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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샤 님의 서재입니다.

눈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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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두샤
작품등록일 :
2008.09.08 02:28
최근연재일 :
2008.09.08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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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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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07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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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눈의 소리 - 3. 외로운 천사의 비가(悲歌) (1)

DUMMY

눈의 소리 3장 외로운 천사의 비가(悲歌)


1

지독했던 지난날의 사투(나는 목숨을 걸었었지.)는 거짓말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 예와 같은 나날의 반복. 눈을 뜨며 새하얀 소녀가 내게 인사한다. 함께 식사를 하고, 가끔 잠에서 깬 에페가 아양을 떨고, 우리는 즐거워한다. 언제까지나 이어지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날들.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나는 빨간색 털장갑에 인사를 건네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 이제 엿새만 지나면 월급이다. 월급을 받으면 지금까지 모아둔 저금과 합쳐, 바이칼로 떠날 자금이 마련된다. 소녀는 어떻게 가려는 걸까? 소녀는 사람들의 감사의 표시, 라고 말했었지.

일을 어느 정도 진행하고 나서, 바쁜 시간이 되었다.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된다고 판단될 즈음에 혜연이 나타난다. 어라? 조금 이른 시간이다. 혜연이는 어색하게 인사하며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아빠가 찾아왔어.”라고 말한다. 나는 놀라며 밖을 내다보니 이상근 교수가 큰 가방을 둘러맨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는 내게 손을 흔들고 있다.

“잠깐 나가서 이야기하고 와. 내가 계산하고 있을 테니까.”

혜연의 배려에 나는 얼른 편의점을 나와 이교수와 인사를 나눈다. 이 교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그 여자애를 만나야겠네. 승우군.”

“저, 아르바이트 끝나려면 두 시간 남았는데요?”

어지간한 성미라고 생각하며 나는 웃어 보인다.

“지금 그까짓 아르바이트가 문제인가? 당장 바이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이 교수는 오히려 역성을 내며 반박한다. 이 교수는 다짜고짜 얼른 바이칼을 가야 한다며 내 팔을 잡아끌었지만, 나도 완강히 저항했다.

“뭐라고 설명을 해주셔야지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자고 하시면 안 되죠!”

이 교수는 한 숨을 푹 쉬더니.

“자네가 뭘 모르는 것도 이해는 가네. 그거 알고 있나? 그녀는 인간이 아니야. 응? 사람이 아니라고. 물론 자네야 또 이 교수 나부랭이가 헛소리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위그드라실 위의 아스갈드에서 비프로스트를 타고 온 메시아일세. 말하자면 아직도 에덴 동산에서 살고 있는 여자라고!”

대개 아는 내용이었다. 위그드라실인지 아스갈드인지 뭔지는 몰라도, 전부 아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런데요?” 하고 시큰둥하게 반문한다.

“허, 참. 이 사람 보게나. 메시아의 등장은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일세. 게다가 그녀는 예언에도 없는 메시아야. 이건 특급 상황이란 말이야!”

이 교수는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하지만 그것도 아는 이야기.

“아, 네. 알아요. 그래서요?”

이 교수는 점점 더 분노하고 있었다.

“이런, 자네는 바보인가? 알고 있는데 뭘 했나! 내게 데려오게. 당장 만나서 대책을 논의하고 바이칼로 가야지. 나는 알고 있다네. 바이칼호는 천호(天湖). 그곳은 인류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일세. 그 곳에 고대의 메시아가 남겨 놓은 단서가 있다는 기밀도 나는 알고 있지.”

그 부분은 분명 놀라운 이야기였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교수는 만족한 듯, 가슴을 편다.

“그럼 혹시 이것도 아시나요?”

나는 결코 악인이 될 수 없는 이 교수에게 다른 세계의 존재에 대해 물었다.

“다른 세계? 그런 건 없어. 그 여자애와 관계된 신화는 북구 신화야. 위그드라실의 위의 아스갈드, 그녀가 타고 온 무지개 다리 비프로스트, 그리고 여기 미드갈드. 그리고 요툰하임이나 알프하임이 있겠지. 아마 그녀는 발할라의 성녀일 걸세.”

나는 그런 세계는 절대 없다고 단언하는 교수에게, 소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 주었다. 신에게 미움 받은 이곳의 인간. 그리고 다른 존재의 시기와 질투. 다른 존재가 만들어낸 세계와 신벌에 대해서.

