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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샤 님의 서재입니다.

눈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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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두샤
작품등록일 :
2008.09.08 02:28
최근연재일 :
2008.09.08 02:28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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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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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06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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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1쪽

눈의 소리 - 1. 소녀의 방문 (1)

DUMMY

눈의 소리

1부 눈을 닮은 소녀

프롤로그


얼마나 지독한 소음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일까? 분명 물속에도 소리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물속의 소리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정적.

처음에는 무섭기도 했다. 한 없이 깊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무서움을 느끼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다. 먼저 심장이 덜컹하며 내려앉고 팔과 다리, 손가락과 발가락, 온 몸의 털들까지 본능적으로 움직이려 발버둥 치게 된다.

시간이 지나자 물을 향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아늑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속인데도 부자유스럽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한없는 고요함과 따뜻함, 그리고 포근함 같은 것이 날 감싸고 있었다. 그리운 느낌. 엄마의 느낌이었다.

끝은 보이지 않았다. 빛도 비추지 않았다. 어디가 수면이고 어디가 수저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숨을 얼마나 참았는지 센 것은 10초 정도일까. 이제는 얼마만큼 숨을 참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머리가 띵하고 현기증이 날 것만 같은, 곧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들뿐이었다.

‘미안해.’

입을 오물거려 그렇게 말해 본다. 그녀에게 어떻게 해서든 사죄하고 싶다. 내 몸은 완전히 힘을 잃었고, 축 늘어진 나는 물살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더 심해지기 전에.

‘미안해.’

필사적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약속을 지킬 수 없었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것은 최후의 발악이었으나, 어차피 패착이었다. 입을 오물거리느라 무리한 탓에, 기도가 열려버린 것이다. 잔뜩 공기에 굶주려 있던 나의 폐는 분별력을 잃고 미친 듯이 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물에 빠져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최후와 무척 가까운 상황이라는 걸.

‘난 어리석은 사람이라, 이런 것 밖에는 몰랐어. 사실은 아직도 모르겠어.’

아마 내 눈은 충혈 되었을 것이다. 뜨거운 것이 눈자위에 몰려 있었으니까.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고통 때문이기도 했다. 폐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 키고 있었고, 그 때마다 아찔한 절망감이 심장을 엄습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빨아들인 폐는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다. 머리가 온통 혼탁해지고 있다. 어서, 속죄라도 하지 않으면.

‘여기까지 와서, 너를 믿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게 내가 생각한 최선이야. 미안…….’

더는, 발악적으로 입을 오물거릴 의식도 남아 있지 않다. 몸이 발작하듯 움찔거리고 있다.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의식의 끈을 놓아 버리는 것. 그것으로 마지막.

- …… 알고 있어……언젠가는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익숙한 멜로디가 들린다. 난, 나도 모르게 웃고 있다. 그리운 노래. 저 그리운 소리.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마치 다 쓴 전구처럼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의식, 그 순간 순간에 나는 분명 그리운 목소리를 듣고 있다.

1장 소녀의 방문

1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심한 면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무감각하기 그지없는 당신의 전화였기에 조금 놀랐다. 그러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 아닌지 하는 나의 걱정은 기우가 되어 버렸다.

“50만원 있으면 좀 보내봐라.”

라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아버지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알바 때문에 바빠서-”라고 얼버무리며 끊어버렸다. 경제 능력이 있는 남자끼리니 서로 의지하자는 것인지는 몰라도, 사실 아버지가 지닌 경제력으로도 빌리지 않고는 감당이 안 될 정도의 돈이 필요한 일은 드물었다. 우리나라의 경우겠지만 사실 간단한 아르바이트만 해도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은 따르지 않는다. 많은 돈을 벌지 못해 똥줄이 타는 것은 우리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이다.

나는 번화가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대학생이 하기에 아주 일반적인 아르바이트지만, 요즘에는 할머님이나 아저씨들도 많이 하고 있어서 사실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 때도 있다. 과외를 하려는 생각도 했지만, 그런 도둑질을 하느니 차라리 막노동 쪽이 나아 보인다.

