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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샤 님의 서재입니다.

눈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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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두샤
작품등록일 :
2008.09.08 02:28
최근연재일 :
2008.09.08 02:28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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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수 :
166,695

작성
08.09.07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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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2쪽

눈의 소리 - 3. 외로운 천사의 비가(悲歌) (2)

DUMMY

6

정겨운 멜로디. 소녀는 짧은 노래를 불렀다. 맑고 청아한 그녀의 음색을 듣고 있자니 마치 하늘의 먹구름이 모두 사라지고 다시 햇빛이 비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진의 얼굴도 한결 밝아져 있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가슴 속 한 구석을 헤집고 들어왔던 불안이라는 녀석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정말 아름다운 노래였다.

“일단 이 교수님께 연락을 하자.”

유진은 백을 열고 휴대 전화기를 꺼낸다. 이 교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들으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좋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부족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대책은 무엇일까?

소녀가 나를 보며 미소지어준다. 나 역시 미소로 소녀에게 답례한다. 저렇게 아름답고 순수하고 고결한 소녀를 그들의 손에 넘어가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책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지혜롭지 못한 내 머리를 한스럽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앗!”

내 입에서 나온 커다란 탄성에 두 여자가 놀라 나를 바라본다. 나는 조금 미안한 얼굴로 그들에게 사과의 제스춰를 한다. 떠올랐다. 이 상황을 타개할 비책이. 그래, 난 지혜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의 지혜를 빌리면 될 것이 아닌가. 나는 어째서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을까.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악마의 입과 천재의 두뇌를 동시에 지녔다는 조성진을!

휴대 전화기를 들어, 성진에게 연락을 한다. 신호음이 들려온다. 빨리 받기를 바라는 내 마음을 짓밟기라도 하듯이 휴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신호음은 무심하게 계속되었다. 그리고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성진아! 급한 일이야. 일단 여기로 와. 빨리 와. 잔말하지 말고!”

이 교수는 아직 알아낸 것이 별로 없다고 한 것 같았다. 아마 소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거라고 한 모양인데, 소녀는 무엇도 말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말짱 헛수고였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던 성진은, 20분 정도 만에 도착했다.

“이리 오너라~”

성진 특유의 인사법. 그는 우리 집에 미녀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예상대로 문을 열어주자, 녀석의 표정이 굳어진다. 하지만 학교가 자랑하는 냉혈인간답게 당황한 기색 없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잘 생긴 성진을 보며 유진은 조금 관심을 표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관심은 지워버린 것 같다. 나이차를 생각한 거겠지. 소녀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나는 도착한 성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 들은 성진은 나를 쏘아보며 한 마디 한다.

“그 말을 믿으라고?”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성진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다. 게다가 실은 무척 거만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 거만함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라 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일단 전부 믿기는 어렵고, 이걸 일종의 게임이라 생각하면 간단하지.”

성진은 우리를 한 번씩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여기서 싸울 수 있는 유닛은 하나 밖에 없는 게로군. 일단 남자는 도움이 안 되고 말이야.”

성진은 나를 한 번 쏘아 본다. 하지만 난 거기에는 할 말이 없어 그냥 머리를 긁적이고 만다.

“적의 숫자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전에 싸웠다는 둘을 빼면 가능한 숫자는 최대 14명 정도인가. 이 중에 12명은 똘마니, 나머지 둘의 스테이터스는 불명. 승리 조건은 소녀를 지켜라. 최악의 상황이로군.”

성진은 가만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유진과 나, 그리고 소녀는 가만히 성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기던 성진이 후-하는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뭐라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불길한 기분이 내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잠깐 실례하지.”

놀랍도록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쪽을 바라보자 검은색 머리를 치렁치렁 기른 여성이 서 있었다.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얼굴을 하고 온통 시커먼, 달라붙는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여자. 이 불길한 기분의 근원지는 바로 그 여성인 것 같았다. 유진이 벌떡 일어난다.

“이 힘은 에피릴? 에피릴의 파편인가? 과연, 수호자인지 뭔지 하는 계집이 너였구나.”

