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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샤 님의 서재입니다.

눈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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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두샤
작품등록일 :
2008.09.08 02:28
최근연재일 :
2008.09.08 02:28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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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수 :
166,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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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07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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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8쪽

눈의 소리 - 4. 천호(天湖)로의 여정 (1)

DUMMY

2부 영롱한 그녀의 노래처럼


프롤로그


눈이 녹은 거리는 모처럼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자연은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그건 눈도 마찬가지여서, 눈은 소리 없이 내리고, 아름다운 경치를 선물한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녹아 없어져 버린다. 사람들은 보통은 눈이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눈에는 소리가 없기 때문이다.

편의점의 문이 열리고 젊고 잘생긴 젊은이가 들어온다. 젊은이는 미소를 지으며 카운터를 향한다. 아마도 아르바이트생인 모양이다.

“승우, 오늘이 마지막이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카운터의 남자가 인사를 마치자마자 말한다. 승우라고 불린 청년은 아쉬운 듯 미소 지으며, 그 동안 감사했다고, 짧게 인사한다. 친절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인 것 같았다.

편의점은 한산했다. 젊은이는 아무도 없는 편의점에서도 결코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리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마치 편의점 직원의 생명은 인사라고 여기기라도 하는 듯이.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편의점으로 몰려오기 시작한다. 젊은이가 계산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효율을 낼 수 없다. 승우라는 젊은이는 들어오는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고, 계산을 하면서도 미소 짓는 얼굴로 눈을 마주치면서 하고 있었다. 건실하고 착한 청년이라는 인상이었다. 손님들도 그것을 아는지, 오늘 마지막이라는 젊은이의 말에 아쉬워하며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인기가 좋을 법한 청년다운 모습이었다.

몰려오는 사람들이 포화 상태에 이를 무렵에 귀여운 인상의 아가씨가 들어온다. 잘 생기고 인기 좋은 젊은이가 반갑게 인사하지만 그 아가씨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일하기에 바쁘다.

일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둘은 아쉬운 듯이, 청년이 옷을 갈아입은 후에도 한 참 대화를 나눈다.

편의점에 한 남자가 들어온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괴팍한 인상의 남자. 아마도 손님은 아닌 듯,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젊은이에게 반갑게 인사한다. 둘이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또 다른 손님이 들어온다. 하지만 역시 손님은 아닌 것 같았다. 젊고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뭇 남정네의 눈길을 한 번에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 있는 여성이었다.

“드디어 떠나는 날이 되었군요.”

“네, 내일 오후 2시 비행기입니다. 승우군, 준비에 차질이 없어야 하네.”

“물론이죠.”

셋은 비행기 표와 좌석, 그리고 가져갈 준비물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단 승우라는 젊은이는 해외여행에 처음인 것 같았다. 한 참 대화를 나누던 그들이 잠시 침묵한다. 이야기는 모두 끝난 것 같았다.

“그럼…….”

젊은이가 운을 띄운다. 그리고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괴팍한 남자가 그 말을 받았다.

“우선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하세.”


1장 천호(天湖)로의 여정

1

-1월 27일, 정승우

15년 전, 눈을 닮은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내게 잊을 수 없는 도움을 주고, 하나의 약속을 남기고 사라졌다. 세월은 흘러 15년. 눈의 계절에 나는 겨우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눈을 닮은 소녀는 매우 상냥했고, 아주 아름다웠다. 하얀 머릿결, 그보다 더 하얀 피부, 올망졸망 귀여운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예언자였다. 이 세계는 버림받았고, 소녀는 그 버림받은 세계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 무언가 하기로 작정하고는 이 세계를 방문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15년 간 나이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라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상냥했기 때문에, 나는 조금씩 그녀를 믿게 되었다.

그녀는 내게, 바이칼호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 우리는 바이칼호로 떠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소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소녀가 묻힌 곳으로.


-같은 날, 서유진

승우의 표정을 잠깐 훔쳐본다. 녀석의 표정이 너무 애처롭게 보여서 조금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보지 않게.

각자 준비한 꽃을 꺼낸다. 놀랍게도 모두 하얀 안개꽃이다. 서로의 꽃을 확인하고 우리는 조금 웃는다. 그 아이가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으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소녀를 전송한다.

사실,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지금 침울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 승우일 것이다. 그 아이가 죽어……버린 나흘 전은 공교롭게도 승우 어머니의 기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5년 전에 처음 그 아이를 만난 날도 그 맘 때였던 것 같다. 승우는 이제 스물두 살이다. 아직은 어린 나이인데 충격이 얼마나 클 것인지.

그 날, 사실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상당히 많은 기척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힘을 소진한 탓에 지쳐버린 나는 잠시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회복되자 녀석들이 날 찾아냈다. 싸울 수도 있었고 도망갈 수도 있었다. 그 때, 탐욕의 장군이라는 녀석이 내게 말을 걸었다. 배덕의 마녀는 이미 소녀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고. 녀석들도 나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소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앞뒤 안 가리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가 엉망으로 당하고 말았다. 겨우 힘을 가다듬고 다시 싸우려고 했는데, 녀석이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참혹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뚝뚝 눈물을 흘려버렸다. 그 웃음의 의미는, 모든 상황이 종료 되었다는 의미였다. 녀석은 나를 한 번 돌아본 후에 부하들과 함께 떠났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희망을 품고 그 아이와 승우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신은 너무 무심하시다. 간절히 기도했건만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져야만 하는 것인지.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눈길 위에 그 아이는 조용히 쓰러져 있었다. 그 아이를 중심으로 새빨간 피가 눈 주위를 천천히 물들이고 있었다. 그 아이는 마지막으로 무언가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승우에게만 남긴 모양이다.

