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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쟁이 은서우입니다

휘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완결

은서우
작품등록일 :
2012.11.04 23:01
최근연재일 :
2016.02.15 21:05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458,322
추천수 :
5,772
글자수 :
162,057

작성
13.11.10 22:04
조회
2,646
추천
58
글자
22쪽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5)

DUMMY

젊은 여자 점인(店人)은 진비월의 앞에 말차 한 잔과 경단꼬치 접시를 내려놓았다. 강가에 자리한 통원차실(通園茶室)에서는 손님이 차를 주문하면 곁들이로 팥소를 넣은 경단꼬치를 내주었는데, 보통은 두 개씩이었다. 하지만 그 점인은 제 맘에 드는 미남이 손님으로 오면, 주인이 흘겨보는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단꼬치를 하나 더 주었다. 비월도 뜻하지 않게 점인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헌데 비월은 점인의 기대에 어긋나게도 부드러운 미소로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곁들이 음식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정작 본인이 주문한 차도 바로 마시지 않고 찻잔만 잡고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생각에 골몰했다. 점인은 곧바로 흥미를 잃고는, 주문한다고 손을 드는 다른 손님에게로 엉덩이를 살래살래 흔들며 걸어갔다.



‘김 공, 나는 이 계획을 성공시키고자 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허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태자 신유성의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어젯밤, 본의 아니게 엿들었던 대화가 아직도 진비월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째서 하필이면 그녀가 작정하고 진의 황태자를 유혹하겠다는 요지의 말을 들어버렸을까. 서의 유일한 왕위계승자인 세류가 어떠한 각오로 이번 일을 계획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그 말을 여태 떨쳐내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세는 것이 무의미해졌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았다. 헌데도 정인이 다른 사내에게 여인의 눈길을 보내고 여인의 미소를 짓는 것을 상상만 해도 질투가 일어났다. 진심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아직은 현실로 이뤄지지도 않았는데도 구차한 감정을 느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내인가…….’



비월은 자조하며 찻잔을 들었다. 그때, 문을 열고서 방으로 들어가자 세류가 슬쩍 자신의 기색을 살피던 것이 생각났다. 자기가 혹 그 말을 듣지는 않았는지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자신은 끝까지 못 들은 척해야 한다. 서로를 위해서 말이다.



“제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비월 님이 먼저 오셨군요.”



비월은 눈을 들어 월미령(月美怜)을 올려다보았다. 어깨선에 닿을 듯이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에 저녁놀처럼 고상한 자줏빛 호복(胡服)을 입고 있었다. 진의 땅에서 진의 의제와는 전혀 다른 차림새를 갖춘 모습에, 비월에게서는 짧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미령은 차실 안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슬쩍슬쩍 훔쳐보는 것을 똑똑히 느끼면서도 태연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주변인들의 불필요한 시선쯤은 깡그리 무시해주는 고고한 오만함은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



“이전처럼 청조를 통해 서한으로만 보내도 되었을 터인데. 자네가 직접 오겠다는 연락을 받고서, 솔직히 나는 의외다 싶었네. 맡아서 하는 일들이 많아 좀처럼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지 않나.”


“예, 제 처지에서는 그렇지요. 당장 생각나는 일들만 해도 제법 많네요. 허나, 오랜만에 비월 님을 직접 뵙고 싶었습니다. 해서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까지 왔지요. 헌데……, 이 나라의 풍습과 제도는 저와 맞지 않아서, 복식은 저 편할 대로 했습니다. 차라리 타국인으로 보이는 편이 운신하기가 더 좋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비월은 빙싯 웃었다. 속칭 ‘십이단(十二單)’이라 불리는 귀족여성의 정복(正服)을 보고서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하던 세류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에서도 바지가 편하다고 걸핏하면 남복하던 사람이, 진의 의제에 맞게 차려입고 행동하려니 얼마나 힘들까?


미령은 비월의 얼굴에 살짝 떠오른 웃음꽃만 봐도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겠다. 그녀는 엷게 미소하며 슬며시 말을 건넸다.



“그분께서는, 무탈하게 잘 계시나요?”


“그럼.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뵙겠는가.”


“아쉽게도 그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겨를이 없습니다. 비월 님께 말씀만 드리고 바로 떠나야 합니다.”