몇 가지 물건을 챙겨 집을 나선다. 지갑, 휴대 전화기, 열쇠. 하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은 브로치가 달린 팔찌다. 싸구려임에 틀림이 없는 얄팍한 재질의 보석류였지만 모양은 제법 그럴 듯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끈에 매달린 하얀 눈 모양의 브로치. 언제나 이걸 하고 다녔기 때문에 고등학생 시절에는 눈과 관계된 별명이 붙기도 했었다. 팔찌를 손목에 걸고, 문 옆에 놓여있는 낡은, 그러나 앙증맞도록 작고 귀여운 빨간색 털장갑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핵심은 인사다. 계산이야 기계가 대신 해주기 때문에 어려운 점은 별로 없다. 밝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넨다. 미소를 가득 머금고 인사, 계산을 하고 가격을 말하고 거스름돈을 건넨 후에 다시 인사. 기계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기 보다는 리드미컬하게 상대에 반응한다. 손님도 나도 기분 좋게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일하는 시간은 4시부터 10시. 특히 8시부터는 많이 붐비기 때문에 혜연이라는 두 살 연하의 여자애와 함께 일한다. 혜연이는 작고 귀여운 타입의 여자이지만 야간 아르바이트를 감내할 정도로 강심장에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다. 계산을 할 때에는 기계처럼 정확하고, 손놀림은 내 두 배 정도는 빠르다.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건네는 나와는 달리, 혜연이는 입으로 재빠르게 인사를 중얼거리며 손은 이미 다음 손님의 물건을 계산하고 있다. 자연스레 나와는 능률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언젠가는 ‘그렇게 삭막하게 일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물어보려 한 적도 있지만 관두기로 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 친절한 사람도 있고 둔한 사람도 있고 냉정한 사람도 있고 영리한 사람도 있다. 어느 한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판단은 언제나 오판이 되기 때문이다.

“혜연아. 그럼 난 이만, 간다. 수고해!”

“응, 들어가요. 승우 오빠.”

나는 한껏 밝게 인사해 주었지만 혜연이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인사를 받았다.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손님도 없는데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뭐겠는가. 조금 서운하기는 하지만 성격에 문제 있는 사람에게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쓸데없는 반발을 초래하지 않는 최고의 방법이란 이쪽에서 꾸준히 밝은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가 교화될 수 있을 때까지. 착한 사람이 있으면 그 주변 사람들도 착해진다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던가. 정말이지 성현의 입에서 나올만한 지혜의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길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거리를 수놓은 조명들이 어쩐지 운치 있게 보였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어쩐지 강한 인상으로 각인되고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겪었던 상황을 반복하는 것 같은, 데자뷰. 데자뷰는 물론 신기한 현상이다. 그 현상에 대한 견해들도 모두 다르지만, 어느 하나 특별한 것은 없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 일상. 그 같은 일상이 반복되다 보면 데쟈뷰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편의점과 집의 거리는 가깝다. 도보로 10분. 번화가를 걸어 나와 작은 아파트 단지를 넘으면 원룸과 빌라로 가득한 주택 구역이 나오는데, 그곳에 내 집이 있다. 스물두 살 대학생이 혼자 살기에는 조금 호화로운 10평 원룸이다. 매달 월세가 나가기는 하지만 감사할 정도로 좋은 집이다.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이웃에 예쁜 아가씨가 없다는 것 정도인데, 싼 가격에 좋은 집에 살게 된 대가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해진다.

문을 열고 “다녀왔어요.”하고 인사한다. 누구도 받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아까의 낡은 털 장갑은 내 인사를 받아주고 있다. 웃으며 털장갑을 한 번 쓰다듬어 준다. 이 털장갑은 어머니의 유품이다. 어머니는 내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다. 암으로 투병하고 계셨는데, 저 털장갑은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귀여운 아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리고 어린 나는 그 선물을 소중히 여기며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오실 거라는 기대를 품고 하루하루를 견뎌나갔다.

“앗, 그러고 보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들어와 달력을 무심코 쳐다본 나는 깜짝 놀랐다. 어느덧 어머니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의 아버지의 전화는 그 때문이었던가. 문득 나도 모르게 건성으로 아버지를 대한 것이 후회가 된다. 다시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관둔다. 남자끼리 간지럽게 ‘아까는 바빠서 미안했어요.’로 시작하는 대화를 하느니 마음으로 사과하는 편이 좋다. 때로는 잘못을 말없이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용서받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상대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인지,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예, 아버지.”

아까의 이야기를 하려고 말을 이으려는데, 뜻밖의 이야기가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언제 오냐? 일 늦게 끝나?”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이에요? 가다니, 어딜?”

내 질문이 끝나고 정적이 흘렀다.

“……. 너 기억 못하니?”

“기억이라니, 뭐가요?”

전화기 너머로 후 하는 한숨이 들려왔다.

“하긴 일곱 살 때 일이니 기억 못할 수도 있지만, 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여자애는 진심인 것 같았어. 정말 기억 안 나니? 너 아직 팔찌 하고 있지 않아?”