그 여자는 유진을 바라보고는 한 번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웃음 진 여자에게서 어둠이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 여자에게서 어둠이 생겨나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무관하게 시커먼 어둠이 순식간에 집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그 어둠이 몸에 닿는 순간 나는 극도의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유진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소녀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 상황에서 태연히 서 있는 것은 성진 밖에 없었다.

“죽이려고 온 것은 아니니 안심하도록. 나는 우리 편의 누군가와는 달라서 말이지, 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싸움질이나 하는 폭력주의자는 아니거든.”

그녀의 목소리에는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실려 있었다. 그녀의 말에 거역할 수 없다. 거역해서는 안 된다. 나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너는 그게 정말 궁금한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난 네게 관심 없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아시겠지요. 이 저주받은 세상에 흘러들어온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자, 천궁을 버려두고 이 세계로 들어온 멍청한 신녀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신처럼 고귀한 분을 이런 곳에서 뵐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그녀는 높고 가느다란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조차 끔찍한 공포였다.

“당신은 모릅니다. 배덕의 마녀여.”

소녀가 유진의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유진은 만류했지만 소녀는 유진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자신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뜻인 것 같았다.

“모르지요. 어찌 저 같은 미천한 것이 고귀한 분의 뜻을 알겠습니까? 영원히 약속된 시간을 버리고 이런 하찮은 세계에 영롱한 에피릴의 빛을 들고 오신 당신의 뜻을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배덕의 마녀는 다시 높은 소리로 웃었다. 소녀는 말없이 마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그분은 에피릴을 원하십니다. 이 세계가 멸망하던 유지되던 그건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을 방해할 뜻도 없지요. 에피릴만 건네주신다면 조용히 물러가겠습니다. 물론, 천궁의 신녀가 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적어도 그 마녀는 소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녀는 가만히 마녀를 노려보다 이야기했다.

“그건, 이 세계를 위해 쓸 물건입니다. 당신들의 왕은 이미 하나의 에피릴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당신들이라 하여도 그건 지나친 욕심입니다.”

소녀는 당당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녀의 말을 들은 마녀는 소리 높여 웃는다.

“아하하하. 욕심이야 말로 미덕이지요. 고귀한 분이시여. 당신은 고작 이런 세계를 위해 그 보석의 빛을 정녕 잃게 만들 생각이란 말입니까? 이런 하찮은 세계와 에피릴. 어느 쪽이 중한지는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모두 착각하고 있어요. 이건 그분의 뜻입니다.”

마녀는 급기야 깔깔대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죄어오는 것 같았다. 두렵다. 참을 수 없는 절망이 밀려오는 것 같다. 저 목소리를 더 듣다가는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다. 마녀는 다시 그 끔찍한, 절망적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착각은 당신이 하는 것이지요. 당신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압니다. 당신의 나라에서도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자는 아무도 없겠지요? 그러니 호위도 없이 이곳에 온 거겠지. 당신이야 말로 착각에 빠진 도둑고양이가 아닌가!”

마녀가 소리친다. 그 소리는 거의 물리적인 힘이 되어 우리를 덮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주저앉아 버릴 것 같다. 이런 공포는, 이런 절망은 처음이었다. 이런 상대와 유진이 싸운다고? 말도 안 된다. 유진이 아무리 조각의 힘으로 인간을 넘어선다고 해도, 이건 순도 100%의 악마다. 그것도 이 세상에 존재할리 없는, 다른 세계의 악마.

소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배덕의 마녀는 뭐가 좋은 조금 웃더니.

“당신을 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우리도 당신네들과 서운한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거든. 하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마녀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제안을 하겠습니다. 5시간을 드리지요. 5시간 후에 여기로 오겠습니다. 물론 도망갈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도 상황은 잘 아시겠지요. 그 때 에피릴을 준다면 그냥 물러가는 것을 약속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필요 없어.”

마녀는 소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내가 없으면 에피릴도 찾지 못할 겁니다.”

소녀의 말에 마녀는 다시 크게 웃는다.

“내가 온 이상 열쇠 같은 건 필요 없지. 에피릴의 파편 7개를 모아서, 내 힘으로 ‘열면’ 되니까. 조금 있으면 천호에 파편 7개가 전부 모이지? 그 때 당신이 부탁한 그 7인도 모조리 죽이면 그만이야.”

