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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쟁이 은서우입니다

휘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완결

은서우
작품등록일 :
2012.11.04 23:01
최근연재일 :
2016.02.15 21:05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458,340
추천수 :
5,772
글자수 :
162,057

작성
13.11.15 00:15
조회
2,546
추천
44
글자
22쪽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7)

DUMMY

영경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활발하게 돌았다. 황태자 신유성이 평상시 우대신 김종찬을 노골적으로 경계했음을 아는 이들은, 처음에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우대신의 집을 방문하는 황태자를 목격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결국 그들도 소문의 내용이 진짜라고 인정했다. 개중에 어떤 이들은 이것이 소문으로만 끝나지 않고 조만간 황실에 의해 기정사실화되지 않겠느냐고 예측했다.


십이월 삼일, 오늘도 역시나 유성은 오전부터 우대신의 집을 찾았다. 의도인지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유성은 김수영이 출타하여 집안에 없는 시간에만 걸음을 놓았고, 재종형제인 채영이 수영을 대신해서 응접했다. 그녀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유성을 서원(書院)으로 안내했다.


벽 한쪽을 절반 이상 채운 긴 서장에는 책들이 가득하고, 선반이 달린 수납장인 이계주자(二階厨子)들에는 갖가지 꽃들을 꽂은 화병, 분재들이 얹어져 있었다. 벽에도 서예나 그림 족자나 멋스럽게 걸려 있으니, 널찍한 방이 학문수양을 위한 공간으로 보일 만도 하다. 하지만 이곳은 운치가 있는 정원과 어우러져 있어, 손님을 맞고 담소를 나누는 한의 외당이나 서의 사랑방과 비슷한 기능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채영이 유성을 대접하기 위해 직접 준비한 녹차를 내밀었다.



“드시지요.”


“고맙다.”



유성은 기쁘게 찻잔을 들었다. 뺨을 어루만지고 지나가는 산산한 바람과 마음속 가득히 은은히 퍼져가는 다향을 맡으면서 슬그머니 채영을 보았다. 한손으로 찻잔을 받치고 천천히 차를 마시는 자태마저도 태생부터서 남다른 존재라고 짐작되리만큼 고아하다. 남들의 머리 위에 선 자라도 한순간에 일개 범부로 만들어버릴 감미로운 미색에 유성은 마냥 설렜다.



“내가 그대를 보러 이곳을 찾은 지 닷새째인가.”


“예, 날이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는 날로 그대와 가까워지는 듯해서 좋네만, 그대는 내가 귀찮을까 걱정스럽네.”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자 전하를 뵙는데, 어찌 귀찮겠습니까. 저야말로 전하께 송구스럽습니다. 오늘도 수영인 다른 용무가 있어서 전하를 모시지 못합니다.”



황태자가 우대신의 여식과의 혼담으로 우대신의 집을 방문한다는 소문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채영은 유성이 만나야 할 상대방이 자리를 지키지 못함을 꽤나 아쉬워하는 형색을 띠었다. 하지만 그는 김수영이 서원으로 나오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김수영은 우대신의 집을 방문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지난 사흘간 운향각에 눈길조차 던지지 않게 만든 사람은 바로 김채영이었다. 김수영이 뜬금없이 황태자를 대접하겠노라고 나타나버리면, 더 이상 단둘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유성은 차라리 수영이 오늘도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무슨 용무가 있어서 내게 그 얼굴조차 비추지 못하나?”



그럼에도 구태여 김수영의 부재에 관해 묻는 까닭은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화제로 삼든 김채영과의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함이다.



“한 시진 전쯤에 수영이의 글선생이 왔습니다. 해서 수영이는 지금 서헌(書軒)1)에서 선생과 함께 글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오신다는 기별을 받고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놓았으니, 조금만 있으면 수영이도 글공부를 마치고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채영은 재종형제의 글공부를 아주 일반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양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반면 유성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냉소를 터트렸다.



“하앗, 수영이 글공부를 한다고?”