나는 충격으로 오열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내게 밀어 닥치고 있었다. 하지만 승우는 그 자리에서 돌이 되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승우의 그 상태는 이틀 동안 지속되었다. 승우는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따귀도 때려보고 윽박질러 보기도 하고, 그 아이가 죽을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녀석이라며 승우의 상처도 건드려 봤지만 승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런 승우를 다시 움직이게 만든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승우가 밝고 건강하고 싹싹한 타입의 미남(완전 내 스타일이다. 아, 저 녀석 나이만 좀 되면……)인데 아버지는 무척 남자다운 타입이라 조금 놀랐다. 아무튼 아버지의 말로 마음을 움직인 승우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상처를 이겨내기는 어려운 일이겠지.

승우는 그 아이가 쓴 책을 계속 읽고 있는 것 같다. 그 책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는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 아이와 같은 존재들은 꼭 필요한 사람, 역할이 있는 사람에게만 책을 전하며, 다른 사람이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교수의 말이지만 그 책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인지.

승우가 돌아선다. 아마 스스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결심을 한 것이리라. 마음속으로 승우를 응원하기로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승우의 역할은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한 일은 녀석이 귀엽게도, 웃어 주었다는 것이다.


-다시 정승우

손을 흔들며 두 사람에게 인사한다. 내일이면 나는 저들과 함께 한국을 떠나게 된다. 이 교수는 웃어 주었고, 유진은 내게 뭐라고 구박을 한다. 아마, 유진도 날 걱정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 유진의 고운 마음에 조금 감동한다. 겉으로는 틱틱 대면서도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여자다.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온다. 내 가슴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온다. 마치 내 명치 아래쪽에 쇠로된 고리 같은 것이 걸려 있고, 누군가가 그 고리에 달린 쇠사슬을 마구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 거리에는 온통 소녀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끔찍한 고통이다. 소녀와의 추억, 소녀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 내게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

소녀와 함께 걸었던 거리를, 혼자서 걷는다. 생각해보면 짧은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 나날은 내 인생의 그 어떤 장면보다도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집으로 들어와, 습관대로 인사를 한다. 이제는 받아줄 소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려다, 문 앞에 놓인 작고 귀여운 빨간 털장갑을 보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이 털장갑을 찾아 헤매던 어린 시절의 나. 그리고 그 장갑을 찾아 주었던, 눈을 닮은 소녀. 그녀는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송이 그 자체였다. 소리 없이 찾아와서 녹아 없어질 흔적만을 남기고,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오지 않았던 것처럼, 그 모든 나날이 한 나절의 꿈인 것처럼.

빨간 털장갑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다 결국 주저앉는다. 두렵다. 언젠가 소녀의 얼굴을 잊어버릴까 두렵다. 소녀의 목소리가 더 이상 귓가에 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렵다. 마치 어머니가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소녀가 어렴풋한 실루엣만 남기고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너무나도 두려워진다.

그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에페가 다가와서 아양을 떤다. 나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에페에게 비빈다. 폭신한 감촉. 소녀가 내게 남겨준 것은 너무나도 많다. 에페, 팔찌, 털장갑, 추억, 그리움, 그리고 소녀의 상냥한 마음.

소녀는 처음부터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쓸쓸했던 그녀의 얼굴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눈물을 흘린다. 마음껏 울어버리고 싶다. 오늘만큼은.

창밖으로 눈발이 소리 없이 흩날린다.


2

-1월 28일, 인천 국제공항, 이상근 교수

승우는 조금 늦게 왔다. 깔끔한 복장에, 가지고 온 짐에도 군더더기라고는 없었다. 사실 승우가 바이칼호로 떠나는 이 여정에 함께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진씨의 계속된 다그침에도 반응조차 없던 승우. 아마 상당한 정신적 타격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슬퍼했다. 우리는 모두 그 여자 아이에게 한 번쯤 신세를 진 사람들이니까.

중국을 거쳐 시베리아로 향한다고 하니, 혜연이는 난색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식년도 아닌데 갑자기 여행이라니 놀랄 만도 할 것이다. 사랑하는, 유일한 가족은 모두 이 여행을 반대했다. 나도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이 싸움의, 이 여행의 희생자는 그 여자 아이 하나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이다.

조각의 수호자들이 지닌 힘은 대단하다. 그 모두가 모인다면 정말 볼만하겠지. 총력전을 벌인다면 중국에서 일어날 것이다. 아직 수호자가 4명일 때 최대한의 힘으로 몰아붙인다. 그것이 가장 좋은 작전이다. 그 와중에 희생자는,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승우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가.

대견하게도 승우는 내 옆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 그 여자 아이가 남긴 책이다. 그 여자 아이의 존재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 여자 아이가 아주 고귀한 혈통의 사람이며, 사실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뿐이다. 이름을 듣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행히 암흑의 비밀 기록의 저자는 위쪽 세계의 사람들의 이야기도 언급했으니 유명한 혈통이라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가 날아오른다. 이 비행기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류의 희망을 담은 비행기다. 우리의 여행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학자인 내게, 이 여행은 인생 최대의 경험이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 비록 이 일들을 평생이 걸려 연구해도 논리적으로 증명하지 못할 난제라 하더라도, 진실은 어차피 논리 이상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유진이 이쪽을 보고 눈으로 인사를 한다. 아름다운 아가씨. 승우보다도 더 많은 눈물을 흘렸을 아가씨다.

