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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금랑서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09.25 05:04
최근연재일 :
2009.09.25 05:04
연재수 :
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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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23
추천수 :
55
글자수 :
92,698

작성
09.05.10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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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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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0쪽

금랑서은 5 - 굴레 2

DUMMY

“살려…….”

뚝.

전화가 끊어졌다.

둔한 머리로도 알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죽는다. 벌떡 일어섰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는데 아무 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 아이가 또박또박 물었다.

“저는 김정운인데, 아저씨는 이름이 뭐에요?”

“어? 김기훈.”

정신없는 가운데 자동으로 답한 그에게 아이가 어설프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그 때 기훈은 아이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없었기에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걸 생각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기실 버려진 과거의 자신과 겹쳐 보이는 것 따위, 현실의 절박한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가 자신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태어나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런 사소한 것이 그의 등을 밀어 재촉했던 것이다. 아이를 버리지 말라고, 자신은 폭력과 욕설로 점철된 삶을 사는, 가방끈도 짧은, 하루하루 삶이 막막한 막장 인생이지만, 그래도 자식을 버리는 부모와는 다르다고.

자장면 값을 치르고 아이를 뒤에 태우고 달렸다.

“꽉 잡어.”

자신의 보금자리인 한 평 반의 월세방에 벌써 기철의 부하들이 와 있었다. 수중에 돈이라곤 겨우 오만 원 가량이다. 이래선 며칠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그동안 그 더럽고 힘든 짓을 해가며 모은 돈이 전부 저 안에 있었다.

“여기 가만히 있는 거다.”

애도 감을 잡았는지 눈을 땡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인다.

입구에 두 명 서 있다. 안에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대여섯 정도는 어떻게든 가능하다.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 라고 적힌 전봇대 아래에 버려진 가구가 있었다. 장롱의 문짝을 떼어냈다. 그리고 달려가서 머리를 차례로 후려쳤다. 가구는 합판이라 약해서 몇 동강이 나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둘은 쓰러졌다. 안에 들어가니 또 두 명이 있다. 칼을 휘두른다. 악질이다. 팔을 스쳤지만 그럭저럭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예전부터 자신에게는 오기와 힘밖에 없었다. 그가 이 방에 돌아올 리 없다고 기철은 생각하고 겨우 이 정도만 보내놓은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기훈은 기철의 말투를 흉내 내어 중얼거렸다. 기철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은 돈을 저금하지도 않았다. 통장에 적힌 숫자 따위 어떻게 믿나. 벌거벗은 여자들 천지의 잡지들 사이에서 겨우 찾아냈다. 사이사이 떨어지는 것들을 모아서 이백만 원 정도 된다. 대충 주머니에 쑤셔 박고 아이를 데리고 달렸다.

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이의 안색이 질렸다.

“별 거 아니야. 빨리 가자.”

정류장마다 부하들을 풀었을 것이다. 오토바이를 몇 달 전에 구입해놓아서 다행이다.

“역시 바보네.”

기철이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색 차량이 하나둘씩 좁은 골목길을 막으며 도착하고 안에서 여러 인원이 내렸다.

“내가 널 죽이겠다고 했나? 뭘 그리 겁내고 그래. 그냥 내 대신 감방 좀 갔다 오라는 거지. 나오면 섭섭지 않게 해주마.”

기훈은 묵묵히 잠시 서 있었다.

“형님. 저는 압니다.”

기철은 자신의 뜻대로 안 되어갈 것을 예감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형님 말씀대로 전 바봅니다. 그래도 형님 옆에 제일 오래 있었습니다. 감옥에 가도 전 죽습니다.”

기철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형님, 맞지요?”

기철은 그 여자를 분명 사랑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것은 기철이 아니라 기훈이다. 기훈은 바보라서 항상 한 박자 늦다. 이제야 알아챘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여자가 죽었다. 그리고 자신도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

‘아, 이래서 날 버렸을까.’

당장 죽을지도 모르니까, 무력함이 힘이 되는 아이에게 살아남으라고 버렸을까.

그래도 아이였던 자신은 그런 걸 바라지 않았는데. 장난감도 과자도 엄마 아빠의 품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죽여.”

기철이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명실상부한 2인자는 아니었지만, 그 순박함으로 인해 은근히 인망이 있었던 기훈이었다.

“죽여 버려. 진작 죽여 버렸어야 했어. 부모에게도 버림받은 놈인데.”

그 말에 기훈이 아닌, 정운이가 앙앙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도 온다고.. 했어! 아빠도 온다고 말했단 말이야!”

큰 소리로 우는 아이를 보며 기철이 내뱉었다.

“동병상련이냐? 그래봤자 니가 무슨 뜻인지 알겠냐만은. 그나저나 어차피 너랑 똑같이 되는 거 아냐? 사채업자와 조폭에 시달리다가 도주한 네 부모가 버린 니가 조폭이 되고 사채업자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저 아이도 너와 함께 살다가 그렇게 되는 거 아니냐고.”