아버지의 말을 듣고 팔찌를 본다. 눈 모양의 하얀 브로치. 눈. 겨울. 어머니 기일을 일주일 정도 앞둔 이맘때. 일곱 살.

혼탁했던 시야가 갑자기 환해지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 나는 급하게 전화기를 닫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2

숨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전에 살던 집 근처였다. 아직 거기까지 가려면 조금 더 달려야 한다. 이를 악문다. 익숙한 거리인데도 낯설게 느껴진다.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처럼, 모든 게 낯설기만 하다.

시계를 본다. 10시 40분. 12시가 지나면 오늘은 끝난다. 어쩌면 기다리다가 이미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아아, 나는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일까. 15년 전, 눈을 닮은 소녀와의 그 약속을.


-15년 전, 겨울

울고 있었다. 하염없이. 그냥, 주저앉아 울고만 있었다.

많이도 돌아다녔지. 문구점에도 가고 공원에도 가고 학교 운동장에도 가고 슈퍼에도 들렀다. 어둑해질 무렵에 집에 돌아왔는데, 아뿔싸. 장갑이 없어졌다. 엄마가 남겨놓은 유일한 물건. 나를 위해 아픈 걸 참고 만들어준 소중한 물건. 언젠가 다시 돌아올 때 내가 잘 간직하고 있었다고, 정말 따뜻했다고 말하며 건네야할 우리 엄마의 소중한 장갑.

그 장갑이, 없다. 다시 천천히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물어도 보았지만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빨간색 털장갑? 글쎄. 그런 장갑이 어디 한 두 개니?”

문구점 할머니의 말에 나는 울며 달려들었다.

“우리 엄마가 만든 장갑이에요. 몰라요? 그냥 빨간색 장갑이 아니고 우리 엄마 장갑이에요. 찾아주세요, 찾아주세요…….”

하지만 그네들은 모두 난처한 표정을 지을 뿐, 결국 장갑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주저앉아서 울고만 있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그 소중한 장갑을 잃어버린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안녕.”

서럽게 울고 있던 내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목소리도. 그저 그녀가 눈을 닮았다고만 기억한다. 하얀 눈처럼 순수해 보이는 소녀. 그 소녀는 자신을 열여섯 살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다. 잘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기서는 멀고 하느님의 나라랑은 가까운 곳이라고 한 것 같다.

“엄마가 만들어준 장갑을 찾고 있지? 엄마는 그걸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넌 정말 슬퍼하고 있구나. 자, 우리 찾으러 가자. 내가 알고 있어.”

나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어, 마치 엄마를 따르듯 그 소녀를 따라갔다. 어딘가에 도착했고,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이 빨간색 장갑 근처에 서 있었다. 소녀는 동물의 이름 같은 것을 불렀고 동물은 달려와 날렵한 동작으로 소녀의 어깨까지 올라갔다. 소녀는 그 동물을 귀여워해 주었다. 나는 빨간색 장갑을 다시 찾은 것이 너무 기뻐서, 그리고 너무 안심해서 다시 큰 소리로 울고 말았다. 그녀와 그녀의 동물은 나를 위로해주었다. 작은 다람쥐를 닮은 신기한 동물은 걱정 된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동물의 눈망울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눈망울에 내 시선이 닿자 마치 내 가슴 속에 있던 모든 응어리가 세척되듯 싱그러운 느낌을 받았다.

소녀는 미소를 머금어 주었지만 왠지 쓸쓸해보였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언제나 널 바라보고 있어.”

소녀는 마치 자신이 직접 보기라도 한 듯, 그렇게 말해주었다. 기뻤다.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지금 이 ■■■■■. 그 다음 순간이 마지막일 거야. ……. 우리 세계의 시간은 아주 느려. 우리 세계 시간으로 1년 반 후에, 그러니까 15년 후에 다시 돌아올 테니까. 날 기억하고 있어주겠어?”

나는 그러겠다고 크게 끄덕였다.

“고마워. 대신 이걸 줄게.”

“이게 뭐야 누나?”

그녀가 꺼낸 것은 눈 모양의 브로치. 그녀는 그것을 평범한 팔찌에 달아 내 팔목에 걸어주었다.

“항상 지니고 다니도록 해. 부적 같은 거야. 그리고 털장갑은 집에다 두는 편이 좋아. 엄마도 그걸 바라고 있을 거야. 겨울에 네 손이 따뜻하길 바라서 만든 거니까 항상 손을 따뜻하게 해 두고. 이제 손이 커져서 내년부턴 안 맞을 테니까.”

