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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님의 서재입니다.

판상츠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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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작품등록일 :
2012.09.20 00:09
최근연재일 :
2023.09.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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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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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판상츠모사][14장 “알을 깨우는 자장가” - 11]

DUMMY

[판상츠모사][14장 “알을 깨우는 자장가” - 11]




“그래? 그럼 내일 보지.”


생각보다 대답은 시원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당연히 저기 문제보다는 여기 문제가 먼저지. 마침 나도 내일 저녁은 비어있어.”


가닐... 아니, 백남현 선생님의 대답에 나는 약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문제보단 여기 문제가 먼저라. 저기, 그리고 여기.


“아, 그런데...”


“응?”


“정말 죄송하지만... 어쩌면 내일 저녁도 어려울 수가 있어요.”


“뭐?”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가... 아니,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꼭 처리할 일이 하나 있어서요.”


“꼭 처리할 일? 나 만나기 전에?”


전화 너머 목소리에 슬쩍 의문이 묻어났다. 그러나 머리 좋은 사람답게 백 선생님은 금방 상황을 나름 이해한 모양이었다.


“어... 어쩐지 나한테 할 말이 꽤 많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주위에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냐.


“네. 맞아요.”


내가 순순히 인정했더니 너머로 고민에 빠진 듯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해. 단, 나도 내일이 아니면 시간을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어. 나도 나름 바쁘거든? 물론 여건이 된다면 보겠지만, 아니라면 서로 시간이 될 때 보자고.”


“감사합니다.”


사실 학생인 내 입장에서야 시간을 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정도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한 일이지.


“그래. 그럼 궁금하지만 내일 보는 걸로 하고... 아, 그런데.”


“네?”


“하나만 알려줘. 우리 혹시 이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혹시 기억하고 있나? 어디서 봤었는지?”


“만난 적이요?”


“아니, 아마 예전에 어디선가 만났으니까 서로 꿈에 등장하고 있는 것일 거 아냐. 그런데 나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아서 말이야. 혹시 2년 전에 학교에 있었나?”


예상한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때는 아직 입학 안 했을 때라서요...”


“그래? 그럼 선배 방문 행사 때 본 것도 아닐 텐데... 흠...”


알고 보니 우리 고등학교 졸업생이셨던 백남현 씨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잠시였다.


“어쨌든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면 되겠지. 내일 별 일 없으면 저녁에는 아마 계속 일정 비어 있을 테니까 좀 늦더라도 연락주고.”


“죄송합니다.”


“어차피 일정이 비어있다곤 해도 혼자서 일해야 할 거 하는 거니까 죄송할 것까진 없어. 신기한 일이니 이런 일에 한 번쯤 시간 내는 건 괜찮겠지.”


어, 음.


“그럼 정해지는 대로 알려줘.”


“네.”


뚜뚜뚜... 용건이 끝나자 전화는 금방 끊어졌다.


“하아...”


전화기를 침대 옆에 올려두고 나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침대에 픽 쓰러져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음, 예상한대로 가닐영은 아직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군. 그리고 마찬가지 예상한 바와 같이, 그냥 어디서 우리가 언젠가 만난 적이 있었기에 그 기억이 남아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와 시아가 처음 만났을 때의 추측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가닐영을 보면서, 나는 과연 내일 가닐영이 사전과 지나, 시아를 만났을 때 어떤 표정일 지을지 궁금해졌다.


“음.”


물론 그건 일이 잘 풀렸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지.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나는 전화기를 다시 한 번 손에 쥐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지나에게서의 연락은 없었다. 하긴 고작 그 사이에 연락 올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만... 혹시나 해서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으로 마지막으로 전화했던 것이 방금 가닐영과 통화하기 직전이었기에 지금 전화한다고 해서 지나가 받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이 방법밖에 없군.”


나는 나 자신을 다잡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잘 자. 나.”


그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쿨...”


아니, 입으로 소리를 낸다고 해서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나는 한참이나 뒤척이다가 결국 침대에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잠이 안 와...

하긴 당연한 이야기였다. 조퇴하고 나서 집에 온 것까진 좋았지만, 아직 저녁 먹을 시간조차도 되지 않은 때니까. 평소라면 잠들기 싫어서 발버둥을 치던 내가 이렇게 잠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건 분명 우스운 일이지만, 지금은 그 우스운 일에 진지하게 임해야 할 때였다.


“어쩌지...”


