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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프스키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바이킹

유료웹소설 > 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유료 완결

까다롭스키
작품등록일 :
2023.01.01 00:57
최근연재일 :
2023.12.26 19:00
연재수 :
280 회
조회수 :
489,016
추천수 :
48,037
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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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1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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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 바이킹 정착지의 소멸은 2023년 초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는 미스테리입니다. 기후변화가 예고하는 험난한 앞날을 목전에 둔 오늘날, 다방면으로 관심을 받고 있는 주제기도 하지요.


이야기의 시작은 그린란드의 동쪽에 있는 아이슬란드에 바이킹이 정착하면서부터입니다. 아이슬란드 전승에 따르면, 9세기 말엽 노르웨이 최초의 통일왕국을 건설했다고 전해지는 ‘멋진머리’ 하랄 왕에게 밀려난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지금의 레이캬비크 일대에 정착했다고 전해집니다. 노르웨이 본토로부터의 거리와 희박한 인구밀도 덕에, 13세기에 노르웨이령으로 편입되기 전까지 아이슬란드는 알팅그(Althingi, 의회)에 의해 다스려지는 일종의 무정부 내지는 원시적 민주주의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척박하지만 자유로운 땅에 유입된 바이킹 중 붉은머리 에이릭이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이민 2세대였던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농장 하나를 가지고 있을 만큼 꽤 성공하였지만, 이웃 농장과의 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고 3년간의 추방형을 선고받았지요.


에이릭은 기왕 추방당한 길에 삼 년의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기로 작정하고, 몇몇 뱃사람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던 서쪽의 거대한 땅을 찾아나섭니다. 마침내 레이캬비크에서 남서쪽으로 대략 1,200km 떨어진 곳에서 에이릭은 그린란드의 남쪽 끝부분을 발견하게 되지요. 추방 기간이 끝난 에이릭은 곧장 아이슬란드로 돌아와, 자신이 발견한 땅으로 함께 갈 개척민을 모집합니다. 그린란드라는 이름도 얼음과 안개만 가득한 아이슬란드보다 훨씬 나은 땅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에이릭이 일부러 그렇게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985년, 에이릭과 그 아내 – 그린란드 최초의 기독교인 – 쇠드힐드, 그리고 그의 네 아들딸들은 25척의 배에 개척민을 가득 채우고 그린란드 남쪽 끝에 정착합니다. 이 일대는 위도로 따지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비슷하고 바다의 영향도 받았기에 아이슬란드보다 실제로 훨씬 더 온화하였고,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자작나무 숲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말로 ‘푸르른’ 녹지는 말할 것도 없었지요.


그리하여 남북 직선거리로는 약 120km에 달하는 범위 안에 최대 500여 곳의 농장과 교회 등이 점점이 세워지고, 이 일대 전체를 ‘에위스트리뷔그드Eystribygd’, 즉 동부 정착지라 부르게 됩니다.


훗날 붉은머리 에이릭의 사가와 그린란드인의 사가를 통해 전해지는 것처럼, 정착 초기 그린란드인들은 그린란드 서남쪽의 보다 풍요로운 땅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특히 그린란드인들의 사가 대부분은 에이릭 슬하의 사남매와 다른 두 탐험가 – 비야르니 헤르욜프손, ‘수완 좋은’ 토르핀- 들의 북미 모험담을 다루고 있지요.

Skálholt-Karte.png

(중세 아이슬란드인과 그린란드인의 북미 대륙에 대한 지리학적 지식을 총망라한 스칼홀트Skalholt 지도, 1570년)


이들은 그린란드부터 건너편 배핀 섬(헬룰란드Helluland), 래브라도(마르크란드Markland), 뉴펀들랜드(빈란드Vinland, 단, 퀘벡이나 뉴잉글랜드 해안이라는 주장도 있음)가 거대한 하나의 대륙이고, 그린란드는 그 중 유럽을 향해 툭 튀어나온 반도일 뿐이라는 지리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빈란드는 에이릭네 사남매의 어머니 쇠드힐드가 독실하게 믿는 기독교 신앙에 꼭 필요한 밀과 포도가 자라는 땅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도는 모두 무산되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그린란드인들의 관심사가 다른 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이었지요.