소녀의 친절함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꼭 기억해줘. 15년 후에, 이곳으로 올 테니까. 나는 무척 지쳐 있을 거야.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난 위험해. 하지만 넌 기억할 수 없어. 그래, 잊는구나. 팔찌만…….”

소녀는 슬퍼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만날 거야. 난 누나를 도와 줄 거야.”

소녀가 걱정되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어 본다. 그 때 소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것으로 기억한다.

“응. 내 이름은 ■■■. 기억해두고 있어. 하긴 내가 먼저 널 알아 볼 테니까 상관은 없지만. 그리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혹시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이라고 외쳐. 위기에서 한 번은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난 아무것도 몰랐지만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하게 소녀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소녀에게 보답하는 길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장면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열심히 뇌리에 강하게 인식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홀연히 그녀의 뒤로 6~7개의 그림자가 생겨났다고 느꼈다.

“날 기억해줘. 15년 후, 오늘. 여기로 와줘. 약속이야.”

“응, 약속해 누나.”


그녀의 말에 화답해 보았지만 그녀는 그림자와 함께 홀연히 사라지고 난 뒤였다. 약속하자는 말만 남기고. 그 후부터 나는 팔찌를 분신처럼 차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천천히 눈을 닮은 소녀를 잊어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강렬히 기억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억은 약해졌다. 결국에는 그녀의 얼굴도 이름도 떠올릴 수 없어지다가 이제는 존재 자체를 망각해버린 것이다.

어느덧 아버지의 집 앞의 놀이터까지 왔다. 생생하게 살아오는 기억. 그래 분명히 여기에서 나는 울고 있었다. 풍경은 아주 많이 변했지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소녀가 나타났고 그 이상한 동물이 있는 곳으로 갔었다.

그게, 어디였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녀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갔었다. 원래 찾을 리 없었던 털장갑을 찾아서. 그곳은 어디였을까? 미간을 찌푸려 정신을 집중해본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 눈을 닮은 소녀. 그리고 그 작은 동물. 배경은, 벤치에 앉아 있었고…, 분명히 조명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던 것 같다.

공원?

공원. 그래, 공원이다. 공원 구석의 작은 벤치. 우리는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틀림없어. 시계를 본다. 11시 12분.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 나는 지체 없이 공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3

밤의 공원은 더할 수 없는 쓸쓸함과 그리움이 깃들어 있다.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앙상한 나무들. 차가운 밤의 공기. 하얀 입김. 귓가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 어디로 가야 할까? 주변을 둘러보지만 소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시간이 부족해.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공원은 제법 넓다. 15년 전, 내가 어디에서 장갑을 찾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공원의 구석구석을 누빈다.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 거친 숨소리.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폐는 이미 그만 달리라고 애원하고 있다. 저 편 정자에서 작은 불빛이 보인다. 조금 가까이 가 보니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무리들이다. 작은 불빛은 아마도 담배. 요즘은 청소년들이 공원을 공인된 흡연 장소 정도로 생각하는가 보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타다닥 달리는 내 모습이 뭐가 우스운지 그 청소년 무리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린다.

없다. 시간은 11시 5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공원의 구석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없다. 잠시 멈춰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고른다. 생각이 맑아지는 느낌. 그래, 15년이나 된 일이다. 나에게는 은인이지만 그 소녀에게는 그저 지나가다 마주친 사소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약속은 지켰어. 기억해냈어.”

라고, 변명처럼 중얼거려 본다. 아버지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덕분에 다시 소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지만, 결국 그녀는 없었다. 혹시 그녀가 나를 기다리다가 돌아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조금 늦었을 뿐이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걸음을 옮긴다. 나는 어느덧 처음의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본다. 이미 이렇게 되어 버렸지만 그녀와의 약속은 꼭 지켜야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어린 아이에 불과 했지만 그 후로 한 번도 팔찌를 떼어놓은 적이 없었던 것을 보면 나는 그 약속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공원의 입구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며 손목을 들어 팔찌에 달린 눈 모양의 브로치를 바라본다. 낡았지만 모양은 그대로였다. 입가에서 허탈한 웃음이 배어나온다.

-……여기야.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잘못 들은 건가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려 본다. 목소리가 들려 왔다기보다는 마음속에서 언어가 울려오는 느낌이 든 것 같았다.

-이쪽이야.

이번엔 확실히 방향을 제시해준 느낌이 들어,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입구 근처의 화장실. 정확히는 그 뒤인 것 같다. 어쩐지 긴장이 되어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조심스레 다가간 화장실 뒤편은 무척 어두웠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한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어이!”