잠 잘 오는 방법이나 좀 더 검색해볼까. 그러나 아까 집에 오는 길에 충분히 검색해봤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건 딱히 없었다. 뭘 센다거나 어디 힘을 준다거나 하는 것도 다 시도해봤지만, 지금 여전히 말짱하단 말이지. 하긴, 역시 이런 이상한 방법에 의존하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 없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잠깐, 이상한 방법이라고?

나는 즉각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이상한 방법이라서 효과가 없는 거라면, 이상하지 않은 방법을 쓰면 되는 거잖아? 나는 그런 생각과 함께 잠자코 주방 탁자 위를 쳐다보았다.


“흠...”


나는 팔짱을 끼고 익숙한 모양새의 검은 봉지를 쳐다보았다. 버리려고 놔뒀는데, 결국 아직도 못 버렸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 봉지를 슬쩍 집어들었다. 그리고 부스럭 소리를 내어 안에 든 수면제들을 꺼냈다.


“...수면제는 유통기한 없나?”


갑자기 든 생각에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거 언제 처방받았더라? 몇 년은 된 거 같은데... 아, 역시 날짜 지났네. 나는 상자 밑면에 적혀있는 숫자를 읽고서는 약간 상심에 빠졌다. 그러나 손에 든 약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사실 날짜가 지났을 거라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미 이 약을 몇 번 먹은 적이 있었다. 꿈을 꿔야 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 날 몇 알씩 삼키고 잠들었었지. 그런데 아직까지 별 일 없는 거 보면, 괜찮은 거 아니겠어?

물론 그때는 그때만 먹고 나머지를 버려야지 했는데, 요새는 처방전이 없으면 이것들도 살 수가 없으니까... 나는 아직도 많이 남은 약을 보며 다시금 상자 밑면에 적혀있는 유통기한을 가만히 읽어보았다.

유통기한이란 건... 유통할 수 있는 기한이었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손에 든 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포장 잘 되어 있었으니까, 날짜 조금 지난 건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약까지 먹었는데 왜 잠이 안 오냐...

불시에 찾아올지도 모를 잠을 위해서 나는 여전히 눈을 꾹 감고 있었지만, 졸음은 쉽사리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잠을 청하면 청할수록, 머리가 더 맑아지는 느낌이랄까.


“하...”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아무리 머리를 비우려고 해도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아서 나는 결국 눈을 뜨고 말았다.

아, 젠장...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렸다. 이미 충분히 약을 먹은 상황이었지만, 아무래도 한두 알 더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고, 그런 다음 별다른 생각 없이 침대에서 내려왔...


“어...?”


나는 잠시 굳고 말았다. 어라, 여기는...?


“젠장!”


대체 언제 잠들었지? 나 지금까지 여기서 계속 깬 채로 누워있었던 거야?


“사령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황급히 방문을 열고 나왔더니, 복도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호위병 두 명이 즉각 그렇게 물어왔다.


“아... 부관을 좀 만나려고 하는데.”


그런 내 중얼거림에 그 경비병들은 서로를 힐끔 쳐다보았다.


“지금... 말입니까?”


아, 시간이 좀 애매한가? 나는 복도 너머 창밖을 쳐다보았다.

창밖은 깜깜했다. 하지만 내가 잠든 게 저녁이 되기 전이었으니... 그래도 너무 늦지는 않은 시간일 것 같은데. 게다가 리체는 자기 입으로 꽤 늦게 잠드는 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응.”


내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히 호위병들은 더 이상 뭔가 캐묻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리체의 방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왕궁의 방들은 대개 비슷한 모양이었기에 층수를 헷갈리거나 방향을 헷갈리면 찾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호위병들은 애초부터 그런 정보쯤은 전부 숙지하고 있는지, 별다른 어려움도 없이 능숙하게 리체의 방을 찾아내었다.

하긴, 예전에 내 방 앞을 지키던 경비병들과 달리, 지금 내 방 앞을 지키는 것은 2군단 직속의 호위병들이니만큼 부관이나 참모장 침실 정도야 분명히 기억하고 있겠지.


“아, 내가 할게.”


문 앞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려는 호위병을 나는 그런 식으로 제지했다. 사실 누가 두드린다고 해서 별 차이야 있겠냐마는, 그래도 왠지 나는 내가 두드려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흠, 나는 문 앞에 서서 가볍게 기침을 한 번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똑똑 두드렸다.


“...리체?”


