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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샤 님의 서재입니다.

눈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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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두샤
작품등록일 :
2008.09.08 02:28
최근연재일 :
2008.09.08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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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08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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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쪽

눈의 소리 - 5. 약속의 호수 (완결)

DUMMY

6

“무슨 일이 있는가 보군요. 승우씨도 한 번 다녀오시지요.”

움베르트의 말에 나는 에페에게 여기 있으라고 말하고는 이 교수에게 달려간다. 이 교수는 페르난도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그 곤봉 같은 것 좀 빌려주게.”

페르난도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곤봉을 하나 넘겨주었다.

“얼른 쓰고 돌려주슈. 나는 망 봐야 되니까.”

하고는 자기 위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무슨 일 있냐고 물으려 했다. 그 때, 이 교수의 눈빛이 돌변했다.

“무슨…….”

그러나 내 이야기는 소용없었다. 이 교수는 내가 있거나 말거나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곤봉을 휘둘러 루시의 머리를 내려친다.

“꺄아!”

도미니크의 비명. 루시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진다. 도미니크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쓰러지는 루시를 안고는 루시의 상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다. 도미니크의 비명에 모두 이쪽을 바라본다. 그러나 거리가 있다. 이 교수는 다시 곤봉을 들어 도미니크의 머리를 향해 휘두르고 있었다. 그 때,

“크헉-.”

이 교수가 나가떨어진다. 유진은 순식간에 여기까지 달려와서 이 교수를 날려 보낸 것이다. 모두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갑자기 돌변하여 루시를 쓰러뜨린 이 교수. 이 교수는 도미니크까지 때리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 때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설였어. 아까 네 전화를 못하게 할 때 쓰러뜨렸어야 했는데. 곤봉을 넘겨받는 순간에 달려왔어. 역시, 이 교수는…….”

“무슨 말이에요, 누나?”

그리고 그 때였다.

“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모두는 비명이 난 곳을 돌아본다. 페데로프가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천천히 쓰러지는 페데로프의 앞에는 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검은색 천으로 몸을 두르고 있는 키가 아주 큰 남자가 새까만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저 녀석은!”

본 적이 있었다. 녀석이 바로 탐욕의 장군이다. 우리 집 앞에서 몸을 휘청 거리며 서 있던 바로 그 탐욕의 장군. 번쩍하는 노란색 빛, 가장 먼저 유진이 달려 나간다. 그리고 찬란하게 4개의 빛이 빛난다. 루시와 도미니크, 그리고 먼저 달려 나간 유진을 제외한 나머지 수호자들의 빛이다. 그들은 조금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건 위험한 상태가 아닌가? 언젠가 성진이 이야기했었다. 대전격투 같은 실시간으로 조작하며 상대와 싸우는 게임을 할 때에는 먼저 평정심을 잃은 쪽이 지는 거라고. 그러니까, 이 상태라면 안 된다. 게다가 성진은 말했다. 상대가 흥분할 때야말로, 이쪽은 준비해둔 기술을 거는 타이밍이 온 거라고.

굉음이 울린다. 페르난도가 있던 곳의 바닥의 얼음이 박살나며 차가운 물이 튀어 오른다. 물과 함께 튀어 오른 페르난도는 충격을 받은 듯, 얼음위에 떨어져 주욱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날개를 단 녀석들이 나타난다. 유진의 머리 위로 검은 구체가 쏟아진다. 유진은 그 구체를 빠른 움직임으로 피하기 시작한다. 레이지의 앞에는 붉은 머리 아르펠이 나타나 진로를 막는다. 그리고 이옌의 앞을 접근전에 능할 것 같은 모습의 배덕의 군세가 가로막는다. 동시에 공중의 테르펠이 다시 한 방을 움베르트에게 날린다. 움베르트는 충격을 받지 않았지만 움베르트의 움직임은 멎어 버렸다.

적의 숫자는 총 다섯. 그 중에서 네 명의 배덕의 군세가 기습을 가해, 조각의 수호자들은 모두 잠시나마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건 계획된 작전이다. 수호자들의 진형은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내부에서 수비하는 쪽을 먼저 공략할 수 있다면 금방 무너질 수 있는 진형이었다. 성진이 이걸 읽어내지 못하다니!

아니, 이건 성진이 생각하지 못할 내용이 아니다. 우릴 배신한 것은 이 교수가 아니던가. 아까, 내 전화를 막은 것도 이 교수였다. 그렇다면, 아니, 어째서 이 교수가?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를 안고 울고 있는 나타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탐욕의 장군이 든 검이 천천히 들어 올려 진다. 그리고 그 검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긴 호를 그렸다.

피가 솟구쳐 오른다. 나타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잠시 몸을 떨며 피를 뿜어내다가, 옆으로 힘없이 쓰러진다. 모두 이를 악물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저 탐욕의 장군을 막지 못했다.

페데로프와 나타샤가 죽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그토록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던 죄 없는 두 부녀가 저런 악마가 휘두른 무기에 목숨을 잃어 버리다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격한 슬픔이 가슴 속에서 섞이며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나는 소녀를 지키지 못했다. 이번에는 저 둘이 죽고 있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나는 뭐란 말인가.

나는 전황을 살펴 보았다. 움베르트 교수의 주변에 얼음 조각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테르펠도 힘을 모으고 있었다. 유진에게 쏟아지고 있는 검은 구체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유진은 욕지거리를 하지만 쉽게 그 범위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아르펠은 레이지의 상대가 안 되었다. 하지만 아르펠은 몸을 던져 끊임없이 레이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페르난도는 뭐라고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옌은 푸른 기운을 몸 주변에 무수히 떠올리더니 작은 화살을 만들어 끊임없이 쏘고 있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 배덕의 군세도 끝까지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틈이었지만 저 탐욕의 장군은 여전히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도미니크를 바라본다. 도미니크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무척 마음이 약한 것 같았다. 루시는 아직도 머리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그 루시를 바닥에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계속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도미니크는 경악했다. 도미니크의 표정을 본 나는 섬뜩한 가슴을 안고 탐욕의 장군을 바라본다.

