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선공(先攻) - [1]
적어도 경상좌도수군 진영 내에서 소흡을 제외한 다른 문무관들은 나에게 딴죽을 걸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의 운신의 폭도 넓어졌다.
여유로워진 나는 병사들의 몸 상태를 보고 죽기 직전의 나라면 절대로 생각하지 못할 발상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왜구들만의 전유물.
항상 조선은 방어만 하는 쪽이었다.
나도 조선의 무관이었으며 성리학을 공부하던 문관의 자제.
침공과 약탈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을 했다.
나의 선택으로 인해서 병사들이 고통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를 했었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아직 조선을 쳐들어오기 전의 왜구들은 규합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것은 150명의 병사와 판옥선 두 척뿐.
그나마 두 척의 판옥선도 병사의 숫자가 부족하여 한 척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화약, 식량,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계획하는 것을 실행을 해야 한다.
“왜구 놈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
왜구들도 풀만 먹고서 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식량을 약탈해봤자 별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계획하는 것은 공훈을 쌓아 조정에서 함부로 병사들의 식량에 장난을 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또한 병사들의 사기 진작과 전투경험을 풍부하게 만들고 왜구들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는 기회다.
“약탈.”
백성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왜구들.
이제는 너희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할 것이다.
* * *
“화약과 식량보급을 더 늘려달라는 겁니까?”
“현재 지자총통을 운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네.”
“절도사님에게 보고를 하셨는지요?”
“보고를 했고 승인을 받았네.”
급히 절도사에게 찾아가 식량과 화약 보급을 늘려달라고 했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들을 어디다가 쓰냐고 물어봐서 내가 실행하려는 계획들을 솔직하게 말했더니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고 도리어 창고에 여유분량이 있다면 가지고 가라고 밀어줄 정도였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를 의심하는 것보다 지금 닥친 상황을 해결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식량과 화약을 담당하는 정 7품 박사는 수긍을 하며 물어본다.
“50발 이상을 쏠 수 있는 화약과 150명이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필요하네.”
“네?”
박사는 나의 말을 잘 못 들었다고 판단하고 다시 되묻는다.
“150명의 한 달 식량과 지자총통 50발 이상 쏠 수 있는 화약 그게 지금 필요하네.”
“종사관님? 지금 전쟁이 났습니까?”
순간 박사의 표정이 굳어지며 진중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본다.
“전쟁이 난 게 아니라네.”
“그렇다면 혹시...?”
그는 뭔가 이해를 한 듯 입을 가리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를 한다.
“무슨 착각을 하는지는 대충 이해를 하겠다만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네.”
분명 다른 파벌들의 사병들과 싸우는 것을 상상했겠지.
조선은 다른 나라에 대한 방어나 침략에 대해서는 아예 배제를 한다.
그저 정쟁을 벌여 서로 물어뜯기 바쁘지.
“그럼 이것들을 어디다가 사용하실 건지요?”
“자네가 더 이상 알 필요는 없으니 내가 말한 것들을 줄 수 있는가?”
별제 추이엄의 귀에 들어가면 골치가 아파질 수 있으니 되도록 말을 아낀다.
“음... 일단은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는 열쇠꾸러미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자 뒤를 따라간다.
거대한 창고.
그 앞에 선 박사는 굳게 잠긴 자물쇠를 열자 내부에는 병사들에게 보급되는 쌀, 무기, 갑옷 등등 정리가 되어 쌓여져 있는 게 보인다.
“어디보자.”
박사는 서책을 펼쳐 창고에 얼마나 있는지 직접 세기 시작한다.
이윽고 일일이 세던 것을 멈추고
“종사관님이 말씀하신 것들의 여유분량을 확인하니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만에 하나 여유분량이 없었다면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헌데 종사관님.”
박사는 진중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절도사님이 허락을 했다고 해도 이정도의 식량과 화약을 가지고 간다면 다른 문무관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몰래 가지고 가라는 건가?”
“네. 그것이 종사관님에게 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종사관님이 가지고 가실 때 저를 불러주신다면 해시(21:30~23:30)에 창고를 열어드리겠습니다. ”
나를 걱정해주는 것인가?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맙네.”
감사의 인사를 표하자.
