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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금랑서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09.25 05:04
최근연재일 :
2009.09.25 05:04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13,722
추천수 :
55
글자수 :
92,698

작성
09.03.30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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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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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1쪽

금랑서은 3 - 왕따 3

DUMMY

“이제 그만해, 점심시간 끝나가.”

서은은 손목시계를 흘끗 보고 말했다. 밀가루와 계란 범벅. 그리고 낙서에 찢겨진 교과서가 사방에 흩어져 있다. 백하민은 눈을 감지 않고 부릅뜨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김현아가

“흥.”

하면서 손을 주머니에서 꺼낸 연분홍색 수놓인 손수건으로 닦았다. 더러운 것이라는 눈빛으로 손수건을 백하민 머리에 던져버렸다. 서은은 김현아를 필두로 하여 이신희 등 여덟 명 정도가 우르르 체육 창고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백하민을 향해 걸었다.

“불쌍하게도.”

과장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쪼그려 앉아 백하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너는 나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저 아이들이 나쁜 거야. 억울해서 어떻게 해?”

그러자 백하민의 눈이 새빨갛게 되더니, 눈물이 댐의 열린 수문에서 밀려나오는 강물처럼 흘러나왔다. 서은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입구에 다다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백하민이 참혹한 일을 당할 때마다 서은은 옆에서 말했다.

“넌 참 불쌍하구나.”

백하민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서은을 쏘아보았다. 그 흰빛에 서은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너 같은 애한테도 이렇게 마음 쓰는 나는 참 착하지?”

그 말에 하민은 손을 들었다. 서은을 후려치려던 참에 어느 새 금랑이 와서 그 손을 붙들고 있었다.

“동정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깔본다는 거니까, 더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동정하는 일은 착한 사람의 할 짓은 아니야. 그렇지?”

서은은 묘한 웃음과 함께 금랑과 뒤돌아서서 백하민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백하민은 멍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너는 왜 그런 식으로 말하니.

그런 식으로 상처 주는 법이 어디 있니!

너한텐 별 거 아닌지 몰라도 이 애들은 다르잖아.


도대체 왜 자신은 그렇게 말했을까.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었었다. 누구든 마음에 상처받지는 말아야 하니까 힘든 역할을 자신이 맡은 거라고.


누가 맡아달라고 했나.


뱃속에서 시꺼먼 어둠이 말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그런 식으로 다른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졌단 말인가.


몰랐었다.


완연한 봄이다. 새하얀 서양식 저택에 넓은 마당. 아직 연두색을 띠고 있는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살랑거린다. 새하얀 찻잔을 달깍 가볍게 내려놓았다. 서은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김현아와 이신희를 바라보았다.

“오빠!”

서은이 고개를 돌려 부르자, 그 둘의 고개도 돌아간다. 그들의 시선 끝에 금랑이 있었다. 현이헌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의 과학 선생님이자 서은의 사촌오빠로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너희들 왔구나.”

아주 자연스럽다. 서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홍차를 마시는 척 하면서 감추었다. 현이헌의 길쭉길쭉한 몸매도 그렇지만 그 상쾌한 눈빛과 미소가 여중생의 환상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둘은 벌써 몇 번이나 이 저택을 방문했다. 서은과 친해지기 위해서라지만, 실은 현이헌 때문이다.

그 둘이 돌아가려는 찰나, 현이헌은 김현아를 향해 말했다.

“집까지 바래다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조심해서 가도록 해.”

김현아는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있다. 당연한 것처럼 호의를 받아들인다. 그것을 이신희는 뭔가 단념 혹은 체념이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은은 이신희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말없이 위로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신희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상처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상처는 아니다. 언제나 받고 있던 상처였다. 김현아의 패거리 중에서 이신희는 항상 두 번째였다. 김현아의 그림자 역할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녀의 자아는 강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증거였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또 내뱉으려는 충동을 참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언젠가 반드시 이신희는 김현아를 거부할 때가 올 것이다. 서은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현이헌, 바로 금랑이었다.

“인간을 홀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야.”

금랑은 서은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나도 홀린 거란 말이야?”

금랑은 어울리지 않게 생긋 웃었다.

“글쎄.”


점심시간이다. 그러나 이신희는 몸이 안 좋다며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김현아는 몇 번 물어보다가 마치 상관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그 찬 기운을 반의 모두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둘은 현이헌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김현아는 당연히 이신희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으니 불쾌한 것이다. 더욱이 저번에는 함께가 아니라 이신희 홀로 서은의 집을 찾아가 현이헌을 만난 것이다. 서은이 이신희에게 다가갔다.

“양호실로 갈래?”

이신희가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이신희가 김현아의 그늘에 가렸던 것은 이유가 있다. 그만큼 기가 세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현아와의 조금의 다툼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요즘 백하민 괴롭히는 거 없어졌지?”

양호선생님이 자리를 비웠기에 약장을 뒤지며 서은이 지나가듯 던졌다. 이신희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사실 네가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지? 네 글을 보면 차분하고 고요해서, 네가 그런 짓을 좋아할 것 같지 않았어. 그래서 처음엔 조금 놀랐었어.”

이신희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물었다.