나는 황급히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그 소녀가 15년 전의 그녀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이던 간에 쓰러져있는 여자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동안 저기 쓰러진 여성이 15년 전의 그녀이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녀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얄궂게 교차했다. 나는 황급히 다가가 엎어져있는 그녀의 몸을 잡고 조심스럽게 뒤집어 일으킨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지저분해진 옷가지. 힘없이 축 늘어진 몸. 손에 닿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감촉. 어느 정도 일으켜 얼굴을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드러난다. 미간을 찌푸리고 눈은 감고 있다. 어두웠지만 그녀는 빛나듯 아름다웠다. 푸른빛이 감도는 은색의 머리카락, 눈처럼 새하얀 얼굴. 티 없이 맑고 깨끗해서 마치 건드리기만 해도 더럽혀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 동안 숨을 죽이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그녀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는 내 손을 만진다. 그 감촉이 너무도 생생해서 나는 조금 놀랐다.

“뭐야……. 손, 차갑네.”

그녀는 아주 힘겹게 웃어보였다. 어찌해야 하는 걸까?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자를. 잠깐이나마 그녀의 미모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일단은 도로로 나가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아니, 구급차를 불러볼까? 휴대 전화기는 가져왔다. 그렇다면.

“아냐. 걱정 안 해도 돼. 집으로 가자.”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구슬이 구르듯 맑고 청아했다. 목소리에서도 고결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꼭 요정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녀는 내가 말을 하기 전에 마치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일 거라고 자신을 달래 보지만 조금 섬뜩한 기분이었다.

“집? 집이 어딘……데요?”

나보다 어려 보이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녀가 지닌 고귀함을 무시하기는 힘들어, 눈치를 보며 존대어를 섞어 본다. 고등학생 쯤 되었을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에페도……, 힘을 잃었어. 갈 곳은 없어. 승우. 네 집으로…….”

힘겹게 말을 잇던 그녀는 허억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가쁘게 숨을 쉬는 그녀의 호흡이 너무나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녀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마치 숨을 거둘 사람처럼 보였다. 가만,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나는 짐작하고 있던 것을 확인한다.

“혹시, 15년 전에……?”

그녀는 다시 힘겹게, 고개를 위 아래로 살짝 움직였다.


그녀의 호흡은 안정되고 있었다. 침대에 눕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현상이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편안한 표정이 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리 그래도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반하는 것은 그녀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는 알 수 없는 예감 때문에, 도박을 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옮긴 것이다.

그녀는 생각보다도 더 가벼웠다. 겉으로 보기에 날씬한 체형의 그녀였지만, 적어도 40kg이상은 나갈 텐데, 책가방 하나 맨 것처럼 가뿐히 들 수 있었다. 오는 동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떤 소문이 돌 리 없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환자니까, 내일 아침에 먹을 환자식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는 완전히 반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자리를 피한 것이다.

거리의 낯설음은 사라져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지만 번화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다. 술을 마시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싸우고 있는 사람들. 직장에서 힘든 일이란 업무와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만은 아니다. 저렇게 술을 마시며 지친 마음을 달래고, 다음날 다시 괴로워하는 것. 그것이 진정 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극복하기 힘든 아픔이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혜연이 인사한다. 역시나 손님을 바라보지 않고 ‘어서 오세요.’를 중얼거리는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지금은 한가한가 보네.”

환자식으로 구입한 크림스프를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넌지시 말을 걸어본다.

“……. 인스턴트?”

“응. 아픈 사람이 있어서. 내일은 스프로 아침을 때워야겠어.”

잠시 놀란 듯 날 응시하던 혜연이 응하고 웅얼거린다. 가격을 말하고, 서로 안녕. 하면서 헤어진다. 조금 더 웃어줄걸. 힘들지? 하고 말해줄걸 하고 후회해보지만 혜연이 저 녀석도 꽤나 강적이라 어지간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힘들다.

익숙한 길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는 평소처럼 “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하고는 멈칫 한다. 맞아, 그 아이가 있었지. 깨지는 않았을까하는 마음에 크림스프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침대로 향한다.

“오랜만이야.”

들려오는 영롱한 목소리. 눈을 닮은 소녀는 내려앉은 달빛을 맞으며, 침대에 앉아 있었다.


4.

“금방 일어났네? 오랜만이야. 15년…… 만인가?”

자연스럽게 대화하려 했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입에서 나온 말은 굳어 있었다. 어색함이 내 몸을 엄습했다. 하릴없이 웃어본다.