침묵이 흘렀다. 마녀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난 번거로운 건 질색입니다. 고귀한 분이시여. 당신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은 그분도 원치 않으실 테지요. 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마녀는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7

마녀는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우리는 모두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모두 절망에 빠져 있을 것이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배덕의 마녀를 실제로 봤으니, 실망과 절망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침착하게 말을 꺼내 분위기를 개선한 것은 성진이었다.

“일단 이건 행운이라고 봐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적의 존재를 확인했으니까요.”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 보였다. 눈앞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을 보았으니 당황할 것도 같은데,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것 같았다. 난생 처음으로 인간을 초월한 자들의 싸움을 보고 기겁했던 나와는 매우 상반되는 태도였다.

“에피릴이라고 했나요. 그게 구원의 돌의 정체인 것 같군요. 아까 그 여자가 노리고 있는 것 같고. 이야기로 유추하건데 분명히 보석이겠지요. 그것도 일회용의.”

성진은 차분한 분위기로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승산은 어떤가요? 맞대결을 한다고 하면?”

성진은 유진을 보며 물었다. 유진은 조금 어두운 표정이었다.

“이길 수 없어.”

예상했던 대답. 희망은 없다. 끄응 하는 신음이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성진은 반응하지 않았다.

“시뮬레이션을 해보지요. 맞대결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완패를 뜻하는 것인가요? 그러니까, 조금의 데미지도 줄 수 없다?”

“그건 아니야. 지금 조각의 힘을 9할 정도는 개방할 수 있어. 그게 최대야. 그렇다면 적어도 조금의 타격은 입힐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내가 그 상태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가. 하는 거야.”

“어느 정도일까요?”

“길어야 5분.”

5분. 유진이 최대의 힘으로 싸울 수 있는 한계치였다. 그 시간 동안 싸워봐야 마녀에게는 작은 타격을 입히는 것이 고작이라는 소리였다. 이건 싸울 필요도 없는 문제다.

“음. 저 쪽의 NO.2의 실력은 모르겠지만, 저 마녀에게서 힘을 받은 것이라면 마녀가 가진 힘의 절반 이하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아요. 그 정도라면 이길 수 있겠지요?”

“알 수 없어. 하지만 쉽게 승부가 갈리지는 않을 거야.”

“나머지 12명은 어떤가요?”

“아까 말한 최대로 힘을 끌어낸다면 모두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간이지.”

문제는 시간, 그랬다. 설령 탐욕의 장군과 계속 싸울 수 있다고 해도, 유진이 조금 앞설 수 있다고 해도 5분이었다. 유진이 12명의 똘마니를 모두 해치우고 탐욕의 장군도 쓰러뜨린 후에 배덕의 마녀를 붙잡고 그 사이에 소녀는 도망간다는 식의 작전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특수기술이지요. 저 배덕의 마녀가 어떤 식으로 싸울지는 알 수 없어요. 어쩌면 터무니없는 능력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이죠.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이 이길 수 없는 게임을 승리로 이끌 계책이.”

성진의 눈빛이 빛났다. 우리는 모두 성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때 소녀가 입을 열었다.

“소용없는 일이야.”

소녀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아.”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유진이 소녀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성진이 그보다 앞질러 말을 했다.

“우리의 승리 조건은 당신을 지키는 겁니다. 저도 싸울 생각은 없어요. 승산이 없는 걸요 뭐. 그렇다면 싸우지 않고 이겨야지요.”

성진의 말에 소녀는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침묵한 소녀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해 보였다.

성진이 작전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나와 유진은 진지하게 그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5시간 후

유진이 문 앞에 선다. 나와 소녀는 우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일단 선봉은 저와 유진씨입니다. 유진씨가 있는 이상. 적들은 쉽게 덤비려 하지 않지요.

유진과 성진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밖으로 나간다. 밖에는 아니나 다를까 벌써 배덕의 마녀가 와 있었다. 눈에 보이는 인원은 네 명이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것이 배덕의 마녀. 그리고 그 뒤로 이상한 상자 같은 것을 매고 있는 남자가 한 명 이었는데,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 키가 컸고 호리호리했다. 그는 연신 몸을 휘청거리며 서 있었다. 아마 탐욕의 장군이라는 자겠지. 그리고 그 뒤로 낯익은 얼굴. 붉은 머리의 아르펠과 올백머리의 테르펠이었다.