“이, 이럴 수가. 절대악? 정말인가? 신에게 반하여 다른 차원의 세계를 창조했다고? 아아 잠깐만, 아직 해독 중인 고문서가 완독이 안 되었어. 조금 기다리게.”

말을 마친 교수는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책을 우르르 쏟아 놓고는 뿔테 안경을 썼다.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지금 교수에게는 문헌을 찾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았다. 나는 시간을 번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편의점을 찾은 무수한 손님들을 맞아 고군분투하는 전우의 힘이 되어주기로 했다.

“내일이 기일이지?”

“응? 아, 그러고 보니.”

기일에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버지의 할 일로, 나는 아침에 아버지를 찾아뵙고, 그냥 돌아올 뿐이다. 기일에는 오히려 고인을 생각하며 추억을 더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혜연이도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꽤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이기에,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 혜연이 우리 어머니의 기일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나는 부드럽게 혜연을 바라본다. 편의점 밖에서는 무섭게 연구에 몰두한 이 교수의 모습이 보인다. 티격태격 싸우지만 사이좋은 부녀.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마음이 따뜻한 혜연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온다. 따뜻한 마음과 열정을 공부 외에는 쏟을 줄 모르는 교수가 여전히 책에 파묻혀 있다.

“교수님, 저 나왔어요.”

“응, 잠깐만 기다리게. 알았어. 뭔지 알았어.”

이상한 꼬부랑 문자를 보고 있는 교수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 교수를 보고 있다 보면 공부가 저렇게 즐거운 것인지 새삼 반문하게 된다. 분명 즐거울 리 없을 테지만, 이 교수의 저 신나는 표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교수는 걸으면서도 책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큰 탄성을 지르며 책을 탁 덮는다.

“그랬군. 그랬어. 바로 그거였어. 어이, 승우군, 그녀가 다른 이야기는 안 하던가?”

나는 짤막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파란색 피를 흘리는 다른 세계의 사람. 배덕의 마녀, 혼돈의 소용돌이. 그 모든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던 교수는 크게 웃는다.

“하하하하! 맞았어, 맞아 떨어졌어! 세상에 이렇게 정확히 맞을 줄이야. 그래, 바이칼에 단서를 남긴 고대의 메시아는 길을 잘못 찾아 들어간 덜떨어진 메시아였어. 그게 신이 장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길을 잘못 찾아 들어간 그는 다른 세계를 직접 목격한 거야. 그게 바로 이 암흑의 비밀 기록인걸세!”

이 교수의 손에는 두꺼운, 검정색 표지의 책이 들려 있었다.


2

방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이 교수는 소녀를 본 순간부터 아까의 활발함이 조금 진정되어 있었고, 괴팍한 이 교수의 진지한 모습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그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 교수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 킨 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책을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메시아들의 의무인 겁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볼 수 있을까요?”

엄청난 호기심이 담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부탁해 오는 이 교수에게 소녀는 고개를 저어 보인다. 이 교수는 예상했다는 듯 웃어 보인다. 그렇게 정중한 모습을 처음 보는 나는 여전히 이 교수의 분위기에 놀라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들이 쓰는 책은 읽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하죠. 그럼 제게도 어떤 역할이 부여된 겁니까?”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 교수는 여전히 진지한 태도로 소녀를 응시하고는.

“바이칼호에는 언제 가십니까? 제가 예상하기로는 열흘 정도 남은 것 같은데요. 지금쯤 세계 각지에서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겠군요.”

소녀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무반응은 긍정의 의미인 것 같았다. 이 교수는 지체 없이 입을 연다.

“바이칼호로 떠날 준비는 제가 하겠습니다.”

나는 교수의 충격 발언에 놀라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커피를 전부 뱉을 뻔 했다. 이상근 교수, 아무리 교수라지만 그리 여유롭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 텐데. 무리가 아닐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녀의 반응. 소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 교수는 다시 한 번 제안했다.

“승우군도 무언가 역할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승우군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신분증도 여권도 없는 다른 세계의 메시아를 모시고 바이칼로 가는 준비를 하나도 하지 못합니다. 승우군이 태평하다기 보다는 아직 인생 경험이 부족하니까요. 여권과 신분증 정도는 준비하겠습니다. 물론 비행기 표도 말이죠.”