나의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겸연쩍게 웃으며
“누군가가 자신의 녹봉을 털어 병사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비록 병사들의 식량을 책임지고 있지만 항상 줄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여, 그렇게 병사를 위하는 분의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배려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이자는 소흡의 휘하 문관인데도 불구하고 배려해주는 마음이 전해져 온다.
“하하하. 알겠네. 그럼 그것들을 가지러 가기 전에 자네를 부르면 되는 거겠지?”
“네.”
말이 통하는 정도가 아닌데?
삼도수군통제사의 관직에 있었을 때 보급을 담당하던 ‘그’와 비슷하다.
나와 합도 잘 맞는 것 같고 언젠가 이자를 데리고 가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럼 얘기가 된 것으로 알고 이만 가보겠네.”
“...수고하십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윽고 나에게 군례를 취한다.
* * *
검을 휘두르는 병사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세에 흠잡을 게 없다고 생각한다.
별제 추이엄이 시킨 훈련이 이럴 때 도움이 되니 다행이군.
수군의 훈련만 시키던 내가 갑자기 추이엄처럼 육전에 능한 훈련을 시키는 이유가 궁금했던 이종진은
“어째서입니까?”
“무엇이 어쨌다는 거지?”
“지금까지는 수군의 훈련만 시키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돌연 육전의 훈련을 시키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파벌이 없는 이종진에게 말을 해도 될까?
되도록 출전하기 전에는 마음속에 묻어두려고 했었다.
“자네는 육전에서 왜구들과 백병전을 벌여봤겠지?”
“백병전이라면 왜구들이 달포에 2~3번은 침략해서 질리게 했습니다.”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뜬금없는 소시를 하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품계가 더 높은 나에게 순순히 대답을 한다.
“어땠는가?”
“무엇을 말입니까?”
“왜구들의 백병전 능력. 그리고 우리 병사들의 백병전 능력에 대해서 말해보게.”
“왜구들과 우리 병사들의 백병전 능력에 대해서 말씀입니까?”
도무지 내가 하는 얘기가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사관님은 육전에서 싸우지 않고 판옥선을 타고 정찰을 하시기로 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일단 말해보게나.”
지금은 이종진의 궁금한 점을 풀어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정확히 백병전의 능력을 종합해 늦은 밤에 몰래 상륙해서 기습을 해야 할지 아니면 낮에 왜선을 부수며 상륙을 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백병전은 우리 병사들이 훨씬 뛰어납니다. 애초에 왜구들은 저희들이 없는 시간을 노려 힘없는 백성들을 주로 약탈을 하는 것뿐입니다. 막상 부딪치면 우리가 필승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이종진이 얘기한 것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어떻게 싸울지 계획을 짠다.
“이제 종사관님이 질문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어지간히 궁금한 것을 못 참는 성격이군.
예전의 젊었을 때의 나와 비슷해 더욱 눈길이 간다.
“자네는 왜구들이 사는 섬에 가보았는가?”
“왜구들의 섬 말씀입니까? 가보지 못했습니다. 헌데, 그것은 왜 물어보십니까?”
“구경해보고 싶지 않는가?”
나의 의미심장한 얘기를 이해한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린다.
“그, 그 말씀은?”
“아직은 모르니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게.”
만일 소문이 퍼진다고 해도 행동반경이 넓어진 나에게는 타격이 없을 거지만 훗날 다른 사건과 엮어 꼬투리를 잡을 수 있으니 엄중하게 얘기한다.
그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며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리 겁낼 것 없네. 대단한 일이 아니라서 이 사실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도 되지만 그저 조심하자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이 얘기를 끝으로 병사들의 훈련을 다시 도와주기 시작하는 이종진.
보면 볼수록 재능이 넘치는 문무관들이 조선의 땅에 많다는 것을 느낀다.
관료라고 해서 전부 탐관오리는 아니다.
성리학자라고 전부 변질된 것은 아니다.
그저, 시대에 잘못 태어난 능력 있는 자들은 자신을 중용해줄 임금을 만나지 못한 잘못이다.
지금쯤 류성룡이 움직일 때가 되었다.
덕흥군의 3명의 아들.
장남 하원군(河原君)
차남 하능(河陵).
삼남 하성군(河城君).
그 밖에도 명종의 또 다른 조카 풍산군(豊山君)이 존재한다.
과연 누구를 선택할까?