-주눅 들지 말고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배덕의 마녀. 우선 할 이야기가 있다. 여기 이 인간의 물음에 대답해라.”

배덕의 마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조금 떨어져서 보는 거였지만 그 공포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래도 배덕의 마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그녀는 무슨 검은 가죽으로 된 두꺼운 띠 같은 걸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무슨 문양 같은 것도 새겨져 있었는데, 몸 전체를 두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검은색 천 같은 것이 또 몸을 한 번 휘감고 있었다. 무척 선정적인 모습이었다.

-처음엔 거절할 겁니다. 대화할 시간 따윈 없어. 라고 하겠지요. 문제는 그 다음이에요.

“배덕의 마녀라, 그러고 보니 그런 호칭으로 불려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시간 낭비하긴 싫다. 그 분을 내놔라.”

성진의 이야기가 맞아 떨어졌다. 유진은 성진이 지시한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희망은 없다. 그렇다면 성진의 작전을 한 번 믿어보자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희망의 조짐이 있었다.

“배덕의 마녀. 나는 그 계집을 묶어두었습니다. 지금 내 부하가 계집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 계집을 넘기지요. 아울러, 에피릴의 위치까지 알아내 보겠습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우리 세계 인간들을 버러지쯤으로 보고 있어요.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듯한 말로 들릴 겁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거지요.

“호오? 그럼 어디 말해 보거라.”

맞아 떨어졌다. 성진은 천재다. 녀석은 진정한 천재다. 나는 환호성을 지를 뻔 했던 것을 겨우 참았다. 저 배덕의 마녀가, 고작 한 인간이 예상한 대로 움직여주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성진이 앞으로 나섰다.

“아름다운 여군주시여. 저는 예전부터 군주님과 군주님의 세계를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매복하고 있는 자들을 모두 불러주십시오. 서로가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와 같은 배신자들은 의심이 많기 마련이지요.”

-나는 배덕의 마녀가 흥미를 가질 이야기를 계속해서 할 거야. 그리고 그 때를 기해, 달아나는 거야.

타이밍이 왔다. 나는 소녀에게 눈짓을 했다. 분명히 도박이었지만, 가능성은 있었다. 우리는 집 안이 아니라 집 바로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8

소녀와 나는 조심조심 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달릴 수도 없었지만 조금씩 과감해졌다. 정말로 아무도 추격해오지 않았다. 성진의 작전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우선 유진씨와 내가 적의 주의를 끌지. 일단 우리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믿게 하고서는 숨어 있는 모든 부하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게 해달라고 할 거야.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찰나에 너희는 도망가는 거야. 완전한 타이밍이지. 그리고 나는 배덕의 마녀를 섬길 터이니 다른 세계에 우리가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거야. 목숨 구걸인건데, 배덕의 마녀는 결코 의심하지 않겠지. 물론 그렇다고 배덕의 마녀를 끝까지 속일 수 있을 리는 없지. 분명히 그녀는 중간에 눈치를 챌 거야. 그리고 우리에게 속은 것을 기분 나빠 하겠지? 그와 동시에 그녀의 부하들이 너희를 쫓을 거야. 그 때, 유진씨가 나를 때리는 거야. 날려 버리는 거지. 즉, 유진씨도 나한테 속았다는 설정이야. 유진씨가 나를 진심으로 치면 난 한 방에 죽지? 즉 배덕의 마녀가 보기에는 유진씨가 나를 죽이고, 그 후에는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너희를 직접 잡으러 온다는 설정이지.

나와 소녀는 달리고 있었다. 성진의 이야기는, 물론 유진씨와 우리가 멀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도박이었지만, 일리가 있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달렸다. 소녀는 조금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눈앞에, 테르펠과 아르펠이 나타났다. 그 둘은 웃으며, 조금씩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이, 네 친구에게 깜빡 속을 뻔 했다. 하지만 그 꼬맹이는 달라. 이미 우리 편이 되었지. 알아? 네 친구 녀석을 주저하지 않고 한 방에 보내버리더군. 아 저기 오셨군.”