미령은 말하면서 곁눈으로 찻집에 사람들이 대략 몇 명이나 있는지를 재빠르게 파악했다. 손님들은 저희들끼리의 대화에 열중하느라 더 이상 자기들에게로 시선을 던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쪽의 말소리가 아주 잠깐이라도 외부인의 귓가에도 스쳐지나가기를 원치 않는다. 사소하게 느껴질 요소들에도 미리 꼼꼼하게 신경을 써둬야 만일에 벌어질 사태를 미연에 방지한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잠시나마 관심을 두었던 미남의 상대방이 어떻게 생겨먹은 여인인지를 확실하게 봐두겠다는 의지로 미령의 외모를 찬찬히 살피던 여자 점인이 뒤늦게야 다가왔다. 미령은 생긋하며 딱 부러지게 답했다.



“괜찮아요. 난 금방 일어섭니다.”


“예, 알겠습니다.”



점인은, 일단 자리에 앉았으면 주문을 해야지, 왜 안 해? 라고 말하는 눈으로 미령을 슬쩍 흘겨보고는 수첩과 세필을 도로 들고서 뒤돌아섰다. 점인이 탁자에서 한 걸음 정도 멀어졌을 차에 미령은 검지로 탁상을 툭 쳤다. 탁상을 중심으로 일어난 공기의 파문은 그들의 자리에까지 넓게 퍼졌다. 하늘의 축복을 과하게 받아서 유독 신기(神氣)가 두드러지는 극소수를 제외한 하계인들은 전혀 감지하지 못할 빛이 그들을 둥글게 에워쌌다. 그들의 말소리가 불필요한 귀에까지 닿는 경우를 막기 위한 일종의 결계다.



“그럼 이제부터 진짜 대화를 나눠볼까요?”


“그러시게.”



비월은 목을 한 번 축인 말차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현재 한의 황궐은 상황이 어떠한가. 청은(淸誾) 공주가 왕비가 되면서, 내정의 세력구도에도 변화가 생겼지 않나?”


“어디 내정뿐이겠습니까? 외조의 세력구도까지 흔들리고 있습니다. 황제의 중인은 여전히 표면상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청월(靑月)의 말에 따르면 폐하의 의중도 결국은 서인 쪽으로 기울 듯합니다. 다만 당신의 뜻을 어디까지나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요. 은연중에 영친왕(英親王)……, 그러니까 서현(李曙泫) 황자에 힘을 실어주실 계획이시랍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영친왕비라고 불리는, 청은 공주를 통해서겠지만요.”


“서현 황자와 서인의 입장에서는 청은 공주가 황제의 뜻과 중인의 지원까지 연결하는 존재가 되겠군. 정리하자면 황제가 종국에는 이서현을 황태자로 삼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저희들 쪽에서는 그렇게 되리라고 추측합니다. 황후의 세력이 여전히 강해서 황제께서도 신중하게 행동하시고 당신의 뜻을 중인 전체에게도 알리지 않으셨지만, 그분과 가까운 최측근 인사는 이미 언질을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공주께서 혼인 전에 스승으로 모셨던 이부상서 이종호는 여전히 스승으로 있으면서 공주를 자주 만난답니다. 얼마 전에는 정민규 대사의 부인도 공주의 혼인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청성궁을 방문했었지요.”


“황후와 동인에서는 꽤나 마뜩찮아 했겠네.”


“청은 공주가 서현 황자를 도와 서인들의 세력만을 규합해도 동인들의 눈에는 황후의 전차(前借)를 따르는 것으로 비쳐집니다. 헌데 중인을 이끄는 주요 인사들과의 관계까지 돈독하니, 청은 공주의 정치적 성장은 황후를 자극시키기 충분하지요. 황후도 더 이상은 여유를 부리지 못할 겁니다.”


“허나 청은 공주가 왕비로서 영친왕비로 봉해졌으니, 황후도 이전처럼 섣부르게 공격하지는 못하겠지.”


“시모이자 국모의 체면이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서현 황자가 청은 공주를 철저히 보호하는지라, 황후로서는 청은 공주를 직접적으로 견제하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듣자 하니, 서현 황자는 청성궁에서 갖는 서인들의 회합에도 청은 공주를 꼭 참석시킨답니다. 단순한 대동의 수준이 아니라, 청은 공주에게도 안건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는군요.”


“서현 황자가 청은 공주가 외조의 정치에 관여할 방도를 열어주는군.”


“예. 청은 공주는 서현 황자의 배필이자 서인 수뇌부의 한 명입니다. 외조의 회의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서인의 인사들이 대신 공주의 견해를 전해주니, 공주는 여전히 외조의 정사에 영향력을 끼치지요. 공주가 항아로 외조에 드나들고 좌사로서 외조의 공무를 맡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관원들도 공주의 정치적 행보를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하란이 숙비였던 시절에 자기 목소리를 내며 국정에 관여하려들자, 당시 관원들이 거세게 반대했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현상입니다.”