자고로 여인이란 정성을 다해 지아비를 받들고, 건강한 후사를 낳으며, 도리를 다해 시부모를 봉양하면 족하다. 부부지연을 맺을 사내와 서한을 주고받기 위해 문자를 배우는 것까지는 이해하나, 그보다 더한 학식을 쌓을 필요는 없다. 어쭙잖게 글공부를 한답시고 서적을 잡고 시를 쓰다보면, 여인의 도리를 소홀히 한다. 성미도 드세져서 급기야는 지아비를 이겨먹으려고 든다. 고로 부부간의 위계질서가 분명해지고 집안이 평안해지려면, 계집에게 필요 이상 먹물을 먹여서는 안 된다. 유성은 쓸데없이 학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수영을 황태자비로 맞으면 공연히 자기 골치만 아프다고 머리를 가로흔들었다. 말없이 황태자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던 채영이 차분히 말을 건넸다.



“제 어림짐작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규방여인이 사내들처럼 글공부를 하는 것을 마뜩찮게 여기시는 듯합니다. 규방여인들은 글선생을 초빙하여 학문을 수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유성은 뜨끔했다. 그렇다고 긍정하기가 주저되었다. 자기가 꺼낸 답변에 채영이 드러낼 반응이 걱정되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나흘간의 채영은 상당히 지적이고 현명했다. 자신의 풍류를 과시하고자 건넸던 시에 능수능란하게 답했으며, 자신의 학식을 자랑하려고 늘어놓은 경서의 구절을 원활하게 풀이했다. 대화를 통해서 드러낸 식견은 분명 귀족가의 보통 여인네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빛나는 지성미는 김채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녀에게 점점 빠져드는 본인을 발견하면서, 유성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이미 김채영은 특별한 존재로 인지했다. 서의 진명 공주에게 국혼을 제안했다가 좌절된 이후로 뼈저리게 곱씹어야 했던 쓰디쓴 열패감을 어느새 잊게 할 만큼 대단했다.



“대부분의 사내들은 이리 말하겠지요. 모름지기 아녀자는 부모의 슬하에서 성장하여 자기 수준에 적당히 맞는 사내에게 시집가서, 얌전히 내조하며 공손히 시가를 모셔야 한다. 실제로 이 나라의 여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고, 한나라 여인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허나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사내들만큼 학문에 깊게 정진하지는 못하더라도 귀족가의 여인으로서 최소한의 교양과 학식은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예의범절을 익히고 사람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경서를 공부해야지요. 아울러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의견을 타당하게 밝히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갖추려면 다양한 학문을 접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사람이 어질어야 바깥양반의 이름이 드높아지며, 어미가 현명해야 자식도 올바르게 자란다고 했습니다. 지아비를 지극정성으로 내조하고 후사를 굳건히 육성하기 위해서라도, 여인네들도 어느 정도는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헌데, 저의 이런 생각이 아주 틀렸을까요?”



본인이 하고팠던 말을 야무지게 다하면서도 마지막에는 상대방에게 동조를 구하는 화법을 사용하여 생각이 다른 상대방의 기분까지는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성은 틀렸다고 받아칠 수만은 없었다. 김채영의 말이라면 그 한 자락도 상냥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콩깍지에 씌어도 단단히 쓰인 모양이다. 그예 유성은 웃어버렸다.



“아니다, 그대의 말이 맞아. 나야말로 오늘도 그대에게 하나를 더 배워간다.”


“황송하신 말씀입니다.”



채영은 싱긋했다. 유성은 여자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대는 태양처럼 눈부시게 찬란하면서도 별처럼 계속해서 바라보고 싶다는 등의 연애시가에서나 볼 법한―평상시라면 속이 오글거린다고 눈살을 찌푸렸을―달짝지근한 구절들이 입안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어차피 자기 입으로 내뱉고도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하기는 차후의 일. 그녀를 향해 꼭 말하고 싶다면야 두 눈을 딱 갚고 꺼내놓을 수도 있다.


