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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괴물이 우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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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11.02 18:29
최근연재일 :
2012.11.02 18:29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41,635
추천수 :
393
글자수 :
202,939

작성
12.08.22 17:42
조회
692
추천
9
글자
10쪽

괴물이 우는 소리: 이 장 - 재해(03)

DUMMY

희민은 결국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 간단히 준비 운동을 하고 가볍게 뛰어나가며 그를 지나쳤다. 어둡고 좁은 골목을 거의 다 빠져나갔을 때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남자가 옆에 나란히 서서 달렸다. 희민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운동하기에 좋은 날씨군요.”


희민은 모자를 눌러쓰고 속도를 높였다. 남자도 지지 않고 따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전력질주를 해서라도 그를 따돌리고 싶었다.


근육질 몸매에 훤칠한 키와 잘 생겼다고는 못해도 듬직하고 호감이 가는 외모를 한 남자는 공원을 달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희민은 쏟아지는 시선에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평소에 운동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모두 다 나온 것 같았다. 평일 아침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도 미스터리였다. 이 모든 게 사전에 준비시켜 놓은 게 아닐까 의심됐다. 왜냐면 남자가 쓸데없이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골목으로 돌아오자마자 남자를 떼어놓듯이 집으로 들어간 희민은 시원한 물부터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던 도중 남자도 목이 마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밉상이어도 한 시간 이상 같이 뛴 사람을 그냥 내버려둔다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유리컵에 물을 한 컵 따르기로 마음먹고 커튼 사이로 밖을 본 순간, 차에서 1.5리터짜리 음료를 꺼내 마시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희민은 계획을 철회하고 샤워 준비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밖을 내다보니 남자는 없었지만 자동차와 휴대용 의자, 드레스는 그대로 있었다. 누가 훔쳐가면 어쩌려고 저러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곳까지 들어올 사람은 자신과 남자뿐이었다.


희민은 밖으로 나가 주변에 남자가 숨어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분명 특수 요원이었지만 하는 행동은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집 뒤에 놔뒀던 앞 카울이 부서진 스쿠터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말해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그렇다고 어제 행동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화풀이했다는 게 조금 속상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도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희민의 눈길은 드레스로 향했다. 옷걸이에 가까이 다가가 슬쩍 만져 감촉을 느껴봤다. 얇고 가벼웠고 약간 까끌까끌한 게 기분 좋았지만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찢어져 버릴 것 같았다. 이런 옷은 대체 어떻게 입은 건가 싶어 요리조리 살펴보다 뒤쪽에 숨겨져 있는 지퍼를 발견했다. 지퍼 또한 작고 약해 보여서 금방 부서질 것만 같았다. 이런 옷을 일상생활에서 입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 옷 괜찮지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봤다. 어느새 양복으로 갈아입은 남자가 골목을 걸어오고 있었다.


“근처 목욕탕에 갔다 왔습니다. 희민 씨 집에서 신세를 져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여자분 혼자 사는 곳에 부탁하긴 그렇더라고요.”


그는 리모컨으로 차 문을 열고 운동복이 들어 있는 비닐 봉투를 집어넣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차 안을 볼 수 있었지만 평범한 승용차와 다를 게 없었다. 차 문이 닫히고 남자가 희민을 바라봤다. 드레스를 보고 있던 걸 들킨 희민의 두 볼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옷이 마음에 드시면 파티에 입고 가시는 게 어때요?”

“아뇨. 별로 마음에 들지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라도?”

“너무 화려하고... 노출이 많은 것 같아요.”


그 말에 남자는 심각한 얼굴로 드레스를 살펴봤다. 희민은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드레스를 훔쳐봤다. 남자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허리를 세웠다.


“좋습니다. 내일은 꼭 마음에 드는 걸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뇨 아뇨. 다른 건 별로 필요 없어요. 그냥 평소에 입던 걸로 입고 갈 거니까.”

“아닙니다.”


남자는 갑자기 희민의 두 손을 잡고 눈을 사정없이 반짝였다. 희민은 당황하며 부담스러운 그 눈빛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남자가 놓아주지 않았다.


“희민 씨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여성은 꾸미면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저는 옷에 조예가 없어서 제대로 볼 줄은 모르지만 이 드레스들은 꽤 유명한 분들이 디자인한 걸로 압니다. 분명 그 중 한 벌은 희민 씨 마음에 들 겁니다.”


부담스러운 눈빛에서는 부담스러운 말이 끝나자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사람,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남자는 휴대용 의자와 드레스를 주섬주섬 챙긴 다음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가 떠나기 직전에 무언가 번뜩 떠오른 희민이 말했다.


“저기요. 아저씨!”