나는 핵심을 찔린 것 같은 느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랬다. 여권 준비. 소녀를 데리고 가려면 당연히 생각해야 했던 것임에도 나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소녀가 바이칼로 간다는 말을 농담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 때,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도와준다면 고마울 겁니다. 하지만 바이칼호로 가는 여행은 당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여행이 될 겁니다. 마음을 급하게 먹어선 안 됩니다. 바이칼호로 직행하는 것은 피하십시오. 이 지역의 조각의 수호자와 함께 먼저 중국으로 가세요. 그 곳에서 세 사람을 만나십시오. 그들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바이칼호에는 영영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바이칼에 도착했을 때, 당신의 역할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교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나를 한 번 돌아보며 소녀가 말한 대로의 루트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소녀는 반드시 나를 데려가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교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는 내내 얼굴에서 슬픈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는 가끔 저런 슬픈 얼굴을 하곤 한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다.

“후, 예전과 똑같군.”

나는 이 교수를 유진의 집까지 안내하기 위해서 함께 집을 나섰다. 교수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런 교수의 모습을 접하는 것은 처음이라서 나는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교수는 십 몇 년 전에 소녀를 만났다고 했다. 아마 15년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이 교수는 다섯 살이던 혜연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공항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 혜연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놀란 교수는 정신없이 혜연을 찾다가 결국 실패하고 공항 벤치에 앉아 절망하고 있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엄마 없이 키운 아이야. 집사람은 혜연이를 낳다가 떠나버렸거든.”

그런 혜연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교수는 끝없이 자신을 책망하며 눈물을 쏟고 있었다고 했다. 그 때, 혜연이의 손을 잡고 소녀가 나타난 것이다. 어리던 혜연이는 방실방실 웃으며 이 교수에게 다가왔고 교수는 소녀를 은인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 함께 있던 것이 이옌이라는 청년으로, 그것이 인연이 되어 가끔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만나곤 했다고 한다.

“혜연이는 울고 있었을 거야. 나중에 들어서 안 이야기지만 그 여자아이가 혜연이가 무서워하지 않게 노래도 불러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었다는 거야. 아무튼 그녀는 고마워하는 내게 책을 한 권 주었다네. 그게 이 암흑의 비밀 기록을 찾는 단서가 되었지.”

이 교수는 처음에는 그 책에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소녀의 책을 읽다가 상황을 파악했다고 한다. 그 후로 본격적인 연구를 비밀리에 진행했다고 했다.

교수의 이야기가 끝나갈 때, 유진의 오피스텔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교수는 유진이 퍽 부자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응, 무슨 일이야? 승우군.”

뒤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 유진이었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길인 것 같았다. 나는 유진을 보며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지금 유진을 보자마자 호감어린 표정으로 변한 저 교수, 만약 전처럼 유진이 집에서 핫팬츠라도 입고 있었다면 대형 사고라도 나지 않았을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늘의 보살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감사를 드렸다.

이 교수를 소개하고, 둘은 인사를 나눈다. 나는 다시 유진의 집을 방문했다. 전에는 자세히 살피지 않았지만 의외로 유진은 집을 깔끔히 청소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유진이 간단한 차와 다과를 내오고,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말하자면 교수님이 그 애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 모든 현상을 가장 자세하게 알고 있다는 이야기로군요.”

유진은 간단하게 정리했다. 도도하고 자신감이 지나쳐 거만해 보이기까지 한 유진이었지만 그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유진은 굉장히 머리가 좋아 보였다. 그런 유진을 교수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다지 많은 것을 아는 건 아닙니다, 아가씨. 아직도 이 기록을 전부 해독하지는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아는 부분만큼은 알려드리겠습니다. 물론 제가 하는 이야기가 모두가 진실인 것은 아닐 겁니다. 아마 그 소녀는 더욱 많은 것을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때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는 법. 그걸 알기에 저 소녀는 전부 숨기고서 지내고 있는 겁니다.”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소녀가 많이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니까. 누구와도 의견을 교환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자신의 괴로움을 털어 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외로움일까?