왕실의 후손이 아닌 조선을 위한 인물이 임금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무리가 있어 하성군을 제외한 나머지 방계 중 한명을 선택해야 한다.
주색에 빠져 횡포를 부려 망나니라고 평가받는 장남 하원군이냐?
조용히 지내어 누구도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차남 하능이냐?
주상전하가 극찬하고 인순왕후와 영의정 이준경이 밀고 있는 삼남 하성군이냐?
그것도 아니면 주상전하의 조카인 풍산군이냐?
그들을 직접 만나 품성과 대의를 알아본 후 결정하겠다고 말한 류성룡.
수군을 담당하기로 결정한 나는 그가 옳은 결정을 하길 빌 뿐이다.
‘하성군은 선택하지 않길 바라오.’
미리 그의 존재를 알렸지만 운명은 모르는 법이다.
‘만일 하늘의 뜻대로 하성군이 왕이 될 운명으로 태어났다면...’
역천(力薦).
백성들을 위해 내가 선택할 단어를 마음속에 품는다.
* * *
1566년 12월 2일.
푸른 하늘을 보던 나는 이제 때가 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아군과 왜구에게 공평하게 추운 겨울.
“가시렵니까?”
어두컴컴해진 저녁.
창고를 담당하는 박사에게 찾아가자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을 짓는다.
“.....”
“힘드실 겁니다.”
“알고 있소.”
그는 허리춤에 달려있는 열쇠 꾸러미를 빼내어 손에 쥐고서는
“종사관님이 부탁하신 것들은 혼자서 못 옮깁니다.”
“이미 병사들을 불렀네.”
며칠 전 병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다들 겁에 질려 가기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거듭되는 훈련과 근래에 다시 만났던 왜선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한 덕택에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붙은 상태다.
박사와 함께 창고로 이동하며
“승산은 있으십니까?”
“없으면 가지 않았겠지.”
병사도 백성.
그들의 헛된 생명을 꺼트리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 상황을 상정하고서 계획을 짜면서 병사들의 훈련 진척이 크게 오르자 움직이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끼이이익.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열자 전에 봤던 내부의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박사와 나는 창고 앞에서 잠시 대기를 하니 저 멀리서 간편한 복장을 한 병사들이 수레를 끌고 다가온다.
“박사의 지시에 맞춰서 옮기면 된다.”
창고 앞에 도착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자 모두 숨을 죽인 채 고개만 끄덕인다.
‘조선에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었다.’
방어만을 생각했던 내가 너무 편협했던 것 같다.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손자병법에 적혀있다.
왜구들은 나와 조선의 수군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들을 꿰뚫어보고 있다.
“애꿎은 백성들의 피는 이제는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천지신명께 빌며 박사가 지목하는 것들을 수레에 담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소매를 걷고 같이 도와주기 시작한다.
-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는 어제 연참을 하려고 계획했는데 몸살 & 두통이 너무 심해 그러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연재주기도 제대로 맞추지 못해 독자님들께 불편함을 끼쳐드린 점 죄송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설명 드릴 것이 있습니다.
정쟁.
저도 정쟁에 관해서는 많이 복잡해서 쓰기 싫습니다.
오히려 이순신 장군님의 포커스에 맞춰서 쓰는 것이 한결 편합니다.
하지만 명종~선조 이때 정쟁의 절정시대였습니다.
훈구파와 사림. 그리고 사림에서도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지며 조선은 점점 쇠퇴했습니다. 재능있는 문무관들은 정쟁의 희생양이 되었었고 그 대상 중에서는 이순신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무패의 장군이었던 이순신도 결국 정쟁의 삶을 살아온 위인입니다.
이 소설은 전쟁만 그리는 소설이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님을 기리고 치열한 삶을 각색한 소설입니다.
사이다와 고구마.
답답하신 것을 싫어하시는 것 잘 압니다.
‘왜 진도를 못 빼냐?’
‘그냥 선조를 죽이면 되지 않겠냐?’
하지만 그들을 그냥 죽이면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님의 치열한 삶을 제대로 글에 담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약속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최선을 다해 연재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작품에 애정을 가지시고 읽는 시간보다 댓글을 쓰는 시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독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가연(假緣)배상.-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편(謨攻篇) 제3(第三)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에서 현대로 재 해석 한 것이 지피지기백전백승 [知彼知己百戰百勝]입니다.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