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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하세용

앞점멸 소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윤코
그림/삽화
세씨
작품등록일 :
2020.05.11 12:39
최근연재일 :
2021.10.12 16:08
연재수 :
2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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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57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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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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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뿌리내린 예언

DUMMY

랏산과 위니는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예언자 왕은 송곳으로 허공에 피를 흩뿌려 나무의 뿌리와도 같은 괴악한 글씨체로 예언들을 써 내려갔고, 위니의 동공은 그가 중요한 정보를 발설할 때마다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위니는 욕을 했다. 랏산은 티가 나지 않도록 이를 갈았다. 예언을 믿지 않는 마법사와 예언자 왕은 그들의 대화에 술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서로가 동의했다.


해적선에 럼주가 차고 넘치는 것은 그런 그들에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술에 취한 채로 파도를 느끼던 위니는 속이 메스꺼려 고개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밤바다를 환히 비추는 달빛. 그 빛의 모체인 이 세상 너머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그녀의 식은땀을 쥐어짰다.


“신은 인간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세상에 존재했습니다.”


랏산은 말을 많이 한 탓에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그는 선장을 시켜 가져온 럼주로 목을 축이고는 텁텁한 입을 열었다.


“진실과 거짓의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천칭처럼 그 둘은 세상에서의 영향력을 두고 마치 파동처럼 강해지고, 약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

“단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균형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신조차 위협할 만한 파멸적인 재앙이 진실을 죽게 했지요.”

“니드벨린. 황혼 마법 전쟁. 마나 번 대폭발.”


위니는 그녀가 주섬주섬 모아 맞춘 항해도의 공백을 가리켰다. 마법으로 이어 붙여진 채 핏빛 오망성과 갖가지 낙서들이 칠해진 항해도는 이제 넝마나 다를 게 없는 참혹한 꼴이 되어 있었다.


망가진 세계 또한 이처럼 걸레짝이 나 있으리라. 그 섬뜩함에 미간을 찌푸린 위니가 랏산의 몫으로 마련된 술병을 낚아채 병나발을 불었다.


-국 국 국

“입을 대지 말··· 됐습니다.”

“크하! 아델릭 파우스트. 토툽스 제국의 대마법사. 그가 신비와 마법의 땅을 타르타로스로 만들어 놓았지.”

“최악의 전쟁 범죄자로군요. 그가 제가 말한 상황과 연관이 있다고 보십니까?”

“연관? 아주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이윽고 궐련을 입에 문 위니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실내에서 불을 붙이는 모습에 못마땅하다는 듯한 랏산의 표정을 말끔히 무시한 그녀가 연기 섞인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그놈이 신이었거든. 죽은 진실의 신.”

“일리가 있군요.”

“놀라지 않는 거냐?”

“진실의 신이라는 것은 늘 그렇게 탄생하는 법이니까. 마법은 아무리 연구를 해도 그 끝을 볼 수 없는 학문이라 알고 있습니다. 끝이라는 미지의 목표에 가장 가까이 파고든 자는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랏산은 찢어졌다 복구된 항해도를 손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들의 강함도, 그들의 유능함도. 마법을 모르는 자라면, 아니, 심지어는 마법사들이라 할지라도 당신과 같은 대마법사가 행하는 일은 마치 신과도 같은 권능으로 여길 겁니다.”

“멍청하니까 그런 거지.”

“어떤 신은 우리 인간을 그런 하찮은 시선으로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제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결국 신이라는 건 이름에 불과하다는 거잖아.”


손을 내두른 위니는 문득 머피의 마법공학을 떠올렸다.


말 없이 달리는 마차와 하늘을 나는 배. 손가락을 까닥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와 생명의 경지를 넘본 철제 인골들.


기계의 세계를 만들어 낸 미치광이 마법공학자인 그녀의 유산과 이야기가 외부 대륙에 퍼지게 된다면 세상의 양상은 결코 전과 같지 못할 것이다.


진실의 신이라는 것은 그런 것. 세상을 바꿀 정도로, 아니면 아델릭과 같이 세상을 파멸시킬 정도로 강한 힘을 거머쥔 마법사.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계승한, 최강의 마법사라는 살아있는 공포이자 질서.