그 다른 관심사란, 바로 바다코끼리 상아 교역이었습니다. 대략 13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중세 온난기 덕에, 그린란드 바이킹들은 그린란드 서해안 곳곳을 누비면서 바다코끼리를 사냥하고, 아이슬란드나 노르웨이로부터 오는 상선이 도착하면 쏠쏠한 가격에 바다코끼리 상아를 판매하곤 했지요. 십자군 전쟁과 몽골의 중동 침공으로 동아프리카산 상아의 유럽 공급이 끊긴 덕에, 그 유일한 대용품인 바다코끼리 상아를 그린란드에서 독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중세 유럽의 가장자리에 있으면서도 중요한 사치품을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곳이었기에, 그린란드 식민지는 크게 번성했습니다. 1124년에는 가르다르 주교좌가 설치되었고, 동부 정착지에서 한참(약 6백 km) 북쪽, 현재 그린란드의 수도인 누크 일대에 ‘서부 정착지Vestribygd’가 세워지기도 했지요.


최전성기의 그린란드 인구는 – 도싯Dorset 문화에 속하는 원주민을 제외하면 – 5~6천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부 정착지의 부유한 교회와 수도원, 수녀원은 잉글랜드나 노르웨이에서 장인을 고용해 외벽을 단장하곤 했고, 풍부한 목초지 덕에 말과 양, 소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자체조달이 불가한 목재나 금속 등은 교역을 통해 언제든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 뒷뜰에 매장된 시신들은, 목재가 귀했기에 나무 관 대신 수의에만 싸인 채 매장되었으나, 영양상태의 지표인 평균 신장은 당대 아이슬란드인들을 훌쩍 뛰어넘어 현대 스칸디나비아인에 근접했습니다. 매년 북쪽 사냥터Nordresetr(디스코 만)에서는 바다코끼리를 쉽게 사냥할 수 있었고, 바다코끼리로부터 채집하는 상아는 종주국 노르웨이를 거쳐 유럽 각지로 값지게 팔려나갔습니다. 일례로 1327년 노르웨이 국왕 망누스 4세는 그린란드의 6년치 세금이었던 바다코끼리 상아 820kg을 단번에 처분하여 노브고로드 공국 원정을 위한 자금을 충당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좋은 시절은 14세기에 접어들며 끝나게 됩니다. 중세 온난기가 끝나면서 바다코끼리 사냥은 매년 어려워졌습니다. 겨울은 더욱 길고 혹독하게 변해갔고, 가축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실내에 축사를 마련하고 짧은 여름에 애써 건초를 마련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중세 온난기를 틈타 알래스카 북해안에서 캐나다 북부와 그린란드까지 넘어온 이누이트의 조상 툴레Thule인들은 추위를 피해 남하했고, 뛰어난 수렵기술과 (제한적이지만) 야금술을 지니고 있던 이들은 그린란드 바이킹들에게 곧 커다란 위협으로 부상했습니다. 북대서양의 바다는 갈수록 거칠어져, 그린란드는 고사하고 아이슬란드에도 유럽발 상선이 한 척도 입항하지 않는 해가 늘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더 큰 치명타는, 바로 유럽 무역구조의 변동이었습니다. 14세기 중엽 유럽 대륙을 강타한 흑사병은 사치품 수요 자체를 무너뜨렸고, 겨우 그 충격이 가실 무렵에는 지중해 교역을 장악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맘루크조 이집트를 통해 들여오는 동아프리카산 상아가 유럽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경제난과 기후변화라는 이중고 속에서 그린란드 바이킹들의 삶은 나날이 어려워졌습니다. 1350년경, 그린란드 바이킹들은 서부 정착지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포도의 공급이 끊기면서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의 모든 교회는 성찬식을 치를 수 없게 됩니다. 1369년에는 마지막 노르웨이 왕실 연락선이 그린란드에서 복귀하던 중 폭풍을 만나 침몰했습니다. 1378년에는 가르다르의 마지막 주교 알프가 사망합니다. 그리고 1406년, 기록에 남은 마지막 그린란드 방문객, 아이슬란드 상인 토르스타인 올라프손의 선단이 악천후를 피해 동부 정착지에 입항합니다.


1410년, 토르스타인은 동부 정착지에서 새로 얻은 그린란드인 아내 시그리드 비요른스도티르와 함께 아이슬란드로 돌아옵니다. 그 이후 모종의 사유로 인해, 토르스타인은 아내 시그리드와 자신이 그린란드의 흐발세이Hvalsey 교회에서 – 교회의 외벽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 1408년 결혼식을 올렸음을 입증하는 서류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중세 그린란드에 대해 남은 마지막 기록입니다.