“이 십팔놈아!”

기훈이 울부짖었다.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러나 기철이 아닌 다른 부하였다.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첩첩산중이었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분노와 한이 끓어 넘쳐서 이대로 폭발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살아있으면 가끔 살아있나 알아채는 정도였다. 바보가 되면 좀 덜 아플 거라 생각했다. 바보가 되면 좀 살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위의 비정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기철은 자신을 버러지만도 못하게 여긴다는 걸 알면서도, 형님형님하면서 따랐던 것은 자신을 위해서였다.

행복해지길 바랐다. 욕심이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그냥 현실을 왜곡해서라도 자신만 행복하면 될 것 같았다. 약했다. 약해빠졌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주위에 쓰러진 여럿. 자신을 에워싼 여럿.

결국 현실은 이런 것이었다.

기철의 옷깃도 스치지 못한 무력한 자신. 쓸모없는 다리와 주먹.

쓰러진 그의 시야에 낯선 것이 잡힌다.

한참 생각해서 아이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정운아. 울지 마.’

난 오늘 네 부모를 괴롭히러 갔던 조폭이야. 나 같은 놈들 때문에 네 부모가 널 버리고 가버렸잖아. 자장면 한 그릇 사준 것뿐인데 왜 나 때문에 우냐. 그만 쳐다봐.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말만은 하고 싶은데.

“넌.. 나처럼 되지는.. 마.”

그 말과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치유의 바람 같았다. 온몸의 상처가 아물고 고통이 사라졌다.

그리고 천사가 내려왔다.

새하얀 피부에 검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보랏빛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의식이 끊어지기 전에 기훈이 생각했다.

‘난 죽은 거구나.’


“아저씨. 아저씨…….”

고사리 같은 손이 자신의 거구를 흔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눈을 떴다. 자신이 눈을 뜨자 안심한 듯 아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떻게 된 거…….”

몸이 뻐근했다. 그러나 상처는 없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폐품을 모으러 다니는 할아버지가 한낮에 길바닥에 누워있는 그를 보고 수레를 끌고 가며 혀를 찬 것이 전부였다. 품속의 이백만원도 그렇고 꿈은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간덩이가 부은 건지, 바보인건지 그는 기철의 사무소 근처로 가보았다. 숨어서 지켜보길 여러 시간, 마침내 기철이 사무소에서 내려왔다.

“형님!”

아이의 표정이 겁에 질리고, 안색은 새파래져서 그의 바지를 움켜잡았다.

기철은 뭔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듯 눈을 찌푸리더니 이런 말을 던졌다.

“저거, 도대체 뭐 하는 새끼야? 왜 아는 척이야?”

기훈이야말로 놀랐다. 그러나 기철의 부하들도 자신을 못 알아보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통에 얼른 근처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타고 날랐다.

해안에 접한 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이제 아무 것도 없다. 수중엔 그의 전 재산인 구겨진 돈 이백만 원. 그리고 뒷자리에는 정운이가 있다. 오토바이의 연료통은 가득차 있었다. 아직도 갈 수 있었다.

그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달렸다. 새파란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파도가 발치에서 자갈에 부딪쳐 사그라졌다. 근처 점빵에서 하드를 두 개 샀다. 한여름은 지나고 가을의 서늘한 내음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정운이가 먹고 싶다고 했으니까.

“우리 같이 살까?”

기훈의 말에 정운이가 구원받은 듯한, 기쁨으로 반짝거리는 눈으로 얼른 답했다.

“응!”

해가 중천에서 빛나고 있었다.

“근데 그거 아냐? 나 그 때 보라색 눈의 천사 봤다.”

그 말에 정운이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

“같은 아파트에 사는 누난데…….”

기훈이 껄껄 웃으며 정운이 머리카락을 손으로 흩뜨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너 바보냐?”

바보란 소리만 듣다가 한 번 남한테 써보니 기분이 심히 유쾌하다. 기훈은 신나게 웃었다. 정운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누나가 나타난 순간 모두 쓰러졌고 아저씨의 상처는 나았다. 그리고 그 누나가 말했다. 둘은 더 이상 쫓기지 않을 거라고.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더 알고 싶지 않았다. 좀 무섭지만, 사실은 좀 둔하고 바보 같고 착한 아저씨가 곁에 있었다. 이 아저씨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저씨 혼자니까 엄마와 아빠처럼 싸우지도 못할 것이다.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둘은 하드를 쭉쭉 빨며 해변을 걸었다.

“히히.”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기훈이 웃었다. 정운이 그런 그를 쳐다보자 기훈은 말했다.

“맛있네.”

정운도 웃었다.

어느새 해가 서편으로 기울고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뉘고 있었다. 터덜터덜 신나게 걷고 달렸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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