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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하세용

앞점멸 소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윤코
그림/삽화
세씨
작품등록일 :
2020.05.11 12:39
최근연재일 :
2021.10.12 16:08
연재수 :
2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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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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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도적들의 항구

DUMMY

항해는 늘 그렇듯 길고 지루했다. 그러나 고된 여정을 거쳐온 론멕에게 이는 마치 휴양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바닷바람의 소금기와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일상처럼 익숙해진다는 것은 항해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의 증거와도 같았다. 쏜살같이, 그리고 하염없이 흘러가는 끝을 향한 시간을 되돌아보자면 론멕은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에 대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겔겔겔겔.”

“...”

“핰핰핰하! 핰핰핰!”

“좀 닥쳐봐. 집중이 안 되잖아!”


해적 선장과 선원들의 갈라지는 웃음소리가 어느새 익숙해진 것도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놀라운 일 중 하나였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낮, 언젠가 여정을 시작했을 때 몸을 눕혔던 그 그물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은 론멕은 사과나무 통 위에 펼쳐진 트럼프 카드들을 훑어보며 해적들의 비웃음을 무시하려 애썼다.


“...이럴 땐 이걸 내야지.”


중얼거린 론멕이 나무통 위에 카드 한 장을 버렸다. 그 순간 거세진 해적들의 웃음소리를 듣자 하니 론멕은 자신의 패배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직감할 수 있었다.


“제가 이겼습니다 마법사님! 크핰핰하!”

“아. 이런 제기랄.”


패배한 카드와 승리한 카드. 그 순간 의미 없어진 손패의 카드들이 일제히 나무통 위에 쌓였다. 내깃돈으로 마련된 한 무더기의 동화가 선장의 손에 삼켜지는 것을 억울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론멕이 말했다.


“이런 게임에 실력이 있다고? 인정할 수 없어. 이건 전부 우연에 불과하잖아.”

“에이 그건 모르는 소리죠.”


그녀의 옆에서 사과를 베어 문 해적 선원 하나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손패에 무엇이 잡히는지는 마법사님의 말씀대로 우연이겠지만, 바닥에 깔리는 패와 상대가 내는 카드들을 보다 보면 경우의 수가 점점 줄어들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표정을 보고 상대방의 수를 예측할 수도 있고...”

“내가 표정이 잘 읽히는 편이던가?”


사과를 씹던 선원은 론멕의 퀭한 눈과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침과 사과, 그리고 묵직한 부담감을 꿀꺽 삼킨 그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실로 포커페이스의 달인이십니다.”

“그럼 뭐가 문젠데? 너희랑 판을 벌인 게 거의 스무 번이 넘은 것 같은데 아직도 어떻게 이기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그냥 실력 문제가...”


론멕은 희번득한 눈으로 선원을 노려보았다. 살기 가득한 그녀의 눈길에 살짝 허리를 숙이며 머리를 긁적인 그가 말을 이었다.


“...역시 운이 안 좋은 게 분명합니다.”

“난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내 꼴이 도대체 어떻길래 내 눈치를 보는 거야?”


아쉽게도 바다는 얼굴을 비춰 보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선원들과 선장은 그녀의 몰골이 어떤지를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수십 년간 바다 위에서 익혀온 생존 본능이 그것을 억눌렀다.


선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에, 론멕은 휘적휘적 카드를 모아 그것을 섞었다. 결의에 찬 셔플을 하던 그녀가 나무통 위에 카드 뭉치를 올려놓고는 말했다.


“아. 이럴 때 매키니 씨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게 누굽니까?”

“있어. 테플로 왕국 전설의 노름꾼.”


한층 더 침울해진 그녀의 눈을 본 해적들은 굳이 그녀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늘 그래왔듯 손패를 뽑아 새로운 게임을 준비했다.


그 사이 미리 손패를 든 론멕은 위니가 깨어 있는지를 확인했다. 목걸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위니는 바닷바람과 마찬가지로 일상이 되어버린 럼주에 취해 깊게 잠들어 있었다.


“한 판 더해. 지고는 못 살아.”

“그래서 그렇게 죽음에 가까운 몰골을 하고 계신 거였군요.”

“아니 좀 닥쳐 봐. 내가 아주 편해졌지 이제?”


론멕은 술, 그리고 피아와의 부담스러운 애정 행각이 불러온 이 혼자만의 시간에 만족했다.