“황제가 깔아두었던 포석이 이제 제 기능을 발휘하나?”



비월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의 황제는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이 연(李 淵)은 역대 황제들과는 확연히 다른, 파격적인 결정을 종종 했었다. 당시에는 기막히고 황당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꼼꼼히 따져보면, 결국 그의 결정이 옳았다. 통찰력을 갖춘 선견지명이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의 신하들은 황제의 결정에 무조건 반대만 하지 못했다.


타인으로 하여금 인정할 수밖에 만드는 ‘성과’는 그의 위엄을 높이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만약 장차 은세희가 사하란을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황후가 된다면, 그 또한 이 연이 황제로서 이룩한 위업 중 하나가 될 터.



“황후와 청은 공주의 대립각이 치열해질수록 민심도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겠군.”


“외조의 세력이 재편되면서 세력이 엇비슷해지면, 관원들은 민심에서 명분을 찾지요. 실제로는 백성들을 자기 몸처럼 여기는 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어쨌든, 비월 님의 말씀대로 그 민심의 방향도 앞으론 꽤 중요해질 겁니다. 지금의 황후인 사하란이 그 민심을 기반으로 실권을 키웠으니, 청은 공주도 그에 상응하는 지지력을 얻어야 황후를 꺾을 수 있습니다. 청은 공주에겐 있어선 상당히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요.”


“상대가 사하란이네.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야.”


“허나 그 점은 폐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황제께서 정녕 서현 황자를 황태자로 삼기로 결정했다면, 자신의 소생을 황태자로 만들려는 황후의 세력부터 어서 없애놔야 합니다. 허나 황후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후궁에 지나지 않았던 과거와는 다릅니다. 사하란을 지키려는 자들이 외조의 고관으로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동인의 실질적인 수장의 안위를 가벼이 여기겠습니까?”


“특히 동인의 수뇌부는 황후를 위한 친위군이나 진배없지.”


“우습게도 사하란이 지금처럼 정계의 거물로 커질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적절하게 준 사람이 황제 폐하이십니다. 황제께서는 당신의 손으로 만들어놓은 역대 최고의 황후를, 당신의 손으로 다시 끌어내려야 합니다.”


“그의 업보이니, 그가 감당하겠지.”


“예,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미령은 싱긋했다. 비월은 그녀의 눈빛에서 황제 이 연을 향한 호감을 읽었다. 일족의 안위가 걸려있어서 하릴없이 황제와 손을 잡았다고 설명하기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이다. 만약 월하 육성월이 오래전에 이미 서의 왕실과 금석지약을 맺지 않았더라면, 월미령은 황제의 신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이것도 그의 능력인가.



“그러고 보니, 자네도 이젠 하계사람이 다 되었네. 한의 내정(內政)에도 훤한 것이 그쪽에 몸을 담고 있는 듯해.”



비월이 슬쩍 흘린 말에 미령은 움찔했다. 하지만 애써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빙그레 웃어버렸다. 인정이었다.



“하계의 인간사에는 개입하지 않았던 제가, 한의 황제를 만나고 흑야라는 황제 직속의 비밀정보기관에 속하면서부터 그곳의 내부사정을 너무도 많이 알아버렸습니다. 맹주인 정 대사를 통해 폐하를 직접 뵙고 대화를 나누다보니, 뜻하지 않게 간혹 그분의 의중도 알게 되었지요. 해서 언제부터인가 저는, 제가 알고 있는 바들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부의……, 어떤 기밀들은 한의 황제 폐하와 너무나도 깊숙이 관련되어 있어서, 일부러 왕후 전하께 아뢰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율배반적인 행위에 스스로 당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난감한 것이 당연하네. 어쨌든 현재 자네가 속한 나라는 서가 아닌, 한이지 않는가? 엄밀히 말해서 나와는 입장이 다르지. 자네가 애매한 입장이기에 무엇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왕후 전하께서도 잘 아시네. 세류도 자네가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해서 왕후 전하는 자네에게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네. 허니, 왕후께 너무 미안하게 생각지 말게나.”


“……전, 그분들께 큰 결례를 범했군요.”