아르펠이 가리키는 곳에 유진이 서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두 사람은 정말로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정말 반가운 일이었겠지.

“이봐, 서유진. 이 녀석들도 네가 처리하도록 해. 우리 주군께서도 좋아 하실 게다.”

테르펠은 차갑게 웃으며 마치 우리에게 들으라는 듯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유진은 그런 테르펠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연다.

“물론 처리해야지.”

-유진씨. 추적자들과 조우하면 일단 한 숨 돌리셔요. 저들의 능력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동료가 당한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면, 대응이 늦어지는 만큼 위험해 집니다. 처리할 때는 단숨에. 그리고 처리를 끝냄과 동시에 두 사람을 들고 달리세요. 유진씨가 지닌 조각의 힘은 전부, 달리는 데에 집중합니다. 전투중에 5분이라면 끊임없이 달리는 데는 더 큰 체력이 소비될 테니 1분 동안에 최대한 도망가야 합니다.

유진은 우리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숨을 몇 번 몰아쉬었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른 그녀는 여유롭게 웃어 보인다.

“미안하지만, 자비는 없어.”

유진이 말을 마친 순간, 유진의 귀걸이가 전에는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찬란한 광채를 발했다. 귀걸이는 순식간에 환한 빛을 발했고, 곧 유진을 중심으로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압력이 밀려 나왔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이 초자연적인 ‘힘’이라는 것은 밀도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지금 유진이 발하고 있는 힘은 지금껏 처음 느껴보는 고밀도였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듯, 압도적인 압력에 정신조차 잃을 지경이었다. 조각의 힘의 최대출력. 신벌조차 빗겨낸다는 구원의 돌, 그 돌을 지탱하는 일곱 조각의 힘이었다. 그 힘은, 저 배덕의 마녀가 평소 발하고 있던 압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유진에게 상상 이상의 힘이 뿜어 나오자 테르펠과 아르펠은 본능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들의 놀람이 채 멎기도 전에 먼저 테르펠의 몸이 크게 흔들리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상황을 파악한 아르펠의 몸에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신체의 변형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운이 채 새어나오기도 전에, 아르펠은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을 하고는 자리에서 쓰러진다. 물론 그들이 방심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압도적인 조각의 힘 앞에서 두 명의 추적자는 반응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옆에 유진이 나타난다. 유진은 나와 소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다급히 외친다.

“팔로 날 감아!”

소녀는 시키는 대로 한다. 소녀가 하는 식으로 한다면 몸이 비스듬한 채로 유진의 어깨를 양 손으로 잡아야 하는데, 완전히 안기는 모습이 된다. 유진의 몸에 밀착하기 어려워 망설이고 있는데, 유진은 내 손을 잡아채서 자신의 몸에 두른다. 한 번 째려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꽉 잡아!”

유진은 크게 도약했다. 도약했다고 느꼈다. 유진은 거의 날고 있었다. 바닥의 타일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쏘아지는 탄환처럼 바닥을 딛고 앞으로 달려 나간다. 지지대가 되고 있는 바닥은 그 때마다 부서져 버린다. 눈을 뜰 수 없다. 숨도 쉴 수 없다. 엄청난 광풍이 우리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두려워졌다. 만약 작은 돌멩이나 나뭇잎이라도 이 정도의 속도라면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유진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유진은 멈춰 선다.

“더는 달릴 수 없어.”

유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렸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우리는 어디까지 온 것일까?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본다. 먼저 하늘을 본다. 아까의 그 절망적인 암흑으로 가득 찬 하늘이 아니라 평범하게 구름 낀 하늘이다. 처음 보는 풍경. 산길. 하늘은 거뭇거뭇해지고 있었다. 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게다가 이곳은 도시가 아니었다. 아마도 시골. 산은 무척 컸다. 작은 산이 아니다.

추적자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성진의 계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여기는 어디지요?”

“몰라. 아무튼 서울은 아니야. 방향을 여러 번 바꾸었는데, 아마 남쪽일거야.”