녀석은 손에 작은 동물을, 아주 작고 귀여운 동물을 들고 있었다. 그 동물은 몸에서 파르스름한 기운을 뿜으며 저항하고 있었지만 탐욕의 장군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급기야 그 작은 동물, 에페는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탐욕의 장군이라는 녀석은 그 끔찍하게 시커먼 검을 에페에게 겨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에페만큼은 안 돼. 안 돼. 안 돼. 제발 그만 둬. 너희들은 이미 소녀를 내게서 빼앗아 갔잖아. 소녀가 항상 데리고 다니던 그 귀여운 동물만큼은 안 돼. 에페는 열쇠. 이 세계의 운명을 쥐고 있어. 그러지 마. 내게서 에페를 앗아가지 마. 움직여, 이 멍청한 몸뚱어리! 수호자가 일곱이나 있는데 당하다니 이게 말이 될 리가 없잖아. 누가 저 녀석을 좀 막아줘! 유진, 도미니크, 레이지, 페르난도, 이옌, 움베르트! 제발, 제발 저 녀석을 멈추란 말이야!

촤악-

녀석의 손에 들려있던 작고 귀여운 노란색 동물에게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파르스름한 기운을 발하던 에페는 바들바들 떨더니, 축 늘어진다. 희망은 모두 끝났다.

“으아아아악!”


7

내 절규는 금방 파묻히고 말았다. 싸움은 2차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아르펠은 엉망으로 쓰러졌고, 테르펠도 움베르트의 상대가 안 되었는지 떨어지고 말았다. 유진을 괴롭히던 녀석도 결국 유진에 의해 쓰러졌다. 이옌의 상대였던 녀석은 아마 죽은 것 같았다. 탐욕의 장군은 끔찍한 미소를 지으며 비틀비틀 서 있었다.

모두의 눈에서 불똥이 켜지고 있었다. 도미니크가 바람 같은 것으로 잠시 내 주위에 벽을 만든다. 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도미니크는 슬픈 표정으로 아직도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루시를 부탁했다. 나는 루시의 가냘픈 무게를 실감하며 루시를 안아준다. 피를 흘리는 것이 안타까워 가방 속에서 수건을 꺼내 머리를 감싸준다. 수건은 금방 피로 흥건하게 젖고 말았다.

빛나지 않던 도미니크의 조각이 찬란한 빛을 발한다. 조각은 내 옆에 잔뜩 놓여 있었다. 큰 녀석도 작은 녀석도 있었지만 모양은 제각각이었다. 도미니크는 손을 마주잡고 잠시 정신을 집중하자 넓은 범위에 바람이 요동치며 벽을 만든다. 그리고 도미니크는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천천히 걸어 벽의 가장 앞까지 나간다. 본격적으로 수호자들을 서포트하려는 모양이었다.

모두의 표정이 단호하게 변해 있었다.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 나도 물론 누구보다도 슬프고 분노에 찼다. 아까 오열할 때만 해도 내 손으로 저 탐욕의 장군을 찢어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화가 나서 이성을 잃는다면 그것은 성진의 말처럼 패배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수호자들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가장 먼저 뛰쳐나간 것은 페르난도였다. 양손에 든 곤봉을 뒤로 젖히며 총알처럼 튀어나가는 페르난도를 시작으로 레이지가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유진은 움직임이 없었다. 이옌은 그보다 뒤에서 활을 쏘는 것처럼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이옌의 몸 주변으로 푸른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것은 점차 거대한 화살의 모양이 되어가고 있었다. 말이 좋아 화살이지, 이옌의 몸보다도 커지고 있었다. 움베르트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몸 주변을 얼음 조각들로 둘러친다. 그리고 움베르트는 정신을 집중하려는 듯, 잠시 멈추었다. 이윽고 쿠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아까 테르펠에 의해 깨진 커다란 구멍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른다. 그 물줄기는 움베르트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구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페르난도가 위로 도약하더니 양손에 든 곤봉으로 탐욕의 장군을 내려친다. 탐욕의 장군은 그 시커먼 검을 한 손으로 휘둘러 페르난도를 튕겨낸다. 검과 곤봉이 마주치는 순간은 눈에 보일 정도로 엄청난 힘의 폭발이 있었다. 만약 그 근처에 보통 사람이 있었더라면 날아가버릴 정도의 충격이다. 저들은 그런 힘으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페르난도가 튕겨나가자마자 레이지가 접근해 있었다. 레이지는 속도는 느렸지만 힘만큼은 무지막지한 것 같았다. 그는 탐욕의 장군이 들고 있는 칼의 두 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두께의 칼을 탐욕의 장군을 향해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유진의 귀걸이가 한층 강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였다. 악마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듣는 것만으로도 온갖 공포가 밀려드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끔직한 웃음소리였다. 그리고 탐욕의 장군의 주변에 시커먼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레이지가 문득 멈춰 선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괴물. 괴물이었다. 거대한 어둠으로 만들어진 포악한 괴물. 녀석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흡사 개를 연상하게 했지만 저토록 무섭게 생긴 개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눈은 없고 거대한 이빨과 턱을 지니고 있는 괴물. 그 괴물이 탐욕의 장군의 몸 위에 나타나 있었다.

그 두려운 괴물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자세히 보면 탐욕의 장군은 끔찍한 미소를 지으며 침을 흘리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탐욕’그 자체라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레이지에게 그 괴물이 덮친다. 레이지의 몸에서도 피가 튀었다. 나는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레이지의 상처는 조금 까진 것 정도의 상처에 불과한 것 같았다. 레이지는 머뭇거리지 않고 있는 힘껏 그 거대한 칼을 그 괴물에게 휘두른다. 엄청난 소리가 들리고 괴물은 키이- 하는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공격은 통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상대해야 하는가. 페르난도가 잠깐 움베르트를 바라봤다.

