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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랑전(極狼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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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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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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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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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17화. 타초경사(打草驚蛇) (1)

DUMMY

“놓쳤다고요.”


천중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안색을 다스릴 겨를도 없다. 만약 천중이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어수룩했다면, 그나마 꾸밈으로라도 표정을 다스렸겠지만─


“며, 면목 없습니다. 워낙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고, 너무 뒤늦게 알아서···.”


늘 하던 대로 아라부카를 내보내 주변 정세를 둘러보다, 대박을 건졌다. 아니, 결과만 놓고 보자면, 최악의 쪽박이다.


바로 사흘 전까지만 해도 공의현에 있던 무허자가 어느 틈에 사라진 것이다.


천중은 기함하며 공의현에 들어오지 않은 천가방의 남은 패거리를 다 동원해 사라진 무허자의 뒤를 쫓았다. 물론, 백련교의 손도 빌렸다.


어쩐지, 그 염라왕 염천호가 요 며칠 사이 기묘할 정도로 허술하다 싶더니만. 물론 그 덕분에 천중은 천가방의 방도 300명과 40명의 백련교 호법을 아무런 마찰 없이 공의현으로 들여오는 것에 성공했지만─


만약 무허자가 갑자기 무당으로 귀환해버린 이유가 혹시라도 ‘그 책’ 때문이라면···!


“임무, 실패··· 인가요?”


천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 그게···!”

“후후, 아녜요. 방주님. 농담이랍니다.”

“···예?”


여인은 그 미모에 어울리는 아주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광륜사자께는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하필이면 광륜사자께서 자리를 비우신 틈에 이런 일을 알게 되다니··· 아주 크게 당황하셨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방주님?”

“···예, 물론입니다. 이런 실책을 저지르다니, 진심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후후, 그리 긴장하실 것 없답니다. 방주님의 고충은 소첩도 잘 이해하고 있사와요. 다른 이도 아니고, ‘흑도(黑道)의 주인’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하오문주─ 염라왕 염천호의 눈이 이곳 하남성과 공의현을 향해 있으니··· 그 눈을 피해 송화루를 손에 넣으신 것만으로도 방주님께선 하실 일을 다 하셨다고 봐도 무방하니까요.”


천중은 그제야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아냈다.


“···가, 감읍할 따름입니다. 소저.”

“어머, 소저라니! 후후···.”


여인, 교랑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교랑(嬌娘)이라고 불러주시어요. 소저라는 호칭은 마음에는 들지만, 후후···.”


천중이 고개를 끄덕이자, 교랑이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듯, 무허자에 관한 이야긴 제가 직접 사자께 전달하도록 하겠어요. 사자께서는 교(敎)의 대호법으로서, 공사다망하신 분이시니··· 후후, 이런 사소한 일로 그분의 마음을 어지럽힐 필요는 없겠지요. 우후후후후···.”


듣는 이의 방심(芳心)을 뒤흔들 만한 웃음소리였지만, 교랑의 정체를 알고 있는 천중에겐 소름 돋는 웃음소리였다. 천중은 무슨 일로 그리 웃느냐는 뜻을 담아 팔에 돋은 닭살을 한 번 쓸고는 교랑을 빤히 쳐다보았다.


“광륜사자께서 어찌하여 천 거사를 그리 총애하시나, 그 이유가 참으로 궁금했사온데, 이제 알겠어요. 과연 인재를 탐하시는 사자께서 탐내실 만한 인재시어요.”

“과찬이십니다. 소인은 그저 왈패, 양아치 놈일 뿐입지요.”

“그런 것 치고는 귀가 너무 밝으신걸요?”

“가늘디가는 목숨줄, 연명이나 하려고 귀를 열고 다니는 게지요.”

“후후후.”


교랑은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옆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천중이 급히 눈짓하자, 그들 옆에 시립하고 있던 수하 하나가 교랑에게 대나무로 만들어진 곰방대를 건네주었다.


“후후, 아편인가요?”

“그렇습니다. 이제 이 송화루의 주력상품이 될 물건입지요.”


천중은 교랑의 입에 물린 곰방대에 불을 붙이고서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취해 보였다.


“이건 물론, 귀교에서 베풀어주신 크나큰 은공 덕분입니다.”

“어머나, 이에 관해서 소첩은 한 일이 없는걸요?”


천중은 흐흐, 웃으며 말했다.


“옛날부터 구상하던 사업인데, 말입니다. 이 여송연이란 놈은 첨부터 제가 꽉 잡고 있던 거라 걱정이 없었는데···. 아, 물론 황하길을 통하는 물건뿐이지만요.”


천중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에 문 여송연을 꾹꾹 눌러 씹었다.