나는 유진에게 살짝 귀띔을 해줬다. 이번 여정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에페가 아니면 승우일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그 여자 아이가 굳이 승우를 찾았을 리가 없다. 열쇠는 추상적인 단어. 에페가 아니라면 승우다. 나는 그것을 확신하며 차창으로 눈을 돌렸다. 아직, 하늘은 푸르다.


-같은 날, 베이징 국제공항, 서유진

공항에 도착하니 중국의 탁한 공기가 괴롭힌다. 조금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이옌을 보니 반가움에 그런 생각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옌은 나머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움베르트씨와 함께 먼저 이르크츠크에 가서 기다린다고 하더군요.”

이옌은 조용히, 하지만 침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이야기를 전화기 너머로 들은 이옌은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투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쉽게 받아들이긴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 아이에게 한 번은 도움을 받았던, 그리고 그 도움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반가운 얼굴과 재회한다. 도미니크와 레이지.

“인사해요. 이쪽은 도미니크. 프랑스인이고 조각의 수호자. 그리고 이쪽은 레이지. 미국인이고 마찬가지로 조각의 수호자에요.”

나는 승우와 이 교수에게 간단한 인사를 시킨다. 15년 전의 주근깨 소녀는 사라지고, 지금은 세련된 프랑스 여자가 되어버린 도미니크. 본래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많이 부드럽게 변한 것 같았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과묵한 레이지. 이 교수와 승우는 거대한 몸집의 흑인 앞에서 조금 주눅이 든 것 같았다. 레이지의 몸집은 여전히 거대했다. 등에 매고 다니던 것은 두고 온 것 같았지만, 안 어울리는 선글라스도 여전했다. 여전히 그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레이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15년이 흘렀어도…….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자, 우리는 자연히 그 아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아이가 죽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런 분위기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지, 도미니크가 애써 활달히 웃으며 식사를 하러 가자고 한다.

“힘들었지? 혼자서.”

짐을 내리러 호텔로 가는 길에 미안하다는 얼굴을 한 도미니크가 그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그 말에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니 긴장이 풀어짐을 느낀다. 한국에서 그 아이와 재회한 이후로는 하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혼자서 그 많은 적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절박감.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 그 아이도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승우가 레이지의 팔을 보고는 내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레이지는 왼팔이 없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는 만큼만 설명해 주었다. 레이지는 사실 직업 군인이었다. 그 때에도 우람한 근육과 과묵함으로 누구에게나 신뢰를 주는 상관이었는데, 사고로 왼팔을 잃었다고 했다. 그 시절에 레이지는 군에서 나와 거리를 방황했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건강한 체격을 지닌 사람이 외팔이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리라. 그는 점점 불량한 길을 찾아 들어가기 시작했고, 바로 그 시점에 그 아이를 만났다고 한다.

함께 식사를 하며 도미니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프랑스인 특유의 억양을 한국어에 접목시키면 굉장히 활달한 느낌이 난다. 게다가 도미니크의 이야기는 대개 재미있는 것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미니크는 집시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잘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옌도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이 교수도 즐거워 보였다. 승우는 요즘 들어 아주 차분해진 느낌이다. 레이지는 역시 과묵했다.

일단은 모두 쉬기로 했다. 오늘은 여기에서 쉬고, 내일은 이르크츠크로 향한다.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이르크츠크로 직행하는 노선을 택할 예정인 것 같다.

자꾸만 승우가 신경 쓰인다. 녀석, 괜찮은 걸까? 나는 “에라, 모르겠다.”하며 침대 위로 쓰러진다.


28일 저녁 - 정승우

다시 소녀의 책을 펼친다.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끼지만, 이제는 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소녀의 책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동글동글한 한글로 적혀진 귀여운 책이었다. 소녀는 한글을 열심히 연습한 모양인지, 제법 글씨가 균형이 잡혀 있다. 내용은 소녀의 예언이 조금 담겨져 있고, 이 세계에 남기는 일종의 당부와 진실, 그리고 노래가사가 대부분이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그게 이 세상의 법칙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은 그것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무한히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 하지만 그걸 위해서는 무한히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내가 예언하는 미래의 모습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가변하는 미래다. 하지만 예정된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의 운명과 맞바꿀 수 있는 가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은 그리 값진 것은 아니다. 이 세계에서 값진 것은 항상 그보다 못한 평가를 받는다…….

나는 가만히 책을 덮고 생각해본다. 그녀가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 그것은 자신의 생명이었을까.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 날의 일을 떠올린다. 생각하기 싫은 일이지만 소녀가 받아들인 운명. 희미한 그날의 기억은 점차 선명하게 바뀌고, 이내 생생한 울림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3

운명을 뒤바꾼 날

소녀의 기도가 중간에 멎어 버렸다. 내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배덕의 마녀를 저항할 수 있는 의지도 없었다. 내게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소녀를 구하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눈을 질끈 감는 것조차도……. 나는 그저, 가만히 선 채로 배덕의 마녀가 소녀를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배덕의 마녀의 손이 소녀의 가슴을 관통한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장면을 지켜본다. 마녀의 손이 거두어지고 소녀는 소복이 쌓인 눈 위로 힘없이 쓰러진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그저 그 장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녀는 잠시 소녀를 내려 보고는 사라진다. 가뿐히. 마치 원래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이제 움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있던 소녀가 몸을 움찔거리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나는 소녀에게 달려간다.