그 때, 괴물이 그 거대한 입을 쩍 벌린다. 괴물의 입에서 거대한 검은 구체가 튀어 나왔다. 모두, 다섯 개였다. 그 끔찍한 다섯 개의 구체는 유진, 페르난도, 이옌, 움베르트, 레이지에게 달려든다. 엄청난 속도였다. 피하기 힘들 정도로.

콰앙-하는 굉음이 정확히 다섯 군데에서, 그것도 거의 동시에 울렸다. 직격이라면 즉사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공격. 나는 조각의 수호자들을 살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수호자들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자세히 보니 수호자들의 앞에 바람이 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미니크가 급히 수호자들의 앞에 바람의 벽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하지만 많은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일까? 도미니크는 급격히 힘을 쓴 듯, 숨을 급격히 몰아쉬었다. 루시는 움직일 수 없다. 그렇다면 도미니크의 부담이 너무 큰 것은 아닐까?

“이옌씨, 움베르트 선생님, 풍진 안으로 들어와요!”

이옌과 움베르트는 도미니크의 말대로 바람의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움베르트는 소리친다.

“페르난도와 유진이는 장군을 노려, 레이지군은 그 괴물을 상대해주게. 이옌이 서포트할 걸세!”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옌이 만든 거대한 화살이 바람의 벽을 뚫고 검은 괴물에게 날아간다. 엄청난 크기의 푸른빛이 검은 괴물을 관통한다. 괴물을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동시에 탐욕의 장군이 페르난도에게 달려든다. 페르난도 역시 곤봉을 휘두르며 탐욕의 장군에게 맞선다. 둘의 공방이 두 번 정도 오고 갔을 때 유진이 탐욕의 장군의 배를 걷어찬다. 탐욕의 장군은 몸을 조금 굽혔지만, 그건 연속기의 시작에 불과했다. 유진은 화려한 동작으로 탐욕의 장군에게 연타를 퍼붓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번의 공격을 허용한 탐욕의 장군은 몸이 크게 뒤로 젖혀진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유진에게 검을 휘둘렀다. 유진은 몸을 돌려 그 공격을 피해낸다. 검은 허공을 가르고 페르난도의 회심의 일격이 몸이 젖혀진 탐욕의 장군에게 가해졌다. 페르난도는 순간 보랏빛으로 빛나는 곤봉을 휘둘러 탐욕의 장군을 내리친다. 탐욕의 장군은 바닥에 완전히 뻗어 버렸다. 그리고 그 위로, 수십 개의 얼음송곳이 탐욕의 장군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음송곳이 모두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공중에 떠 있던 물로 된 거대한 구체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들어 그 주변을 완전히 박살냈다. 얼음이 모두 부서지고 탐욕의 장군은 그 거대한 물 구체와 함께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탐욕의 장군이라지만 조각의 수호자들의 협동 공격을 받고 일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내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탐욕의 장군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물 위로 솟아올랐으니 말이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유진이 움베르트를 한 번 쳐다본다. 그걸 신호로 움베르트의 조각이 한층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압력. 마치 예전 성진의 탈출 작전 때 유진이 보여준 힘과 유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조각의 수호자들이 최대의 힘을 개방한다. 어마어마한 압력이 폭풍이 치듯 주변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루시의 움직임을 느꼈다.


8

루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탐욕의 장군과 나머지 수호자들의 싸움이 시작된다. 괴물이 여섯 개의 엄청난 크기의 어둠의 구체를 쏘아낸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그것들은 도미니크의 바람의 벽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쿨럭

도미니크가 기침을 했다. 루시가 움직이려 하지만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것 같았다. 루시가 일어날 수 있다면 수호자들은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텐데. 도미니크는 곧 자세를 다시 잡고 전황을 살피기 시작한다. 레이지가 우렁찬 기합을 내며 하늘로 도약한다. 그의 몸에는 마치 눈에 보일 듯이 힘이 끓어 넘치고 있었다. 레이지가 하늘로 뛰어오를 때, 이옌이 아까의 거대한 화살을 쏜다. 푸른색 빛의 기둥이 괴물에게 적중한다.

한 방이 아니다. 재차 같은 크기의 빛의 기둥이 쏘아진다. 그리고 다시 한 방. 또 한 방. 이옌은 무려 네 번이나 그 거대한 빛의 기둥을 쏘아내었다.

네 번의 빛의 기둥에 몸을 관통당한 괴물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레이지의 거대한 검이, 녀석의 몸을 양단한다.

탐욕의 장군은 눈을 크게 뜨며 검을 휘둘렀다. 휘둘러진 검의 궤도를 따라 시커먼 기운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페르난도와 유진에게 날아간다. 그 둘의 앞에 도미니크의 바람의 벽이 만들어진다. 바람의 벽과 만난 검은 기운은 엄청난 소리를 냈고 견고하게만 느껴졌던 바람의 벽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물론 바람의 벽을 뚫은 검은 기운도 그 기세가 약해져 있었다.

도미니크의 몸이 잠깐 휘청거린다. 그 순간 페르난도가 유진의 앞을 막아섰다. 페르난도는 곤봉을 교차해 그 검은 기운을 막아낸다. 힘을 집중한 페르난도의 곤봉이 보라색 기운을 맺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리고 페르난도가 비틀거린다. 검은색 기운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때, 황금색 빛이 탐욕의 장군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유진, 그녀는 이미 빛이 되어 있었다. 온 몸에서 노란색 빛을 형형하게 발하고 있는 그녀는 흡사 여신이었다. 그 빛을 본 탐욕의 장군이 외마디 외침과 함께 시커먼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 때, 움베르트가 조종하는 커다란 얼음의 기둥이 탐욕의 장군의 몸을 내리친다. 탐욕의 장군은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칼을 휘두를 타이밍을 놓친다. 그리고 탐욕의 장군은 기어이 황금색 빛의 덩어리와 마주친다.