“네게는 15년, 내게는 1년 하고 6개월. 어느 쪽이든 오랜 시간이야.”

그녀는 담담히 말하고 있었다. 내게는 15년 전의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소녀를 보고도 15년 전의 그 소녀라고 자신할 수는 없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가 기억하는 일곱 살의 내 모습은 22살인 지금의 내게서 조금도 찾기 힘들 것이다. 어느 쪽이든 오랜 시간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새삼 다시 들여다보았다. 깊고 쓸쓸한 눈. 외로운 듯 처연한 표정.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밤의 공기와 조화를 이루며 더욱 빛나고 있었다. 작고 순수한, 하얀 눈을 닮은 소녀. 그 이미지만큼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나와 그녀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야하지 않겠어?”

그녀는 무심한 듯. 반응이 없다. 다시 적막이 흘렀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이 소녀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뭐 하는 아이일까. 여기에서는 언제까지 있을까. 어째서 15년 후에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걸까. 정체가 뭔지 알아야 원. 게다가 침대는 계속 쓸 건가? 침대를 새로 들여야 하나? 아니면 나는 바닥에서? 아, 그러고 보니 여자애와 동거를 하고 있는 걸까?

“에페.”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그녀는 지니고 있던 작은 가방을 연다. 가방 속에서는 작은 동물이 조용히 자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할 수 있다. 저 동물은 일곱 살의 내가 생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다람쥐를 닮은 동물이다. 가만히 동물을 관찰해보니 다람쥐를 닮은 것은 사실이지만 퍽 달랐다. 노란색 털이 나 있었고, 다람쥐보다 동그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선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문득 생각이 미쳐 그녀를 보니, 그녀의 옷차림도 조금 이상했다. 홍대 앞에서도 저런 스타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가죽으로 된 조끼를 입고 몸에는 자주색 천을 두르고 있었고, 적당한 길이의 치마를 입었는데 제단이 잘못된 것처럼 들쭉날쭉한 치마였다. 게다가 아까 벗긴 신발은 어그 부츠를 축소해놓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 동물을 몇 번 쓰다듬더니 다행이다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쓸쓸한 눈빛이 나를 향하자 내 마음도 쓸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날 도와주겠어?”

“응?”

그녀는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날 도와주겠어?”

“뭘, 어떻게?”

후- 하는 한 숨. 그녀는 왠지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어. 약속, 했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뭘 어떻게 도우라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야기할 수 없다니?”

소녀는 입을 다물고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 저항하기가 무척 힘이 든다.

“그래……. 혹시, 악기를 지니고 있니? 현악기……. 기타 같은 것.”

“응, 잠시만 기다려.”

마침 기타는 장롱 한 구석에 있었다. 고교 시절 기타를 치겠다는 젊은 혈기로 샀지만 두 달 정도 치다가 관두어버린 기타다. 먼지가 조금 묻어 있어서 잘 닦고 소녀에게 건넸다.

“줄이 풀려 있을 거야. 다시 튜닝을 해야 해.”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기타를 건넨다.

“나도 잘 할 줄 몰라.”

그녀는 손사래를 치는 나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조금 분하다. 그녀는 기타를 자신의 옆에 두고는 잠시 밤하늘을 응시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

그녀의 물음에 나는 가슴이 데인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녀의 말대로 하고 싶은 말은 쌓여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의아한 소녀였다.

“너에게 위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만 말해줄게. 긴 이야기가 될 거야.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위해서 온 것이고 언제까지 있을 것인지. 그리고 왜 너와 15년 전에 약속을 했던 것인지. 차근차근 설명해줄게. 한정된 범위에서. 비록 믿기 어렵겠지만.”

그렇게 말 한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멀고 먼 옛날의 일이야. 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창조자가 인간을 처음 만들어내던 시대의 이야기. 신은 만들기를 좋아하던 존재야. 무한한 상상력으로 모든 것을 만들었어. 그는 모든 세상을 만들었지.

그 신은 인간이라는 존재도 만들어냈어. 아주 똑똑한 존재였지. 그들은 영리했고 신은 그들을 사랑했어. 그런데, 어느 날 신에게 훼방을 놓으려고 작정한 다른 존재가 신이 모르는 사이에 인간에게 접근한 거야. 신이 돌아와서 보니 인간은 변해 있었어. 그 인간들은 신이 만들어 놓은 작은 세계에서 살기에는 부적합해 진거야. 그래서…… 버림을 받았어. 신은 아주 슬퍼했어. 자신이 만들어낸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인간이었거든.”

소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마 내 반응을 살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냥 여기저기서 들어볼 수 있는 신화 같은 이야기. 소녀는 다시 말을 이어간다.