미령은 쓴웃음을 띠었다. 굳건하리라고 믿었던 관계들이 서서히 약간씩 흔들린다. 하신과 류흔에게 주상과 왕후를 신의로 받들고 진명 세자를 주군으로 모셔야 한다고 말했던 장본인면서, 한의 황제와 서의 왕후 사이에서 조금씩 주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직까지는 제법 보기 좋은 균형을 유지했는데, 아슬아슬한 평형이 언제 뒤틀릴지 모른다. 다름 아닌, 하늘에 본적을 둔 자신이.



“허나 전, 저의 가장 솔직한 속마음을 다른 성월(聖月)들에게는 결코 털어놓지 않겠습니다. 그들에게는 서의 왕실과 맺은 맹약에 따라 주상과 왕후 전하를 신의로 받들고 진명 세자를 주군으로 모셔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입으로 시인한 약속이었으니까요. 저도 그 약속을 잊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전보다 끊임없이 주저하고 고민하겠지요. 그것은 제가 감당할 몫입니다.”


“의외로 답은 쉽게 나올지도 모르네. 일족의 안전을 위해서 서의 왕실과 맹약을 맺었으나, 뜻을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이에게까지 목숨을 바쳐 반드시 이행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네. 서의 신하로 조정에 몸을 담그면서 맹약을 맺었던 사람은 나네. 허니 맹약이행의 책임도 온전히 내 몫이네. 그 의무를 자네들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어.”


“허나, 성월의 한 명으로서 맹약의 책임을 비월 님만 감당하게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비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띠며 차분히 말했다.



“맹약의 시작은 나였으나, 끝은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네. 잊었나. 나는 내 사랑과 운명을 찾고자 일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당주의 자리를 스스로 포기했네. 나는 그것이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네.”


“…….”


“허나 자네들은 지금껏 선택이란 것을 하지 않았어. 이젠 무엇을 선택할지는 자네들의 몫이네.”



미령은 울걱, 감정이 일렁였다. 하신과 류흔에게는 차마 털어놓지 못했던 혼자만의 고민을 전(前) 당주 비월이 너무도 쉽게 갈피를 잡아주었다. 그래서 미령은 못 견디겠다. 고민은 스스로 감당해야할 몫이라면서, 내심 기뻐하는 자신이 마냥 좋지만은 못했다.


기나긴 세월에서 나름대로의 중심을 지키며 변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믿었던 자신이, 어느 사이엔가 변해버렸다. 아니, 변해 있었다. 미령은 실소를 지었다.



“정말……, 저도 하계인이 다 되었군요.”


“…….”



미령이 어렵게 꺼내놓는 진솔한 고백에 비월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온화하게 미소하며 찻잔을 잡았다.






“어머, 황태자 전하가 아니시옵니까? 오늘은 일찍 오셨군요.”



세 걸음만 더 놓으면 홍주가 기거하는 처소의 방문 문고리를 잡는다. 그런데 어디에서부터 걸어왔는지를 모를 기녀 류지(柳枝)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그를 반가워했다.


그간은 홍주를 항상 초저녁에만 찾았다. 하지만 오늘은 대낮에 불쑥 들어가서 그녀를 놀라게 할 요량이었던, 유성은 류지 때문에 초장부터 계획을 망쳤다고 언짢아졌다. 애교랍시고 코맹맹이 소리를 과하게 넣는 류지의 목소리가 오늘은 더 듣기가 싫어진다.



“나한테 건네는 인사는 그만하면 되었다. 네 갈 길이나 가라.”



유성은 분홍빛 잇몸이 살짝 드러날 정도로 크게 웃음을 짓는 류지를 내버려두고 방문으로 성큼 걸음을 놓았다. 그러자 류지는 뜬금없이 뒤따르며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고 했다.



“아아니, 전하. 이대로 가시면 제가 너무 서운하지 않사옵니까? 저와도 대화해주세요!”



분명히 너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거절했건만 어이하여 자꾸만 따라붙느냐? 류지가 귀찮아진 유성은 얼른 방으로 들어가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문고리를 잡자마자 확 열어젖혔는데, 코끝에 닿는 공기가 수상쩍고 묘했다. 유성은 침석의 홍주를 빤히 보았다.


홍주는 금방 전까지 누워있었다는 듯이 이불을 걷고 자세를 고치는데, 속살이 은은히 비치는 얇은 장유번(長襦袢)만 입고 있었다. 이른 아침도 아닌, 해가 중천에 있는 시간에 속곳차림이다?