중세 그린란드의 미스테리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16세기 초 어떤 시점에 동부정착지의 폐허를 방문한 뱃사람은, 해변에 홀로 쓰러져 죽은 한 사내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시체를 수습하려 한 어떤 흔적도 없었고, 시신의 손에는 더 이상 갈기 어려울 정도까지 칼날을 간 조막만한 주머니칼이 들려 있었지요. 1410년부터 대략 1500년 사이, 유럽의 최변방을 오백여 년간 지켰던 그린란드의 바이킹 후손들은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까지 그 어떤 기록에도, 멸망을 눈앞에 두었던 그린란드의 삶이 딱히 동시대 스칸디나비아나 아이슬란드보다 유별나게 어려웠다는 언급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동부 정착지의 마지막 생존자들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전투의 흔적도, 집단 학살의 흔적도, 하다못해 집단이주나 이누이트인들과의 통혼을 시사하는 흔적도 (2023년 현재까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스크렐링Skraeling이라 불렸던 이누이트인들의 선조들이 이 중세 유럽인들에게서 얻어낸 것은, 중세 그린란드어 어원을 지닌 낱말 몇 개, 몇몇 금속 제품, 면직물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20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그린란드 바이킹들의 완고함과 고집불통이 멸망을 불러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과학적인 분석 기법이 도입되면 도입될수록, 그런 단순한 설명은 반박되었고, 15세기 중반 (어쩌면 후반?) 그린란드 남쪽 끝에서 벌어진 일의 진상은 미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그린란드의 중세 유럽인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의 일상을 유지하려 노력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짧아지는 여름 한철에 최대한의 건초를 마련하기 위해 관개를 시도했고, 부족한 식량은 물개 고기 등 해산물로 채웠습니다. 뱃사람들은 피요르드를 돌며, 매년 해빙기 홍수로 인해 시베리아에서 북극해로 유입된 뒤 해류를 타고 그린란드까지 밀려오는 통나무를 모아 목재 수요를 충당했지요. 제대로 유지보수를 받지 못한 성당이 무너지자, 생존자들은 언제고 다시 교회를 재건할 날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종탑의 종을 근처의 농장 안으로 옮겼습니다. 가장 비옥하고 온난한 동부 정착지 남쪽 끝의 공동묘지에서는, 15세기 초 유럽 대륙의 최신 유행이었던 두건과 모자를 모방한 복식의 그린란드인 시신이 발견됩니다. (15세기 초반, 점차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근해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가던 바스크 포경선과 잉글랜드 어선이 기항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되는 증거들은, 어쩌면 콜롬버스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했을 무렵까지도 몇몇 생존자들이 그린란드에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그린란드의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중세 그린란드의 흔적이 사라지는 속도도 점차 빨라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중세 그린란드의 운명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미스테리일 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5

  • 작성자
    Lv.42 롤하고싶다
    작성일
    23.01.01 02:26
    No. 1

    글을 보면 볼수록, 저도 궁금해지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0 Megabran..
    작성일
    23.01.01 04:54
    No. 2

    오오 바이킹 대역이라니 기대됩니다!
    그린란드 동남쪽의 보다 풍요로운 -> 서남쪽이 아닌가 싶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8 까다롭스키
    작성일
    23.01.01 09:43
    No. 3

    정초부터 보내주시는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짚어 주신 부분은 바로 고쳤습니다. 정식 연재에 들어가기도 전 오타가 나와 송구스럽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6 녹색자쿠
    작성일
    23.01.01 06:03
    No. 4

    북미로 집단이주를 시도하다가 폭풍우를 만나기라도 했던걸까요?
    신기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9 갓뺌
    작성일
    23.01.01 11:54
    No. 5

    새해 첫날 미스테리와 함께 신작 예고! 심지어 바이킹이라니 대역에서 잘 안다룬 북유럽이라 좋네요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67 무뇌드라군
    작성일
    23.01.01 13:52
    No. 6

    지진해일이나 태풍으로 망한게 아닐까요 그러면 증거가 남아있나
    아니면 살기 힘들다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수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5 PnPd
    작성일
    23.01.04 14:45
    No. 7

    온난화로 흔적이 사라지면 정말..영영 미스테리가 되겠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9 김국국
    작성일
    23.01.04 14:46
    No. 8

    와! 빈란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g5******..
    작성일
    23.01.04 16:52
    No. 9