당연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깨어있다면 바로 대답했겠지만, 아마 이미 침대에 눕거나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추측한 나는 문 앞에 선 채 약간 망설였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이대로 돌아간다는 것도 선택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 사과를 하러 온 마당에 사과할 일을 추가로 만들다니. 나는 그런 어이없는 생각에 허탈감을 느끼면서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리체 님, 죄송해요.

그러나 그때였다.


“...누구세요?”


희미한 목소리에 나는 막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멈췄다. 어, 이 목소리는...


“리체...?”


문을 사이에 뒀으니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안에 있는 리체가 순간 숨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끼익, 짧은 시간이 흐르고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핀... 님?”


“아, 안녕...”


그리고 할 말이 없어져서 나는 아무 말이나 꺼내들었다.


“자, 자고 있었나 보네?”


생각해보니 아직도 잠기운이 역력해 보이는 상대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것은 실례 아닌가?. 그러나 그런 내 인사에 리체는 어깨에 걸치고 있는 얇은 천을 살짝 매만지고는, 나를 향해 가냘프게 미소 지었다.


“네. 그래서...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리체의 기운 없는 대답에 나는 양심의 가책마저 느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리체는 그런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아, 그게...”


리체를 만나러 온 것은 맞지만, 이런 상황을 가정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리체는 나를 구해주었다.

리체는 가늘게 열린 문틈 사이로 살짝 주위를 살폈다. 내 뒤에 선 경비병 둘을 먼저 훑고, 그 다음 나를 한 번 쳐다본 리체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와서 이야기하실까요?”


“응?”


“여기서는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어, 맞기는 한데... 그게 맞는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나는 리체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 그럼...”


내가 뒤를 힐끔 쳐다봤더니, 경비병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여차저차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리체의 방 안에 있었다. 예전에도 한 번 와본 적이 있긴 했지만, 다시 봐도 그리 넓은 방은 아니었다. 마법사라고 하면 왕국에서도 최고의 대우를 받는 인재라고 들었는데, 이 방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죄송해요. 요즘 방 정리를 못 해서... 좀 어지럽죠.”


내게 의자를 권한 리체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그 이전에 신경 쓰지도 못할 부분에 대해서 우선 사과해왔다. 이 방이 정리하지 않은 방이라면 정리한 방은 어떻다는 거야? 그러나 내가 그런 멍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응?”


맞은편에 앉은 리체는 즉각 그렇게 물어왔다.


“아, 일이랄 것까진 아닌데...”


“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리체는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라고요?”


따져 묻는 듯한 말투였다.


“에, 급한 일이라면 급한 일인데, 급하지는 않은 일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꼬이기 시작한 말을 풀어놓았고, 그래서 이야기는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내 말을 듣고 있던 리체는 눈썹을 살짝 모았지만, 잠시 후에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무슨 사고가 터진 건 아니라는 건가요?”


“사고?”


“그러니까... 군단에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해서요.”


아, 그런 의미였나. 그제야 리체의 말을 이해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런 건 아니야.”


“그렇습니까.”


리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나가듯 말했다.


“이런 시간에 오셨기에, 뭔가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습니다.”


“응?”


“네?”


방금 얘 뭐라고 한 거야? 그러나 내가 그렇게 리체를 쳐다보자, 리체는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분명 무슨 큰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 그건 미안해. 혹시 지금이라면 깨어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지금...요?”


리체가 눈썹을 다시 살짝 모으는 바람에 나는 이야기가 헛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물론 늦은 시간이긴 할 텐데, 평소에 늦게 자기도 하는 것 같아서...?”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느낌에 나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무엇보다 리체가 그런 내 이야기를 마치 대리석 조각이나 되는 것처럼 듣고 있었기에 나는 애매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좀 늦긴 했어도... 아직 저녁... 아냐?”


리체는 그런 내 질문을 듣고는 한참이나 가만히 있다가, 눈만 살짝 움직여 창문을 쳐다보았다.


“주무시다 오셨나 보군요.”


“응?”


“저도 자고 있던 중이라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아마 시간으로 보면, 저녁보다는 새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요...”


“새벽?”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한 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럼... 혹시 지금 아직 한밤중?”


“...아마도요?”


이 자식들! 대체 나를 왜 안 말린 거야아아!

나는 나를 여기까지 안내해준 애꿎은 경비병들을 향해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하아.”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한껏 숙인 나를 앞에 두고 리체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 담긴 의미가 안도감인지, 허탈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 됐어요. 전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라니까 오히려 다행이네요.”


말투를 보면 완전히 또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인데...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응?”