“그런데 혹시, 저 소녀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이름만 알 수 있다면 소녀의 정체를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소녀가 메시아라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저는 소녀가 발할라의 성녀 정도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어쩌면 소녀는 그 보다 더 큰 존재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교수와 나는 유진을 응시했다. 소녀의 이름. 유진 역시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3

방 안의 공기가 경직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정적. 유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연다.

“나도, 몰라요.”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그 것은 교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의 실망한 표정을 보며 유진은 마치 자기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에 그 아이가 말했어요. 두 번 정도, 자기 이름을 말했다고. 자기 이름을 아는 사람은 세 사람 정도라고.”

교수는 “그렇습니까.”하고 말한다. 하지만 누구인지 알 길이 없으니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때, 소녀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다. 소녀의 이름을.

-응. 내 이름은 ■■■. 기억해두고 있어.

아아, 분명히 들었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할까 하다가 관둔다. 그런 중요한 아이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싫었다. 자신의 기억력이, 자신의 무심함이 처절할 정도로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일단 구원의 돌이나 심판의 돌, 구원의 조각 등에 대해서는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쪽 세계와 다른 세계에 대한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던 고대의 메시아가 남긴 암흑의 비밀 기록과, 그 메시아가 이 세계에 도착해서 남긴 기록들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교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선……. 그녀가 위의 세계에서 왔다는 것은 잘 아시겠지요. 그 세계의 이름은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서를 통해 세계의 모습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지요. 우선 신이 사는 세계는 이 세계의 바깥입니다. 가장 위쪽이라고 할 수 있죠. 그 바로 아래에 자신의 피조물들이 사는 작은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에 비유하자면 작은 연못이나 우리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있어요. 우리는 그 세계에서 다른 존재와 결합했다는 것 까지요.”

“음, 그랬군. 승우군은 그녀에게서 들었던 거겠지.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는 군요. 신은 아홉 개의 아래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여기는 그 중에 가장 마지막인 아홉 번째 세계이지요. 메시아의 기록에 의하면 아홉 번째 사람들의 죄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더군요.”

“다르다니요?”

“음, 승우군. 성경에는 원죄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지?”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거죠.”

“승우군도 기본적인 상식은 있는 사람이구만. 하지만 이 기록에서는 말이야, 인간의 원죄는 지혜의 열매를 먹은 것과 그보다 더 큰 죄가 있는 것이라고 해. 그것이 다른 존재, 절대악과의 결합이지. 그리고 우리는 ‘욕망의 저주’를 받은 인종으로 알려져 있다네.”

“응, 그래서요?”

못 참겠다는 듯, 유진이 끼어든다.

“네, 아홉 개의 세계는 평행으로 늘어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위쪽으로 그녀의 세계가 있구요. 그리고 그 평행 세계는 하나의 줄기와 모두 연결되어 있지요. 저는 그것이 위그드라실이라 생각합니다만, 메시아의 기록에는 ‘혼돈의 균열’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일직선으로 주욱 늘어진 혼돈의 균열을 따라가다 보면, 길이 하나 갈라져 나오는데 그 갈라진 길로 가면 하계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하는 군요. 게다가 이쪽은 평행세계의 제일 끝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메시아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아주 높은 사다리’를 타고 온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무지개 다리 비프로스트. 그것을 타고 혼돈의 균열의 가장 바른쪽에서 나타난다고 하는군요. 문제는 ‘혼돈의 균열’ 한 가운데에 있다는 ‘혼돈의 소용돌이’.”

“그런 내용을 우리가 알아야 할 이유는요?”

유진은 핵심을 짚었다.

“네,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도대체 저 차원을 가르는 일직선의 균열은 왜 생겼나는 겁니다. 책에 의하면 절대악이 신에게 질투와 시기를 느끼고 반대편에 같은 종류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구 신화에는 라그나뢰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신들의 황혼. 하지만 신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쪽 세계의 존재들이 이쪽 세계로 쉽게 넘어오지 못하도록 선을 그은 것이죠. 그 선을 넘어서 이 메시아는 절대악의 세계를 탐험하고 온 겁니다.”

“그런 그 세계에 대한 내용은 모두 파악하셨나요?”