속과 머리가 썩어들어가는 느낌을 감내한다면 그녀로서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외로움이었고, 이는 거짓의 권능을 실험하기에도 좋은 환경이었다.


“매키니 테쉬. 그녀는 이런 노름에서 매번 이겼지. 카드 게임에서 단 한 번도 지는 걸 본 적이 없어.”

“그건... 솔직히 말해 허풍처럼 여겨집니다. 아무리 실력이 관여한다 해도 결국은 운. 아무리 카드를 잘 치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 뭐. 우연에 불과하잖아? 다만 매키니 씨는 느린 시야로 옆 자리 사람들의 카드를 모조리 훔쳐봤을 뿐이었어.”


론멕은 손패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법이 침묵하면, 마법사가 잠들면 그제야 깨어나는 이글거리는 황금빛 불길이 그녀의 눈동자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모든 게 우연에 불과할 뿐이지.”


그 말을 끝으로 게임은 계속되었다. 해적들은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듯이 능숙하게 패를 내었고, 일련의 과정을 거치자 그들의 손패는 어느새 눈에 띄도록 줄어 있었다.


그것은 론멕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인 순간,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질 않는 참혹한 패를 묵묵히 노려보던 론멕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 이번엔 행운이 따라줬으면 좋겠는데.”

“하핰핰하! 이번에도 마법사님이 이길 경우의 수는 매우 희박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내가 뭘 내면 이기는 거지?”

“스페이드 에이스가 필요해 보이는군요. 그런데 그건 이미 나왔지 않았습니까? 마법사님은 이번에도 제게 패배했...”

“스페이드 에이스라...”


론멕이 말하고 생각하자, 그리 되었다. 최후의 패, 이 승부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하트 2는 어느새 스페이드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자.”


론멕은 보란 듯이 그것을 통 위에 던졌다. 흰 카드 위에 그려진 단 하나의 스페이드 문양이 모두를 침묵하게 했다.


해적들이 그 상황을 머리로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멍청하게 스페이드 에이스를 바라보던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이내 다급히 카드 뭉치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 수가 없는 건데?”

“한스! 저거 니가 갖고 있었던 거 아니냐?”

“예 선장님. 분명 제가 세 번째 바퀴에 그걸 냈...”


아무리 뒤져봐도 스페이드 에이스는 한 벌의 카드가 모두 그러하듯 단 한 장뿐이었다. 론멕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동화 뭉치를 쓸어왔고, 해적들은 그런 그녀를 일제히 돌아보며 동시에 소리쳤다.


“마법사님! 마법을 쓰시다니요!”

“무슨 소리야? 난 마법 같은 거 안 썼어! 너흰 마법사가 카드 바꿔 치는 마법이나 연구할 정도로 할 짓 없는 사람처럼 보여?”

“이미 천리안으로 손패를 훔쳐본 전과가 있잖습니까! 이건 사기라고요!”

“아니 그건 니네들이 먼저 판을 짜고 치니까 그랬던 거잖아!”


론멕이 보아온 카드 게임의 말로는 언제나 그러했다. 그것은 늘 뒷장을 빼던 스승 넬포와 손패를 훔쳐보던 매키니를 보고 배운, 정정당당한 승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용병들의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권능을 능숙하게 다룰수록 가슴의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그라드는 듯했다. 능청스레 기지개를 편 그녀는 노름판을 떠나며 하품 섞인 말을 내뱉었다.


“아. 해적들을 믿은 내가 병신이지.”

“마법사를 믿는 것보단 그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헛소리 하지 말고 사과나 더 가져와 봐. 집중했더니 목마르니까.”

[그리고... 술도...]


갑작스레 들려온 위니의 목소리에 론멕의 귀와 꼬리가 하늘로 솟았다. 흠칫하여 털을 부르르 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긴 채 다급히 뱃머리를 향한 계단을 올랐다.


<아니, 언제 일어나셨어요?>

[방금.]

<어디까지 봤죠?>


숙취에 시달리는 위니의 형체는 특히나 정신 사납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론멕을 바라보는 사이에, 론멕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무너진 균형. 거짓의 권능을 발현한 지가 방금의 일이었다. 과연 위니는 그것을 보았단 말인가?