황금의 빛으로 둘러싸인 유진은 탐욕의 장군에게 세 번의 공격을 가했다. 유진의 주먹이 탐욕의 장군의 턱에 꽂아 들어간다. 번쩍- 하고, 노란색 빛이 카메라의 플래쉬가 터지듯 한 순간 밝게 빛난다. 그리고 무릎으로 탐욕의 장군의 옆구리를 찬다. 마찬가지인 빛의 번쩍 하고 터진다. 탐욕의 장군은 입을 벌리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유진은 양 손으로 탐욕의 장군의 얼굴을 감싼다.

그리고 황금색 빛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그 빛은 한참이나 계속되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얼마 쯤 지났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았다. 너무 밝은 빛을 보았기 때문인지, 사방이 어두운 것처럼 느껴졌다. 탐욕의 장군은 저 만치 떨어져서 쓰러져 있었다.

탐욕의 장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겼다. 유진이 풀썩 무릎을 꿇는다. 너무 많은 힘을 썼기 때문일까? 바람으로 이루진 벽이 풀리고 도미니크가 숨을 몰아쉰다. 쓰러진 페르난도가 걱정 되었지만 페르난도는 웃으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루시가 다시 한 번 몸을 움직인다. 루시는 웃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는 않지만 루시도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겼다는 사실을. 주위를 둘러본다. 모두 지쳐있었지만 크게 다친 이들은 없었다. 모두 몸을 추스르고 이쪽으로 모였다.

“후, 이제 이 교수를 처리해야겠지.”

움베르트의 말이었다. 모두가 지친 듯 다른 말은 없었다. 루시를 도미니크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 교수에게 다가갔다.

“어째서 그랬던 거죠?”

유진이 차갑게, 하지만 쓸쓸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쓰러져 있던 이 교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킨다.

“어쩔 수 없었어……. 혜연이. 녀석들이 혜연이를…….”

이 교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랬다. 이 중에서 이 교수는 유일하게 지켜야 할 것을 집에 두고 온 사람이다. 그는 이 세상을 구할 메시아가 보낸 사람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 약점을 배덕의 마녀는 치고 들어온 것이리라.

“그 때, 아르펠이 이 교수의 방에서 묶여 있을 때, 배덕의 마녀가 접근한 걸 거야. 에페가, 알려주었어.”

유진은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에페’라는 단어를 이야기하는 유진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어째서 배덕의 마녀는 그런 방법을 쓴 것일까? 우리는 하나도 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탐욕의 장군이 쓰러지지 않았는가. 지금 몸을 추스르지 못하는 것은 루시 뿐이다.

“어이~ 너 때문에 지금 몇 사람이 죽었는지 알아? 엉?”

페르난도가 소리친다. 그의 목에 핏대가 서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절 죽여주시오. 난 살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 세상에 가서 메르나님과 페데로프씨, 나타샤, 그리고 에페에게 사죄를 하겠습니다.”

에페의 시체가 보인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이 교수는 배덕의 군세도 아니고 그저 나약한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인데. 그 인간이 우리를 배신했다고 해서, 그리고 죽어선 안 될 행복한 두 부녀를 죽였다고 해서 이 남자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나약한 남자를,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 남자를 벌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움베르트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슬픔은 슬픔이오. 당신을 죽인다니 무슨 말이오, 이 선생. 자 갑시다. 우리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일단 이 일을 끝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쩌죠? 에페가…….”

유진의 말이었다. 모두들 심각한 표정이 된다. 이 교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 교수는 침울한 목소리로 의견을 말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에페가 열쇠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열쇠는…….”

이 교수의 말을 경청하던 움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나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움베르트는 급히 루시와 도미니크를 바라본다. 도미니크는 루시를 안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도미니크의 몸을 시커먼 기운이, 마치 날카로운 창 같은 모양을 한 기운이, 관통한다.

도미니크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풀썩 쓰러진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온통 불길한 기운을 뿜고 있는 배덕의 마녀가 나타났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에 온통 검은 기운으로 몸을 두르고 있는 다른 세계의 악마. 그녀가 발하고 있는 불길한 기운은 아까의 탐욕의 군주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검은 구름이 모여들고 있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미니크가 쓰러졌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화를 내기에는 눈앞의 배덕의 마녀가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한 대로 다들 곤죽이 되었잖아. 뭐 어차피 내 상대는 안 되었을 테지만.”

그녀의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저 마녀에게는 덤빌 수 없다. 조각의 수호자들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끔찍한 공포였다. 저 탐욕의 장군이 어린애로 느껴질 정도로.

그 때, 레이지가 배덕의 마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페르난도도 레이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는 곤봉을 움켜쥐고 마녀에게 달려든다. 비록 아까에 비하면 너무도 약했지만, 두 개의 빛이 어두워진 세상을 미약하게나마 밝히고 있었다. 레이지와 페르난도는 최전방에 서는 수호자들이다. 다른 멤버는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이들은 가장 먼저 적과 몸을 부딪혀야 한다. 그 의지가 레이지와 페르난도로 하여금 배덕의 마녀에게 달려들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는 배덕의 마녀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져 버렸다. 배덕의 마녀가 손을 휘두른다. 파도와도 같은 어둠의 물결이 레이지를 덮친다. 그리고 배덕의 마녀는 같은 종류의 물결을 페르난도에게도 뿌렸다. 레이지의 몸을 덮친 어둠의 물결은 완전히 레이지를 집어 삼켰다. 그 검은 물결은 레이지를 동그랗게 감쌌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레이지는 한 줄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는 쓰러진다. 곧, 다시 커다란 비명이 터지고, 페르난도가 쓰러진다. 둘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배덕의 마녀는 다시 성큼 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절망이었다. 그녀에게 결코 저항할 수 없었다. 아직 이옌과 움베르트, 유진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저 마녀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때 이 교수가 외쳤다.