하얀 눈 위로 소녀의 선홍색 피가 배어간다. 눈처럼 하얀 소녀의 얼굴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을 터인데, 소녀의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진다. 눈물. 소녀의 저 티 없이 맑은 얼굴에 내 눈물을 흘리다니, 나는 미안한 마음에 소녀의 얼굴에 묻은 내 눈물을 손가락으로 지워준다.

“에페, 에페…를 데리고 바…이칼에…….”

나는 알았다고 계속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는 숨을 거의 쉬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내 가슴이 빛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주머니 속에서 에페가 빛을 내고 있다. 필사적으로 빛을 내는 듯, 에페의 표정이 사뭇 열심이다. 에페에 의해, 소녀는 더 말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약…속, 지키는 거야.”

소녀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결국 소녀를 지킬 수 없었다는 생각만이 가슴 속에 메아리친다. 말을 하고 싶다. 힘을 내라고. 하지만 나는 입만 달싹거릴 뿐 소리를 내지 못한다. 슬픔이 차올라 목을 죄고 있는 느낌이다.

“안…되는 줄…알면서도…….”

소녀의 호흡이 갑자기 가빠지기 시작한다. 나는 불현듯 불안감을 느낀다. 더 말하지 마. 가만히 있어줘. 하지만 나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끄윽 끄윽 하는 신음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다. 소녀는 무척 힘에 겨운 듯, 얼굴을 찌푸린다.

“떨어지는…해를……, 붙잡아 세워두고……싶었어.”

그걸로 끝이었다.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축 늘어진다. 소리 없이,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유진이 도착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못한 놈이 나라고, 철저하게 스스로를 자책했다. 유진은 내게 심하게 굴었다. 말없이 나를 위로했던 이 교수와는 달리 나를 닦달하고, 내게 심한 소리를 퍼부었다. 나는 오히려 이 교수만큼이나 유진이 고마웠다. 상냥한 마음. 무서운 얼굴로 내게 심한 소리를 하지만 돌아서면 눈물을 흘릴 여자가 유진이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깊이 박힌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왔다. 아마 성진이 연락한 것이겠지. 아버지는 조용히 옆에 앉아서 담배를 물었다.

“많이 괴롭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멍한 상태라서,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소녀를 지킬 수 없었다는 죄책감. 반드시 지켜주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소녀의 죽음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충격. 그 모든 것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멋대로들 해라. 대신 나를 내버려둬. 나는 쓰레기만도 못한 놈이야. 나는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고 있었다.

“일어나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음을 느꼈다. 조용한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일어난다. 하지만 앙탈은 부린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의미 없이 모두에게 저항을 해본다.

짜악-하고 큰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귀 속이 전기가 흐르듯 울리고 있었다. 따귀. 아버지에게 맞아본 일이 있었던가? 아버지는 그 우람한 팔을 용서 없이 휘둘렀고, 나는 놀라움과 뺨이 타는 듯, 아찔한 고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고 있었다. 분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엄한, 하지만 왠지 모르게 침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자는 그렇게 한참을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 엄마가 말이다.”

나직한 음성. 어머니의 이야기에 정신을 차린다. 아버지는 다시 말을 이어간다.

“네 엄마를 내게서 빼앗아간 놈은 병이라는 놈이었지. 나는 말이야, 대학 시절부터 복싱을 했었다. 다른 이유는 없어. 단지 적어도 남자라면 밤길에 자기 여자쯤은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인왕전에도 나갔지.”

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나는 왠지 그 눈빛을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훈련했다. 단련된 근육은 내 자랑이었지. 하지만, 네 엄마가 떠나는 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다. 내 팔뚝은 어디에도 쓸 데가 없었어. 네 엄마는 괴로워했지만 나는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 생애에서 그렇게까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단순하게 생각하고 호탕하게 지내는 줄 알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렇게 인간적으로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말. 그 말이 내 가슴 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다 때려 부수고 싶었단다. 일단 내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던 의사가 죽도록 밉더구나. 하지만 그보다, 내 아내가 그렇게 아픈데도 그걸 모르고 지냈던 내 무신경은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자살하고 싶었다.”

나는 잠자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에 거짓은 없다. 같은 종류의 아픔이라는 것일까, 나는 아버지의 그 때의 심정을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잠시 멈춘 후에, 다시 말을 잇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지금 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네 엄마랑 한 약속이 생각나더구나.”

나는 아버지를 빤히 바라본다. 아버지는 얼굴에 조금 미소를 지었다.

“바로 너. 우리가 만든, 우리가 사랑했다는 증거인 너를 끝내 자랑스러운 아들로 키우리라는 약속 말이다. 그 약속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한 인상, 투박해 보이는 말투, 마초이즘을 연상시키는 근육질의 중년.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이렇게 섬세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요즘 들어 아버지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는 게 그리 유별나지는 않더구나. 때로는 아플 일도 많지만 말이다. 남겨진 사람이 떠난 사람의 옷깃을 잡고 매달리면, 그 사람은 편하게 가지도 못하는 법이다. 그보다는 떠난 사람이 미처 살지 못했던 생을 짊어지는 것이, 진정 떠난 사람을 생각하는 길이란다.”