론멕이 초조함에 떠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텅 빈 눈동자를 번득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몸 좋은 해적들이랑··· 뜨겁게 뒹구는 장면.]


그리고는 멍청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라? 이건 꿈인가?]

<...더 주무시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제게 있어서도, 당신에게 있어서도.>

[아무래도 그렇지?]


론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에, 그녀보다도 퀭한 눈가로 수평선을 응시하며 허공을 더듬거린 위니가 말했다.


[그래서 술이 필요해. 그것도 아주 많이.]

<그냥 주무세요. 해독 주문을 쓰던가.>

[그럼 취기가 사라지잖아. 애초에 그걸 느끼려고 술을 마시는 건데.]

<그럼 적어도 몸을 내어주기 전에는 해독을 쓰세요!>

[싫어! 그럼 잠이 깨 버리잖아!]


그녀의 머리칼은 그것이 형상임에도 무척이나 부스스해 보였다. 위니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벅벅 긁고는 말을 이었다.


[요즘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술 없이는 잠이 안 온단 말이야.]

<제가 경험한 바로는 술은 그 생각이란 걸 방해하던데요?>

[겨우 20년 산 애가 뭘 안다고 쫑알쫑알 말대답이야?!]

<21년이에요.>


수평선을 바라보던 론멕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위니는 그런 론멕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배가 파도를 가르는 소리. 습기를 머금은 목재가 비틀리는, 썩 듣기 좋은 갑판의 신음. 소리는 들려오지만 한 번도 가까이서 보지 못한 갈매기의 울음소리.


위니는 생각했다. 침묵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에 참 좋은 수단이라고. 500년이라는 시간에 비해 1년이라는 시간은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어찌 된 것이 이 붉은머리 여자아이와의 여정은 참으로 길게만 느껴졌다.


[뭐 어쩌라고.]

<아니... 그냥 그렇다고요.>


퉁명스럽게 말은 했지만, 위니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지는 론멕과의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것은 현재라는 이름의 축복이었기에, 그 소중함을 되새긴 위니로서는 도저히 미소지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고, 론멕은 그런 위니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으신데요?>

[과거의 후회, 현재의 부질없음, 미래의 불안함. 가장 큰 건 뭐 마지막 거지.]

<...언더우드 전하의 예언 때문인가요?>


론멕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능청스레 연기하며 말했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언. 루블란의 희망봉이 우리의 여정의 끝이 될 거라는 예언...>

[별 개소리야. 너는 그걸 믿어?]

<물론 아니죠.>


론멕은 헤레몬을 꺼내 불을 붙였다. 한 모금을 마신 그녀는 두 손가락으로 궐련을 집는 시늉을 하는 위니의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잠시 몸을 내어주었다.


위니도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는 순순히 그 주인에게 몸을 되돌려주었다. 바닷가에 퍼지는 헤레몬 연기처럼, 안개가 자욱해진 의식을 만끽하던 론멕과 위니는 둘 다 휘둥그레 눈을 뜨고 있었다.


두 약쟁이 중 입을 먼저 연 것은 좀 더 나이가 많고, 퉁명스럽고, 괴팍한 쪽이었다.


[그걸 안 믿는 애가 갑자기 루블란으로 가겠다고 해?]

<그걸 안 믿으시는 분이 절 말리지도 않고 가만 놔두는 이유는 뭘까요?>

[글쎄? 네가 아무리 조언을 해줘봤자 그걸 들어 처먹지도 않는 그런 글러 먹은 년이란 걸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

<그건... 일리가 있네요.>


론멕의 퀭한 눈동자가 깜박이는 것은 마치 빛이 점멸함과도 같았다. 멍한 표정으로 헤레몬 한 모금을 더 삼킨 론멕에게 위니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넌 왜 루블란으로 가려고 하는 건데?]


론멕이 그 이유에 대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어머니와 가족을 죽인 제르니모 덕분이었다.


<복수해야죠.>

[...]

<복수가 복수를 낳고, 뭐 이딴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요. 내가 더 아프고, 불행한 것도 이제는 겁나지 않아요. 나는 내가 설령 팔다리를 전부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제르니모는 죽여 놔야 성이 풀리겠어요.>


그리고 론멕은, 마치 그녀가 예언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달라는 듯이 위니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앞으로 계속 살아갈 생각이라면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에겐 참 고마워요.>

[왜.]