헌데도 막상은 말머리를 내지 않은 연유는, 그대를 열렬히도 연모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을 벌써부터 내놓기가 겸연쩍어서다. 오늘을 포함해서 다섯 번째의 방문이다. 수영은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채영과 서너 시간을 다정하게 대화하고 자못 아쉬워하면서 일어섰다. 이쯤 되면 채영도 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아차렸을 터.


하지만 김채영의 태도는 지난 달 이십칠일 밤, 정원에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늦은 시간, 도로에서 처음 만났을 적의 도도한 분위기만을 유지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지만, 하루가 지날수록 마음이 뜨거워지는 자신과 달리 김채영은 작은 바람 한 점 일지 않아서 마냥 평화로운 호수처럼 잔잔했다.


그것이 내심 서운하다. 내 머릿속에서는 그대가 하루 종일 자리를 잡고 있는데, 어째서 그대는 나와 같지 않는가. 하루에도 여러 번 그녀에게 한판승을 빼앗기면서도 입으로 속내를 시인하지 않음은, 사내의 마지막 자존심이리라.



“매번 느끼지만, 그대가 주는 차는 정말 맛있어. 계속 마셔도 질리지 않겠어.”


“칭찬이 과하십니다. 저는 아랫사람들이 정성을 들여 키우고 말린 찻잎을 다관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기만 했습니다. 뜨거우나 맑은 물은 얼마의 시간을 통해 녹차를 우려내주고, 깨끗한 옥빛 찻잔은 녹차의 멋을 더해주지요. 제가 들인 공은 없습니다.”


“한 것이 없다니, 어찌 그리도 섭섭한 말을 하나? 나를 위해 차를 준비해주는 사람도 그대요, 나와 함께 차를 마셔주는 사람도 그대이지 않나? 허니,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아니, 그다음날도 이렇게 그대에게 차를 청해도 될까.”


“예, 그리하십시오. 전하께서 청하신다면 언제든 차를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생각이 바뀌었다. 너무도 잔잔해서 야속하게도 느껴지는 채영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싶어졌다. 하얗게 얼어붙은 얼음처럼 변하지 않은 태도라면 어떻게든 깨버리겠다. 먼저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사내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대도 이제는 상관없다. 사내의 자존심을 내려놓고서 도통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은 여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련다.



“아니, 그대는 내 말의 진의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어. 나는 분명히 앞으로 그대에게 차를 청한다고 말했다. 이는 앞으로 김수영이 아닌 그대를 만나기 위해 이 집을 찾겠다는 의미야.”


“허나, 황태자 전하와의 혼담이 오가는 규수는 저의 재종형제이지 않습니까.”


“뭐?”



유성은 웃음을 터트렸다. 채영이 자신과 김수영과의 혼담을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왜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에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내는 이야기지, 내 맘은 전혀 그렇지 않아. 정녕 그대는 여태 모르고 있었나? 나, 신유성이 바라보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유성은 채영과 그 사이에 놓인 찻상을 옆으로 냉큼 치워버리고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채영은 조금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으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나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유성은 심장이 요란히 뜀을 느꼈다. 지난 달, 이십칠일 밤의 재회 이후로 마음속에 담아두고만 있던 말을 이번에는 확실히 꺼내기로 작정했다.



“내가 그대를 다시 만났을 때에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내가 그날의 연회에서 진짜로 만나고 싶은 사람은 김수영이 아니라 그대였다고.”


“허나 전하께서 그날의 연회에 참석하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전하께서 저의 재종형제를 황태자비로 맞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어제, 황실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황명을 받들어 방문했다는 상시(尙侍)께서 수영을 살피고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황실에서도 수영을 황태자비로 점찍어두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황실에서 원하는 것은 우대신의 딸―김수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딸로써 얻어질 우대신의 권세와 재력이다. 내가 황위를 계승받으면 나의 황권을 강화하는 데에 필요한 우대신의 강력한 지원을 이끌어내려고 혼사를 이용한다는 소리다. 허니, 우대신과 혈연관계에 있다면 구태여 그의 딸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


“…….”