-유진씨는 힘을 남겨 놓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방향을 바꿔 처음과 같은 스피드로 조금 더 가신 후에 몸을 숨기세요. 교란 작전입니다. 그들은 어느 쪽을 추적해야할지 난감하겠지요. 그 사이에 저는 이 교수님 댁으로 가서 상황을 전하겠습니다. 이옌씨라고 했나요? 그분께 연락하면 최대한 빠른 시일에 7명의 수호자가 모두 모이겠지요. 지구 반대편에서 온다고 해도 최소 하루, 최대 이틀입니다. 여러분이 이틀만 몸을 숨기면 아군이 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오면, 우리는 이기는 겁니다. 이 이길 리가 없는 게임을!


9

유진은 곧장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꼭 살아남아야 해! 알겠지? 이봐 승우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가 지켜야 해.”

떠나기 전에 유진이 남긴 말이었다. 아마 유진은 달리면서도 여러 번 방향을 바꾸었을 것이다. 최대한 자신에게로 적의 관심을 쏠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유진은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데없이 생긴 일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배덕의 마녀. 하긴, 생각해보면 언제라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저 나만 상황을 애써 낙관하고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이 교수가 맞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바이칼호로 떠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그의 말. 하지만 나는 바이칼호에 갈 준비는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던 얼간이였고,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준비를 해야 한다며 시기를 늦췄다. 그러한 안일함이, 나의 안일함이 이런 상황을 불러온 것이다.

어머니의 기일에 찾아온 이 믿지 못할 사건. 성진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아니 적어도 소녀만큼은 그곳에서 변을 당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뜨끔해졌다.

우리는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있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마을로 내려갈까 하다가, 오늘 밤은 차라리 산에서 보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있었다.(성진의 지시였다.) 오늘 밤을 견디고 나면 내일은 어찌어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48시간이다. 지금은 이미 성진이 이 교수에게 가서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48시간만 지나면 유진을 제외한 6명이 이곳에 도착한다. 일단 전선에서 이탈한 후에 동료를 부른다는, 성진이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운 비책이었다.

“그들은 오지 않아.”

소녀가 말했다. 소녀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이라면 배덕의 마녀 말이야?”

“아니.”

“그럼 수호자들? 그럴 리가.”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묻고 있었다. 소녀는 슬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어째서 그들이?”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소녀는 쓸쓸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왠지 그 얼굴이 눈물을 흘릴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소녀의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 하얀 피부, 하얀 숨결. 그 모든 것이 눈에 녹아들고 있었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소녀의 담담한 어투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어째서, 어째서 소녀는 그들에게 미리 오지 말라고 한 것일까? 소녀는 메시아. 예언자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미래는 싫어도 알게 되지 않을까? 처음부터 말했었다. 자신을 위쪽 세계의 대표정도로 생각하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올 거라고, 발각되면 끝이라고. 그렇다면 소녀는 미리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단지 시간이 조금 안 맞았던 것 뿐.

“불안해하지마. 노래를 들려주고 싶지만,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이야기를 들려줄게. 일단 저기 앉을까?”

나와 소녀는 작은 바위 위에 앉았다. 바위가 축축해서 나는 우선 겉옷으로 바위를 닦아 주었다. 주변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산 속, 내리는 눈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떨어지는 해를, 잡아 세워두고 싶었어.”

소녀는 담담히, 그리고 쓸쓸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쩌면 너무 이쪽 세계를 오래 내려다봐서 정이 든 것인지도 몰라.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결국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배덕의 마녀에게 위협당하는 걸?”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끄덕인다. 그런 소녀의 모습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나는 호기를 부리고 싶어졌다. ‘마녀 따위는 걱정 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라고 호언장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어지고 있었다.

“내가 바라본 미래는 17년이었어. 지금으로부터 2년 후지. 신벌이 예정된 시간. 그 이후로 여기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었어. 나는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15년 전에 이 세계로 왔어. 신은 자애로우니까. 아니, 이 세계 사람들 중에도 좋은 사람은 있으니까. 반드시 구원의 돌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소녀는 잠시 말을 거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아주 긴 여행이었어. 하지만, 내가 신벌을 피하려는 노력을 하니까, 예정이 앞당겨진 거야. 그래서 나는 15년 후를, 지금을 예언했어. 지금 이 순간을 넘기지 못하면 예정에 없던 신벌이 내려져.”