나는 새삼 가만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조금 쑥스러운지 고개를 돌려 버린다. 나는 모멸감에 차 있었다. 모멸감이라는 먹이를 문 사람은 그 모멸감을 놓을 수 있어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알게 된 것이다. 그건 모멸감에 파묻혀 현실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 것, 말하자면 어릴 때 보던 공포영화가 무서워 이불속에 얼굴을 파묻는 것과 같은 행위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때로는 공포영화라 할지라도 숨지 않고 볼 것을 강요한다. 심장은 덜컹 덜컹 내려앉아도, 우리는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바이칼호로 떠나는 비행기를 탈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4

-28일 저녁, 프레아 호텔, 정승우

소녀의 글을 어느 정도 읽고 있을 때였다. 똑똑 하는 노크소리, 나는 대답하며 문을 열어준다.

“책은 다 읽었어?”

유진이었다. 겉으로는 냉정하게 대하지만 사실은 따뜻한 사람. 날 혼자 두기에는 걱정이 되어 찾아온 거겠지. 나는 미소를 지어준다.

“잘 읽히지가 않아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한다. 유진은 조금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

유진의 청을 나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유진은 한국에 있을 때처럼 멋을 부리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간단한 차림이라고는 해도 워낙에 미인이었기에, 빛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굳이 치장을 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밤이 깊어 있었다. 길에는 듬성듬성 사람들도 보인다. 중국에서 바라본 하늘은 왠지 낯설었다.

“힘드니?”

“괜찮아요, 이젠.”

유진은 근처에서 사온 캔 맥주의 뚜껑을 젖힌다. 딸칵-하는 시원한 소리. 유진은 한 잔 들이키고는 가만히 하늘을 응시한다. 그녀의 눈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건, 그녀의 눈망울이 아름다워서일까, 아니면 글썽인 것일까?

“내 아버지는 미친 인간이었어.”

유진은 뜬금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숙연해진 유진의 분위기에 말을 멈춘다. 가만히 하늘을 응시하는 유진. 마냥 하늘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짓는다.

“너무 감상적이니?”

“아뇨. 들을게요.”

“별 이야기는 아니야.”

유진이 별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에서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진의 이야기가 아무 것도 아닐 리가 없다는 건, 느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소아성애자라고, 알아?”

나는 조용히 끄덕였다. 소아성애자. 어린 여자아이들을 성적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 실제로 로리타 컴플렉스라는 말은 아주 유명하다.

“아버지는 소아성애자였어. 죽일 놈이었지. 내가 어렸을 때, 갓 중학생이 된 아이들을 실제로 집으로 데려와서 그 짓을 했으니까. 아마 그런 부류들은 나름의 원조교제 루트가 있는 것 같아. 그 인간은,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성관계를 맺었어. 소녀들의 입에서 비명이 나올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아니 남성 그 자체를 혐오하게 되었지.”

그런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버지였다니,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처음으로 느끼는 유진의 아픔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없거든, 날 낳으면서 돌아가셨어. 그러니 그 남자가 마음껏 집에서 변태 짓을 할 수 있었지. 그런데…….”

유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유진의 표정을 살핀다. 유진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표정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난 어렸을 때부터, 성장이 빠른 편이었어. 아직 12살이었지만, 중학생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었지. 난 그저 평범한 아이였어. 그런데, 어느 날 그 놈이 나를 불렀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가갔지.”

유진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유진을 보며 내 마음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저 유진을 당당하고 멋진 여성, 조금 성격이 빗나가는 자신감 넘치는 여성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유진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며, 나는 애처로움을 느꼈다.

“당해……버렸어. 그 새끼한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설픈 반응이나 위로가 이럴 때에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실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의 과거, 그 거대한 아픔에 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저,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던 유진은 애써 말을 이어간다.

“난 너무 무서웠어. 아픈 건 그 다음이었지. 더 이상 아버지와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버지가, 그 놈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밖으로 나왔지. 울면서 길을 내달렸어. 머리가 헝클어져 있는 것도 몰랐고, 다리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줄도 몰랐지. 그 때, 어떤 소녀가 말을 걸어왔어.”

유진의 표정이 조금 나아지고 있었다. 유진은 소녀의 말투를 조금 흉내 낸다.

“이리 와. 많이 아프니? 내가 노래를 불러줄게.”

유진의 말에서, 나는 소녀의 영상을 겹쳐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지. 근데 어린 내가 보기에 그 아이의 생김새는, 그리고 마음씨는 말 그대로 천사였어. 천사가 내게 다가와서, 날 위로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

“알아요.”

나는 그 부분에서만큼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문득 빨간 털장갑을 잃어버린 날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천사. 그녀는 천사보다도 더욱 천사 같은 소녀였다.

“그래. 그리고는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해주었지. 그 아이의 마음이 너무 따뜻했어. 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어. 그래서 그 아이와 여행을 시작했어. 그리고 조각을 받게 되었지. 내게 이 조각은 그 아이가 준 최대의 선물이야.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으니까.”