그렇다면 거짓의 신은 어떤가? 마치 그러한 위니의 자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녀에게서 술병을 넘겨받아 나무잔을 채우던 랏산이 입을 열었다.


“강한 마법사여야만 신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이 경우엔 거짓의 이야기입니다.”

“계속하거라.”

“거짓이라고는 하나 그것에 속은 자에겐 엄연한 진실로 여겨질 뿐. 그럴싸한 이야기를, 창조된 설화를 사람들이 믿게 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성국이 섬기는 신은 그렇게 탄생한 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녀’가 음유시인인 건가?”


금발의 소녀, 음유시인의 꺄르륵대는 웃음소리가 거나하게 취한 위니의 의식에 파문을 남겼다.


어떤 힘을 부리는지 감조차 잡히질 않는 맥락 없는 존재. 인과율과 마법이라는 세상의 이치를 가볍게 무시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을 일으키는 존재. 기적과 불행, 창조와 파괴를 숨 쉬듯 일으키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


생전의 세월과 사후의 500년이라는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녀의 실마리가 잡히질 않았다. 심장을 조이는 답답함에 연거푸 술을 들이킨 위니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 그렇게 생각하면 인기 있는 음유시인은 모두가 신이 될 만한 인간들이었다 이거야? ‘그녀’는 어떻게 신이 된 거지? 지가 쓴 소설로 초대박을 치기라도 했다는 거냐?”


랏산은 말없이 위니의 눈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본 위니의 눈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아니··· 정말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랏산이 말했다.


“진실의 신은 참으로 자주 바뀌고는 하지요. 하지만 거짓의 신은 다릅니다. 그는, 혹은 그녀는 그대가 살아있었을 때부터도, 어쩌면 기록되지 않은 태고의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 암약해왔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

“거짓이 대행자를 두었다는 예언이 피아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질 않았으니까요.”

“···대체 뭔 소설을 썼길래? 음유시인이 신이라 불릴 정도라면 얼마나 인기가 많았길래? 아니 그것보다, 그런 게 있다면 나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어야···”

“감이 오질 않으십니까?”


이어지는 랏산의 말에 만취한 위니는 술기운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성국의 신화. 성국의 성서. 성국의 교리.”

“···”

“닭과 달걀. 무엇이 먼저인가? 이야기로부터 신이 태어나고, 신이 자신의 이야기를썼다면 신과 이야기 둘 중 뭐가 먼저란 말인가?”

“···”

“사실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답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성서를 쓴 자 또한 엄밀히 따지자면 음유시인인 셈이니, 그, 혹은 그녀는 필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겠지요.”



성서.


에르딘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세상에 신전과 성당이 존재하는 만큼, 아무리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그 내용을 꿰고 있는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신화와 교리의 집약체. 그것을 쓴 것이 음유시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위니는 머리를 크게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


그녀는 그 기막힌 사실에 놀라움을 채 제대로 느껴보기도 전에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았고, 그녀의 시선은 머지않아 랏산이 술을 따르던 나무잔에 가서야 멈추었다.


잘려나감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녀의 걱정과는 다르게, 병에서부터 잔으로 물줄기를 이루던 술은 그것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음유시인. 금발의 소녀는 그녀의 정체가 이런 식으로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위니가 이제는 자신의 몸처럼 익숙해진 단발머리를 손으로 휘젓고는 말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빼앗긴 게 있어.”

“그 말을 들은 것이 이번이 정확히 다섯 번째로군요.”

“그래. 그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를 누군가가 알아차리면 그 즉시··· 그것이 없었던 일이 되는 지독한 저주까지 갖고 있지. 이 사실을 말했는데도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아.”

“···”

“그런데 넌, 너희들은 도대체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 정보가 계승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뭐야?”

“그대의 말에 이미 답이 있습니다. 고대의 존재여.”


나무잔을 홀짝인 랏산이 말했다.


“그대가 그저 ‘빼앗긴 것이 있다’ 라고 말할 뿐인 것처럼, 예언 또한 무언가를 암시하는 비유 노랫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격과 요철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그는 두 손을 모아 타르타로스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지도의 공백을 감싸며 말을 이었다.