“그렇지는 못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지식도 아주 단편적입니다. 대신 배덕의 마녀라던가, 앞으로 유진씨가 싸울지도 모를 존재들에 대한 내용은 알 수 있었습니다. 배덕의 마녀는, 절대악의 가호를 받는 4명의 군주 중의 하나입니다. 그녀는 절대악에 의해 영원의 시간을 약속받은 존재. 그리고 다른 세계의 어떤 존재보다도 교활하며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의 밑에는 가장 강한 부하인 탐욕의 장군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배덕의 마녀에게서 많은 권능을 부여받은 존재로, 어지간한 일은 그가 도맡아서 한다고 합니다. 또, 탐욕의 장군 밑에는 14명의 탁월한 부하들이 있다고 하는군요.”

“그럼 테르펠과 아르펠은 그 14명에 포함되겠군요. 15년 전에는 두 명이 더 있었으니까.”

“그럼 그들의 능력은 뭐지요?”

“그건 불명이라네, 승우군. 이 메시아는 숨어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어. 그들의 힘까지 알아낼 수는 없었겠지. 그 지역에 사는 탐욕스런 주민들을 속여서 알아낸 정보인 것 같아.”

“15년 전에, 테르펠이 계금……같은 걸 깨고 폭주한 일이 있었어요. 그 때 그는 새카만 날개를 달고 있었어. 혹시 그 녀석들, 천사 같은 건가요?”

“음, 아마 그럴 겁니다. 저쪽 세계에도 하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시아가 방문한 곳은 이쪽 세계 기준으로 위쪽 세계와 같을 겁니다. 즉,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존재인 위쪽 세계의 사람들과 같은 개념이지요. 그들은 모두 천사라 봐도 무방합니다.”

“조각의 수호자들의 능력은 어떤가요? 유진씨.”

나는 적절한 질문이라 판단했지만, 유진은 잠시 말이 없다. 이 교수도 답변을 원하는 듯 진지하게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은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날 똑바로 바라본다.

“유진씨? 야, 너 몇 살이니?”

“스물둘……인데요?”

“난 전부터 그게 마음에 안 들었어. 어디 조그마한 것이, 건방지게.”

유진은 정말 불쾌해 보였다. 아니 그런 자신은 훨씬 나이차가 나는 이옌에게 반말이나 찍찍 하면서 내게는 예의 차리라는 건가? 역시 이래서 예쁜 여자들은 성격이 나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흠, 내가 보기에도 승우군이 잘못한 걸세.”

이 교수는 한술 더 떠 유진의 편을 든다. 역시,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예쁜 여자에게 유독 약한 이 교수는 여기에서 절대 아군이 되어줄 리 없다.

“누나라고 부르면 될까요?”

“누님이라고 불러.”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알았어요, 유진 누님.”이라고 말한다. 이건 굴욕이다. 제길, 뭐? 자애의 조각? 웃기고 있네. 조각이고 나발이고 다 사기다. 저런 성격이니 남자 친구가 있을 리가 없지. 없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아니, 확실히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얼굴이나 몸매 보고 반했다가 일주일이면 진상을 깨닫고 도망치겠지. 배덕의 마녀니 뭐니, 저 여자야말로 마녀다. 이 세상은 저주받았다. 저런 마녀가 조각을 지니고 있다니.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요괴 할망구 같으니.

“흠. 뭐 승우가 그리 저자세로 나온다면 나도 할 말 없어. 앞으로 까칠하게 굴지 않을 테니까.”

유진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진다. 하지만 나는 어림없다. 망할 요괴 할망구야.

“네. 저도 유진 누님처럼 예쁘고 멋진 분이 누님이라면 좋죠. 어디 가서 자랑할 수도 있구요.”

나는 방긋 방긋 웃으며 마음과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한다. 나는 22세의 사회인이다. 이미 세상을 경험했고,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했다. 물론 진심으로 하자면, ‘이 요괴 할망구야, 널 누님으로 부르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겠어. 어디 가서 널 누님이라고 했다가는 너무 부끄러워서 가솔린을 쏟아 부은 석탄 마냥 몸이 활활 타버리고 말 걸.’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다.

유진은 무척 만족한 표정이었다. 특히, ‘예쁘다’와 ‘멋지다’에서 큰 반응을 보였다. 한층 부드러운 분위기로 변한 유진이 미소까지 보이며 말을 이어간다. 단순한 여자.

