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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쟁이 은서우입니다

휘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완결

은서우
작품등록일 :
2012.11.04 23:01
최근연재일 :
2016.02.15 21:05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458,308
추천수 :
5,772
글자수 :
162,057

작성
09.05.19 23:27
조회
4,248
추천
23
글자
18쪽

1부: 제1장. 물음. (07)

DUMMY

십이일 십일일의 아침햇살이 가느다란 국숫발처럼 사방에 뻗쳤다. 하지만 주혜원(周慧媛)을 잠에서 깨운 것은 눈부신 아침빛도, 조금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들어온 사느란 바람도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요란스레 방문을 두드리는 든침모 오춘희(吳春琋)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마님, 송구하오나 어서 기침하시어 쇤네를 봐 주십시오! 마님, 쇤네 춘희옵니다!”



어릴 적부터 혜원을 보필하여 그녀가 신림(神林) 정문(丁門)의 본가로 시집와서도 곁을 지켜온 오춘희는, 사소한 일로 곤히 자고 있는 주인을 함부로 깨울 정도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혜원은 침상에서 일어나 바로 겉옷을 걸쳤다.



“마님! 잠깐만 나와 보시옵소서!”


“알겠네. 내 지금 나가네.”



혜원은 방문을 열었다. 잠을 깨워 죄송하다며 사죄부터 올리는 춘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먼저 자리부터 앉게. 말숙이를 불러 냉수라도 한 그릇 떠오라고 할까?”


“아니옵니다. 마님께서 직접 살피셔야 하는 일이옵니다. 쇤네는 마님을 모시려 왔습니다.”


“나를 데리러 왔다고? 왜?”


“설명을 드리자면 조금 기옵니다.”


“말해보게.”


“마님께서 건강을 회복하시어 오늘 본가로 돌아가겠다는 서신을 체신청(遞信廳)에 부치기 위해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습니다. 무심코 대문을 열었는데 어떤 처자가 옷이 피범벅이 된 채로 쓰러져 있지 않겠습니까? 놀란 마음에 우선은 집 안으로 들였사옵니다만, 그 뒤는 마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여……. 살펴보시고 처자가 깨어날 때까지 보살펴줄지 말지를 결정해 주시옵소서.”



옷에는 피가 묻은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는 여자. 혜원은 자신들이 잘못된 일에 휘말려 해를 입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보다도 이름조차 모르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야박스럽게 집에 들인 객을 도로 내쫓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여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말숙이랑 둘이서 객실로 옮겨놓았습니다.”


“가세.”



혜원은 즉시 객실로 걸음을 놓았다. 춘희는 혜원의 뒤를 따르면서 처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옷이 한과는 달랐으며, 나이는 열여덟쯤 되어 보였다. 검이 든 칼집을 꽉 쥐었는데, 옷에 많이 묻어있는 피는 그 여인의 것으로 보이지 않더라. 무엇보다도 얼굴이 많이 상해있는 것이 무슨 변고라도 당한 듯하다.



“혹, 자네와 말숙이가 그 여인을 옮기는 것을 누군가가 보지는 않았는가? 위병(衛兵)이나 행인 등의.”


“다행히 저희를 본 사람들은 없었사옵니다. 아무리 위병들이래도 신림 정문의 안주인께서 기거하시는 집을 함부로 범할 수 있겠습니까?”


“이럴 때 남편과 아들의 권세가 예상치 못한 도움을 주는군.”



혜원은 방문을 열어젖혔다. 의자에 앉아 손님을 보살피던 말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머리를 숙였다. 혜원은 침상에 누워있는 이름 모를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넘어지고 굴렀는지 흙탕물에 더러워졌지만 본래는 색깔이 곱고 바느질도 깔끔했을 치마저고리와 길게 땋은 머리끝에 매단 주홍색 댕기가 먼저 보였다. 한과는 다른 복식과 머리모양이지만, 혜원의 눈에는 생소하지만은 않았다.