“신은 아주 슬펐지만, 슬픔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었어. 그래서 새로 인간을 만들었지. 추방당한 인간들에 대해서는 신이 원래 만들어 놓았던 작은 세계의 아래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살도록 했지. 그게 바로 아래 세계의 사람들이야. 하지만 아래 세계의 사람들은 신과 너무 멀리 떨어진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했어.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 신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지.

신은 인간을 새로이 만들었지만, 다른 존재는 신에게 어떻게 해서든 훼방을 놓았지. 그리고 다른 존재와 결합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어. 새로 탄생한 인간들은 얼마 안 가서 다른 존재와 결합하기를 반복했어. 그래서 그 인간들은 그들을 위해 신이 새롭게 만든, 또 다른 아래 세계로 내려가게 되었지. 그렇게 일곱 개의 아래 세계가 생겨났어. 아래 세계의 사람들은 모습도 느낌도 삶의 방식도 조금씩 달라. 다른 존재의 훼방은 항상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야.

그들 중에서 다른 존재를 거부한 인간들도 있었어. 신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 인간들을 더욱 사랑했지. 그게 우리들. 네가 보고 있는 나야.”

“중간에 말을 잘라서 미안한데. 언뜻 보기에 너랑 나는 큰 차이가 없는데?”

나는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소녀는 그런 나를 지긋이 응시하며,

“큰 차이가 있어.”

“어떤 차이인데?”

“우리는 신이 완성해 놓은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결점이 거의 없어. 다른 존재가 우리를 더럽히지 않았거든. 예를 들자면, 우리는 우선 병이라는 걸 걸리지 않아. 살도 찌지 않고 쉽게 늙지도 않아.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도 거의 없어. 외부도 내부도 차이는 아주 많아.”

그건 놀라웠다. 눈처럼 깨끗한 그녀의 피부는 그 때문일 것이다. 생전 여드름도 기미도 생기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신은 자신이 원하던 인간이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기뻤지만, 그 전에 만들어낸 아래 세계의 인간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감정도 숨길 수 없었어. 그래서 신은 항상 아래 세계에 신경을 썼지. 다른 존재도 그 사실을 알았어. 그래서 그 아래 세계의 인간들을 빼앗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지. 신은 신 나름대로 애써 만든 아래 세계와 아래 세계의 인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 둘은 지금도 경쟁하고 있지.

지금 너와 내가 있는 세계는 그 중에서도 조금 특별한 세계야. 여기 인간들의 선조는 다른 세계와 가장 빨리 결합한, 그리고 가장 가깝게 결합한 사람들이야. 그 대가로 신에게 받은 애초의 능력은 모두 상실했어. 대신 다른 존재의 능력은 다른 아래 세계의 인간들과 격이 다를 정도로 많이 지니고 있어. 신과 다른 존재의 성향을 절반씩 지니고 있는 거야. 거기에서 문제는 시작되었지.”

“문제?”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존재가 소유권을 주장한 거야. 신이 만들어낸 큰 세계의 반대편에 자신도 이 세계와 유사한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로 여기 있는 인간들을 이주시키겠다고. 신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으려고 작정을 한 것이지. 실제로 그는 반대편에 세계를 만들었고 이런 저런 존재들을 만들어 내었어. 하지만 우리의 신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으니 다른 존재는 심심했고, 결국엔 신의 아이들을 노리게 된 거야. 신은 그럴 수는 없다고 판단했지만 딱히 다른 존재를 막을 방법도 없었어. 그래서 신은 한 가지 방법을 고안했어. 일단은 인간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지켜보자고 말이야. 만약 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이 세계의 인간들은 그냥 두기로 했어. 왜냐면 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다른 존재가 끼어들 여지가 적어지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존재에게 넘기기로 한 거군.”

“아니야.”

나는 소녀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반응에 조금 놀랐다.

“신은 결코 다른 존재에게 굴복하지 않으니까. 대신, 만약 다른 존재에 가깝게 인간이 변모한다면 신벌을 내려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들기로 한 거야.”


5

소녀의 이야기는 오랜 시간 계속되고 있었다. 중간에 소녀가 조금 지쳐 보이기도 해서 같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소녀가 정체모를 종교 단체의 광신도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결국 신은 인간을 심판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끝없이 발전하여, 더 이상 수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진행된 것이다. 아래 세계의 가장 특별한 인간들을 믿고자 했던 신의 마음은 참혹하게 배신당했다. 결국 신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새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에 가장 기뻐한 것은 다른 존재였다.