“어찌하여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냐? 내 말의 뜻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느냐,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느냐? 좋다, 네가 내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네가 이해할 수 있도록 내가 다시 말해주마. 네가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도록 내 확실히 말하리라. 김채영, 내가 원하는 반려는 김수영이 아니라, 너다. 너를 열애한다. 허니 내 여인이 되어라!”


“…….”



채영은 욕망과 소망으로 이글거리는 사내의 눈동자를 보았다. 뜨겁게 타오르면서도 간절한 눈빛에 ‘김채영’은 조금은 놀란 기미를 드러내나, ‘은세류’는 새삼스레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아흐레 전의 첫 번째 만남이나, 닷새 전의 두 번째 만남이나, 모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애당초 눈길 하나도 허투루 던지지 않았으며 미소 하나도 무심결에 짓지 않았었다. 몸에 걸치는 옷 하나까지에도 첩자들을 통해 파악해뒀던 신유성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신유성의 관심을 온전히 받기 위해서 심혈을 다해 만든 인물이 바로 ‘김채영’인데, 그가 어찌 여태껏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이쯤 되면 신유성이 본인의 입으로 사랑을 고백하기야 지극히 당연하다.



‘허나 우선은…….’



채영은 유성의 손아귀에서 슬며시 손을 뺐다. 그가 자신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알기에 의도적으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유성의 눈빛이 또다시 흔들렸다. 채영은 사느란 속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건 깊은 속내평이지, 유성의 눈이 살피는 겉모습으로는 외려 그를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사실은 솔직하게 털어놓고픈 말들을 지금의 입장에서는 차마 내놓을 수 없기에, 그저 모조리 삼키고 있는 듯한, 그런 것.



“…….”



이내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는 듯이 잠깐 떨구었던 시선을 들어 다시 똑바로 그를 보았다. 금방 전과는 확실히 다르게 곧고 반듯한 자세로.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조금 전에 제게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어째서인가, 그대는 내가 싫은가?”



유성은 일단은 조금 서운하면서도 그녀가 말문을 열기 직전에 떠올렸던 표정을 되짚어보았다. 뒤늦게야 황급히 수습하던 것은, 그녀가 얼결에 드러내고 말았던 진심의 한 조각이었다. 채영의 마음도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 질문에는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 금방 전에 내게 보인 그대의 눈빛만 봐도 나는 그대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를 알아. 허니, 그대는 내가 하는 말만 들으면 된다.”


“전하.”



채영은 한 글자, 한 글자 명료하게 발음했다. 저변에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그만하시라는 의미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유성은 그녀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의향이 조금도 없었다.



‘김채영, 이처럼 단호한 형색을 띄어도 너는 이미 내게 본인의 감정을 들키고 말았다. 허니, 나는 지금 네가 하는 말, 마치 자기는 나와 마음이 같지 않다고 한사코 가장하려고 드는 이 말을 순순히 믿지 않는다!’



유성은 채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눈이 순간, 동그래진 것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힘을 주어 힘껏 끌어당겼다. 유성의 손을 뿌리지지 않은 채영은 그대로 품에 안겼다. 채영이 품속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유성은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그녀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무사처럼 강하게 말했다.



“나는 그대를 열렬히 사랑한다. 이렇게 매일 보는데도 헤어지고 나면, 또다시 그대가 그리워져. 내 하늘과 땅을 두고 맹세하건대, 내 반드시 그대를 내 정비로 맞겠다.”


“…….”


“허니, 그대는 나만 믿고 내 말만 따르면 돼.”


“말씀을 다하셨으면, 이제는 절 놓아주십시오.”



채영이 의사를 너무도 분명하게 밝혀오니, 유성도 더 이상 그녀를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유성은 까슬까슬한 뒷맛을 느끼며 팔을 풀었다. 채영은 즉각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가 말문을 열기 전에 먼저 똑똑히 말했다.