“공백이 드러나는 것이죠. 없는 것에 불과하지만, 무언가 있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는 그런 공백이···”

“···”

“우리는 오직 그 공백을 전하기 위해 피나무를 죽지 않도록 가꿔 왔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정말 의미가 있었던 겁니다.”


허공에 떠오른 피나무의 뿌리, 예언의 문구를 떠받들 듯 손을 들어올린 랏산의 앞에서, 위니는 론멕의 빨간 머리칼을 거리낌 없이 쥐어뜯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이성과 뜨겁게 끓어오르는 흥분. 밝은 희망과 어두운 절망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를 이루는 듯했다.


마음의 갈피를 도무지 잡을 수 없었던 그녀는 마치 듣기 싫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며 항해도 위에 고개를 박았다.


이제야 확실해진, 그녀가 해야 할 일처럼, 길잡이의 목소리는 그가 술에 취했음에도 너무나 또렷했다.


“꿈의 끝. 끝이라는 이름의 시작. 의미가 없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 선조로 인한 엘프의 희생도 마찬가지였겠지요.”

“···”

“500년이 지났습니다. 거짓은 운명과 진실 모두를 뒤집어 놓을 거대한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고, 그것이 오랜 시간 동안 힘을 모아온 만큼 그것은 고통스러워하고,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습니다.”

“···”

“이제는 그대가 당도했습니다. 이야기의 끝. 이 영원한 파동의 끝을 낼 위니 터미너스라는 마법사가 오랜 기다림 끝에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겁니다. 끝이라는 이름의 시작이, 마치 예언의 문구처럼···”


항해도 위에 드러누운 위니는 이제 붉은 말미잘과 다를 바가 없는 추레한 모습이 되었다. 그 앞에서 랏산은 미쳐버린 취객처럼 과장된 몸짓을 하고서는 나지막이 말했다.


“뭐. 마침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 = = =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로 위니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음을 깨달았다. 선장실의 창으로 보이는 넘실거리는 밤바다가 책상 위의 깃펜과 송곳을 흔들리게 했다.


그녀는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뇌 속의 혈관에는 피 대신 술이 흐르는 것 같았다. 독한 술로부터 발화된 뱃멀미는 잔잔한 파도조차 폭풍의 해일로 만들었다.


두통에 시달리던 위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상을 지으며 어지러움을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의식은 그녀의 목소리보다 한발 늦어 있었다.


“정말··· 모든 걸 되돌릴 수가 있다고···?”

“···.”

“그 좆같았던 일들을··· 전부 없었던 일로 만들 수가 있다고···? 에··· 에르··· 내··· 내 책 도둑 친구도 다시 볼 수 있는 거고··· 그러면 엘프의 멸종도 없었던 일이 되는 건가?”

“···”

“난 마법이 좋았을 뿐인데··· 그 이유만으로 내 곁에는 항상 불행 뿐이었지··· 그런 불행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가 있다고···? 아무 것도 없이 폐허 속에 선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있다고···?”


실로 역사라 할 만한 기나긴 시간 동안의 이름들이 그녀의 의식에서 점멸했다.


엘프 마을의 서기. 폭동 주동자. 토툽스 제국의 대마법사이자 또다시 마법사들의 반란을 이끈 최악의 반역자.


은둔자. 도망자. 마법도시 에르딘의 설립자.


그리고, 용 시해자. 세상을 구한 영웅.


빼앗기고 잘려나간 망가진 이야기. 그것이 온전히 남은 최후의 기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녀의 기억이리라.


다만 그 기억을 향유하는 본인조차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 자신이 이런 것에 감상에 젖을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수 많은 이름들을 가져왔지만, 결국 그녀는 마법사였으니까.


“역시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로군.”

“피나무 맙소사 지금까지 도대체 뭘 들으신 겁니까?”


울다가 싸늘히 돌변한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감정 상태에 질려버린 랏산은 왕으로서의 품격조차 잊은 채 그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고대의 존재여. 예언은 분명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난 예언 같은 거 안 믿어.”