“뭐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튼 조각의 수호자는 능력이 천차만별이야. 5개의 조각은 공격적인 성향의 힘을 지니고, 2개의 조각은 수비적인 성향을 지녀.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싸울 수 있는 조각의 수호자는 5명이라는 이야기지.”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조각은, 구원의 돌을 발동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했지요? 열쇠는 구원의 돌을 찾게 해주고.”

“응. 그래서 그들은 조각의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조각을 뺏는 수고로운 작업 보다는 열쇠를 찾는 편을 택한 거지.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다면 유진 누님이 말한, 싸울 수 없는 조각을 지닌 수호자들은, 지금쯤 위험하지 않을까요? 배덕의 마녀도 왔다고 했어요. 나머지 부하들도 모두 오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둘 밖에 못 봤잖아요. 그럼, 나머지는…….”


4

이상근 교수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말대로 그들이 생각하고 움직인다면 그건 그야말로 큰 일이 아닌가. 바이칼호로 떠난다는 소녀의 계획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된다. 아마 열쇠는 소녀가 지니고 있겠지. 유진이 열심히 소녀를 지켜, 이 교수의 도움으로 바이칼호까지 어찌어찌 간다고 해도, 조각이 모이지 않으면 구원의 돌은 발동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유진은 그 상황에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글세, 네 말대로 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일단 나는 그 아이를 믿어. 그 아이는 아무래도 미래를 보는 힘 같은 게 있는 것 같아. 물론 내 느낌이지만……. 교수님 말씀대로 그 아이가 메시아라면 조각이 모이지 않을 리는 없을 거야. 그리고 조각의 힘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고.”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거실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는다.

“두 사람 다 이쪽으로 와요. 조각의 힘에 대해 말해볼게요.”

우리는 그 쪽으로 이동한다. 교수는 호기심이 급증한 듯 신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고문으로 접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다르겠지.

“우선 내가 가진 조각은, 지금 하고 있는 귀걸이인데. 기본적으로 조각으로부터 힘을 받는 거예요. 그 힘이라는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냥 기운 같은 거지요. 내 경우에는 조각으로부터 힘을 받게 되면 그것이 몸에 감돌게 되요. 아우라와 비슷한 개념인데, 무언가 따뜻한 것이 몸에 감도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평소에는 조각으로부터 힘을 받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내 몸에 흐르는 조각의 힘을 사용할 수 있어요.”

유진은 나를 본다.

“승우, 전에 내가 싸우는 걸 보았지? 어떤 것 같았어?”

나는 잠시 유진이 싸우던 장면을 떠올린다.

“일단, 인간의 속도가 아닌 것 같았어요.”

유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맞아. 위력도 인간의 것은 아니야.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한 방에 즉사할거야. 그리고 그 때에는 조각의 힘을 하나도 받지 않고 싸운 거였어. 조각을 조금도 개방하지 않은 거지.”

유진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조각의 힘을 조금만 개방하면.”

그녀의 귀가 노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으헉.”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바람 같은 것이 우리를 스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분명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계속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아마, 유진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지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떠한 중압감이 우리를 누르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그녀에게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언가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무거운 느낌이었다.

“아마 움직이기 불편할 거예요. 그리고.”

유진이 우리를 한 번 쳐다본다. 유진과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나는 몸이 굳어진 것을 느꼈다.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전에 테르펠이 보여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절망감 같은 것이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바라본 건데, 아마 맹수 앞에서 토끼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일 거예요. 이런 종류의 힘을 운용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내 경우는, 철저하게 몸 주변에 응축되지요. 이 상태에서 나는 인간을 아득히 초월해 버리는 것 같아요. 내 경우에는 움직임과 힘과 판단력이 엄청나게 발달하고 눈도 좋아져요. 시계의 초침이 초침처럼 느껴지지 않아. 다른 수호자들은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운용해요. 이옌은 마치 화살을 쏘듯 기운을 던지지요. 그리고 어떤 수호자는 염력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요.”

유진은 꼼짝도 못하고 있는 우리를 보고는 살짝 미소한다. 유진의 귀걸이의 노란 빛이 사라지자 우리는 막혀 있던 숨을 내뱉는다.

“안심할 수 있겠어, 승우? 이래 뵈도 신의 분노마저 막아낸다는 구원의 돌을 지탱하는 조각의 힘이야. 쉽게 당하지는 않아.”