“어차피 잠은 이미 깼고 하니... 하실 말씀이 있는 것 아니었어요?”


“그야... 그렇긴 한데.”


“하시지요.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하죠.”


“아, 그건 좀...”


“네?”


“금방 이야기하고 갈 테니까, 얼른 자.”


여기서 리체가 잠을 자지 않으면, 정작 지나의 답변을 듣지 못할 테니까 그건 곤란하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리체는 약간 불만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네... 어쨌든 하실 말씀이란 게?”


“그게...”


그리고 별다른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까 아직 정하지 못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리체를 스윽 쳐다보았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리체는 잠옷 차림이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얇고 하늘하늘한 재질의 하얀 옷이었는데, 머리 뒤쯤에서 가볍게 묶은 빨간 머리가 워낙 선명한 인상이어서 그런지 깔끔한 느낌은 더욱 도드라져보였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면 부끄러운데요.”


“죄, 죄송합니다.”


리체가 얼굴을 붉히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순간에야 나는 나의 응시가 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윽, 리체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로 살짝 손을 모았다.


“저... 그래서 하시고픈 말씀이...?”


리체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사실은 마냥 리체를 쳐다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야 했다.


“있잖아, 만약 리체 네가 누구한테 뭔가 사죄할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사과할 거야?”


“제가요?”


“예를 들어 그렇다는 거야. 네가 정말 미안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마음을 상대에게 어떻게 표현할래?”


“음... 자결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아니, 왜 그렇게 극단적이시죠.”


예상치를 뛰어넘는 답변에 내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했더니,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 미안하다면, 그 정도가 적절할 것 같은데요.”


으엑... 진짜? 진짜로? 나 자결해야 돼?

생각보다 과한 답변에 할 말이 없어져서 내가 가만히 있었더니, 리체는 잠시 뒤 피식 웃었다.


“농담이에요.”


“응?”


“이렇게 대답해야 핀 님이 곤란해 하실 것 같아서요.”


어? 그 말은...

내가 당황해서 리체를 쳐다봤더니, 리체는 그런 내 시선에 살짝 미소 지었다.


“저에게 뭔가 사과할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윽, 이 녀석... 감히 나를 가지고 놀다니. 이미 다 알고 있었군.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 그래. 사실 너에게 사과할 일이 있어.”


“사과할 일?”


“엄밀하게 말하면 너에게 사과할 일은 아니지만.”


“네?”


리체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미안해.”


“피, 핀 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리체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시아가 있다는 걸 숨기고 있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지금 여기서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일어나면 내게 연락해줬으면 좋겠어.”


“아니, 지금 갑자기 무슨...”


리체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리체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화를 내는 건 당연해. 이건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잘못이고, 섣불리 용서해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


내 말이 계속 이어지자, 리체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리체를 앞에 두고 고개 숙인 채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 안 자고 기다릴 테니 시간이 언제가 됐든 연락 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 미안해.”


반응을 확인하지 못하는 사과는 왠지 어려운 느낌이군. 나는 거기까지 말한 다음에야 비로소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리고 리체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걸로 끝.”


리체는 그런 나를 조심스레 진중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확인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이나 나를 지켜보던 리체는 이윽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핀 님.”


“응?”


“...지금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지극히 정상이야.”


“하아.”


다시 한숨.


“무슨 일인지 도저히 모르겠네요. 어디 아프신 건가 생각했지만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고...”


그런 다음 리체는 눈썹을 살짝 모으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왠지 저에게 하는 말도 아닌 것 같단 말이죠?”


“맞아.”


“그런데 왜 저에게?”


“그런 게 있어.”


“하아.”


리체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나름 상황을 합리적으로 분석해보려는 눈치였지만, 쉽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서.”


그리하여 결국, 리체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응?”


“제가 이제 뭘 하면 되는 건데요?”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나는 잠시 굳어있었다.


“어... 딱히 안 해도 되는데?”


“네?”


리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들어준 걸로 충분해.”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리체는 이번에도 한참이나 진지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역시 이마 한 번 짚어 봐도 되요?”


“열도 없어.”


리체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저 데리고 장난치시는 건 아니죠?”


“그건 아냐. 몹시 진지해.”


나는 진지하게 말했고, 리체는 그런 대답을 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가네요.”


그러나 결국, 먼저 두 손을 든 것은 리체였다.


“일단 농담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제가 사과 받을 일이 없는데 왜 사과를 받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미안해.”