“제 설명을 듣긴 하셨습니까?”

“시간이 되돌아갈 거라는 예언? 넌 그럼 그걸 믿는다는 거냐? 그럼 지금 당장 육지에 내려서 새 왕비가 될 사람이나 찾아보지 그래? 어차피 다 없었던 일이 될텐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모두가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제가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이라도 설명해 주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야.”


위니는 이제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고개를 들이민 피폐한 고양이의 기세에 랏산은 그만 어깨를 움찔하고 말았다.


“시간을 어떻게 되돌릴 수가 있지?”

“···”


랏산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치와 논리를 다루는 마법. 그런 마법에 통달한 대마법사에게 예언이 타당함을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분명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세상이 거짓된 세상이 아니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예언은··· 공백을 더듬는 것···”

“아. 모르나? 그럼 미안하지만 난 네놈 말을 믿어줄 생각이 없어. 이 입만 산 버러지 같으니.”

“그럼 그대는 해적들이 그들의 항로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 말에 위니의 꼬리가 꿈틀댔다. 그녀는 치부를 드러낸 여느 여인과 다를 것이 없이 불쾌함을 가득 담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대가 품은 저주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마법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적어도 혈마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아 감히 여쭙는 겁니다.”

“닥쳐.”

“고대의 존재여. 그대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세계의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 또한···”

“으힉핫! 커헉!”


위니는 딸꾹질과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익사 직전에 물 맡으로 나온 사람처럼 켁켁대던 그녀는 사례 들린 가슴을 연신 두드리며 고개를 젖혔다.


그녀는 한참동안 선장실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랜턴에 담긴 호롱불은 파도에 맞춰 일렁이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침묵이 지나고, 그녀는 여전히 랜턴을 응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내가 화가 나는 건 말이야. 네놈의 그 같잖은 예언 때문이 아니야.”

“···”

“그걸 믿을 수 밖에는 없는, 선택지가 그것밖에 남지 않은 내 자신의 상황이···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는 거야. 마치 500년 전, 프레드릭 그 노망난 늙은이를 만났을 때처럼···”


위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빛을 가렸다. 의자는 그녀의 몸과 함께 기울며 위태로운 무게중심을 유지했다. 비참함에 몸을 뉘인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잘 들어.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선택을 하게 되면 우선 너희들부터 싸그리 곱게 갈아 주마. 그러니 군대를 준비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전쟁을 준비해. 우리 론멕은 피튀기는 걸 참 재밌어하거든.”

“여부가 있겠습니까?”


랏산은 지긋이 눈을 감으며 술잔을 입에 물었다. 그와는 다르게 슬쩍 손을 내려 슬며시 눈을 뜬 위니가 그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별 이상한 새끼를 다 보겠네.”

“우리 언더우드 가문의 일원들은 그런 평을 종종 듣고는 합니다.”

“야. 하나만 물어 보자.”


랏산은 긍정의 의미로 눈을 떴다. 불쾌할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푸른 눈을 묵묵히 노려보던 위니가 엄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론멕이라는 아이. 론멕 데이드림 말이야. 그 예언에서 꿈이 의미하는 게 론멕이지?”

“저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 그녀와 함께 한 것은 제가 아닌 그대가 아니겠습니까? 누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는 뻔한 일이겠지요.”

“···그런가.”

“그녀가 이 일에 휘말림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다리를 꼰 채 다시금 항해도로 드러누운 위니가 팔뚝에 얼굴을 파묻었다. 랏산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축 늘어진 귀와 꼬리에서 느껴지는 감정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그녀와 뜻밖의 공감대를 가지게 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피아를 그리 여기듯, 이 위니라는 이름을 가진 고대의 존재 또한 론멕이라는 아이를 비슷한 심정으로 대하고 있으리라.


그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그 무엇보다도 두텁고 견고한 유대의 울타리였다.


“하지만, 어째서입니까?”


그것은 분명 고귀하고 아름다운 감정이었지만, 고대의 존재가 먼 훗날에 마주친 여인을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그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의혹을 가득 담은 랏산의 물음에 위니는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몰라. 빌어먹을 년 같으니.”