“고름을 맨 저고리와 주름이 곱게 잡힌 치마는 서의 옷이지. 댕기머리도 그쪽의 처녀들이 하는 머리고.”


“그러니까 서나라 사람이라는 말씀이시옵니까?”



머루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더욱 동그래졌다. 말숙은 말로만 듣던 서나라 사람을 대면하니 신기하다는 듯이 세희를 내려다보았다. 차림새만 다를 뿐, 어제오늘 웃으면서 인사를 나눈 이웃을 대하는 느낌이다.



“하오면 어이하여 이곳 한에까지 왔을까요? 서의 국경에서 한의 동역(東域)까지는 마차로도 족히 십여 일은 소요되지 않습니까?”



보희이 꺼낸 의문에 혜원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상태를 보니 도중에 비적이라도 당한 듯싶네. 그 먼 길을 혼자서 왔을 리가 없으니 일행도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모두 죽었나 보네.”



혜원은 처자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옷차림을 보나, 손의 상태를 보나, 온갖 궂은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온 평민은 아닌 것 같다. 하기야 농사로 먹고사는 백성이었다면 무슨 까닭으로 이 먼 곳까지 나왔을까.



“하온데 마님. 저이의 옷에서 이런 것이 나왔습니다.”



춘희는 처자의 몸에서 떨어졌던 단검을 혜원에게 보였다. 혜원이 살펴보니 단검에는 특이점이 없었다. 허나 처자에게는 못내 중요한 물건이었을지도 모른다. 혜원은 단검을 춘희에게 돌려주었다.



“따로 챙겨놓게. 저 아이가 깨어나면 분명 단검에 대해 물을 걸세. 그리고…….”



혜원은 처자의 오른손에 꽉 붙들려있는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얼마나 귀중했으면, 의식을 되찾지 못한 상황에서도 저 검만큼은 놓지 않은 걸까. 검을 억지로 떼어내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면 옷을 갈아입힐 수가 없었다. 뺨이 벌겋게 얼렸고 목과 손에도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어 깨끗하게 닦아줘야 한다. 그러므로 처자가 고집만 부린다면 이쪽에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혜원은 검을 쥔 오른손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네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혹시나 해서 말한단다. 내 너를 지켜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불안을 내려놓으려무나. 헌데 네가 힘껏 잡고 있는 검 때문에 네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히기가 어렵구나. 허니 잠시 손에서 검을 내려놓지 않겠느냐? 네 물건은 잘 간수했다가 네가 깨어나면 반드시 돌려주마. 약속한다.”



마님께서 어찌하실까 숨죽여 지켜보던 춘희와 말숙은 경탄했다. 마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는지, 칼자루를 단단히 붙들었던 손가락들이 스르르 풀렸다. 처자의 뺨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가 감당해야만 했던 비통함을 조금씩 느릿느릿 이야기하는 듯했다.


듣는 이의 창자를 끊어내는 단말마……목숨을 걸고서 잔혹한 칼부림에 힘껏 맞서는 사람들 ……증오를 담은 울음소리는 하늘을 찢어내고, 억울한 피는 땅을 검붉게 물들였다. 죽은 자들에게서 빼앗은 패물들을 보면서 히히대던 작자들과……못난 상전을 살리겠노라 죽은 것도 가여운데 죽어서도 능욕당한 가영이……그리고 그 사내. 삐뚜름히 올라간 입매에 걸린 웃음은 몹시도 비릿했다.


청은 공주의 일행이 어서 일야 평야를 지나기를 기다렸던 그들은 결코 비적나부랭이가 아니다. 뉘의 사주를 받고 움직인 자객들이다. 비적들에 의한 참사로 보이고자 농간질했다.


— 제법이군. 허나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그렇다면 그 배후가 누구란 말인가. 아니, 어째서 그자는 서의 공주가 한의 장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 우리가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억울하게 살해당해야 했나!