난 유진을 보며 웃어주었다. 유진도 가만히 웃고 있었다. 유진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당장이라도 잊고 싶은 추악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애써 기억해낸 것이다. 그건, 날 걱정해서겠지. 누구에게도 하기 싫고,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그런 어려운 이야기를 굳이 나를 위해서 해주는 유진의 상냥함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유진이 무척 애처롭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유진에게 별 상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누구라도 상처는 있다. 누구라도 아픔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의도는 하나도 없이,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녀를 포옹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였다.

쿠웅-하고 지면이 울리는 느낌을 받는다. 지진인가? 나와 유진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땅은 분명히 울렸지만 주변에 지진의 흔적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이번에는 와장창-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프레아 호텔을 바라본다. 14층의 유리가 깨져 있었다. 14층, 레이지와 도미니크가 묶고 있는 층이었다.

“유진 누님!”

나는 유진을 바라본다. 유진은 내 이야기를 채 듣기도 전에 이미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에는 신세 좀 졌었지? 갚아주러 왔다.”

소리가 난 곳은 하늘이었다. 급히 위를 올려다 본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분명 테르펠과 아르펠, 그리고 그들의 동료로 보이는 넷이 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지만 입고 웃통은 벗은 채였고, 등 뒤에는 검은색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테르펠과 아르펠의 얼굴은 많이 변해 있었다. 다른 넷도 마찬가지겠지만, 얼굴이 마치 야수처럼, 아니 악마처럼 변해 있었다. 눈이 쫙 찢어져 올라가고 송곳니가 날카롭게 자라 있었으며 이마에는 양방향으로 뿔이 자라 있었다. 악마도 천사도 아닌,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상상 이상의 불길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었네. 이옌들을 만나고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어.”

한숨짓듯 말한 유진이 그들을 응시하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그들은 천천히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우리를 순식간에 포위하는 형태가 되었다. 나는 에페를 꼭 껴안는다. 그리고

유진의 귀걸이에서 노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5

28일 저녁, 프레아 호텔 14층, 이상근 교수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와 보니, 이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싸우고 있는 것은 이옌과 도미니크. 레이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소녀는 여기 중국에서 동료를 만나 바이칼호로 가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내 역할을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난 이미 알아버렸다. 저들의 의도도, 그리고 열쇠의 존재도. 내 역할은 열쇠를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 열쇠로 구원의 돌, 에피릴의 봉인을 푸는 것.

적들은 날개 달린 천사였다. 천사? 악마에 가까운 모습이기는 했다. 기괴한 모습. 분명히 길 잃은 메시아가 표현했던 배덕의 군세, 그 엘리트 병사들의 모습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저항도 하지 못할 것이 뻔한,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들. 게다가 그들은 모두 본래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 인간을 가장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들은 접근전을 선호하는 것 같다. 물론 원거리에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우선 전황을 파악해 본다. 적의 숫자는 총 8개체. 그중 여섯은 접근전을 시도하고 있고, 나머지 둘은 복도 끝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복도의 한 가운데에는 이옌과 도미니크가 있었고 배덕의 군세는 네 명씩 나뉘어 있었다. 각각 셋은 다가오고 나머지 하나는 조금 떨어져 있는 식이었다.

적들이 어느 정도 다가왔을 때 복도 한 가운데서 두 개의 빛이 사방으로 뿜어나간다. 파란색과 연두색의 빛. 이옌과 도미니크가 들고 나온 가방에서 빛나고 있다. 저것이 이옌과 도미니크가 지닌 구원의 조각인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피릴의 파편이다. 그 두 개의 파편은 서로 공명하고 있었다.

에피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소녀에게서 받은 책과 길 잃은 메시아가 적은 책을 조금 해석해 보면 에피릴은 보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보석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보석을 깎을 때 나온 파편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관례인 것 같다. 에피릴의 파편으로 만든 것은 에피릴을 받친다고 한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에피릴의 파편만 지니고도 지금 이옌과 도미니크가 보이고 있는 저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유 있는 싸움으로 보였다. 도미니크가 손을 마주잡고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복도에 엄청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나와 이옌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적들을 다가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일정한 범위에 바람으로 벽을 둘러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날개달린 적들은 더 이상 다가오질 못하고 낑낑대고 있었다.

공격을 시작한 것은 이옌이었다. 이옌은 독특하게도 활을 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그 자세를 제법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자세를 따라 푸른색의 기운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옌은 그 푸른색의 기운을 정면의 셋을 향해 날린다.

그리 큰 빛으로 보이지 않던 푸른색의 기운은 번쩍 하고 빛나는 섬광이 되어 복도를 가로지른다.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인지,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그 빛을 정통으로 받아낸 두 명의 배덕의 군세는 벽에 처박혀서 움직임이 없다. 살짝 빗겨 맞은 것 같은 한 녀석은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녀석도 충격이 상당한지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옌은 재차 같은 자세를 취한다. 이번에는 반대편이다. 이옌과 도미니크의 콤비네이션은 훌륭했다. 도미니크는 방어에 치중하고 이옌은 큰 한방을 날린다. 적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다.

그 때, 복도 저 끝에 서 있던 녀석이 어둠을 불러내기 시작한다. 녀석의 몸에 감돌던 시커먼 기운이 점차 길쭉한 형태로 모여들고 있었다. 어두운 기운이 모이면 모일수록 믿기 힘들 정도로 새까만 창 같은 형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계속 기운을 집중하던 녀석이, 그 창 같은 것을 한 손으로 움켜쥔다. 그리고는 투창을 하듯이, 온몸의 탄력을 이용해서 도미니크를 향해 날린다. 그 창 같은 것은 한줄기 어둠이 되어 복도를 관통하기 시작한다.

