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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892
추천수 :
21
글자수 :
373,950

작성
23.05.13 20:00
조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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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1쪽

동백꽃-빛이 있는 곳에서의 마지막 글

DUMMY

연극 때문에 분장을 했다손 치더라도


이 늦은 시각까지 눈물 자국이 남거나 목소리가 갈라질 까닭은 없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직원은 편의점 밖으로 나가 112에 신고를 했다.



<직원> “그러니까 우리 편의점에 도둑이 든 건 아니고, 웬 여학생이 들어와 라면 먹고 있는데,


얼굴이 아주 못쓰게 됐어요.


눈물범벅에 오래 울었는지 목소리도 갈라지고, 화장도 번지고.”



<직원> “친구랑 다퉜을 수도 있지만, 강도를 당했을지도 모르잖아요.”






한편 편의점 안 도림은 전자레인지가 놓인 선반에 라면을 놓고 의자에 앉았다.


가로등 주황 불빛이 내리비치는 어둑어둑한 도로를 내다보고 있자니,


우두커니 반쯤 넋이 나간 그녀의 모습이 유리창에 비쳤다.


그제야 자기 얼굴의 얼룩덜룩한 실루엣을 보고는 휴지를 여러 장 뽑아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그럴수록 얼굴은 더 엉망이 돼 가는 줄을 알았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도림> ‘내가 초등학교 5년 사이에 당했던 일들이 이런 일이었을까?’



그녀는 곰곰 생각에 잠겼다.



<도림> ‘아무리 악독해도 고작 열두 살 정도밖에 안 되는 애들이잖아. 설마.’



그러곤 말도 안 된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도림>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는지는 알고 있다.


괴로웠던 인생 5년이 기억이 단절돼서 소멸했다는 것.


이걸 아는 사람이 있을까?


쳇, 알 게 뭐야. 다시금 기억을 단절시킬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지금 이 순간을 포함한 17년 인생 또한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 내게 의미 있을 뿐이니까.


내가 살았다는 흔적, 외관은 남겠지만, 나 신도림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그녀는 문득 앞에 놓인 라면을 열어 보았다.


참 많이 불어 있었다.



<도림> ‘분 라면은 나의 마지막 별미로 치지 뭐.


근데 아직 지각(知覺)이 또렷한 것을 보면 걱정이 되긴 해.’



라면 첫 젓가락을 집어 올렸다.


그때 편의점 안으로 누군가 들어와 도림의 앞에 섰다.



<경찰> “학생, 괜찮아요?”



112에서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이었다.



<도림> “네? 무슨······?”



도림은 어리둥절해 했다.



<경찰> “아유, 이 얼굴 상한 것 좀 봐.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도림> “이거요. E 고등학교 연기 동아리 소속인데, 오늘 연극을 했거든요.


분장 안 지우고 울어서 그래요. 우는 연기요.


별것도 아닌 일로 괜히 오시게 해서 언니한테 미안하네요. 또 고맙고요.”



도림은 괜히 코끝이 찡했다.



<경찰> “깡패라도 만난 건 아니구요?”



경찰은 ‘분장 안 지우고 울었다’는 말에 주목했다.


순서에 어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림> “아니요. 깡패 같은 거. 뭐 그래 보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런 걸 만났다면 제가 먼저 경찰에 신고했을 거예요.


그리고 편의점에서 태평하게 라면이나 먹고 있지는 못하겠죠.”






그렇게 경찰도 돌아가고 도림은 ‘늦은 만찬’을 즐겼다.



<도림> ‘세상엔 온탕도 있긴 있구나. ······


하긴 냉탕이 없으면 온탕이니 열탕이니 말할 것도 없겠지.’



그녀는 라면을 국물까지 비우고는 가방에서 노트를 하나 꺼내 글을 써 내려갔다.


빛이 있는 곳에서의 마지막 글이었다.










- 나를 찾지 마세요


17년을 공들여 만든 비누가 있었습니다.

긴 시간 들인 정성만큼 곱고 예쁜 속포장지로 감싸고 무려 금장장식을 두른 고급스러운 상자에 넣었습니다.

만든 사람은 그 비누가 영원하길 바랐을까요.


하지만 그것도 비누인지라 물에 녹고 거품을 내며 사라져갔습니다.


결국 비누를 담았던 상자와 속포장지는 남았지만 비누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요.

예, 소멸한 거예요.

처음부터 없었던 거죠.


비누상자와 속포장지는 남겠지만, 비누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암늑대에게서 구해달라는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註1)는

지옥 속에서 절망적으로 절규하는 영혼들이 애원하는 것은 오직 소멸,

영혼의 소멸일 뿐이라고 말했다지요.


비누는 참 복 받았지요.

그러니 슬퍼하지도 애통해하지도 말아 주세요.


(2018년 10월 XX일 E 고등학교 1학년 박해주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꼭 만났으면 좋겠군요.)



2018년 10월 XX일. 신도림.










도림은 글을 쓰다가 어느 어두침침한 곳에서 ‘지옥의 다리’라고 적힌 팻말이 붙은 곳을 지나가는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런 곳을 지나간 적은 과거의 사진으로도 없었다.


혹시 잃어버린 5년의 한 조각이 아닐까 싶어 굳이 또 기록을 해 두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것을 신곡 지옥편에 관한 이야기로 적어 둔 것이었다.


말하자면 어떤 감격스러움 같은 감정이었다.