교수도 놀란 표정이었지만, 실실 거리며 웃고 있었다. 교수는 새로운 것을 보았다는 기쁨에 차 있었다.

유진의 힘은 정말 놀라웠다. 구원의 조각. 그 이름에 걸 맞는, 그 수호자에 걸 맞는 힘이었다.

“다른 수호자들도 모두 똑같이 강한가요?”

“아니, 그렇지는 않아. 큰 차이는 없겠지만, 중요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 그리고 그 아이는 내가 가진 돌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어. 즉, 나는 수호자 중에서도 가장 큰 힘을 지니고 있는 거지.”

유진은 설명을 계속했다. 15년 전, 소녀와 처음 구원의 조각을 찾아낸 유진은 조각의 수호자가 되기에 적당했다고 한다. 조각을 손에 넣자 힘을 운용할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조각의 힘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조각을 개방하면 몸과 정신이 버티지 못해 조각의 힘을 사방으로 방출하고 기절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끊임없이 조각의 힘을 조절하는 수행을 한 끝에 지금은 대부분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15년 전에 소녀가 이 세계를 방문한 것은 조각의 수호자들을 미리 만나서 시간을 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교수는 이야기했다. 아마, 조각을 모아 구원의 돌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수호자들이 조각의 힘을 개방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각을 개방하는 능력을 익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조금씩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 바이칼호로 떠나는 한국의 멤버는 나하고 교수님, 승우와 그 아이. 이렇게 네 명이로군요. 저는 여권도 있으니 구하지 않으셔도 되요. 좌석 번호만 알려주세요. 가까운 쪽으로 예약하지요.”

“날짜를 잊지 마세요. 1월 28일입니다. 다음 주 수요일이지요. 오늘이 1월 22일 이니까 엿새 남았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날은, 2월 3일. 빠듯한 일정이군요.”

그랬다. 우리는 우선 중국으로 가서 이옌과 만나야 한다. 중국에서 바이칼호로 가는 최단 루트가 있을 거라고 이 교수는 말했다. 물론 이옌에게 연락해서 여기의 사정을 이야기해야겠지만 이옌도 미리 알고 있을 것이리라.

나는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자정이 지나 있었다. 이제 엿새 후면 바이칼호로 떠난다. 한 번도 한국을 떠난 적이 없는 나다. 조금 걱정도 되었다.

오늘은 어머니의 기일이다. 아버지에게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걷는다.

그건 그렇고, 소녀는 어째서 나와 함께 지내고 있는 것일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나를.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나를. 나는 이 교수처럼 바이칼호로 가는 방편도 마련해주지 못하고, 유진처럼 특별한 사람인 것도 아닌데. 그 두 사람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소녀에게 무엇인가가 되고 싶다. 소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쌀쌀한 바람만이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5

아침 일찍, 소녀에게 간단한 식사를 만들어주고, 나는 빨간 털장갑을 집어든다. 1년에 한 번, 어머니의 털장갑이 외출을 하는 날. 소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웃어주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인간의 미소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환하게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온다. 소녀에게 더 어떤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이 털장갑을 찾아준 소녀는 이제는 내게 있어서 털장갑 못지않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오랜만에 집을 찾는다. 아버지의 집. 사실은 어머니와 나와 아버지가 있었던 집. 그 후에는 나와 아버지가 15년을 함께 더 살았던 집. 그리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게 한다.

“어서 오거라.”

아버지의 인사. 집 안 가득 배어 있는 담배 냄새에 조금 인상을 찌푸린다. 아버지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큰 덩치에 남자다운 얼굴. 어린 시절의 나는 아버지가 곰처럼 생겼다며 무서워했다고 한다.

제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빨간 털장갑을 손에 꼭 쥐고,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워해본다. 하지만 어머니를 잃은 자식의 그리움과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편의 그리움. 어느 쪽이 더 큰 것일까? 어른이 되어 생각하는 것이지만 내 옆에 서 있는 이 덩치 큰 남자는 16년 동안 이 여자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아마, 하루도 잊어본 날이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 아이는, 왔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를 올려다본다.

“네. 음……. 그건 그렇고 전부터 궁금했는데, 아버지는 그 아이를 어떻게 알지요?”