“고놈은 아무래도 그, 뭐랄까, 무려 황상께서 직접 관할하시는 국가사업 아닙니까. 건드리면 목이 달아나는 것인데─”


정확히는 아편을 가공할 수 있는 자들이 오직 황제의 관리하에 있는 것이다. 지난 계축(癸丑)년, 스스로 포도아(葡萄牙)에서 온 상인이라 소개한 구주인(歐洲人)들이 황제의 허가를 받아 광동성 향산현에 체류하게 된 일은 온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구주인들이 화제가 된 이유는 단순했다. 물론, 놈들의 벽안(碧眼)과 더불어 중원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신기한 문물을 가진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놈들은 아편을 가지고 있었다. 저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서역 놈들만이 다루던 그 아편 말이다.


지난해, 그러니까 정사(丁巳)년에서야 비로소 주강(珠江)을 통한 포도아의 구주인들과 중원 전역의 정식 교역이 확정되었다. 계축년부터 정사년까지 햇수로 5년의 세월 동안, 알 만한 놈들은 오로지 이때만을 기다렸다고 봐도 좋으리라.


포도아 놈들의 아편은 무려, 연초처럼 태울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광륜선사님은 물론, 더불어 귀교 분들께는 감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후, 그럼, 그 보답을 해야지 않겠어요?”

“물론 그렇지요. 그래야 합지요.”

“후후, 그러면 앞으로도 열과 성을 다해주셔야겠군요.”

“물론입니다. 그야말로 성심을 다하여 일을 돕겠습니다.”


가만히 아편을 피우는 교랑을 쳐다보던 천중은 문득, 지독하게 연기가 땡꼈다. 그는 교랑의 눈치를 살피며, 품에서 연초 주머니를 꺼냈다.


“소첩의 허락을 구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이곳의 주인은 방주님이시잖아요?”

“···감사합니다.”


신경쓰지 말래도, 안 쓸 수야 있나. 천중은 감사 인사를 잊지 않고 얼른 여송연을 꺼내 불을 붙이고는 길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후우···.”


천중이 길게 연기를 내뿜자, 교랑은 곰방대의 연기를 마주 내뱉었다.


“흐응, 이거 좀, 뭔가 늘어지는 기분이 드는군요.”

“먹는 것보다는 효과가 훨씬 빠르지 않습니까?”

“후후, 그렇군요.”


교랑은 곰방대의 아편을 다 태우지 않고 탁자에 놓아둔 연회항(烟灰缸)에 남은 아편을 떨어버렸다.


“어이쿠, 이 귀한 것을···.”


천중이 아깝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쳐다보자, 교랑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곧, 귀한 것이 전혀 귀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 거예요, 방주님. 믿으시나요?”

“···믿습니다. 아무렴요.”

“후후후···.”


교랑은 사내의 방심을 뒤흔드는 웃음을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방을 나가자, 천중은 축축하게 젖은 등허리를 의자에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씨발···. 사독파파(邪毒婆婆)라···.”


계묘혈사에서,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최악의 학살자가─



* * *



무당산은 험준하다. 그러나 중원을 대표하는 오악에 이름을 올린 산은 아니다. 흔히 무당산을 두고, 도문의 영산(靈山)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도가에서 성산(聖山)으로 꼽히는 곤륜산처럼 신화적인 배경이 있기에 그리 불리는 것은 아니다.


속세에서도 이르기를 천하오악의 일각도 아니요, 빼어난 봉우리가 있어 천하절경의 정취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라 하고, 도문에서도 이르기를 이 산의 영기가 곤륜이나 화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진대─


무엇이 있어 감히 무당산이야말로 큰 조화(太和)가 있다 말하며, 무당산에 자리 잡은 무당파를 두고 천하제일문이라 일컫게 할까?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근거는, 송말원초의 랍탑도인(邋遢道人) 장삼풍(張三豊)이다. 장삼풍은 무당산에 삼풍파(三豊派)를 세우고 그 개파조사가 된 인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장삼풍은 덥든지 춥든지 걸친 것은 오직 낡은 옷 한 벌뿐이었다 한다. 오죽했으면 거지와 비교해도 더럽고 지저분한(邋遢) 도인이란 별호가 붙었겠는가? 물론, 그가 유명한 이유는 더럽고 지저분해서가 아니다.


그의 무공 때문이다. 그는 태극의 묘리를 깨우친 후 익힌 권법으로 백여 명의 적을 한주먹에 격살해, 사상 최초로 맞수 없는 천하일절로 꼽힌 고수였다. 불문을 이야기할 때 달마도강(達磨渡江)을 빼먹는 일이 없듯, 도문에서 그의 이름을 빼놓는 일이 없다.