바윗덩어리에 묵직하게 눌렸던 숨통이 한꺼번에 터졌다. “허—ㄱ!” 세희는 숨소리를 거칠게 토해내면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엄마나!”



찬물에 적신 수건을 세희의 이마로 옮겨주려다가 말숙은 깜짝 놀랐다. 젖은 수건을 그만 이불에 떨어트리고는, 놀라움 반 반가움 반, 동그란 눈동자를 다람쥐처럼 깜빡거렸다. 세희도 말없이 말숙을 주시했다. 낯선 여자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상황이 이상했다. 그런데 여자는 헤벌쭉 웃더니 크게 소리쳤다.



“마님! 춘희 이모! 그 얘가 깨어났어요! 깨어났다고요!”



문으로 후다닥 달려가는 말숙의 뒷모습을 보고서 세희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소매가 좁고 길이가 짧은 녹두색의 유(襦), 치마폭을 허리 위까지 끌어올리되 발은 가려지도록 아래로 치렁치렁 내려트린 황색 상(裳), 머리칼의 반쯤을 고치 모양으로 말아 올리지만, 남은 아래쪽은 말총머리처럼 한데로 모아 묶은 모양새도 서에서는 볼 수 없었다.



‘결국 한으로 왔나.’



씁쓸함은 물에 떨어진 먹처럼 찬찬히 번졌다.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막막함도 잠시, 세희는 자신이 한의 옷으로 갈아입혀졌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가영의 단검도, 은월검도 보이지 않았다. 이불을 걷고서 침상에서 일어나려는데, 금방 나갔던 여자와 함께, 눈가의 잔주름마저도 고운 귀부인과 그를 모시는 키가 조금 작고 뚱뚱한 중년 여인이 들어왔다.



“일어나지 말고 그대로 누워있게. 아직은 좀 더 쉬어야 하네.”


“하온데 현합(賢閤)은 누구십니까? 그보다 어째서 제가 이곳에 있습니까?”


“내 이름은 주혜원(周慧媛)일세. 오늘 이른 아침, 자네가 대문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내 시비들이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왔네.”



혜원은 눈길로 그들을 가리켰다. 세희와 눈이 마주치자 말숙은 하얀 치아가 살짝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춘희도 호의를 드러냈다.



“하온데 현합. 제가 지니고 있었던 단검과 장검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들은 제게 소중한 물건들입니다.”


“그래, 매우 중요한 물건인 듯해서 침모에게 따로 보관해두라고 일렀네. 원한다면 지금 바로 돌려줌세.”



혜원이 춘희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춘희는 머리를 가볍게 꾸벅이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세희는 그들의 호의마저도 의심스러웠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까지는 절대로 마음을 놓지 못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살뜰히 이불을 덮어주는 주혜원 부인도.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으나 기력이 많이 쇠잔했어. 한동안 몸조리를 해야겠어. 가야할 길이 바쁘지 않다면 잠시나마 내 집에서 쉬었다가 가는 것이 어떻겠나.”


“…….”



세희는 주혜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경계심에 제법 사나울지도 모르는 시선을,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화한 분위기로 넉넉히 받아주고 있었다. 그래서 세희는 그녀가 더욱 의심스러웠다. 나의 무엇을 믿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말을 선뜻 꺼내는가.



“외람된 말씀이오나 현합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현합의 댁 앞에 쓰러져있을 당시의 제 상태는 누가 봐도 이상했습니다. 옷에는 피가 범벅이요,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으니까요. 만약 누군가에게 쫓기는 몸이었다면, 현합께서는 저를 도와주시려다가 도려 화를 입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자네를 해칠까 두려운가.”