“지금까지 전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저의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유성은 이대로 쉽게 굽히지 않겠다고 어깃장이라도 놓는 양 갑자기 사늘한 기운을 띠는 채영을 마주보면서 첫 번째 만남을 떠올렸다. 그날 밤의 도도한 모습이 겹쳐진다. 유성은 이젠 입이 썼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제는 판단결과의 실효성을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측을 넘어서는 그녀의 태도가 아주 싫지만은 않다.



‘그래, 김채영. 너는 내게 쉽게 넘어올 여자가 아니었지.’



유성은 속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말해보게.”



하지만 채영은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 번의 호흡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정도의 틈을 두고 나서야 그를 차분히 응시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절더러 전하를 싫어하느냐고 하문하셨죠?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전 전하가 싫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감히 연모한다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사모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태여 내게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미 그대의 마음을 알았다.”


“아니요, 전하께서는 제 마음을 완전히 다 아시지는 않습니다. 제가 저도 전하와 같은 마음이라고 답한다면, 전하께서는 제가 전하의 뜻에 따라 전하를 지아비로 맞겠다고 허락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실 게 아니옵니까?”


“그야…….”



유성은 결국 말문이 막혔다. 채영이 던진 단도직입적인 말이 의중을 정확히 찔렀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부정을 하면 지금까지의 말들이 모조리 거짓이 된다.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하면, 채영이 찬찬히 자기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게 된다. 그녀가 꺼낼 그다음이 어떤 성질의 말인지를 훤히 짐작하겠는데도 말이다. 역시나 채영은 지금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기어이 내놓았다.



“전하께서 사랑에 매우 열정적인 분이심은 잘 알겠습니다. 허나, 제게 있어서 닷새는 열애를 고백하기에 너무나도 짧습니다. 아직 전하가 어떤 사내인지를 다 알지 못하옵니다. 전하를 향한 제 마음이 무엇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온데 어찌 이 자리에서 바로 전하의 여인이 되겠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채영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유성은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석하고자 재빨리 머리를 굴렸지만, 지금은 머릿속마저도 깜깜해졌다. 정말 아까까지만 해도 김채영이란 여자를 알 듯했는데 이제는 어떤 것도 확언할 수 없게끔 까마득하게 모르겠다. 시방 취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그저 가만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뿐이다.



“한순간에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은 그만큼 쉽게 꺼진다고 하더군요. 허나, 저는 저를 향한 전하의 연정은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저도 전하를 향한 제 마음이 정녕 어떤지를 스스로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저를 위하신다면 부디 제게 시간을 주세요.”



유성은 채영의 부탁이 마치,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세요, 내게 일방적으로 애정을 요구하신다면 나는 이대로 도망칠 수도 있어요, 라는 상냥한 협박처럼 들렸다. 유성은 복잡하게 엉클어져서 매듭을 풀 방법을 당최 찾을 수 없었던 머릿속을 차근차근, 그러나 빠르게 정리했다. 애당초 목표는 너무도 정적이어서 되레 차갑게도 느껴지는 채영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였다. 돌발적인 고백으로 그녀가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확실히 확인했다. 허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도 되지 않을까. 사내의 욕망만을 우선시한 욕심으로 행여나 그녀가 조금씩 열리려던 마음의 문을 아예 꽁꽁 닫아버리면 어떻게 하나. 유성은 최악의 경우만큼은 피하자고 자기 자신을 달래며 다정히 미소하였다.



“알겠네. 그대가 스스로 내게 와주기를 난 진득하게 기다리겠네.”


“감사합니다.”


“허면 오늘은 이쯤에서 일어서겠다. 곤시(坤時;오후2시30분~3시30분)에 서연(書筵)이 있어서 서둘러야 해.”