그리고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꼬리와 귀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죠?”

“···”

“저는 분명 잠들었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들을 수 있었어요. 전하와 위니가 나눈 모든 대화를 저는 기억하고 있어요.”


찰나의 수면을 마친 그녀의 목소리는 전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기지개를 펴듯 일어선 귀는 좌우로 쉴 새없이 쫑긋였고, 그것은 몸의 주인의 귀환을 알리는 깃발과도 같았다.


깨어난 론멕은 알 수 있었다. 깨질 듯이 아픈 머리와 지금 당장 구토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메스꺼움으로 위니가 거나하게 취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말라 버린 눈물샘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니 위니가 울면서 잠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론멕은 울상을 지은 채로 그녀의 것이 아닌 눈물을 휘적휘적 닦아내고는 말했다.


“예언이 사실인가요?”


랏산은 나무 잔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론멕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대답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뭐죠?”

“···”

“꿈의 끝이라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죠? 나는 어째서 존재하는 거죠? 내 삶의 의미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요?”

“···”

“이 모든 일들이··· 나의 이야기가··· 어차피 없었던 일이 될 한낱 꿈과 같은 이야기라면··· 나는··· 나는 어째서 이런 아픔을 겪어와야 했던 거죠?”


론멕은 손톱으로 가슴팍을 짓눌렀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후로 처음 느낀 것은 위니의 행동의 잔재가 아닌, 어김없이 그녀의 심장을 할퀴는 구속구의 고통이었다.


위니는 느끼지 못하지만, 그녀는 분명 느끼고 있었다. 불행은 일상이 되었고, 상실은 끝없이 찾아왔다. 퀭한 눈을 끔벅인 론멕은 자신이 술에 취해 있음에 감사했다.


“모든 예언이··· 마치 머리에 박힌 것만 같아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저는 잘··· 그리고 너무나도 자세히 알겠어요···”

“나의 주술 덕분이라네. 그것이 데블린 왕국의 의미이자 피나무의 의미, 그리고 우리 조경사들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아아··· 아아아아···”


정신에 뿌리를 내린 예언들, 그리고 위니와 랏산의 대화는 공백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나 론멕에게는, 거짓과 불행의 대행자로서 두 신을 모두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론멕으로서는 그것은 더 이상 공백일 수가 없었다.


론멕 데이드림.


신에게 사랑받는, 단언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은 그녀의 동반자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또렷이 마주하고야 말았다.


“나는···”


론멕은 여러 번 말을 삼켜야만 했다. 그것은 간단한 선택에 불과했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세계의 운명이 달린 무거운 말인 만큼,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음식을 삼킨 것처럼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숙인 채, 붉은 머리칼에 얼굴을 숨기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예언 같은 거 안 믿어요.”

“···”

“하지만··· 그것이 그래야만 하는 일이라면··· 빼앗긴 자가 원래 가져야 했을 것을 돌려주는··· 그런 당연한 일인 거라면···”

“···”

“나는··· 나는 어떤 불행이든지 기꺼이 맞이할 준비가 돼 있어요··· 그야···”


고개를 들어 슬픈 미소를 지어보인 론멕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건 익숙하니까···”

“···”

“전하··· 그러니 이런 제게··· 자비를··· 자비를 베풀어 주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랏산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론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론멕 브레이브본 데이드림.”


낡아 빠져 뻑뻑한 선장실의 문을 힘겹게 밀어붙이던 그녀의 등 뒤에서, 예언자 왕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운명은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주었으면 하네.”

“···”

“절대 죽지 말게. 그대와 피아의 목숨은 그 운명을 같이 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아시는 분 치고는 미련이 많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


랏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론멕을 바라보았다. 그는 씁쓸하게 미소지었지만, 그의 눈에는 피아의 것과도 같은 생기가 가득 차 있었다.


“뭐. 그게 인간이 아니겠는가? 이 몸이 피아를 되살린 것처럼, 인간은 언제나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기에 그만큼 현명할 수 있는 법.”

“···”

“그러니, 피아를 잘 부탁하네. 데이드림 양.”