“기별도 없이 오셨사옵니까? 기별을 주셨으면 어여쁘게 단장하고 전하를 기다렸을 텐데요. 어제 밤새도록 전하를 기다리다가 미처 잠을 자지 못했사옵니다. 몸도 너무 고단해서 잠시 낮잠을 잤었지요.”


“그래?”



유성은 대꾸하면서 시선을 슬쩍 오른쪽 벽의 네모난 창으로 던졌다. 창문이 아예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눈에 쏙 들어왔다. 되짚어서 생각해보니, 류지가 자꾸 따라붙었던 태도가 영 수상쩍다. 금방 전까지만 해도 류지는 요란스럽게 굴더니, 유성이 방문을 열어젖히던 순간에 온데간데없이 꽁무니를 뺐다. 정황상 정리되는 결론은 하나다.



“헌데, 방 안이 너무 더웠나 보지? 해서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맞고자 창을 열어두었겠지? 이왕이면 옷도 최대한 얇게 입고……, 아닌가?”


“예? 예, 그렇지요. 암—그렇고말고요.”



홍주는 지나칠 정도로 머리를 주억거렸다. 유성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을 사실을 끝끝내 감추려는 얼버무림이었다. 유성은 눈에 빤히 보였지만 일단은 홍주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하온데……, 어이하여 오늘은 이리도 일찍 오셨사옵니까? 혹시 오늘은 낮에 춘정(春情)이 동하시어…….”



홍주는 눈웃음을 진하게 치며 바투 다가왔다. 신유성을 유혹하겠다고 작정했는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쓸었다. 하지만 유성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단내가 섞인 숨결이 싫었다. 간통의 현장을 들킨 마누라가 뒤늦게라도 지아비의 눈을 속이기 위해 오히려 교태를 지으며 색정을 자극하려는 꼴이지 않나? 유성은 아주 재미가 있어서 속웃음을 쳤다.


누가 한갓 기녀 따위에게 정절을 기대할까. 기녀는 아무에게나 웃음을 흘리고 교태를 부리는 길가의 꽃이다. 나만의 정원에 심어서 오로지 홀로 관상하기 위해 애지중지 키우는 꽃은 따로 있다. 유성은 손을 들어 홍주를 밀어냈다. 비밀을 숨기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계집의 처지가 불쌍해서 이번에는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살짝.



“실은 너와 차나 한 잔 할까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 네 얼굴을 봤으니 그걸로 되었다.”


“예? 예…….”



홍주는 유성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몰랐다. 차를 한 잔 하려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따라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의미다. 헌데 오늘 자신의 얼굴을 봤으니 그걸로 되었다는 뒷말도 덧붙였다. 그 말은 곧 자신을 만났으니 만족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보다 그가 들어오기 전에 방에서 벌어진 일을 설마 알아차렸을까. 해서 거기에 화났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주겠다는 것인지……, 뭐가 뭔지 몰라서 머릿속만 멍해졌다.



“허면 난 가느니라. 어젯밤 잠을 못 자서 고단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마저 편히 쉬려무나.”



유성은 돌아섰다. 홍주는 그를 이대로 돌려보내면 필경 후회할 것 같았다. 입안에만 뱅글뱅글 맴도는 말을 기어이 꺼냈다.



“어, 어째서 어제는 아니 오셨사옵니까? 그저께 그리도 매몰차게 나가시는 뒷모습을 보고서 저는 내내 울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제가 그립지 않으셨사옵니까?”


“…….”



유성이 걸음을 멈추었다. 홍주는 가슴이 뛰었다. 혹시나 기대를 품고 던진 패였는데, 성공했을까. 유성이 뒤돌아섰다. 가만히 홍주를 바라보았다. 홍주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자신을 뜨겁게 안아주기를 바라며 최대한 어여쁘게. 어느새 눈에는 눈물도 갈쌍댔다.



“해서, 오늘은 다른 사내의 위로를 받았나?”


“예……?”



홍주는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아픔을 느꼈다. 눈물이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역시나 눈치를 챘었구나. 신유성이 진짜 믿을 수 있게끔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찾고자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마구잡이 떠오르는 말들에서 아무것이나 입 밖으로 내보기도 전에, 그가 바로 뒷말을 붙였다.



“뭐, 그리 놀란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네년은 남자가 없으면 하룻밤도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쯤은 나도 알고 있으니.”


“저, 전하!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실은……!”