타인의 속내를 정확히 찌르는 언사. 그래선지 세희는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주혜원의 눈길이 너무도 다정하고 따스했다. 겨우내 꽁꽁 얼어버린 땅마저도 촉촉이 녹여버릴 온기였다. 세희는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슬퍼졌다. 세희의 고집과는 어긋나게끔 크게 흔들리는 심리를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혜원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죽음의 공포에 바들바들 떠는 아기 고라니 같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나라고 왜 고민하지 않았겠나? 정신을 잃은 자네를 이곳으로 옮겨온 내 사람들도 마찬가지네. 허나 자네는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고 맥도 너무 불안정했어. 어딘가 다쳤을지도 모르는 여인을 아무렇잖게 내버려둬도 개의치 않을 만큼, 피아 구분이 철저하지도 못하고. 처음부터 가련타 여기니,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야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지.”


“…….”


“그리고 자칫 우리가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고 두렵기보다는 궁금했네. 젊은 처자가 무슨 곡절로 여기까지 왔을까. 복식과 머리모양을 보아하니, 한의 사람은 아닌 듯하고…….”



세희는 무심결에 어깨를 움츠려들었어도 여전히 세심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혜원의 낌새를 살폈다. 이 사람은 내가 피해야 할 적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믿어도 될 구원자일까.



‘헌데……나는 무엇 때문에 살겠노라 결심했나.’



문뜩 의구심이란 놈이 머리를 쳐들었다. 따져보면 자기모순이나 진배없다. 왕실과 조정의 지독한 견제가 끔찍해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소망했었다. 그랬던 자신이 끈질기게 몸부림쳐서 두 발로 예까지 걸어왔다. 오로지 살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허면 여기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과거와 달리 지금은 살기를 원했나.



아무도 없는 드넓은 광야에서 우리가 비참하게 살해당하게 된 까닭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인가. 계획에 따른 암살을 비적에 의한 소행이라고 조작한 배후를 색출해서, 고작 나 하나 살리겠노라고 귀한 목숨을 버렸던 가영을 비롯한 다른 궁인들의 원한이나마 풀어주기 위해서? 그래, 나는 가영을 비롯한 그들의 죽음에 너무도 미안해서 살겠노라 버텼어.


— 정말이야? 정녕, 넌 그들의 죽음이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책임감만 품었었니? 네가 순수하게 그것만을 생각했었더라면, 결국 한으로 왔나, 따위의 탄식은 삼키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너는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었던 곳으로 흘러들어왔다고 여겼었다. 분명히.


또 하나의 자아가 냉정한 말투로 세희에게 물어왔다. 순간 세희는 멈칫했다. 스스로에게 아니라고 확답을 줘야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져버렸다.



“이런, 안색이 다시 나빠졌구나. 자네가 다른 나라의 사람이라고 수상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 금방 전의 내 말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주게. 허나 자네의 이름은 물어보고 싶은데……, 답해줄 수 있겠는가.”



세희도 주혜원이 저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는지를 잘 알았다. 지금과도 같은 상황이라면, 자신이 꺼내놓은 이야기가 어떠하든지 그녀는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고 곧이곧대로 믿으리라. 그러므로 청은 공주가 한행(韓行)을 결정했던 연유만을 우선시한다면, 본인의 이름과 신분을 밝히며 하루빨리 장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은—”



하지만 연달아서, 그들 앞에서 내놓는 이름에 따라서 자신의 앞날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짐작도 확 떠올랐다. 세희는 마음 한쪽이 싸해졌다. 여태껏 자라면서 받아온 교육대로 공주의 책임과 의무만을 염두에 두었지, 언제부터인가 이끼처럼 파랗게 번져간 ‘또 다른 욕망’은 극구 외면하고 부정해왔었다. 그런데 그것은 순식간에 아름드리나무처럼 커다래지더니 거친 뿌리로 이성을 옥죄려들었다.



‘이대로 나를 밝히지 않는다면, 서의 청은 공주는 한의 황자와의 국혼을 치를 수 없게 된다. 허면 은세희라는 이름 석 자도 더 이상은 필요 없는 글자가 되지 않을까?’