“예?” 남자가 창을 내리며 말했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남자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 가르쳐 드렸었는데...”

“에? 진짜요? 전 기억이 없어요.”

“상관없습니다. 다시 가르쳐 드리죠. 김하대입니다. 그냥 김 요원이라 부르세요.”

“예. 김 요원님.”


김 요원은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인사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골목길을 빠져나간 후 희민은 그가 나사 하나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깊게 친해지진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집으로 들어와 옷장을 열었다. 안에는 여분의 옷과 구부러진 가검, 부러진 진검, 그리고 써본 지 오래된 봉이 비스듬하게 들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옷보다 무기들이 차지하는 부피가 더 커 보였다.


희민은 봉을 꺼내 공중에서 한번 휘둘렀다. 잊고 잊던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추억 속에 빠질 때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동시에 마음 가는 대로 봉을 움직이며 연무를 펼쳤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든 검을 쓰면서 의식적으로 봉을 놓은 지 5년이 넘었지만 몸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자기도 모르게 온 힘을 다해 바닥을 찍으려다 정신을 차리고 봉을 멈췄다. 우습게도 그 순간 박화양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라면 방금 같은 상황에서 절대 멈추지 않았을 것 같았다.



※※※



다음 날, 사람들의 출근 시간이 지난 지 얼마 안 되는 오전 열 시에 김 요원이 기다란 검은 차를 뒤에 붙이고 집 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녀 요원들이 차에서 드레스들을 꺼내 마당에 전시하듯 늘여놓았다. 그들이 꺼내놓은 드레스는 대충 봐도 오십 벌은 충분히 넘어갔다. 이 광경을 창문으로 바라보고 있던 희민은 땅을 파서라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요원이라는 것들이 무슨 해괴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가.


“희민 씨! 저 왔습니다!”


김 요원이 쓸데없이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주변 빌딩에서 사람들이 내다볼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시간을 끌면 괜히 일이 커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김 요원 뒤에 있던 다른 요원들이 동시에 몸을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본 희민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제 부하들입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옷을 고르세요.”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나! 외침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희민은 상상 속에서 김 요원 멱살을 붙잡고 공중에서 흔들어댔지만 현실에선 아무 말 않고 드레스를 살펴봐야 했다. 매년 생각했지만 어르신들과 관련된 기관 인사 몇 명과 함께하는 조촐한 자리인데 왜 그렇게 차려입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앞에 있는 드레스들도 영화제에서 여배우들이 입을 만한 디자인의 옷이었다. 이런 건 예쁘긴 해도 활동성이 상당히 떨어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으론 궁시렁대도 희민은 드레스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평범하게 쇼핑에 푹 빠진 한 명의 여자였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여성 요원들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 애가 정말 그렇게 셀까?”

“글쎄. 그냥 보기엔 다른 애들과 다를 게 없어 보이긴 하다.”

“나이도 우리보다 적어 보이고.”

“나이 든 달인들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굉장하다던데.”

“난 예전에 나이 든 여자분하고 현장에 출동해봤는데 멀리 달아나는 범인을 돌멩이로 맞추더라. 그거 있잖아. 탄지신공 같이. 그게 범인 종아리에 맞았는데 그냥 구멍이 뚫려 있더라.”

“그게 가능해?”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야.”

“거기, 잡담 그만.”


후배들의 말소리를 들은 김 요원이 위엄있는 목소리로 주의를 주자 모두 입을 다물고 정자세로 돌아갔다.


희민은 수많은 드레스 중에 마음에 꼭 드는 걸 찾아냈지만 손으로 만져보는 건 망설였다. 그 옷은 소녀가 입을 법한 수수한 흰색 옷이었다. 다른 화려한 옷들 사이에 어떻게 이런 옷이 끼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원래는 없었는데 자신을 위해 뿅하고 나타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신보다 아영에게 어울릴 듯한 그 옷이 마음에 든다고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한자리에 오래 있으면 다른 사람도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김 요원이 희민의 시선이 박힌 옷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게 마음에 드십니까?”


희민은 얼굴을 붉힌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김 요원은 옷의 품번을 확인하고 그것을핸드폰에 메모했다.


“모두 철수!” 김 요원이 외쳤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요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김 요원은 핸드폰을 품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럼 파티 날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작은 지진이었다. 진동을 느낀 희민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유감스럽게도 그곳에서 지진을 알아차린 사람은 희민 뿐이었다.


“김 요원님.”

“예?”

“지금 땅이 조금 울렸는데 못 느끼셨어요?”

“어, 그랬습니까? 전혀 몰랐는데.” 분명 전혀 알아채지 못한 표정이었다.


지진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흔하진 않았지만 가끔씩 약한 지진도 있었기 때문에 희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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