“꺅!”

도미니크는 다급히 소리를 치며 몸을 비튼다. 하마터면 그 어둠의 창을 직격으로 맞을 뻔 했다. 정신을 집중하던 도미니크는 눈을 크게 뜬다. 그와 동시에 복도에 벽을 치고 있던 바람이 사라져버린다.

아직 멀쩡한 셋이 도미니크를 향해 달려든다. 아직 이옌은 발사를 머뭇거리고 있었다. 창을 날렸던 녀석은 다시 한 번 기운을 집중하고 있었다. 도미니크가 만들어낸 벽이 사라지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도미니크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선, 달려드는 세 놈을 향해 두 손을 내민다. 그러자 도미니크의 몸에서 돌풍이 일어나 달려오는 세 놈을 날려버린다. 비록 큰 위력은 없는 것 같았지만 녀석들은 그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한참을 날려가야 했다. 그리고 그 동작을 마치자마자 도미니크는 뒤쪽의, 창을 날렸던 녀석을 향해 손을 크게 휘두른다.

그것은 흡사 바람으로 만들어낸 칼날과도 같았다. 창을 거의 완성하고 있던 녀석의 오른팔이 쩌억 하고 갈라지더니 푸른색 피가 쫙 튀었다. 녀석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끔찍한 비명이었다.

그 때, 이옌이 모아둔 파란 기운을 그들을 향해 날린다. 조금 전보다 훨씬 큰 화력이었다. 돌풍에 밀려 날아가던 녀석들은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거대한 빛에 휘감긴다.

승부는 거의 난 것 같았다. 조각의 힘을 어느 정도 개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미니크와 이옌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이옌의 공격에서 겨우 피해를 적게 받은 녀석은 한 녀석이었고, 나머지는 죽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그 때, 도미니크의 뒤에 돌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다. 도미니크는 황급히 돌아서며 팔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 팔은 녀석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녀석은 입을 쭉 찢으며 웃는다.

녀석이 팔을 움직인다. 전에 유진은 이야기했었다. 몸에 조각의 힘을 흐르게 하는 타입이 있는 반면에 힘을 다른 방식으로 운용하는 타입이 있다고, 그리고 수비형의 조각을 사용하는 수호자도 있다고 말이다. 아마 도미니크는 수비 전문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몸은 일반적인 여성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 않을까? 평범한, 연약한 여성이 저런 괴물에게 얻어맞는다면?

이옌이 달려들지만, 거리가 있다. 그 때, 뒤에서 나타난 거대한 손이 녀석의 머리를 움켜쥔다. 그 손아귀의 힘이 엄청난지 녀석은 애처롭게 비명을 지른다.

거대한 몸집에 무표정한 얼굴, 외팔이 수호자 레이지였다. 레이지는 녀석의 머리를 잡은 채로 녀석을 가뿐히 들어, 벽으로 처박는다. 그리고 등에 매고 있던 커다란 몽둥이 같은 것을 잡아든다. 가만히 보면 그건 몽둥이 같이 생겼지만, 어느 정도 날은 세워져 있었다. 넓적한 칼 같은 무기였다. 레이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녀석을 향해 그 거대한 칼을 우악스럽게 휘두른다. 녀석은 벽과 함께 베어졌다. 아니, 그렇기 보다는 그 힘에 완전히 찌그러진 것이다.

레이지는 압도적으로 강했다. 도미니크가 생긋 웃어보이자 레이지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짧게 한 마디 한다.

“유진에게 가겠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도미니크는 녀석에게 잡혔던 손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단순히 잡힌 것뿐이었지만 부상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이옌이 잠깐 도미니크를 바라본다. 그 때, 이옌이 처음 푸른 화살을 쏜 쪽 복도 끝에 있던 녀석이, 반대편 녀석이 만들어낸 어둠의 창과 흡사한 것을 이미 완성하고 있었다. 그 녀석은 분한 듯이 걸어 나가고 있는 레이지를 향해 온몸을 이용해서 던져 버렸다.

한 줄기 어둠이 좁은 복도를 순식간에 통과한다. 레이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이 레이지의 어깨를 직격한다.

“아앗!”

도미니크와 이옌이 놀라 레이지를 바라본다. 하지만 레이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깨가 조금 다친 듯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지만 별로 타격은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레이지는 잠깐 자신을 향해 창을 날린 녀석을 힐끗 보고는 그대로 다시 걸어가 버렸다.

창을 날린 녀석은 입을 벌리고 가만히 레이지가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은 적은 셋, 그 중에 데미지를 입지 않은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도미니크와 이옌은 마무리를 하기 위해 다시 자리를 잡는다. 14층 복도의 상황은 거의 종료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베이징 시가지, 정승우

유진이 언제가 이야기 했었다. 조각의 수호자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닌 것은 유진이라고.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여섯이 모여 있다면 나머지 여덟이 조각의 수호자 셋을 상대하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유진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유진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나는 유진을 보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녀석들에게 나는 안중에도 없는 상대다. 나는 그들에게는 그저 길을 걸어가는 개미와 다를 바가 없다. 날 죽일 이유도 없고 괜히 내게 신경 쓸 이유도 없다. 조금은 화가 났지만, 어차피 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유진도 그것을 아는지 조금 앞으로 향한다. 유진의 귀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상당히 강한 압력이었다. 물론 전에 봤던 최대 출력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엄청난 위력임은 알 수 있었다. 적절히 시간 안배를 할 수 있도록, 체력 소모가 심하지 않은 정도에서 최대한의 힘을 끌어낸 것이겠지.