    이야기의 시작은 그린란드의 서쪽에 있는 아이슬란드에 -> 스칸디나비아의 서쪽에 있는 아이슬란드 아닐까요?
    늘 좋은 작품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8 까다롭스키
    작성일
    23.01.04 18:03
    No. 10

    감사합니다. 서두에 있는 오류인데도 확인이 늦었네요. 덕분에 고칠 수 있었습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87 Changgat
    작성일
    23.01.04 20:45
    No. 11

    아이슬란드 유전자 중 이누이트인 mtDNA가 조금 있지 않았나요? 뭐 마지막 바이킹 이전 시대에 이누이트-그린란드바이킹-아이슬란드인 사이 통혼이 있었다고 하면 말은 되지만.

    찬성: 5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8 까다롭스키
    작성일
    23.01.04 22:40
    No. 12

    <붉은머리 에이릭의 사가>는 빈란드에 당도한 토르핀 카를세프니가 원주민 소년 둘을 납치해 세례를 받게 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세기에도 그린란드에 툴레 혹은 도싯인 노예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요. 따라서 15세기 이전에 이미 이들을 통해, 혹은 시그리드 비요른스도티르처럼 파국 전에 그린란드를 벗어난 이들을 통해 아메리카 원주민의 유전자가 아이슬란드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분명 존재합니다. 또는 다시 그린란드 일대에서 유럽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16세기 이후에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하지요.

    다만 15세기 초중엽 중 그린란드인들의 아이슬란드 집단이주는 없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아이슬란드도 한계까지 몰려 있었고, 고작 1~2천 명 정도의 인구 유입이었을지라도 큰 사회적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615년의 바스크인 학살 사건처럼, 아이슬란드인들은 자신들과 자원을 두고 경합하는 외지인들에게 호전적인 면을 보였지요.) 하지만 그러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요.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99 추세추종
    작성일
    23.01.05 20:24
    No. 13

    와! 나 이런 이야기 완전 좋아하는데. 유튜브로 만들어주세요!

    찬성: 5 | 반대: 0

  • 작성자
    Lv.28 후퇴금지
    작성일
    23.01.05 21:57
    No. 14

    대체 이런 거는 어디서 찾으시는 겁니까 교수님....

    찬성: 9 | 반대: 0

  • 작성자
    Lv.99 Gustav
    작성일
    23.01.06 09:04
    No. 15

    내가 초중등학생이었으면 꿈꿨을만한 이야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4 편곤
    작성일
    23.01.07 22:28
    No. 16

    바이킹에 대해 궁금한게 많았는데, 작가님 덕분에 재미나게 배울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2 | 반대: 1

  • 답글
    작성자
    Lv.48 까다롭스키
    작성일
    23.01.08 21:01
    No. 17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생소한 분야인지라, 크고 작은 오류가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을 듯합니다. 많은 관심과 따뜻한 지적 부탁드립니다.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99 Gustav
    작성일
    23.01.17 16:57
    No. 18

    선생님 중세 그린란드 버이킹들에 대해 공부할 책 같은게 있을까요? 이 미스테리 글을 읽은지 몇주 지나도 계속 뇌리에 박혀 잊혀지지 않습니다

    찬성: 2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8 까다롭스키
    작성일
    23.01.17 20:16
    No. 19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 놀랍지는 않은 일이지만) 중세 그린란드에 대해 다루는 접근성이 높은 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구나 중세 그린란드의 종말에 관한 연구는 최근에도 막 진행되고 있는 판이라, 정설이 딱히 없는 상황이기도 하지요.

    그나마 그린란드의 최후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는 것은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인데, 안타깝게도 여기서 다이아몬드가 참고하고 있는 자료들은 그 이후로 연구가 진행되면서 부정된 것들이 많습니다. 다이아몬드의 관점 역시, 20세기부터 내려오던 '그린란드는 멸망할 만해서 멸망했다'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제가 인지하고 있는 한, 국문으로 번역된 글은 상술한 다이아몬드의 저술이 전부입니다. 그린란드를 다룬 상업적 소설은 제인 스마일리의 <그린란드인들The Greenlanders>(1988)이 있습니다 (국문 번역본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 이상으로 파고들기 위해서는 부득불 논문 및 학술서적들을 참고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찬성: 10 | 반대: 0

  • 작성자
    Lv.13 n1******..
    작성일
    23.02.20 01:43
    No. 20

    ...혹시 지진해일 같은거에 정착지 전체가 한번 잠겼다가 나와서 떼몰살 당했다든가...?