궁금증을 참을 수는 없었다. 왜 우리들이 타락했다고 하는 것인지, 그리고 소녀는 어째서 이 세계에 온 것인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지은거야.”

소녀는 내 질문을 듣지 않고 대답했다. 다시 섬뜩함이 가슴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하지만 소녀는 내 반응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씻을 수 없는 죄.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그 죄를 미덕이라고 여기고 있어. 신이 남겨 놓은 구원의 돌을 찾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아. 이제 심판의 돌이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 세계에 나타날 거야.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

“뭐야? 그 죄라는 것.”

“그건.”

소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너무 욕심을 부린 거야. 욕망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말았어. 이 세계 사람들의 죄의 이름은 욕망이야.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나는 잠시 침묵했다. 인간의 죄는 욕망. 알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였다. 애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누구나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고 싶고, 누구나 관심 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삶에의 욕구 또한 신이 우리에게 준 미덕이 아닌가? 식욕이라거나 성욕은 충분히 숭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동시에 무척 동물적인 것이지만. 나는 그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야.”

그녀는 잘라 말했다. 인간의 욕망이 지닌 죗값은 너무나 크다고. 그리고 그 욕망으로 인해 버려야만 하는 다른 좋은 것들이 너무나 크다고 말했다. 그녀는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세계를 내려 보고 있었어. 그리고 아주 가슴이 아팠어. 여기 사람들도, 물론 우리 세계에서는 반인반마(半人半魔)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사람인데, 심판의 돌에 의해서 심판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어. 무엇보다 여기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어. 그것이 가장 큰 죄. 모든 것은 그들이 자초한 것. 예를 들어 사람들은 빈부의 격차로 괴로워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인간 스스로 자초한 거야. 멸망도 물론 자연스럽지. 모든 것은 이 세계 사람들이 그렇게 되도록 행동한 결과니까. 아무튼 그럼 참혹한 일을 막으려고 15년 전에 나는 이 세계로 온 거야. 구원의 돌을 발동시켜 심판의 돌의 발동을 막기 위해서.”

“성공한 거지?”

소녀는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소녀는 실패한 것인가? 더 자세한 것을 묻고 싶었다.

“구원의 돌이라거나 심판의 돌이 뭐야? 정말 돌이야?”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범위인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돌을 의미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비유.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겠지.

“나는 왜 필요한 거지?”

소녀는 마찬가지로 대답이 없었다. 대신 소녀는 ‘그 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소녀의 계획을 알고 소녀를 방해하려는 자들이 있다고, 그들은 소녀를 위의 세계의 대표 정도로 생각하고 반대 세계의 대표가 될 자들을 보내어 소녀를 감시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발각되면 끝이야.”

소녀는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녀는 그들을 ‘아주 무서운 사람들’ 이라고 표현했다. 그 무서운 사람들이 소녀를 찾아내기 전에 소녀는 약속된 곳으로 가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소녀는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나는 조금씩 눈이 감기고 있었다.

소녀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소녀가 살던 세계는 퍽 아름다운 곳이었던 모양인지, 자기 세계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졸음이 밀려온 탓에 잘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어쩐지 소녀와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드는, 그리고 아주 다정한 느낌이 드는 장소인 것 같았다.

소녀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신이 만들어놓은 땅은 무척 화가 나서, 신벌에 적극 찬성하고 있지만 신도 대지도 다른 존재도 모두 이 세계의 희망을 인정하고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15년 전의 엄청난 사건에서 소녀는 희망을 직접 보았다고 말했다.

잠이라고 하는 놈은 정말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이토록 예쁜 소녀가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보면 잠의 힘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비몽사몽 중에 들어서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착한 7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말과, 2년 후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소녀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다른 세계의 존재. 신이 하고 있는 일들. 저 세상의 존재. 어느 덧 나는 끊임없이 하품을 하다 결국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결국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게슴츠레한 눈에 힘을 주고, 정말 궁금한 것을 물었다. 소녀의 말은 어쩔 수 없이 중간에 잘라야 했다.

“그럼 너는 왜 이 세계를 구하려고 하는 거지? 너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세상을. 게다가 여기 사람들은 네 말 대로면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 아니야?”

아름다운 소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째칵째칵. 조용한 방안을 시계 초침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나는 잠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의외의 질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 질문이 무례한 것이었는지, 아무튼 그녀는 한참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슬픈 빛을 띄우고 있다고 생각할 때, 길고 길었던, 참기 힘들었던 정적을 깨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불쌍하니까.”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자연 - 일반 (gon)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9-09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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