“승우를 지키십시오, 여러분!”

이 교수가 외친 이야기는 그야말로 뜻밖이었다.


9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이 교수는 하고 있었다. 사실은 교수의 말을 믿어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교수의 일그러진 표정을 바라보면 그게 거짓일거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 때 배덕(背德)의 마녀(魔女)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놈은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것이냐. 네 딸은 지금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고 있겠지. 내가 어떻게 요리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냐?”

배덕의 마녀는 음침하게 웃고 있었다. 이 교수의 표정이 잠깐 변했지만, 그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닥쳐라, 이 요망한 것. 더 이상은 네게 휘둘릴 수 없다. 여러분! 열쇠는 에페가 아닐 겁니다. 열쇠는 바로 여기, 바이칼 자체일 겁니다. 바이칼이 그저 조각을 모으는 장소일리는 없어요. 전에 프레아 호텔에서 이옌군과 도미니크양의 조각은 공명했어요. 여기에서만 공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분을, 메르나님을 믿으십시오! 바로 이 호수에서…….”

그러나 이 교수는 말을 채 마치지 못했다. 배덕의 마녀가 던진 작은 검은색 구체가 이 교수의 가슴을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피를 울컥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진다. 나는 이 교수에게 다가간다. 이 교수는 피를 왈칵 왈칵 쏟으면서도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건……, 인류를 위한 일……. 자네가 희망……. 배덕의 마녀는 이걸 기다렸어……. 자네가…… 조각을, 모두 모아서 열쇠를 이 곳 바이칼로…… 가져, 오기를. 열쇠는…….”

교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때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좀 해봐, 승우야! 일단 우리가 지켜줄게!”

움베르트의 조각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배덕의 마녀의 발 앞에 있던 얼음이 위로 솟구쳐 오른다. 물까지 같이 솟구쳐 올라, 배덕의 마녀 앞에 벽을 만들고 있었다. 움베르트도 돌아보며 소리친다. 내게, 어서 하라고.

하지만 뭘 어떻게? 당신들은 괴물이잖아. 나는 그냥 평범한 인간이야. 나는 그저 소녀의 말에 따라서 바이칼 호수에 온 거야. 싸우는 건 당신들 몫이잖아.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난 조각의 수호자도 아니고 뭣도 아니야. 소녀가 죽는 순간에 간절히 힘을 바랐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에페의 몸이 애처롭게 찢어지는 순간에도 난 움직이지도 못했어. 대체 내게 뭘 어쩌라는 거야.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마지막 순간까지 방관자면 된다고 생각해. 이런 상황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움베르트가 만들어낸 벽은 너무도 허망하게 부서진다. 분명 움베르트가 전력을 다해 만든 장벽일 텐데도. 이옌도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녀는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마녀는 나를 향해 손을 휘두른다.

어라? 이게 아니잖아. 그 동안 나는 너희들 눈에 보이지도 않던 존재였어. 아무리 남들이 위험해도 난 위험하지 않았잖아. 근데 이건 뭐지? 왜 내게, 저런 무서운 검정색 기운을 날리는 거야? 아무런 힘도 없는, 내게.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황급히 나를 돌아보는 움베르트와 이옌의 동작이 바보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저 검은색 기운을 막을 수는 없어. 뾰족한 창처럼 생긴 것이 엄청 아프게 생겼어. 나는 입을 움직여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전부 순간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검은 생머리를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자. 유진. 유진이 내 앞을 가로 막는다. 퍼억-하고, 피가 튄다. 나는 유진을 바라본다. 그 창은 유진의 몸을 꿰뚫지는 못했다. 유진은 무릎을 꿇는다.

“어서…….”

그러지 마.

배덕의 마녀가 미소 짓고는 다시 팔을 휘두른다. 이번엔 엄청난 크기의 물결이다. 유진은 다시 일어나 내 앞을 막아선다. 그 물결은 유진을 덮치더니 동그랗게 유진을 감싼다. 아까 레이지와 페르난도를 쓰러뜨린 기술이다.

“아아아악!”

유진의 처절한 비명이 들린다. 검은 공이 사라지고 유진이 쓰러진다. 유진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 친다. 이건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배덕의 마녀가 움직인다. 작은 검은 구체를 날린다. 유진이 벌떡 일어난다.

안 돼. 그러지 마.

유진은 몸을 날려 나를 안고 쓰러진다. 다행히 검은 구체는 우리 위의 허공을 가로질렀을 뿐이다. 유진의 얼굴, 그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유진의 그 얼굴을 만져준다. 유진은 찡그린 얼굴을 펴고, 억지로, 웃어 주었다.

“그 아이는 네게, 희망을…….”

유진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유진의 어깨 너머로 필사적으로 배덕의 마녀의 전진을 막는 두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유진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는 싫다. 유진이 나를 걱정하는 것도 싫다. 물론 앞의 두 사람이 쓰러지는 것도 싫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상태라면 모두 다 죽는다. 그렇다면,

-약속해. 나와 함께 바이칼로 가는 거야.

다시 유진을 보니 두려웠다. 유진은 움직일 리 없는 몸을 움직여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무섭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어버릴 것 같다. 소녀는 내게 바이칼로 가라고 했다. 나는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여기도 바이칼이다. 다른 곳이 아니야. 바이칼이라고.

그 때 문득, 내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희망은 없다. 그렇다면 바이칼 호수 속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미친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 외에 방법은 없지 않은가. 아무런 힘도 없고 성진처럼 머리가 좋지도 않은 나는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인 소녀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 전부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달리기 시작했다.