“신의 뜻을, 막으려고 하는 거야?”

소녀는 내 말을 듣고는 웃어 보였다.

“그건 신의 뜻이 아니야. 여기, 사람들의 뜻이지. 여기 사람들의 죄는 너무 깊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 모든 것은 자초한 일이야. 하지만 이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나는 어쩐지 소녀가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물의 모피를 산채로 벗겨내고 잔인하게 살육하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모두가 혼자가 되고, 어쩌면 이런 세상이 계속 지속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책 하지 마. 넌 진심으로 날 도와주려고 했어. 난 그런 네 마음이 항상 감사했어.”

소녀의 말에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소녀는 슬픈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하얀 눈에 뒤덮이고 있었다. 조용했다. 무척이나.

“아직 내 이름, 기억하지 못하지?”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걸어간다. 나는 문득 부끄러워 졌다.

“응.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결국 너는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소녀는 가방을 연다. 노란색 털의 다람쥐를 닮은 동물, 에페가 고개를 쑥 내민다.

“자 어서 승우에게 가렴. 어서.”

에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게로 달려온다. 그리고는 내 외투의 안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간다.

“나를 지켜주려 했던 것처럼 에페를 지켜줘.”

소녀는 웃고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은 불현듯 느끼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소녀는 저리 불길한 말을 하는 가. 마치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과 같은 말투였다.

“왜 그래? 조금만 기다리면 돼. 조금만 더 버티면 다시…….”

소녀는 쓸쓸히 웃었다.

“나도 그 시절이 무척 즐거웠어. 하지만 이젠 시간이 없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는데 그게 아쉽네. 하지만 사람들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소녀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 처연해서, 나는 다가갈 수 없었다.

“나와 약속한 것, 잊어선 안 돼.”

덜컥.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몇 번이고 느꼈던 상황이다. 끔찍한 불안감과 공포가 내 몸을 휘감는다. 소녀의 등 뒤로. 온통 시커먼 배덕의 마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배덕의 마녀가 나를 못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배덕의 마녀는 조금씩 소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다가가지 마. 소녀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러나, 배덕의 마녀는 멈추지 않았다.


- 15년 전 겨울, 눈을 닮은 소녀를 만났다…….


빌어먹을, 나는 또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로, 이렇게 한심하게 모든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에페, 에페라면 나를 움직이게 할 수 있을 텐데, 에페는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마녀의 힘이 너무 강해서인가.

소녀와 마녀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소녀는 손을 마주잡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도는 마치 노랫소리 같았다. 맑고 청량한 음색이 산 전체를 아름답게 감싼다. 그 노래에 흠칫하며 마녀가 멈춰 선다.


- “떨어지는 해를, 잡아 세워두고 싶었어.”


움직여. 움직이란 말야. 제기랄.

마녀가 다시 움직인다. 이제 손이 닿을 만큼 소녀에게 다가왔다.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제발 움직여. 이대로, 이대로 소녀가 저런 마녀 따위에게 당하는 것을 눈 뜨고 보고 있을 리가 없잖아.

아아, 내게 힘이, 힘이 있었더라면! 유진처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지금 여기에서 달려 나가 소녀를 구할 수 있는 힘이. 저 배덕의 마녀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다면!

힘만 있으면, 소녀에게 무언가가 될 수 있을 텐데.


3장, 외로운 천사의 비가(悲歌) 끝.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자연 - 일반 (gon)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9-09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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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눈의 소리 - 4. 천호(天湖)로의 여정 (2) 08.09.08 355 2 28쪽
6 눈의 소리 - 4. 천호(天湖)로의 여정 (1) 08.09.07 332 2 48쪽
» 눈의 소리 - 3. 외로운 천사의 비가(悲歌) (2) 08.09.07 219 2 32쪽
4 눈의 소리 - 3. 외로운 천사의 비가(悲歌) (1) 08.09.07 448 2 38쪽
3 눈의 소리 - 2. 무너진 세계를 위한 랩소디 +1 08.09.06 505 2 58쪽
2 눈의 소리 - 1. 소녀의 방문 (2) +1 08.09.06 216 2 17쪽
1 눈의 소리 - 1. 소녀의 방문 (1) +1 08.09.06 882 5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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