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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무희 님의 서재입니다.

금랑서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바람무희
작품등록일 :
2009.09.25 05:04
최근연재일 :
2009.09.25 05:04
연재수 :
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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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9
추천수 :
55
글자수 :
92,698

작성
09.02.21 21:57
조회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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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9쪽

금랑서은 2 - 허주가 3

DUMMY

“당신은 누구신가요?”

아무리 보아도 손위의 사람임이 분명해보였으므로 서은은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허주가(虛主家)의 가주(家主)인 하여(荷與)라 한다.”

그렇게 답하는 하여의 눈빛이 결결하였고 또한 얼음송곳 같기도 하였다.

“제가 무엇인가요?”

서은은 다리가 조금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섰다.

“넌 도깨비와 인간의 혼혈이다.”

가만히 보고 있던 카스가 외쳤다.

“집안의 안위는 상관없이 가출해서 인간남자와 아이를 낳은 무책임한 자다. 그녀가 비록 인(印)을 가졌었다 하나, 지금에 이르러서 무슨 상관일까. 이제 인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어! 수천 년을 이어온 이 허주가의 대가 끊어질 지도 모른다!”

서은은 차가운 눈빛으로 카스를 보았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난 아무 것도 몰라.”

그 냉정함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카스가 뜨거웠기에 서은은 차가워야만 했다. 서은은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깨물곤 나지막한 소리로 외쳤다.

“그럼 왜 인간처럼 날 키운 거죠? 왜 이 가문에서 키우질 않았죠? 난 왜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이방인이어야 하나요?”

하여가 그런 서은을 멀끔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노인 특유의 너무 복잡한, 혹은 너무 지치고 닳아버린 감정의 뭉툭함이 그곳에 있었다.

“내 딸은 그 인간남자와 네가 죽인 것이다. 도깨비는 이종족과 교접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숨이 끊어진다. 너 또한 불모의 몸.”

깊은 절망과 증오가 일렁였다. 하여의 말에 따르면 분명 자신은 그녀의 외손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서로가 건널 수 없는, 바닥없는 골이 느껴지다 못해 명백히 보였다.

“불모의 몸이라고요?”

현실감 없이 물었을 때 쐐기를 박듯이 답변이 돌아왔다.

“넌 후손을 낳을 수 없다.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난 노새와 같지.”

또렷한 경멸.

서은은 어금니를 물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가 필요했겠죠. 그래서 당신들이 날 불러들였겠죠. 가주의 후보든 뭐든 빨리 결론을 내려줘요. 어디서든 내 한 목숨 못 붙이고 살까. 마음이나 편한 편이 낫지.”

맘껏 빈정거렸다. 이제 잃을 것도 무서워할 것도 없다. 자신은 기로사(岐路師)다. 도망도 가능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껏 오기를 부려보았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친부모는 어떤 이들이었을까.

“내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나요?”

뒤돌아서서 복도 쪽으로 향하다 멈칫 서며 물었다.

“내가 딸의 원수를 죽였다.”

하여의 메마르고 거친 답변이 돌아왔다. 이 순간, 서은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게 꿈이었으면.’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백의를 입고 있는 여인이 자신을 안내했다. 얼굴이 없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달걀귀신이었다. 그러나 서은은 거기에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따라오라는 듯한 손짓에 따라갔다. 조그마한 방이 있었다. 두꺼운 기름종이로 바닥을 깔아놓았고 벽은 한지로 발라놓았는데 구석에 나무로 만든 서랍장이 정갈했다. 옆으로 밀어서 여는 큰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푸른 기운을 띤 검은 하늘에 둥근 달이 창백히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을 한 아름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기분이 좋아져서 눈을 내리감았다가 한참 후에 떴다. 금랑이 거대한 짐승의 모습으로 옆에 앉아 있었다. 몸을 기대어 그 윤기 흐르는 금빛 털을 천천히 쓰다듬자, 금랑은 눈을 반쯤 감고, 앞으로 내밀어 모은 앞발 위에 턱을 얹고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침묵이 온화하였다. 가까스로 멈춰 선 낭떠러지의 끝. 그런 안도감, 평안함이었다. 그러나 분명 거짓은 아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하여님.”