배덕의 마녀가 놀란 듯 내게 기운을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기합소리가 들리고 누군가의 신음이 들린다. 앞의 구멍까지는 앞으로 조금이다. 다시 엄청난 소리가 들리고 꺅-하는 여성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다. 그래도 뒤는 돌아보지 않으리라. 지금 내가 멈춰서 뒤를 돌아보다 배덕의 마녀의 먹이가 되면 유진을 볼 면목이 없어진다.

눈앞에 구멍이 보였다. 깨진 얼음의 아래에는 너무나 깨끗한 바이칼의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이칼의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10

얼마나 지독한 소음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일까? 분명 물속에도 소리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물속의 소리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정적.

처음에는 무섭기도 했다. 한 없이 깊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무서움을 느끼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다. 먼저 심장이 덜컹하며 내려앉고 팔과 다리, 손가락과 발가락, 온 몸의 털들까지 본능적으로 움직이려 발버둥 치게 된다.

시간이 지나자 물을 향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아늑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속인데도 부자유스럽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한없는 고요함과 따뜻함, 그리고 포근함 같은 것이 날 감싸고 있었다. 그리운 느낌. 엄마의 느낌이었다.

끝은 보이지 않았다. 빛도 비추지 않았다. 어디가 수면이고 어디가 수저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숨을 얼마나 참았는지 센 것은 10초 정도일까. 이제는 얼마만큼 숨을 참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머리가 띵하고 현기증이 날 것만 같은, 곧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들뿐이었다.

‘미안해.’

입을 오물거려 그렇게 말해 본다. 그녀에게 어떻게 해서든 사죄하고 싶다. 내 몸은 완전히 힘을 잃었고, 축 늘어진 나는 물살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더 심해지기 전에.

‘미안해.’

필사적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약속을 지킬 수 없었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것은 최후의 발악이었으나, 어차피 패착이었다. 입을 오물거리느라 무리한 탓에, 기도가 열려버린 것이다. 잔뜩 공기에 굶주려 있던 나의 폐는 분별력을 잃고 미친 듯이 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물에 빠져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최후와 무척 가까운 상황이라는 걸.

‘난 어리석은 사람이라, 이런 것 밖에는 몰랐어. 사실은 아직도 모르겠어.’

아마 내 눈은 충혈 되었을 것이다. 뜨거운 것이 눈자위에 몰려 있었으니까.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고통 때문이기도 했다. 폐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 키고 있었고, 그 때마다 아찔한 절망감이 심장을 엄습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빨아들인 폐는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다. 머리가 온통 혼탁해지고 있다. 어서, 속죄라도 하지 않으면.

‘여기까지 와서, 너를 믿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게 내가 생각한 최선이야. 미안…….’

더는, 발악적으로 입을 오물거릴 의식도 남아 있지 않다. 몸이 발작하듯 움찔거리고 있다.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의식의 끈을 놓아 버리는 것. 그것으로 마지막.

- …… 알고 있어……언젠가는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익숙한 멜로디가 들린다. 난, 나도 모르게 웃고 있다. 그리운 노래. 저 그리운 소리.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마치 다 쓴 전구처럼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의식, 그 순간순간에 나는 분명 그리운 목소리를 듣고 있다.

추위는 내 몸을 칼로 찌르듯 달려들고 있었고 더 이상은 숨을 쉴 수 없었지만 어쩐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소녀의 노래를 듣고 있다. 소녀가 불러준 그 노래. 소녀의 노래는 희망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드디어 환상을 보고 있었다.

눈앞에 소녀가 나타났다. 15년 전 모습 그대로, 눈을 닮은 소녀였다. 그 소녀가 내게 노래를 불러준다. 그리운 목소리. 저 청아한 목소리에 내 영혼은 얼마나 구원을 받고 있었던가. 하얀 머리칼, 귀여운 얼굴, 눈보다 더 새하얀 피부. 그리고 이 세상 무엇보다 환한 미소. 소녀는 마치 15년 전 그날의 소녀를 보는 듯 밝게 미소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메르나, 기억하고 있어.

소녀는 내게 15년 전의 기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웃었다. 나는 이제, 죽는 것일까? 죽어서 소녀와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고마워. 대신 이걸 줄게.

소녀가 내 팔에 자신의 브로치를 걸어주는 영상이 내 앞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팔찌를 바라본다. 소녀는 웃으며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혹시 위급해지면 ■■■■라고 외쳐. 위기에서 한 번은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아아 그랬다. 소녀는 내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을 준 것이다. 그래서 소녀는 그토록 약속을 내게 강조했던 것인가. 하지만 뭐였지? 그 단어가. 나는 조금씩 기억을 되짚는다. 다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 혹시 위급해지면

조금만 더 기억하자. 조금만 더. 제발.

- ‘나제르다’ 라고 외쳐.

“나제르다!(nad'ezhda!)”

내가 그 단어를 외치는 순간, 소녀가 준 눈 모양의 브로치가 새하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어두운 호수 전체를 밝히고 있었다. 마치 태양을 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도 뜨겁지 않다.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몸이 부유하고, 나는 순식간에 호수 밖으로 튀어오를 수 있었다. 나는 한 참을 공중에 떠 있었다. 배덕의 마녀 앞에 움베르트와 이옌은 쓰러져 있었고, 배덕의 마녀는 유진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그 배덕의 마녀가 나를 올려다보고는 경악하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에피릴은, 세상을 구하는 빛. 이 세계를 위해 소녀가 들고 온 천상의 보물. 에피릴을 손에 쥐는 순간, 나는 모든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에피릴은 소녀가 15년 전에 가져온 천상의 보석. 그 보석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눈 모양의 브로치에 봉인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게. 설마 이 에피릴을 매일 매일 팔목에 차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내 손에 쥔 에피릴을 바라본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순수했다. 그야말로 순수함, 그 자체였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순수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내 손에 쥐어져있는 이 보석은 무엇보다도 순수했다. 소녀는 이야기했다. 이건 그냥 예쁜 보석이라고. 그래, 맞는 말이다. 그저 예쁜 보석일 뿐이다. 무척이나 순수한. 그리고 소녀가 자신의 인생을 걸어 나에게 맡긴 보석이다.