“네가 원해서 한 거니?”

고개를 저었다.

“현아가 원한 거야. 짜증난다고.”

“뭐가?”

“그 애. 그리고 학교고 공부고 부모님이고 선생님이고 모든 것이.”

“가질만큼 가졌는데 왜 그랬지?”

이해가 안 가서 갸웃거리는 서은을 향해 이신희가 차갑게 비아냥거렸다.

“그 애는 속이 빈 플라스틱 인형이니까. 그래서 떠받들어지는 것이, 누군가를 밟아버리는 것이 필요해.”

서은은 조금 놀랐지만 침착하게 응수했다.

“네가 원하지 않았는데 뭐하러 그럴 필요가 있어?”

이민희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서은을 바라보았다. 서은은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곧 이민희가 천천히 말했다.

“그래. 내가 왜 그랬을까?”

반 아이들은 모두 놀란 눈치였다. 이민희는 더 이상 김현아와 함께 있지 않았다. 오히려 백하민과 함께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어느새 김현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평소에 이민희와 유사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백하민이 당하는 것을 보면 김현아를 멀리할 엄두를 못 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민희가 먼저 돌아섰다. 처음 한 명이 어려웠지, 그 다음부터는 모두 김현아를 떠났다. 김현아가 서은에게 와서 방긋 웃었다.

서은은 교과서와 연습장을 세로로 세워 탁탁 두드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짐승들도 무리 중에서 특이하거나 약한 개체는 괴롭히고 배제하려고 한다고 해. 그건 그럼 짐승들의 본능이겠지. 그리고 이건 알아? 사진 찍을 때 어떤 아이들은 자기보다 더 예쁜 아이 옆에 서지 않아. 자신의 얼굴이 사진 속에서 죽기 때문이야. 못나고 약한 것과 잘나고 강한 것의 차이는 엄밀히 봐서 그렇게 다르지 않은지도 몰라.”

“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김현아는 서은을 바라보았다. 서은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잖아. 그러면 물체의 그림자도 이동하는 거 알지? 누가 양지바른 쪽이 되고 누가 그늘진 쪽이 되는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거야. 국어시간에 나왔잖아. 화무십일홍이라든가.”

“너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니?”

떨리지만 주눅 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히스테릭한 느낌으로 김현아가 외쳤다.


퍽.


계란이 깨지면서 투명한 액체에 노란 물이 흘렀다. 김현아의 머리에 밀가루가 쏟아지고 밀려 쓰러졌다. 그 선두에 이신희가 있었다. 그리고 백하민이 떨리는 손으로 계란을 계속해서 던졌다. 교실에는 이미 학생들이라곤 몇 명 남아있지 않았다. 모두 모여 발로 김현아를 차고 밟기 시작했다. 백하민은 조금씩 부활하고 있었다. 예전 사진처럼 쾌활한 듯한 표정. 그러나 그 속성은 달랐다. 이제 거침없이 김현아의 얼굴을 밟는다.

백하민은 주머니에서 얇은 손수건을 꺼내어 천천히 손을 닦았다. 그리고 그 손수건을 쓰러져 있는 김현아의 몸에 던졌다.

“더러워.”

백하민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모두들 김현아를 향해 내뱉기 시작했다.

“지가 뭐가 잘났다고 이래라 저래라야?”

“속이 후련하다.”

“얼굴 좀 반반하다고 다야?”

김현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김현아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우르르 패거리들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서은은 김현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당해보니까 어때? 기분 좋지?”

쭈그려 앉아 김현아의 엉망이 된 몰골을 쳐다보며 서은은 조금 웃었다. 김현아는 화가 난 듯 움직이려했지만 탈력감과 무력감에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네 외양은 아름다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재능도 있어. 그러니 네 어둠을 받아가는 것은 널 천사로 만드는 것일 거야. 우린 잠시 동안이지만 친구였으니까.”

서은은 손을 뻗었다. 김현아의 눈이 경악으로 커지는 것을 보며 그녀의 가슴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망설임 없는 재빠른 동작이었으므로, 어느새 곁에 선 금랑을 미간을 좁혔다. 피가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꿈틀거리며 도망가려 바동거리는 것을 서은은 엄지와 검지로 꽉 잡고 있었다. 새까만 벌레였다.

“누구나 한 마리는 가지고 있어. 그 덩치는 다르지만.”

그 말과 동시에 죽 잡아당겼다. 약 일 미터는 될 만한 길고 까만 지네 같은 것이 몸부림쳤다. 그걸 청산이 넘겨주었던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에 담아 봉했다.

“네 어둠을 받았어. 앞으로 세상은 네게 눈부시게 밝기만 할 거야. 진실을 보지 못하겠지만, 분명 넌 행복할거야.”

처음부터 보였었다. 가장 큰 어둠을 가지고 있었던 건 김현아였다. 가지고 있는 빛이 많아 보이는 만큼 그에 비례하는 어두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불쌍한 여자애.

“금랑, 난 정말 도깨비인가봐.”

금랑은 서은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애들의 기억을 지워. 우리를 그들 기억 속에서 지워버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금랑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굳이 서은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떨리는 어깨로 족했기 때문이다.

서은은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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