그러고는 신도림동 편의점에서 나와 반포동 고속버스터미널로 길을 잡았다.


어디든 갈 생각이었다.


버스(터미널로 가는 시내버스)는 타지 않기로 했다.


고속버스를 타자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도림> “가을바람이 소슬하다. 밤바람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괜히 옷깃을 여며봤다.






아침이 되어 도림은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리고 진안으로 가는 표를 끊고 버스를 기다렸다.


세 시간쯤 걸리는 거리였다.


다리가 아파서라도 가는 동안 단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편의점에서 콜라를 하나 사 들고 버스에 올랐다.


평일이라 그런지 서울서 내려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왼쪽 창측의 7번 자리 표를 끊었지만,


‘전망이 좋은’ 3번 자리로 옮겨 의자를 뒤로 끝까지 젖히고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도착하기까지 잠에서 깨지 않았으므로 ‘전망 좋은’ 자리라는 것이 멋쩍게 되기는 했다.



내리자마자 도림은 버릇처럼 –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지는 알 수 없지만 –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는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며 물을 틀었다.


물이 ‘쏴’ 하는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사이, 그녀는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었다.



<도림> ‘이것도 여행은 여행이지. 기억소멸여행?


뭐 이런 게 있을까는, 이런 걸 하는 사람이 있을까는 모르겠지만······.’



얼룩덜룩한, 그나마 지난밤에는 ‘촉촉했을 그 남자의 흔적’이 하루 새 어린아이 콧물 자국처럼 말라붙은 얼굴을 보며 웃음이 나온다며,


도림은 이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고는 쏟아져 내리는 물에 손을 적셔 ‘콧물자국’을 닦아냈다.



<도림> ‘어차피 의미 없는 짓인데······. 필요 없는 짓은 참 잘 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국을 말끔히 닦아냈다.





진안 터미널은 참 희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註2)



보통의 터미널이라면 사람들은 플랫폼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플랫폼 뒤의 대합실은 적어도 허리 높이까지는 콘크리트 벽으로 구분돼 있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진안 터미널은 대합실이 순전히 유리 -


그것도 문을 열지 않으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고


안에서도 밝을 내다볼 수 없는 파란 유리 - 로 되어있었고,


사람들은 ‘행선지로 구획된’ 대합실,


그래서 각 공간마다 주인의 이름표가 부착된 것 같이 생긴 ‘유리방’ 안에 ‘들어’ 있는 모양새로 있었다.


그러고는 그 유리문의 한쪽 문을 ‘빠끔히’ 열고 버스가 오는지를 내다보는 것이었다.



가을이라 추워서 플랫폼으로 나오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대합실 안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마다 손에 쥔 한 보따리씩의 짐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도 같았다.



도림에게는 꼭 유리방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처녀’들의 모습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도림> ‘전부 다 할머니들인데 처녀라니, 내가 미쳤나 봐.’



그녀는 실없이 웃었다. 괜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천반산 가는 버스가 들어오는 플랫폼의 ‘유리방’ 안 대합실 의자에 쪼그려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배가 고파도 점심을 먹으러 갈 수는 없었다.



그녀가 그리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진안 터미널에는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와 무주 등지로 가는 시외버스,


그리고 시내버스까지 한곳에서 타게 돼 있었는데,


시내버스는 도대체 언제 오는지 시간을 알 수 없었던 데다가


플랫폼에 도착하고서 10분은 기다려 주는 고속버스나 시외버스와는 달리


시내버스는 1분 만에 떠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처음 온 곳에서 버스 구분도 안 됐다.



그렇게 세 시간여를 기다려 도림은 천반산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버스는 마치 터미널과 목적지인 천반산 사이에 손님이 아무도 없을 줄을 이미 알기라도 했다는 듯


그나마 왕복 2차로밖에 되지 않는 도로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도림> “경치는 좋군.”



그녀는 다른 손님에게 들리지 않도록, 또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서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래도 왠지 모를 동질감은 서울보다 진안 땅에 더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왼쪽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가을 산세가 포근하거나


오른쪽 창밖으로 품은 호수가 넉넉해서만은 아니었다.



<도림> “겨우 왕복 2차선 도로라니.


여기도 나처럼 잃어버린 5년이 다섯 번씩 다섯 번은 있었던 모양이야.”



문득 오른쪽에 펼쳐진 호수가 궁금해 그녀는 버릇처럼 휴대전화를 꺼내려고 했지만


빼앗긴 것이 손에 잡힐 까닭이 없었다.


그제야 해주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어 도림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다 용기를 내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듬성듬성 앉은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한 할머니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도림> “저······.”



할머니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맞추자 도림은 얼굴이 확 화끈거렸다.




=== 주석


註1. 로마의 시인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여행하는데, 지옥과 연옥의 여행시에 베르길리우스가 그를 안내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신곡에서는 지옥의 제1원 림보(그리스도를 만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머무는 곳)에 있다.


註2. 진안 터미널에 대한 묘사는 2021년 10월 3일의 모습이다. 소설 속 시간대인 2018년의 모습이 아님을 밝혀둔다. 다만 2021년 12월 3일에도 같은 모습이었으니, 2018년에도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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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바다-전생과의 첫 만남 +2 23.05.14 12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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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백꽃-내 이름은... 23.05.11 14 1 11쪽
2 동백꽃-뿌듯한 도넛 +2 23.05.10 20 2 10쪽
1 동백꽃-첫 만남 +7 23.05.10 112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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