첫째로 꼽은 근거가 있으니, 둘째로 꼽아야 할 근거 또한 있을 것이다. 송말원초의 장삼풍은 현재로부터 약 300년이 훌쩍 넘는 간격을 가지고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전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둘째로 꼽을 근거는, 보다 현재와 가까운 근거였다. 물론, 그 역시도 200여 년의 간격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근거는 200년의 세월을 넘어 현재까지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매우 물질적인 근거이다.


바로, 성조 문황제─ 영락제(永樂帝)께서 12년에 걸쳐 세운 무당파 본궁이 바로 그것이다.


해발고도로 540여장(약 1620m)에 이르는 높이의 거대한 무당산에 자리한 궁. 마치 산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한 무당파의 본궁은 인간이 손으로 지은 건축물과 신이 빚은 자연물이 크게 조화를 이루는 절경 중의 절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무당산의 다른 이름이 바로 태화산(太和山)이다.


그중에서도 팔궁이관의 중심에 위치한 자소궁(紫霄宮)은 무당의 크고 웅장한 건축물들 사이에서도 가히 으뜸이다.


심지어 자소궁은 속가제자로 입문한 당금의 천자, 황제 폐하께서 몸소 들러 백일연공을 한 장소이다. 그를 증거라도 하듯이 백일연공을 마친 천자가 친히 하사한 친필현판은 지금도 자소궁의 현판 바로 아래에 걸려 있었다.


이는 그야말로 무당파의, 아니 도문의 자부심이자 보석인 것이다.



* * *



“지금 그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도문의 보석에 개풀 뜯어먹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보다 더한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이오?”

“이런, 이런···! 이런 정신 나간 자를 보았나?!”

“뭐요? 입조심 하십시오, 사형! 어디 신성한 자소궁 안에서 욕지거리를!”

“입은 비뚤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이깟 서책 하나가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 내용을 보게! 이, 이! 이 내용을 좀 보란 말일세!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공상, 아니 망상이 아닌가!”

“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십니까?! 임맥과 독맥을 역법으로 뚫는 역혈신공은 지극히 현실적인 가능성을 지닌 심법 아닙니까? 게다가 이 서책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지금까지 아무도 백련교의 삼제진경을 파훼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습니까!”

“사형에게 개떡 같은 소리라니!”

“개풀 뜯어먹느냐는 둥, 정신이 나갔냐는 둥, 막말은 사형이 먼저 하셨잖습니까?!”


점점 개판이 되어가는 와중에, 굵은 목소리가 자소궁을 울렸다.


“현문!”

“···예, 장문.”

“비록 우리가 속가와는 다른 하늘의 도리를 따른다 하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현문 자네가 본문의 장로라면 더욱이 말일세.”

“송구합니다.”


현문이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장문, 현현진인의 목소리가 다른 쪽을 꾸짖었다.


“현청 자네 또한 다르지 않네.”

“···송구합니다. 장문.”


무당의 장문, 현현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눌러 가면서 손을 내밀었다. 현청은 마지못해 손에 들린 서책을 내밀었다. 현현이 허공에 한 차례 손을 휘젓자, 현청의 손에 들린 서책이 허공을 격해 현현의 손에 들어왔다.


“···약왕서(藥王書).”


정말 아무것도 없는 허름한 표지다. 달랑 제목 하나뿐이니, 누가 썼는지 또한 알 수가 없다. 약왕서라니. 어지간히 허황한 자거나, 혹은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자일 테다.


“무허.”

“예, 장문.”


무허는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이것을 얻은 경위를 다시 한번 설명할 수 있겠는가?”

“소상히 말씀드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간략히 말씀드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알아서 하시게.”


무허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입꼬리를 뱅글뱅글 돌렸다.


“하면,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말씀드린 만큼, 소상히는 말고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현현이 이마를 짚은 채로 손을 내젓자, 무허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대략의 경위는 이러합니다. 제자는 사부님의 명을 받고 하남제현이 초청한 영웅대회에 참석했사온데, 일련의 과정으로 멸절되었어야 마땅한 백련교도들이 아직 남아 음지에서 한현보를 시작으로 강호 전체를 겁화로 이끌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사옵니다.”

“그 일에 구보신개가 증인이라?”

“그렇습니다. 구보신개께서는 지난 15년간 잠적한 백련교도들의 흔적을 뒤쫓으셨다며 때를 맞추어 제자와 한현보의 소가주, 제갈세가의 연화신산을 구명할 수 있었던 연유를 설명하였사옵니다. 그때에 스스로 광천사자라 밝힌 백련교의 호법의 위협이 있었사온데,”


그때 현청이 끼어들었다.


“광천사자라니···! 정녕 그자가 살아 있었단 말이냐?”

“조용히 하시게, 조용히!”


현현이 짜증 섞인 어조로 꾸짖자, 현청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고, 무공은 감히 비유컨대 장문과 비견될 정도의···.”

“감히 경솔하게 장문을 빗대어 말하다니! 어인 망발이란 말인가?!”