사실 황태자의 서연은 오전에 있던 일정이었다. 하지만 유성은 한시라도 빨리 채영을 만날 욕심으로 황태자가 반드시 임해야 할 경서강론을 취소했다. 황태자가 온갖 핑계를 대고 서연을 작파하기가 부지기수라, 동궁학사(東宮學士)들도 유성을 말리지 않고 조용히 서적을 덮었었다. 그럼에도 서연을 핑계로 삼은 것은, 오로지 연모하는 여인을 위해 나무처럼 묵묵히 기다리겠다고 약속하는 사내의 모습을 남기고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채영이 오늘의 만남에 관하여 자신의 그 멋진 모습만을 생생히 기억하지 않겠나.



“허면 어서 가보셔야죠. 장차 훌륭한 황제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헌데 채영이 방긋 웃으면서 칭찬까지 해줘버리니, 유성은 심히 양심에 찔렸다. 채영은 여인네도 학문을 익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닌가. 의당 황태자라면 서연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등 제왕교육을 성실하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만일에나마 황태자가 오래전부터 서연에 불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에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정말, 내키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서연에 참석해야겠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다. 허면 내일 또 보자꾸나. 아마 내일은 정오를 지나서나 올 수 있을 듯하구나.”


“예, 알겠습니다. 다만 오시기 전에 미리 기별을 넣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게도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래, 알겠다.”



유성은 대답하면서 일어났다. 잇따라 채영도 방석에서 일어섰다.



“허면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은 전하를 위해 생과자(生果子)를 준비해놓겠습니다.”


“나를 위해 말이냐? 기대하겠다.”



유성은 입술 밖으로 새어나가려는 웃음소리를 어금니로 꽉 물고는 황태자다운 품위를 차려 점잖게 답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채영이 오로지 자신을 위해 정성스레 준비할 생과자를 벌써부터 그려보고 있었다.








1) 서헌(書軒) : 공부방


작가의말

#.

만약 숨겨진 진실 같은 것이 없다면, 신유성과 김채영의 관계는 마냥 보기 좋은 핑크빛이었겠지요. 그래도 제가 나름대로 아끼는 커플입니다. 상당히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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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휘린 3부의 연재는 11월 16일부터 시작할게요! +3 15.10.31 1,463 8 3쪽
23 #. 2부 연재 끝을 자축(?)하는 후기 +9 15.10.01 1,163 13 6쪽
22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9) +5 13.11.26 2,371 33 21쪽
21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8) +5 13.11.20 1,814 27 14쪽
»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7) +5 13.11.15 2,547 44 22쪽
19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6) +8 13.11.12 1,678 20 13쪽
18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5) +5 13.11.10 2,648 58 22쪽
17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4) +7 13.11.06 2,061 22 15쪽
16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3) +4 13.11.05 1,909 43 16쪽
15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2) +5 13.11.03 2,447 36 13쪽
14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1) +6 13.11.02 2,719 29 24쪽
13 2부: 序. +6 13.10.31 2,438 27 7쪽
12 1부: 제1장. 물음. (11) +11 09.05.20 4,579 28 12쪽
11 1부: 제1장. 물음. (10) +2 09.05.20 3,969 30 11쪽
10 1부: 제1장. 물음. (09) +5 09.05.20 4,185 29 16쪽
9 1부: 제1장. 물음. (08) +4 09.05.20 4,483 32 11쪽
8 1부: 제1장. 물음. (07) +5 09.05.19 4,249 23 18쪽
7 1부: 제1장. 물음. (06) +3 09.05.19 4,438 33 11쪽
6 1부: 제1장. 물음. (05) +3 09.05.19 4,423 30 19쪽
5 1부: 제1장. 물음. (04) +3 09.05.19 5,457 32 21쪽
4 1부: 제1장. 물음. (03) +4 09.05.18 6,348 33 12쪽
3 1부: 제1장. 물음. (02) +5 09.05.18 6,372 36 11쪽
2 1부: 제1장. 물음. (01) +4 09.05.18 10,355 74 13쪽
1 1부: 序. +30 09.05.18 24,670 7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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