    근데 이러면 어떤 경위로든 고고학적, 지질학적 증거가 남을텐데...?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4 다주리
    작성일
    23.02.21 00:18
    No. 21

    그저 먹을게 부족해서 전멸한게 아닐까요.
    조선시대 대기근이나 현대의 북조선 고난의 행군 시절을 생각해 보면
    인구의 5~10%가 죽는 그린란드 판 보릿고개가 수십년 지속되면
    인구 수가 급감하고, 그 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의 시간을 당장의 식량 생산에 집중하여 매달리다 보면, 사회집단 유지를 위한 각종 기술이나 노하우 같은 것들도 잃어버려서 멸망을 가속화 시킬 테니까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4 다주리
    작성일
    23.02.21 00:27
    No. 22

    굶어 죽은 사람, 영양실조로 인한 면역력 감소로 병 걸려 죽은 사람,
    추위로 약초 재배나 채취가 불가능 해져서 병사,
    땔감 부족으로 동사,
    의사 (또는 의료 지식 있는 사람)의 상실로 병사,
    도구 (철제 농기구, 사냥/어로 도구) 수입 불가로 식량 감소,
    식량 쟁탈전으로 사망
    식인 등 (조선 기근이면 식인 사례 있지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4 다주리
    작성일
    23.02.21 00:32
    No. 23

    이스터 섬 (모아이 석상 있는 곳)도 나무가 없어진 다음에는
    어업 생산물이 감소하고, 농사도 잘 안되고, 부족간에 서로 싸움을 해서 서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지요
    당연히 식인풍습도 생겼구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n2******..
    작성일
    23.03.31 01:04
    No. 24

    통일 노르웨이의 초대 왕 '멋진 머리' 하랄 왕이 그러한 별명을 갖게 된 이유는 전설상에서 그가 노르웨이의 통일을 완수하기 전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고 그 때문에 한동안 봉두난발인 '헝클 머리'로 불리다 마침내 통일에 성공하면서 머리를 가다듬었고 그 이후로 '멋진 머리'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이죠. 이 별명은 그런 일화를 반영하고 노르웨이 통일이라는 위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한편으로 하랄에 반대하는 이들은 노르웨이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그들의 자유를 찾아 오크니 제도, 페로 제도, 아이슬란드로 떠나게 되었죠. 아이슬란드에 이주한 이들 중에는 더 멀리 있는 그린란드, 그리고 빈란드에 내딛은 이들도 있었고요. 이 부분에 대해서 일반 대중들에게는 아이슬란드에서 기록된 두 서사시 <그린란드 사가>와 <붉은 머리 에리크 사가>를 통칭하는 <빈란드 사가>를 모티브로 한 동명의 일본 만화 "빈란드 사가"가 좀 더 친숙하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8 공화국만세
    작성일
    23.09.14 21:07
    No. 25

    바이킹학 개론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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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란드의 미스테리 +25 23.01.01 10,912 0 -
280 100 G 外. 무지개 너머 어딘가 +44 23.12.26 533 112 18쪽
279 100 G 外. 리베르탕고 +13 23.12.26 453 84 25쪽
278 100 G 外. 찬 찬 +15 23.12.24 469 83 20쪽
277 100 G 外. 징기스 칸 +13 23.12.22 493 82 30쪽
276 100 G 外.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15 23.12.21 469 88 25쪽
275 100 G 外.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14 23.12.20 460 83 25쪽
274 100 G 外. 파타 파타 +9 23.12.19 464 90 23쪽
273 100 G 外. 아테네의 백장미 +14 23.12.18 472 86 23쪽
272 100 G 外. 라디오 활동 +13 23.12.16 481 90 26쪽
271 100 G 外. 플라스틱 러브 +20 23.12.15 491 85 27쪽
270 100 G 外. 저 달이 내 마음 대신하네 +16 23.12.14 499 89 25쪽
269 100 G 外. 돌아와요 부산항에 +22 23.12.13 568 98 25쪽
268 100 G 변화의 바람 +25 23.12.07 607 12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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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100 G 세상의 꼭대기에서 (2) +11 23.12.01 467 76 21쪽
262 100 G 세상의 꼭대기에서 (1) +11 23.11.30 471 77 23쪽
261 100 G 나 살아남으리 (3) +18 23.11.29 464 77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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