“마, 말도 안 돼. 저 보석이 어떻게 저런 평범한 인간의 손에서 빛을!”

“그건 내가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에는 힘이 서려 있었다. 그건 물리적인 힘이었다. 내 목소리는 거의 바이칼 전체에 울릴 듯 멀리 퍼지고 있었다. 배덕의 마녀의 표정에 공포가 서리고 있었다. 배덕의 마녀의 손에 머리를 잡힌 채 애처롭게 서 있던 유진이 나를 보고는 웃어준다. 그 웃음이 너무, 가슴이 아파.

“그래, 나는 평범한 인간이라서 아무런 힘도 없다. 그저 소녀의 의지를 대신 전할 수 있을 뿐. 일단 그 손을 놓아라.”

배덕의 마녀는 얼른 손을 놓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놀랍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겠지. 나는 찬란하게 빛나는 에피릴을 배덕의 마녀에게 보이며 소녀의 의지를 분명히 전달했다.

“너는,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너무 많은 사람을 상처 입혔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까지 죽였다. 그리고 소녀를…….”

에피릴의 빛이 세상을 찬란하게 비춘다. 그 빛이 배덕의 마녀에게는 어지간히 견디기 힘든 빛인 것 같았다. 그 순수한, 하얀색 빛. 배덕의 마녀는 끝까지 잔인하게 미소했다.

“그래, 내가 죽였다. 내 손이 그 계집의 가슴을 꿰뚫었을 때의 쾌감을 알 수 있겠느냐? 그 연약한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고 조그마한 심장을 붙잡았을 때의 쾌감을 아느냐? 나는 잊을 수 없다. 보아라, 이 손으로 네가 좋아하던 그 계집을 죽인 거다. 그 계집의 가슴을 뚫고 그 계집의 피를 쏟도록 만든 손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잘라보겠느냐? 미천한 세계의 버러지 같은 인간아! 아하하하!”

마녀의 도발에 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낀다.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틀림없는 구원의 돌, 에피릴이다. 절대적인 힘을 응축하고 있는 이 에피릴을 조금만 응용하면 저 배덕의 마녀 따위는 순식간에 소멸시킬 수 있다. 하지만.

-넘겨본 페이지에서 소녀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라고 했다.

“배덕의 마녀여, 너는 너의 군세와 함께 이 세계에서 사라져라. 두 번 다시는 이 세계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라.”

나는 에피릴을 높이 들어 보인가. 에피릴의 빛이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안 돼! 나는 그 에피릴을, 그 에피릴을 가져가야 해! 이럴 수는 없어!”

무의미한 외침이었다. 엄청난 힘을 지닌 배덕의 마녀였지만 에피릴의 의지 앞에서 배덕의 마녀는 조금씩 소멸하고 있었다. 그것은 쓰러진 배덕의 군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겠지.

어둠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에피릴이 세상에 비로소 희망의 빛을 비추고 있었다.


2장 : 약속의 호수 끝


에필로그 : 눈의 소리


한국에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나는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왔다. 두 달 전, 눈을 닮은 소녀와의 만남과 바이칼에서의 치열했던 싸움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침은 분주한 시간이다. 급하게 가방을 챙기고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열심히 준비하던 내 눈에 낡은 기타가 들어왔다. 소녀가 치던 기타. 나는 웃으며 기타를 조금 쓰다듬어 본다. 그리고 문 앞으로 가서 빨간색 털장갑을 바라보고 언제나처럼 인사를 건넨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침의 따스한 햇빛이 거리를 비추어주고 있었다. 나는 싱그러운 마음으로 거리를 내달린다. 개강 첫 주는 예의상 빠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우리 학교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학교다. 오히려 개강 첫 주에 수업을 못 들으면 제대로 학점을 받기가 어려운, 그런 학교다.

지하철에서 반가운 얼굴과 조우한다. 조성진. 악마의 입과 천재의 두뇌를 지닌 나의 절친한 친구. 녀석에게는 허점이라고는 없다. 언제나 완벽한 모습의 성진은 여전히 여유롭게 인사를 한다. 무서운 녀석이다. 헤어스타일부터 옷차림, 게다가 자세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냈지만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학에서 무수한 동기와 후배들을 마주친다. 녀석들의 인사는 모두 내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성격 때문인지 아는 아이들이 저절로 많아지는데, 성진이는 성격 때문인지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성진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캠퍼스를 걷고 있었지만 말이다.

대학의 수업은 지루함과 따분함,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음의 연속이다. 하지만 질문은 쉽게 할 수 없다. 같은 강의를 듣는 성진을 돌아본다. 녀석의 눈에도 따분함과 지루함이 어려 있었다. 우리는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지만 그 방향성이 다르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수업을 들어야 하기에 지루하지만, 성진이는 다 아는 내용을 계속 들어야 해서 따분하다. 이건 어마어마한 차이가 아닌가.

“야, 승우야. 이상근 교수가 잠깐 연구실로 오라던데?”

친구 녀석이 내게 그렇게 전한다. 나는 성진에게 인사하고 이상근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이상근 교수는 여전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준다. 여전히 안경을 쓰고 책에 파묻혀 있다. 하지만 나를 보고는 조금 진중한 표정을 지어서 나는 조금 슬퍼졌다.