하여는 묵묵부답이었다.

“인간은 도깨비의 요력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녀 자신이 양친 모두를 죽였다는 진실을 감추실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청산의 눈빛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처음부터 당신의 핏줄을 가주로 뽑겠다고 하셨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확실히 해주십시오.”

협박에 가까웠다. 선대 가주에 의해 선택받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 - 이를테면 무력 -을 사용하여 가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여가 그제야 희미한 조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새로운 가주는 달라야 한다. 인(印)이 없어졌다는 것은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카스가 둘의 팽팽한 공기에 다소 겁먹은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물어왔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때지요?”

하여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직은 대답할 수 없다는 표시였다. 그 표정이 더할 수 없이 엄숙하였고 그녀가 뒤돌아 앉았으므로 청산과 카스는 그 방을 조용히 나와야만 했다. 외동딸이 인간남자와 사랑에 빠져 가문의 계승을 저버리고 떠난 후로 많이 쇠약해졌으나, 그래도 인(印)을 가지고 태어난 강자였다. 그리고 가주로 보낸 세월이 이미 이백년에 가깝다. 존중할 수밖에 없었고, 가주는 존중되어야만 했다. 청산과 카스 그 둘 또한 가주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도깨비들의 주인은 셋이다. 그 중 하나가 되는 일이다. 거대한 과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충분히 야망을 가져도 좋을 일인 것이다. 더욱이 인(印)을 받은 후손도 없는 이때라면 더욱 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주의 후보가 된 이상 가주가 되지 않으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깨비가 인간에게 괴물로 불린 까닭을 집약하여 보여주는 것 같은, 소스라쳐지는 가문의 비밀. 공포가 때때로 청산과 카스를 침식했다. 그것은 병의 발작과 같은 것이었고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밥과 반찬이 나왔다.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밥상보다도 호화로웠다. 맛 또한 훌륭해서 서은은 감탄하며 먹었다. 그리고 솜을 새로 타서 만든 이불인지 폭신하고 정결한 이불 속에서 잠을 청했다. 금랑 또한 이리의 모습으로 서은의 옆에서 몸을 둥글게 오므리고 눈을 감아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었다. 새롭고 충격적인 사실들뿐이지만, 여기에서 자신이 위험할 리는 없다는 것을 서은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가출’ 로 방황은 충분했다. 마음의 준비는 오래전에 마쳐져 있었던 것이다.

눈을 떴다. 햇빛으로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청산과 카스가 이제 막 이불에서 몸을 일으키는 서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명백한 경쟁자나 적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으므로, 서은은 자고 일어난 직후의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에 쑥스럽다고 오히려 느끼지도 않았다.

“준비해서 앞마당으로 빨리 나와.”

무슨 통과의례 같은 것인가. 서은은 가차 없는 그들의 처사에 오히려 안도하며 옷을 챙겨 입으려 손을 뻗었다. 감촉이 달랐다. 흰색 상하의에 은보라색 도포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이 허주가에서는 남녀 구분하여 옷을 입지는 않는 모양이다. 청산이나 카스의 것과 같은 류의 복장이었다. 최고급의 실크인지 감촉이 무척이나 좋고 가볍다. 덩굴무늬가 은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가방은 아무데도 없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괜찮아.’

문을 열고 걷기 시작했다. 날이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복도는 어두웠다. 그러나 서은이 걷기 시작하자, 그 기척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벽에 걸려 있던 횃불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바람이 느껴졌다.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옷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소매통이 넓어 금랑은 제 형체를 감추어 아지랑이처럼 변하여 그 속으로 들어갔다. 여차하면 서은을 지킬 셈이었다. 그에게도 도깨비들은 처음이었다.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뿐더러, 어떤 측면으론 즐기고 있었다. 어둠의 수많은 무리들 중 하나. 고작 그것뿐인 소소한 존재들. 그러나 그 내부에서의 투쟁은 어디서든 치열하기 마련이다.

오랜만에 만난 ‘주인’이 이렇게 흥미로운 존재이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아니다. 도깨비도 아니다. 혼혈에다가 기로사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힘을 더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좋은 보음식(補陰食)이 될 것이야. 킥킥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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