이번은 리체에 대한 사과였다. 그러나 리체는 또 다시 이어진 사과에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뜬금없이 되물어왔다.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어요?”


“응?”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어요?”


리체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당황했는데, 아무래도 리체가 방금 전 내가 한 말의 뜻을 오해한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그걸 이야기하는 것도 대답을 주저하는 것도 모두 좋은 선택지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응.”


“그럼...”


리체는 내 대답에 천천히 말을 잇더니...


“미안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네?”


“...라고 제게 말해주세요.”


나만큼이나 리체도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런 이야기를 꺼낸 리체의 눈을 쳐다봤을 때였다. 이따금 흔들리는 촛불이 리체의 눈동자 안에서 일렁거렸지만, 정작 리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갑작스런 시선의 고정에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다행히 아직 리체의 이야기를 이해할 정도의 여력은 남아있었다.


“미안해.”


리체의 요구대로, 나는 입을 열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크게 반성하고 있어.”


나는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였으므로 리체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리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그러한 리체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네.”


“그럼 됐어요.”


이제 와서 보니, 리체는 리체 나름대로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마치 그렇게 내 죄를 사하듯이 중얼거린 리체는 피곤하듯 의자에 살짝 몸을 기댔다. 그리고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제가 용서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 많이 미안해하시는 눈치니까.”


“감사합니다.”


감사가 아니라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나았을라나.


“그래서... 무슨 일인지는 말해주시지 않을 건가요? 도통 짐작 가는 게 없는데.”


“그게... 지금 말해봤자 의미가 없어서.”


사실 별 기대도 안 했다만. 꼭 그렇게 말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은 리체는 잠시 후 다시 눈을 떴다.


“한밤중에 이게 무슨 일인지...”


“미안.”


다시금 이어진 사과에 리체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됐어요. 이미 사과했잖아요.”


“사과를 해도 받아주는 사람이 받아주지 않으면 안 되잖아.”


내가 그렇게 대꾸했더니, 리체는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게 싫은지 즉각 대답했다.


“받아드릴게요.”


“진짜지? 너 그럼 일어나면 전화해 줘야 된다?”


“전화라뇨?”


뜬금없는 단어라는 듯, 리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게 있어.”


내 대답에 리체는 다시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들을수록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빈말로 하는 말은 아닌 듯, 리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용건은 끝나신 거죠?”


“응.”


“아무래도 좀 있으면 해가 뜰 것 같은데... 그냥 바로 씻고 업무 준비나 해야겠네요.”


“아, 그건 안 돼.”


“네?”


“주무세요. 이건 사령관으로서의 명령입니다.”


얘가 일어나있으면 지나가 잠에서 안 깰 거 아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여 짐짓 강하게 말했지만, 리체가 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기에 찔끔 몸을 사리며 대답했다.


“아, 아직 해 뜨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그리고 잠을 충분히 자야 내일... 아니, 오늘도 일할 수 있을 거 아냐?”


“...한밤중에 오셔서 잠 깨운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요.”


“윽.”


그러나 그렇게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리체는 생각을 바꾼 모양이었다.


“네. 그럼 일단 잠깐 눈을 붙이고... 그 다음에 출근하도록 할게요.”


“그래. 고마워.”


“고마워하실 일은 아니지만요.”


톡 쏘는 대답이었지만, 어쨌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리체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서 주무실 거죠?”


“응.”


일단 나도 자야한다. 내가 여기서 깨어있으면, 지나와 연락을 할 수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리체는 몸에 걸친 작은 천을 한 번 매만진 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아무 것도 아니에요.”


리체는 그렇게 대답을 미뤘다. 뭐야, 싱겁게.


“그럼... 나중에 봐.”


“나중에 뵙겠습니다.”


리체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리체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갔던 것처럼 경비병들을 데리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둘러 침대로 뛰어들었다. 혹시 잠이 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고민이 있었으나, 다행히 그런 고민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잠시간의 공백을 두고도, 워낙 늦게 잠들었던 탓인지 나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




지나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내가 잠에서 깨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화면에 표시된 이름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당연히 지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전화를 받자 너머에 있는 목소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너 이런 식으로 연락하면, 오히려 내가 더 화낼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어?”


“...미안.”


물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랬을 뿐.

하아, 내 솔직한 사과에 지나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리체와 같은 한숨이었다.


“어차피 잠은 다 잔 것 같고...”


지나는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다음이었다.


“나와.”


“네?”


“이야기하고 싶다며?”


“그야... 그렇습니다만.”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지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마 입을 삐죽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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