현청 뒤에서 큰 목소리가 났다. 무허는 그러는 너야말로 감히 장문과 장로들이 자리한 곳에서 감히 입방정을 떠느냐고 찔러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다시 말을 이었다.


“감히 비유컨대 구보신개 대협과 대적하여도 능히 승부를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었사옵니다. 하여 제자는 부족한 식견이나마 그의 말이 진실이라 판단할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하여, 천검이 한현보의 제자였다는 구보신개의 추론까지 동의할 수 있었다?”

“정황상 판단이 그리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이오나, 구보신개 대협의 성품을 고려해볼 때, 그런 이야기를 거짓으로 증언하실 분은 아니라···.”

“그건 다만 너의 판단이 아니냐!”

“사견에 불과한 것으로 어찌···!”

“조용히들 못 할까!”


마침내 현현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터지고서야 다들 조잘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산만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현현이 무허에게 말했다.


“구보신개 구정삼의 성정에 관하여는 세간에 알려진 걸협(乞俠)이란 그의 다른 별호가 증명하며, 또 나 현현자가 그를 오랫동안 겪으며 판단한 것이 무허와 일치하니, 그것은 더 입에 담을 필요가 없겠네. 하나!”


현현은 찌푸린 미간이 튀어나올 것처럼 접힌 그대로 무허를 쳐다보았다.


“백련교에 관한 일을 구보신개의 성품에만 기대어 판단할 수는 없는 법. 이 약왕서가 진실로 백련교의 물건임을 증명할 다른 근거가 있는가?”

“다른 증인이 있사옵니다.”

“누구지?”

“하오문주 염천호이옵니다.”

“···염라왕?”


무허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염 문주는 이미 오래전부터 약왕서의 존재를 알았고, 구보신개 대협으로 하여 그 서책을 찾을 것을 의뢰하였다 하였사옵니다.”

“···하오문주는 그 성정이 사특하고, 속여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 자이니 믿을 수 없다. 하물며 그가 다스리는 하오문은 명명백백히 강호의 암부에 속하는 흑도(黑道)! 사파에 속한 자의 증언으로 우리 무당의 판단을 좌우할 수는 없다.”

“송구하옵니다. 제자는 다만, 제자의 귀로 들은 바를 충실히 전달할 따름입니다.”


무허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현현은 무허에게 되물었다.


“하면, 증인은 오직 구보신개 뿐이냐?”


구보신개의 증언이 곧 하오문주에게서 나온 것이옵니다─ 라고 비아냥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낸 무허는 말을 돌렸다.


“한현보의 소가주, 한설총이 약왕서를 보증해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가? 어찌하여?”

“한 소가주는 스스로 어린 시절 천검에게서 무공을 배운 일을 기억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천검 본인으로부터···? 어떻게···?”

“천검이 바로 한현보의 제자였고, 하남제현 한주윤과 사형제였다 하옵니다.”

“!”


현현의 얼굴이 굳었다.


“그 이야기는 미리 듣지 못하였던 것 같은데.”

“송구합니다. 장문 앞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함부로 미리 발설하였다가는 하남제현과 한현보의 안전을 위협할 만한 이야기인지라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줄곧 비밀로 하였사옵니다.”


사실이 아니다. 무허의 사부인 현문은 이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다. 또한 그가 이 자리에선 말하지 않은 것까지 현문은 소상히 알고 있다. 그러나 무허는 이때까지 늘 그래왔듯 자신이 하는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단호하게 믿으며 말했다. 말하는 사람이 먼저 믿어야, 다른 이도 믿을 수 있는 법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네가 옳게 판단하였다.”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이 서책에 관하여 진실 여부를 가늠할 자는 오직 하남제현과 그 아들뿐이란 말인가?”

“천검을 직접 찾지 못하는 한은 그뿐인 줄로 아뢰옵니다.”

“그렇다면,”


무당의 장문이자 당금의 천하일절, 또한 천하제일검의 수식어를 지닌 현현진인은 그가 펼치는 검기(劍技)와 같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무당은 현 시간부로 봉문령을 해금(解禁)할 것을 선포하겠다! 제자들은 들으라!”

“명을 받듭니다!”

“백련교의 혈겁이 다 씻기지도 않은 지금! 다시금 재래한 백련교로 하여 온 천하에 혈하(血河)가 흐르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온 천하에 무당의 봉문이 해금되었음을 알리고, 무림대회를 소집하라!”

“명을 받듭니다!”

“명을··· 받듭니다.”


모두 고양된 목소리로 크게 외치는 와중에,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복명을 읊조린 무허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가 일생토록 바랐던 일들이, 이제 시작되는 것이다. 무허는 가슴속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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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16화. 관화(關和) (1) +1 23.11.02 562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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