보모의 지적대로 한과의 국혼을 받아들이면 고통스런 사람을 살게 되리라는 알면서도 뜻을 돌리지 않았던 궁극적인 까닭은, 어쩌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숨 한 번 편히 내쉬지 못한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서에서는 십팔 년간 양쪽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이름을 결코 떨쳐내지 못하기에 차라리 내 쪽에서 그곳을 버리자는 심산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마 입 밖으로는 선뜻 내지 못했던 바람은, 그간 잠재의식에 잠겼다가 서의 공주임을 증명하는 금패를 바로 가영에게 줘 버리게 만들었다. 가영이 죽었을 때에 청은 공주도 함께 죽었다면서.



“은하라고 하옵니다.”



은하(銀河), 지난 세월들을 일거에 끊어내면서 앞으로는 자의대로 살아보라며 스스로가 짓는 이름이다. 그간은 어두운 침묵으로 존재를 숨겨왔던 또 하나의 자아는 비난을 감수해서라도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었다.



“현합께서 말씀하셨듯이 저는 한의 사람이 아닙니다. 서에서 작은 상단을 이끌었던 어느 상인 부부를 주인으로 모셨던 사람이지요. 그분들은 한나라의 전역을 두루 여행하시면서 특색이 있는 지역들의 산물들을 싸게 구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저는 몸종으로서 그분들을 따랐습니다. 헌데 양국의 불가침영역인 일야 평야를 지나 국경에 다 와서 뜻밖의 사태를 맞게 되었습니다. 무장한 비적들이 저희들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저런…….”


“주인과 마님을 보호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전 상황에 휩쓸리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시간이 꽤나 지나서 사태가 잠잠해져서야 저는 정신을 차리고 마차 밖으로 나가보았습니다. 조금이라도 값이 나간다 싶은 물품들은 모조리 다 털렸고, 그분들을 비롯한 상단 사람들이 모두가 살해당했습니다. 저는 앞날이 막막해졌습니다. 한참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하다가 예전에 주인께서 마님을 지키라며 주셨던 검을 들고서 정처 없이 걸었습니다.”


“그랬었구나. 고생이 참 많았겠어.”



혜원은 세희를 측은하게 여겼다. 잠자코 듣던 말숙의 눈도 촉촉하게 젖어갔다. 솔직히 처음에는 처자가 무조건 마님의 호의를 의심하며 성난 고양이마냥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에 짜증이 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정을 들어보니, 참 딱하다. 자신이라면 그곳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막막한 공포감에 죽어버렸을 터.



“꿋꿋하게 버텨줘서 고맙다. 하늘이 너를 특별히 여겨 살려주셨으니, 목숨을 부디 귀하게 여기려무나.”


“예…….”



세희는 주혜원이 보면 볼수록 참으로 이상스러우면서도 신기했다. 주혜원은 고작 몇 마디 말했을 뿐인데, 끔찍한 경험으로 심리가 극도로 불안정해지고 위태롭던 이를 편안하게 진정시켜 주었다. 그녀의 분위기가 얼마나 따사롭고 부드러운지, 자기마저도 이냥 그녀를 의지하고 싶을 정도다. 거짓 이야기로 스스로를 감춰서 그녀를 기만해버렸지만……그래서 그녀에게 더 미안해지지만……그래도 지금은 온몸을 비트는 고통을 위로받고 싶다.


애써 억눌렀던 슬픔이 결국에는 터졌다. 줄곧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혜원은 별다른 말이랑은 하지 않고 다정하게 세희를 끌어안았다. 엉엉, 세희가 통곡하자 말숙도 따라서 큰소리로 울어댔다. 춘희는 눈가의 눈물을 손으로 훔쳐내며 객실에서 나와 찬간(饌間)으로 향했다. 은하에게 먹일 죽을 어서 만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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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1) +6 13.11.02 2,717 29 24쪽
13 2부: 序. +6 13.10.31 2,437 27 7쪽
12 1부: 제1장. 물음. (11) +11 09.05.20 4,578 2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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