<제가 자살하려는 걸 막아주셨잖아요.>


위니는 이번에도 미소지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은 아이러니였으니까.


만일 예언이 사실이고, 그녀가 진실로서의 의무라 불릴 만한 일을 다 하게 된다면 세상의 시간은 500년 전으로 되돌아갈 터, 물론 그것마저도 아직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완벽하게 성공시켜야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녀와 함께 하는 이 현재와 찰나의 과거마저도 모두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다.


[···헛소리.]


마치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의미가 잃을 것이다. 론멕이 루블란을 향함은 그녀가 죽음조차 모자라 의미의 상실이라는 영원하고도 명백한 파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과도 같았다.


[...나 말고 피아에게나 고마워 해. 나는 네가 고마워 할만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아무럼요. 아. 피아에게는 이미 진한 키스로 보답한...>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쳐!]


그것은 부탁이었다. 론멕의 존재와 자신의 이야기를 두고 저울질하는 이 비참한 상황을 알아달라는 무언의 절규였다.


그러나 위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위니.>

[뭐 씨발년아.]

<제 복수를 도와주세요.>


그녀가 모르는 것은 론멕에게는 이미 예언이 뿌리내렸다는 사실이었고


<그러면, 저도 당신이 하려는 일을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테니까요.>


그녀가 간과한 것은, 론멕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이 불편함이 그저 아이러니함 때문이리라 생각한 위니는 그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됐어. 넌 도움 안 돼.]

“육지다!!!”


하늘에서 육지를 발견한 선원의 외침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꿈은 미소지으며 뒤돌아 하선을 위한 준비로 다급해진 선상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끝은 배 위의 그 누구보다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뒤따랐다.



= = = = =



루블란. 용과 난쟁이의 나라.


성국, 에르딘과 더불어 대륙의 세 끝이라 불리는 남쪽의 끝 희망봉이 위치한 왕국.


해적들이 정박한 항구는 희망봉으로부터 가까운 루블란 서쪽 바다의 한 외딴 항구였다. 론멕은 어째서 그들이 해적기를 내리지 않고 입항을 하는지에 대해 의아해했고, 그에 대한 해적들의 답은 간단했다.


“루블란의 왕국민들이 우리 해적들보다 더 한 놈들인데, 우리가 왜 굳이 정체를 숨기겠습니까?”

“···여긴 도대체 어떻게 돼 먹은 나라길래?”

“직접 보시는게 더 빠를 것 같군요. 겔겔겔···”


난간에 손을 얹은 채 낙후한 항구의 전경을 내려다보던 론멕은 머지않아 그 이유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곳은 무법지대였다. 더 블랙 툼스톤이 다스리던 황무지와는 다른 느낌의 무법지대가 론멕의 눈 앞에 펼쳐졌다.


다른 점이라 할 만한 것은 커티스와 그의 졸개들은 적어도 그들이 악당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인적 없는 황무지에 그들의 소굴을 마련했다 하면, 이곳 루블란은···


“크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이히히히힣히! 으히히힉!”

“낄낄낄낄낄낄낄”


분명 그곳이 국가 소유의 멀쩡한 항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나사가 빠진 도적들과 부랑자들이 버젓이 활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경비병의 것이라 할 만한 갑옷을 입은 자는 보이지 않았다. 생선 썩은 냄새와 뒷골목의 구린내, 그리고 문득 섞여 흘러오는 피비린내가 이곳의 치안을 짐작케 했다.


이 곳은 그야말로 도적들의 왕국이었다. 입항하는 배를 올려다보며 소름끼치는 미소와 찬사를 보내느라 여념이 없는 루블란의 왕국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론멕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 곳이··· 스승님의 고향?”

[난 넬포가 도적의 왕이라는 게 뭔 개소리인가 했더니. 이제는 그 말이 조금 이해가 되네.]


난간에 턱을 괸 위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루블란은 원래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이곳의 국왕이란 놈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어? 어? 저기 저 사람 방금 옆사람 주머니 털지 않았냐?]


론멕은 위니가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낄낄대며 돈 주머니를 던졌다 받는 한 소매치기가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채 몇 걸음을 걷지도 못하고 이마에 흉터가 박힌 남자에게 못 박힌 각목을 맞아 절명하여 고꾸라졌다. 흉터가 박힌 남자는 남들보다 훨씬 더 사악하게 웃으려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더욱 게걸스럽게 낄낄대고는 누군가가 날린 주먹에 맞아 쓰러졌다.