유진의 전투를 몇 번 보아서인지, 이제 나는 힘의 차이를 제법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모두 악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압력을 발하는 것은 올백머리 테르펠이었다. 군계일학이라 말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아르펠도 그 중에서는 강한 축에 속하고 있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인지 그들이 내는 힘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레 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끔찍하게 싫은 느낌.

녀석들도 쉽게 유진에게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진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유진은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고 편하게 서서 녀석들의 움직임으로 눈으로 쫓고 있었다.

그 때, 테르펠이 눈을 크게 뜬다. 그 순간 내 바로 앞의 바닥이 폭발하듯 튀어 오른다. 유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퍼억-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난 곳을 보니, 유진이 이미 한 녀석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녀석은 날아가다가 공중에서 겨우 멈춰 선다.

그 공방을 시작으로 숨 가쁜 격투가 시작되었다. 테르펠은 계속 원거리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공격을 했다. 몸에 힘을 집중하는 듯 잠시 몸을 떨었다가 유진을 노려보면 유진이 서 있던 자리가 큰 소리와 함께 부서져 버린다. 하지만 유진은 그것을 모조리 피하고 있었다.

아르펠을 비롯한 넷은 유진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유진은 타고난 격투 센스가 있는 모양이었다. 현란한 움직임으로 그 공격들을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다. 쉴 새 없이 펀치와 킥이 난무하고, 테르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 어디에선가 날아오지만 유진은 그 모든 것을 피해낸다. 그리고는 한방씩 공격을 성공시킨다. 맞은 녀석들은 잠깐 몸을 움츠린다.

수적 열세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 상황은 유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르펠이 호쾌한 발차기를 날리지만 유진은 가볍게 피한다. 그리고 왼쪽 녀석에게 일격을 성공시켜, 녀석이 무릎을 꿇는다. 동시에 오른쪽 녀석이 펀치를 날리지만 유진은 몸을 휘둘러 그것까지 피해내고 회전하는 동시에 팔을 휘둘러 녀석을 떼어낸다. 그 때, 뒤에서 다가온 녀석이 유진을 그대로 뒤에서부터 끌어안는다. 위기였다. 녀석이 뒤에서 꽉 끌어안자, 유진은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때를 노리고 아르펠이 달려든다. 그리고 테르펠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답답한 심정으로 유진의 표정을 살피던 나는 유진이 조금 미소 지었다고 생각했다. 유진의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발차기로 달려드는 아르펠의 턱을 가격한다. 그리고 그 동작 그대로 유진은 뒤에서 잡고 있던 녀석의 위를 빙글 돌아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넘어가자마자 유진은 녀석을 앞으로 살짝 차버린다. 테르펠의 공격은 유진이 있던 자리로 향했고, 그 자리에는 유진과 위치가 바뀐 한 녀석이 있었다.

“끄악!”

녀석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한 녀석이 쓰러졌다. 하지만 유진은 적들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곧바로 아르펠에게 달려들어 연타를 가한다. 아르펠은 정신없이 얻어맞고 있었다. 유진의 스피드는 아르펠을 아득히 앞서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두 녀석이 다시 유진에게 달려든다. 유진은 아르펠에게 가하던 공격을 멈추고 둘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아르펠은 타격이 큰 듯 한쪽 무릎을 꿇고 푸른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때, 아까 유진의 일격을 처음으로 맞고 날아간 녀석이 기합을 질렀다. 놀랍게도 녀석의 주위에는 새까만 공 같은 것이 무수히 떠 있었다. 그 새까만 공 같은 것은 녀석의 주위를 돌고 있었다. 유진도 녀석을 한 번 보고는 표정이 바뀐다. 하지만 녀석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두 녀석의 펀치와 킥이 계속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진과 공격을 주고받던 녀석들이 갑자기 유진의 거리로부터 빠져나간다. 그리고 이미 유진의 머리 위에는, 엄청난 수의 검은 구체들이 넓은 범위에 비가 내리듯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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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소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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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눈의 소리 - 5. 약속의 호수 (완결) +2 08.09.08 615 2 48쪽
8 눈의 소리 - 5. 약속의 호수 (1) 08.09.08 360 2 49쪽
7 눈의 소리 - 4. 천호(天湖)로의 여정 (2) 08.09.08 355 2 28쪽
» 눈의 소리 - 4. 천호(天湖)로의 여정 (1) 08.09.07 333 2 48쪽
5 눈의 소리 - 3. 외로운 천사의 비가(悲歌) (2) 08.09.07 219 2 32쪽
4 눈의 소리 - 3. 외로운 천사의 비가(悲歌) (1) 08.09.07 451 2 38쪽
3 눈의 소리 - 2. 무너진 세계를 위한 랩소디 +1 08.09.06 505 2 58쪽
2 눈의 소리 - 1. 소녀의 방문 (2) +1 08.09.06 217 2 17쪽
1 눈의 소리 - 1. 소녀의 방문 (1) +1 08.09.06 883 5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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