아버지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이 남자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항상 호탕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아버지의 본 모습이라 생각하는 나는, 1년에 한 번, 아버지가 진지하고 조용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날이 왠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네가 그토록 내게 이야기했잖니. 하얀 머리 누나를 봤다고. 엄마만큼 예쁘고 마음씨가 착하다고. 15년 후에 꼭 만나러 올 거라고 말이다. 15년은 몇 번을 자야 오는 거냐고 네가 물었을 때 그거 계산하느라 죽는 줄 알았지.”

나는 웃으면서, 감동한다. 이 남자에게 이렇게 섬세한 부분도 있었던가. 아들이 언제 그 소녀를 만난 것인지,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주에 여행가요.”

“잘 다녀와라.”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는. 왜, 어디를, 어떻게 가느냐는 말은 한 마디도 묻지 않는다. 그것은 아들을 향한 신뢰의 표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였다. 자신의 아들이라면 어디를 가더라도 분명히 잘 하고 있을 것이라는 신뢰.

그 날의 아버지는 이상했다. 아버지는 무언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야기를 못해 아쉬운 사람처럼 말을 꺼내려다 주저하기를 반복했다. 술이라도 같이 마시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라고 생각하고 난 집을 나온다.

조금쯤 걷다 보니, 소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번화가가 나온다. 번화가 어디에든 소녀와 함께 했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소녀가 노래를 부르던 작은 공원. 이 교수와의 만남. 소녀와 걸었던 거리. 그 모든 것이 누군가 손을 대면 부스러질 것처럼 애처로운 기억들이었다. 언젠가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언젠가는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 되겠지.

문득 소녀와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녀는 바이칼호에 도착한다면, 그리고 바이칼호에서 구원의 돌을 찾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 나와 함께 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겠지. 예정된 이별. 그것이 내 가슴을 쓸쓸하게 했다. 적어도 사진 하나쯤은 찍어 두어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소녀와 내가 눈 위에 추억을 새기던 골목길로 나아간다.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쿠르릉- 하는 소리에 놀라 하늘을 본다. 하늘은, 어느 한 점을 중심으로 먹구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새카만 먹구름들이 무수히 점을 향해 달려드는 통에, 세상은 삽시간에 어둠에 휩싸이게 되었다. 세상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나는 하늘을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이건 자연 현상이 아니다. 저토록 새카만 먹구름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순식간에 먹구름이 모여 들어서 태양을 가린다니,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사람들도 이상한지 하늘을 한 번씩 본다.

아직 대낮인데 세상은 어두웠다. 그 때 내 머리에 눈을 닮은 소녀의 영상이 떠오른다.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소녀와 관계된 일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오니 유진이 있었다. 나는 유진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소녀를 찾는다. 소녀는 예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하지만 그 어느 때 보다도 슬픈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당했어.”

유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소녀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일단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슬픈 표정의 소녀, 심각한 표정의 유진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갑자기 하늘이 새카맣게…….”

유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거 무슨 결계 같아.”

“결계?”

“응. 오늘 아침에 테르펠이 왔었어. 우리 집에. 오늘 밤을 기대하라고 하더군. 그리고 도망가 버렸어. 불안한 느낌이 들어 주변을 둘러 봤더니 아주 수상해 보이는 녀석들이 종종 보였어. 도시 구석구석에. 아마 이 도시만 먹구름이 모여 있을 거야. 도시 전체에 결계를 친 거지. 우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나는 휴-하고 한숨을 쉰다.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겠다는 이야기겠지. 녀석들은 소녀를 바이칼로 보내줄 의향이 없는 것 같았다.

“일단 나로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일단 이 교수에게 전화를 해봐야겠지만, 배덕의 뭐시긴지 탐욕의 어쩌구인지도 왔을 거야. 녀석들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싸움을 걸어온 적은 없었거든. 아마 내가 혼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겠지. 만약 그들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면…….”

방법은 없다. 유진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진도 불안할 것이다. 지금껏 싸워왔던 수준의 녀석들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교수는 그들보다 상위에 탐욕의 장군이 있고, 그 보다 더 높은 곳에 배덕의 마녀가 있다고 했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했던가. 배덕의 마녀가 누구인지 몰랐다면 유진은 이렇게 불안에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나로서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조각의 수호자인 유진도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멜로디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자연 - 일반 (gon)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9-09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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