그렇게 어떤 불쌍한 자의 것일지 모르는 돈 주머니는 은밀하게, 그리고 동시에 대놓고 주인을 갈아치웠다. 소란이 계속되자 이제는 돈 주머니에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폭력배들이 싸움에 끼어들었고, 그것은 머지않아 난투로 변하여 사람들에게 즐거운 내깃거리를 제공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거대 전함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법도시에 있었던 론멕은 이 낙후된 항구의 법령이 적힌 표지판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루블란, 미네데 항구.)

(사람을 %이면 사형에 처한@.)


단 하나의 법. 애처롭게 기울어진 표지판 위에 새겨진 법령은 그마저도 수 많은 낙서와 칼자국으로 인해 희미해져 있었다.


론멕은 어째서 항구의 시민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해적선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녀를 향해 상스러운 손짓을 하는 부랑자 하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 시작한 론멕의 뒤에서, 피아와 랏산은 하선할 채비를 갖추는 데 여념이 없었다.


“지도는? 나침반은?”

“챙겼어요.”

“말린 배와 호두는?”

“혹시 몰라서 한 달 치나 챙겼어요.”


길잡이로서 챙겨야 할 짐들을 수도 없이 읊어가던 랏산의 말과는 다르게, 정작 피아의 등에 짐이라 할 만한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든든하다는 듯이 허벅지를 연신 두드렸고, 해적들은 가끔씩 그녀가 송곳으로 살점을 열어 그곳에서 잡동사니를 꺼내는 모습을 쳐다보며 경악했다.


그중 한 선원은 언젠가 노름판에서 피아가 박아 두었던 상처 속의 핏빛 눈을 더듬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픽 미소지은 론멕에게, 어느새 만반의 채비를 갖춘 피아가 성큼성큼 다가와 말했다.


“됐어. 이제 내리자.”

“···그래.”


피아를 잠시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던 론멕은 이내 랏산에게 고개를 돌렸다. 데블린 왕국을 비울 수가 없었던 그는 피아와 동행할 생각이 없었고, 그는 딸아이와 론멕을 배웅하기 위해 한 데 모인 해적들의 앞에 섰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론멕의 말에 랏산은 지긋이 눈을 감은 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론멕은 기다릴 것도 없이 선착장을 향하는 경사에 발을 올렸다.


그 뒤에서 피아는 그녀의 아버지와 작별의 포옹을 나누었다. 해적들에게도 공손히 인사한 그녀는 론멕의 뒤를 쪼르르 뒤따랐고,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해적 선장은 난간으로 걸어 나가 론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법사 님.”

“응?”


그리고는 씨익 웃어 금 이빨을 보이고는 말했다.


“다시는 보지 맙시다. 크핰핰하!”

“···그래. 고마웠다.”


그 말을 끝으로 해적 선장은 난간의 너머로 사라졌다.


해적선은 머지않아 닻을 올렸다. 어딘가 허술한 뱃고동 소리와 함께 항구에서 서서히 떠나는 배 위에서 예언자 왕은 그녀의 딸아이에게 손을 흔들었고, 선착장 위에 선 피아는 그녀의 아비와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며 그에 보답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지?”


점점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던 론멕의 말에, 손을 흔들기를 멈춘 피아가 말했다.


“아빠가 희망봉으로 가려면 난쟁이들의 지저성에 먼저 찾아가 보라고 하셨어. 거기에 루블란의 국왕 전하가 있을 거라 하셨고, 내가 데블린의 왕녀란 사실을 밝히면 그들이 도움을 줄 거라 하시더라.”

“든든한데? 이게 길잡이라는 건가?”

“그럼! 이제 내가 본격적으로 길안내를 시작할 거니까 아마 별 탈 없이 희망봉에···”


순간 등 뒤에 드리워진 육중한 그림자에, 슬며시 뒤를 돌아본 피아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별 탈 없이··· 도착할 수 있으려나?”

“퍽이나.”


론멕은 그녀의 뒤를 잡은 거구의 부랑배를 올려다보았다. 벌거벗은 상체를 조악한 가죽 갑옷으로 덧댄 그들은 대못이 가득 박힌 몽둥이를 손 위에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미데네 항구의 경비병들이다. 너희들은 입항하기 전에 먼저 신원을 밝혀야 한다.”