론멕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선장실의 문을 발로 걷어차 기어코 그것을 열어냈다.


문이 요란스럽게 열리고 나서 찾아온 것은 밤바다의 고요함이었다.


별들은 하늘을 수놓은 채 빛나고 있었고, 잔잔한 파도는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론멕은 흔들리는 고요 속에서 제대로 가누어지질 않는 발걸음을 어렵사리 옮겨 어둠 속을 향했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른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뱃머리의 난간에 걸터앉은 누군가의 실루엣이었다.


“···”

“···”


그녀의 머리칼은 달빛보다도 아름다웠고, 밤하늘의 그 어떤 별조차 그녀의 눈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긴 머리가 어울릴 것 같다는 옛날의 가벼운 말 한마디를 소중한 보물처럼 간직하며 지나칠 정도로 길어진 머리칼을 묶지도 않은 채 그것이 바닷바람에 휘날리도록 놔 두고 있었다.


“론멕?”


피아가 론멕을 보기 위해 연신 머리칼을 휘젓는 모습은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론멕은 충분했다. 론멕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 목적지가 명확한 발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빠랑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눴길래 거의 반나절동안 그 안에 있었던 건데? 아빠가 뭐라셨어?”

“···”

“설마··· 설마 아빠가 널 고문한 건 아니겠지? 아니 뭐, 그게 우리 전통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럴 수는 없는··· 어어? 어?”


론멕은 말 없이 피아의 허벅지에 얼굴을 찍었다. 무척이나 당황한 피아는 힘 없이 쓰러진 그녀를 다급히 부둥켜 안은 채 그녀를 일으켜세우려 나름의 노력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너 술 마셨어?”

“아니.”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내가 아니야. 지옥에 맹세해.”


론멕은 설득력 없이 몸부림치며 피아와 마찬가지로 난간에 걸터 앉았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가 바다에 빠질 뻔했지만, 고양이의 유연함은 그 순간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피아는 당황하여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먼저 움직인 것은 론멕이었다. 연인에게 몸을 기울인 그녀는 입을 맞추었고, 피아는 저항할 생각이 없었다.


밤바람이 그들을 축복했다. 이 순간만큼은 저주스러운 기나긴 머리칼을 애써 가다듬은 피아가 입술을 핥고는 말했다.


“쓰다. 론멕.”

“미안.”

“그래서 아빠가 뭐라셨어?”

“잘 부탁한다더라.”


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보다 더욱 당황하여 무어라 어물거리는 그녀의 앞에서, 배시시 미소지은 론멕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 하고 싶은게 있는데."

"...일단 입부터 헹구고 와. 진짜 쓰다고."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우리 그냥 루블란으로 가자."


그 말에 잠시동안 침묵한 피아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쉬고 싶지는 않아?"

"괜찮아. 그야..."


수평선을 향해 고개를 돌린 론멕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아직 모험이 하고 싶거든."


작가의말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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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9 21.08.04 161 12 16쪽
223 대도 애옹론멕 브레이브본 +11 21.08.02 126 15 24쪽
222 도적들의 항구 +3 21.07.27 133 8 23쪽
» 뿌리내린 예언 +6 21.07.23 140 10 24쪽
220 최악의 상견례 +3 21.07.19 167 11 24쪽
219 예언자 왕과 고대의 존재 +4 21.07.15 183 10 21쪽
218 불편한 조우 +6 21.07.13 137 9 13쪽
217 녹아내린 시간 +5 21.07.08 160 14 18쪽
216 피아의 일기 +5 21.07.06 177 8 23쪽
215 그리고, 길잡이 +8 21.07.04 154 9 20쪽
214 그리고 꿈 +2 21.07.01 163 9 26쪽
213 +5 21.06.26 189 12 32쪽
212 마법사의 기억 +3 21.06.23 166 9 17쪽
211 도시의 기억 +2 21.06.20 185 9 22쪽
210 엑시온 더 드래곤 +7 21.06.17 187 10 35쪽
209 어머니는 밟혔다 +3 21.06.14 166 10 20쪽
208 의미의 붕괴 +6 21.06.11 213 11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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