“어이하여 내게 설명하려고 하느냐? 언제부터 너와 내가 일일이 변명이 필요한 관계였던가. 네가 잊은 듯하니, 내 다시 한 번 말해주마. 나를 기다리지 마라. 나는 내가 원할 때만 이곳에 온다. 허니 너도 그때만 나를 맞으면 된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저는 전하의 여인이 아니옵니까?”


“네가 사내가 아니니, 굳이 정하자면 그렇겠지. 허나 내 정실부인은 또 아니지 않으냐? 허니 네게는 날더러 어제는 왜 안 왔느냐고 물을 자격이 없다.”


“예에……?”



내 머리가 멍청해서 황태자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할까. 홍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유성이 내뱉은 말을 몇 번을 되뇌어보아도 그 의미를 당최 모르겠다. 시야만 자꾸 흔들렸다. 언제나 듬직하고 당당하게 느껴졌던 뒷모습이 지금은 똑똑하게 보이지 않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리도 컸던가. 방에서는 이젠 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럴 순 없어…….”



다리의 힘이 풀리면서 홍주는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열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방문만을 멍하니 응시했다.


작가의말


#.

 

신유성을 보면, 전 이서현보다도 이영유의 생각이 더 많이 납니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미리 말씀드리자면, 일단 지금 계획으로는 한나라의 이야기는 영유가 장안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다뤄질 듯합니다. 그전까지는 은세류의 과업 달성을 다룹니다. 은세희를 더 마음에 들어 하시는 분들께서는 어쩌면 2부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세류는 세희와 성격이 확실히 다른데다가 세류와 유성의 이야기는 단순한 로맨스라고 말하기가 어려우니까요. 물론, 세류와 유성의 관계에 비월을 넣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지요. 눈치가 빠르신 분은 이미 눈치를 채셨을 겁니다. 2부 이야기(전반부)의 메인은 은세류+신유성+진비월이 됩니다. 신혜성 등 여타 인물들도 적절히 섞이고요. 그렇다고 한나라 이야기를 아예 손에서 놓지는 않아요.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진나라와 서나라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간간히 넣을 겁니다. 잡설이 길었습니다. 다음편도 곧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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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04 : 휘린1, 2부는 이북출간되었습니다.(구매처 안내) 14.11.03 1,713 0 -
공지 #. 03 : 2부 소개글 14.11.03 1,299 0 -
공지 #. 02 : 팬아트와 인물소개는 서재의 게시판에 있습니다. 14.03.15 1,854 0 -
공지 #. 01 : 외전 모음들. +1 10.11.16 2,732 0 -
25 휘린 2부 표지가 나왔어요~ +2 16.02.15 902 5 2쪽
24 #. 휘린 3부의 연재는 11월 16일부터 시작할게요! +3 15.10.31 1,461 8 3쪽
23 #. 2부 연재 끝을 자축(?)하는 후기 +9 15.10.01 1,163 13 6쪽
22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9) +5 13.11.26 2,370 33 21쪽
21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8) +5 13.11.20 1,813 27 14쪽
20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7) +5 13.11.15 2,546 44 22쪽
19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6) +8 13.11.12 1,678 20 13쪽
»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5) +5 13.11.10 2,647 58 22쪽
17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4) +7 13.11.06 2,061 22 15쪽
16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3) +4 13.11.05 1,909 43 16쪽
15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2) +5 13.11.03 2,445 36 13쪽
14 2부: 제1장. 독수리의 지친 날개.(01) +6 13.11.02 2,718 29 24쪽
13 2부: 序. +6 13.10.31 2,437 27 7쪽
12 1부: 제1장. 물음. (11) +11 09.05.20 4,579 28 12쪽
11 1부: 제1장. 물음. (10) +2 09.05.20 3,969 30 11쪽
10 1부: 제1장. 물음. (09) +5 09.05.20 4,185 29 16쪽
9 1부: 제1장. 물음. (08) +4 09.05.20 4,483 32 11쪽
8 1부: 제1장. 물음. (07) +5 09.05.19 4,249 23 18쪽
7 1부: 제1장. 물음. (06) +3 09.05.19 4,436 33 11쪽
6 1부: 제1장. 물음. (05) +3 09.05.19 4,422 30 19쪽
5 1부: 제1장. 물음. (04) +3 09.05.19 5,456 32 21쪽
4 1부: 제1장. 물음. (03) +4 09.05.18 6,348 33 12쪽
3 1부: 제1장. 물음. (02) +5 09.05.18 6,372 36 11쪽
2 1부: 제1장. 물음. (01) +4 09.05.18 10,354 74 13쪽
1 1부: 序. +30 09.05.18 24,669 7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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