됨을 원했다. 위니가 그 이유를 묻자, 프레드릭은 이렇게 답했다.


”그대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오.“


위니는 생각했다. 역시 혈마법은 쓰레기 같은 마법이고, 혈마법사들은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 더미 속의 구더기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그의 뜻을 이해하기 포기한 그녀는 그저 메타 매직을 사용한 후 그가 의식을 치르기를 기다렸다.


기하학적인 도형을 이룬 금줄과 그 중심에 위치한 붉고도 푸른 수정의 앞에서, 찐득한 피를 뽑아내 피의 오망성을 그린 그는 혈마법진 위에 위니가 만든 목걸이를 두었다.


참으로 심심한 의식이었다. 휘황찬란한 효과는 커녕 그 어떤 소리도 나질 않으니 그것이 행해지고 있음조차 알 수가 없었다. 프레드릭은 그저 오랜 시간을 집중했고, 의식은 그것으로 끝났다.


위니는 그녀를 중심으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소용돌이침을 느꼈다.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모를 힘의 파동. 에너지라는 이름의 마루와 골의 행진이자 소리라는 이름의 저주가 빙글빙글 돌며 끊임없는 아우성을 내뱉었다.


위니가 프레드릭의 의식에서 이상한 점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혈마법사는 분명 말했다. 5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영혼을 붙들어 놓는 것에는 다량의 마나와 생명력이 쓰인다고 말이다.


이때 당시의 위니는 헤레몬에 절여질 대로 절여져 수천 명 분의 크기의 마나 그릇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에 직격당했음에도 사망하지 않은 프레드릭 또한 그만큼의 생명력 그릇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위니는 말했다. 이에 메타 매직이 쓰인다면 의식에 대가가 모자랄 일은 없을 것이라고. 프레드릭은 그에 동의하는 듯했고, 그의 의식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위니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의식은 끝났소. 이제 그대가 사망함에도 그대의 영혼은 목걸이에 머물러, 그것을 목에 건 자들의 육신을 향유하며 영겁의 시간을 존재할 수 있을 것이오.”

“···이봐.”


금줄 자수정 목걸이를 목에 건 채, 목덜미를 더듬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위니가 말했다.


“···비명을 들었어.”

“···”

“엘프들의 비명을. <매그내틱 포스>!”


찐득한 피로 가득찬 혈마법사의 몸이 자기력에 이끌려 공중으로 솟았다. 프레드릭은 몸부림치며 신음했고, 위니는 그런 프레드릭을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크으윽··· 흐어억!”

“내가 들은 비명은 뭐지? 말해라! 말하지 않는다면 혈마법사는 이 세상에서 멸종하리라!”


뼈마디가 으스러짐에도 프레드릭은 숨이 찬 것 외에는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질 못하는 듯했다. 당당히, 그리고도 기쁘게 미소지은 노인이 게걸스러운 웃음을 터트리고는 위니에게 말했다.


“거짓이··· 음유시인이···


··· 이 세상의 신이, 그녀의 상처를 감당할 수 없으메}

“엘프··· 엘프들의 비명이었어! 너 뭘 한 거야! 어서 말하지 못해?!”

{이름의 의미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그것을 거머쥔 자에게 있는 것이로다.}


위니는 각혈하며 쓰러졌고, 혈마법사는 머지않아 찐득한 핏덩이가 되어 연구실에 흘러내렸다. 그가 카펫으로, 마룻바닥으로 스며들자 노인의 목소리는 이제 위니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대마법사. 에르딘의 설립자. 용 시해자 위니 터미너스.}

{진실을 위한 그릇. 진실과 공포의 대행자. 마법사 위니 터미너스.}


그녀가 거센 기침을 할 때마다 울컥이는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위니는 그녀의 수명이 꺼져감을 느꼈다. 헤레몬이라는 죄악을 몸에 담은 자의 최후란 그런 것이었다.


{뒤틀린 자. 빼앗긴 자. 자비로운 자 위니 터미너스.}

“쿨럭 쿨럭! 크허억! 끄으으···”

{동족 포식자. 터미너스(Terminus)라는 그녀의 마지막 이름은 곧 끝이란 이름의 시작이로다.}

{끝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는 끝에 다가가노라.}


{시작과 끝, 마루와 골의 행진이 드디어 끝을 마주할지니}

{오오 보라. 이는 균형을 이룬 천칭이오, 공포도 불행도 없는 낙원이로다.}

{우리의 손으로 일궈낸 인간의 터전이로다.}


노인의 목소리는 위니보다도 더욱 고통스럽게 쿨럭이며 점차 본연의 것을 되찾았다. 벽을 조이는 듯한 암연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위니에게 들려오는 것은 숨을 가다듬은 프레드릭의 목소리였다.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오. 하지만 그것은 필수적인 희생이었소. 그대는 자비로운 자니까 분명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오.”

“아아··· 아아아···”

“동족들의 희생으로 그대는 음유시인이 가장 고통스럽고, 약한 시간대에 눈을 뜨게 될 것이오. 그대의 의미는 바로 그 곳에 있을 지니···”


위니는 점차 흐릿해지며 목걸이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 프레드릭의 목소리는 점점 그녀에게 멀어졌다.


“위니 터미너스. 이야기의 끝. 그것이 바로 그대의 운명이라오.”


작가의말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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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대도 애옹론멕 브레이브본 +11 21.08.02 126 15 24쪽
222 도적들의 항구 +3 21.07.27 133 8 23쪽
221 뿌리내린 예언 +6 21.07.23 139 10 24쪽
220 최악의 상견례 +3 21.07.19 167 11 24쪽
219 예언자 왕과 고대의 존재 +4 21.07.15 183 10 21쪽
218 불편한 조우 +6 21.07.13 137 9 13쪽
217 녹아내린 시간 +5 21.07.08 160 14 18쪽
216 피아의 일기 +5 21.07.06 177 8 23쪽
215 그리고, 길잡이 +8 21.07.04 154 9 20쪽
214 그리고 꿈 +2 21.07.01 163 9 26쪽
» +5 21.06.26 189 12 32쪽
212 마법사의 기억 +3 21.06.23 166 9 17쪽
211 도시의 기억 +2 21.06.20 185 9 22쪽
210 엑시온 더 드래곤 +7 21.06.17 187 10 35쪽
209 어머니는 밟혔다 +3 21.06.14 166 10 20쪽
208 의미의 붕괴 +6 21.06.11 213 11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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