“경비병이라고···?”


그들은 경비병이라기보단 커티스가 보면 좋아서 눈이 뒤집힐 만한 황무지를 위한 인재들처럼 보였다. 그들의 지저분한 행색에 미간을 찌푸린 론멕이 허리춤을 뒤져 금화 몇 닢을 꺼내들고는 말했다.


“이거면 되나요?”

“아! 금화! 훌륭한 신원 보증품이지!”


몽둥이를 들지 않은 자가 손을 삭삭 비비며 말했다.


“그런데 아가씨들. 우리가 조금 욕심이 많아서 말이야. 그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은데?”

“아. 그럼 이거 받으세요.”


론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금화 주머니를 뜯어내 그에게 던졌다.


주둥이가 열린 주머니를 그가 허둥지둥 받아낸 탓에 몇 닢의 금화가 선착장 위에 떨어졌고, 어눌하게 생긴 거구들은 그것들을 붙잡으려 고개를 숙이다 서로 머리를 부딫히고 말았다.


그런 그들보다 조금은 똑똑하게 생긴, 주머니를 받은 불량배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입가를 덜덜 떨며 금화를 이로 물어 본 그가 귀신 들린 듯이 여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실례지만··· 뉘신지?”

“아니 그걸로도 부족한 거에요?”

“그러니까 진짜 신원을 여쭙는 게요. 이름은 뭐고, 어디에서 뭐 하다 왔소?”


그 말에 론멕은 잠시동안 침묵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피로 굳어 딱딱해진, 목에 걸린 머리띠를 어루만지며 그리운 옛 기억을 되살렸다.


넬포 브레이브본. 도적들의 왕. 그는 언젠가 루블란에 갈 일이 있다면 브레이브본이라는 이름을 대 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그녀에게 해 왔었다.


그 때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론멕이었지만, 그녀는 어느새 루블란에 와 있었다. 용과 난쟁이의 나라. 도적들의 왕국에 발딛은 그녀가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저는 론멕 ‘브레이브본’ 데이드림입니다.”

“뭐 씨발? 브레이브본?”


론멕은 경비병이라 자칭하는 부랑배의 욕지거리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야 이 씨발! 이 씨발년이 지가 브레이브본이라는데?”

“뭐? 그게 정말이야?!”

“잡아··· 잡아 족쳐···!”


그 말을 들은 항구의 모두의 시선이 론멕에게로 쏠렸다. 심상치 않은 살기를 한 몸에 만끽하던 론멕이 이마를 탁 치며 탄식했다.


“오··· 스승님. 당신은 대체···”


고함이 이곳저곳으로 퍼져 나가는 데에는 조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무기를 든 모든 자가 선착장으로 몰려드는 데에도 마찬가지였다. 론멕은 스승을 저주하며 단검을 뽑아내 곧 일어날 전쟁을 준비했다.


작가의말

봐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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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고해성사 +9 21.08.17 164 11 28쪽
225 신이 보는 곳 +2 21.08.09 153 10 22쪽
224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9 21.08.04 161 12 16쪽
223 대도 애옹론멕 브레이브본 +11 21.08.02 126 15 24쪽
» 도적들의 항구 +3 21.07.27 134 8 23쪽
221 뿌리내린 예언 +6 21.07.23 140 10 24쪽
220 최악의 상견례 +3 21.07.19 167 11 24쪽
219 예언자 왕과 고대의 존재 +4 21.07.15 183 10 21쪽
218 불편한 조우 +6 21.07.13 137 9 13쪽
217 녹아내린 시간 +5 21.07.08 160 14 18쪽
216 피아의 일기 +5 21.07.06 177 8 23쪽
215 그리고, 길잡이 +8 21.07.04 154 9 20쪽
214 그리고 꿈 +2 21.07.01 164 9 26쪽
213 +5 21.06.26 189 12 32쪽
212 마법사의 기억 +3 21.06.23 166 9 17쪽
211 도시의 기억 +2 21.06.20 186 9 22쪽
210 엑시온 더 드래곤 +7 21.06.17 187 10 35쪽
209 어머니는 밟혔다 +3 21.06.14 166 10 20쪽
208 의미의 붕괴 +6 21.06.11 213 11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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