우리는 캠퍼스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날, 이상근 교수의 잘못을 우리는 모두 용서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루시는 모두의 상처를 치료해주었지만 이미 숨이 넘어가버린 사람은 구할 수 없었다. 페데로프와 나타샤는 바이칼 호 주변에 묻혀 있다. 분명 이 교수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용서를 하더라도 이 교수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 교수의 상처는 이 교수가 스스로 해결할 것이다. 그는 어른이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교수가 나를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모두 힘없이 죽어버리고, 이미 이 세계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실을 일깨우는 것, 그것이 이 교수가 받은 역할이었다.

“‘모두가 원하는 ‘진실’은 지나간 나날 속에 묻혀있다.’ 인가.”

교수는 조용히 이야기했다. 그랬다. 소녀의 예언은 적중했다. 소녀와 내가 처음 만난 날의 기억 속에 진실은 묻혀 있었다.

“어쩌면 이 세상을 구원한 것은 이런 작은 돌이 아닐지도 몰라요.”

나는 내 팔목에 걸려 있는 에피릴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피릴은 이제 평범한 보석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평범한 보석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구원의 조각을 능가하는 힘을, 아직도 낼 수 있었다. 신벌을 빗겨가게 할 수 있는 막대한 힘의 잔재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을 사용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말이다.

“나제르다(nad'ezhda), 희망이라는 뜻이었어요.”

그 날. 우리는 조각을 모두 모아 조각의 힘을 개방했다. 조각들은 각자 공명하더니 찬란한 빛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작은 보석 상자였다. 뚜껑에 예쁜 보석, 자애의 조각이 박힌. 그리고 그 보석 상자에 구원의 돌을 넣자, 구원의 돌은 상자와 함께 공명하며 거대한 빛줄기를 하늘로 쏘았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고, 엄청난 크기의 거꾸로 선 하얀색 나무가 이 세계에 나타났다. 그 나무는 꼬박 하루를 그렇게 거꾸로 서 있었다. 사방으로 순수한 빛을 뿜어내며. 그리고 구원의 돌은 평범한 보석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구원받았다.

“구원의 돌은 소녀가 직접 이 세계로 가져온 것이었지. 그 에피릴의 빛을 봉하는 데에만 소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쓴 것이 아닐까? 즉, 모든 것은 그 소녀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 소녀의 따뜻한 마음과 상냥함이 결국 이 세계를 구한 것이나 다름없지. 그나저나 2년 후의 일은 어떻게 해야 하려나. 신벌은 그저 조금 늦춰진 걸세. 2년 후에는 확실히 신벌이 내려. 어디에서부터 준비를 해야 하나.”

이 교수는 한숨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애초에 예정된 신벌. 그것이 앞당겨지자 그 때마다 소녀는 이 세계를 구하러 왔다. 사용한 에피릴은 두 번 사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 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아앗, 그러고 보니!”

“왜 그러나?”

“아, 유진 누나가 밥 사준다고 약속 잡았거든요. 늦으면 큰일이라.”

“그럼 어서 가보게.”

나는 교수에게 인사를 건네고 달리기 시작한다. 마냥 괴팍하기만 했던 이 교수는 조금 쓸쓸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이 가슴이 아프지만 인간은 그런 것이다. 인간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변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아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헛된 욕망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인간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겨울이면 얼어붙는 바이칼 호수처럼.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삶에도 봄이 오면 자연스럽게 눈 녹듯이 사라질 일들이다. 계절의 순환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인간의 변화도 자연스러운 일. 꽃이 진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름답게 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유진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달린다. 늦으면 큰일이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면 살해당할 수도 있다. 아직 이 세계에는 모두가 살아 있다. 눈을 닮은 소녀의 상냥함에 의해 우리는 다시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소녀의 상냥함을 본받아, 열심히 살아보기로 나는 다짐한다.

나는 세계를 구했다. 그렇지만 나는 영웅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세계를 구한 것은 내가 아니다. 조각의 수호자 일곱 명도 아니었다.

소녀의 정체는, 위의 세계에서 살던 아주 높은 귀족 집안의 자제였던 것 같다. 그녀는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약속된 영원의 시간을 포기하고 이 세계를 방문했다. 17살 소녀가, 자신이 죽을 거라고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을까.

3월인데,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소리를 내지 않는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나는 눈을 닮은 소녀를 만났었다.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거닐며 우리는 언젠가 사라질 눈 위에 지워지지 않는 추억을 새겼다. 눈은 자취를 남기지 않지만 눈이 내린 다음날의 풍경은 우리의 가슴 속에 새겨진다.

눈은 소리 없이 흩날린다. 그 속에서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던 눈을 닮은 소녀가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그녀는 눈의 계절에 이 세계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소녀는 눈이었다. 그리고 나는 들었던 것이다. 눈을 닮은 소녀가 부르던 노래를. 원래 소리를 내지 않을 터인, 눈의 소리를.


- 눈의 소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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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소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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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의 소리 - 5. 약속의 호수 (완결) +2 08.09.08 616 2 48쪽
8 눈의 소리 - 5. 약속의 호수 (1) 08.09.08 360 2 49쪽
7 눈의 소리 - 4. 천호(天湖)로의 여정 (2) 08.09.08 355 2 28쪽
6 눈의 소리 - 4. 천호(天湖)로의 여정 (1) 08.09.07 333 2 48쪽
5 눈의 소리 - 3. 외로운 천사의 비가(悲歌) (2) 08.09.07 219 2 32쪽
4 눈의 소리 - 3. 외로운 천사의 비가(悲歌) (1) 08.09.07 451 2 38쪽
3 눈의 소리 - 2. 무너진 세계를 위한 랩소디 +1 08.09.06 505 2 58쪽
2 눈의 소리 - 1. 소녀의 방문 (2) +1 08.09.06 217 2 17쪽
1 눈의 소리 - 1. 소녀의 방문 (1) +1 08.09.06 883 5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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