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모스

29화 Episode 03. 헤론.T. 스트로커스. 책략(策略)(12)

나지막한 그녀의 말에 티그로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경훈을 죽인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네오스. 그것도 시너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김경훈과 최근 가장 연관이 깊은 시너라면 단연 마티니의 일원일 것이다.

그 증거로 김경훈의 저택에서는 마티니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김경훈의 조직인 R.S와 연계된 조직이니 조금의 단서라도 나와야 정상일 텐데, 지나칠 정도로 깨끗했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마티니의 조직원이 김경훈을 죽이고 조직에 대한 모든 자료를 처분했다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었다.

“굳이 김경훈을 죽인 건 김경훈이 체포되었을 때 마티니의 정보를 발설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게다가 이쪽에는 정신 감응 계열의 네오스도 엄연히 존재하니까요.”

“마티니의 그런 극단적인 정보 말살 때문에 아직까지도 우리가 그 조직의 꼬리를 잡지 못하고 있죠. 참 용의주도하고 철두철미한 조직이에요.”

소율은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세계의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녀의 정보부도 유독 마티니의 정보만큼은 도무지 캐내질 못했다.

티그로얼은 마티니란 조직의 존재와 이름을 알아낸 것만 해도 대단한 거라는 이야기를 해 주려 했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그런 의미 없는 위로 따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티그로얼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헤론은 본부 중앙 홀의 카페테리아에 앉아 있었다. 식어 가는 커피를 손에 들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공허했다.

그런 그의 옆으로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가 불쑥 내밀어 졌다. 헤론은 놀란 기색도 없이 그 샌드위치를 받아들며 등 뒤로 다가온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웬일이냐, 네가 나한테 이런 걸 다 사고.”

“하도 넋이 빠져 있으니까 그렇지. 무슨 일 있어? 쌍둥이 오빠들이라도 있었으면 또 주제도 모르고 도전했다가 졌겠구나 싶겠지만, 지금은 쌍둥이 오빠들도 없고. 아, 혹시 연애 문제? 차이기라도 했어?”

대답할 새도 없이 쫑알거리며 헤론의 옆에 앉은 사람은 같은 SI의 멤버인 현세경이었다. 올해로 18세가 되는 그녀는 하나로 높게 묶은 갈색 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말괄량이로, 비슷한 성격의 헤론과는 앙숙 관계였다. 그러나 헤론과는 은근히 죽이 잘 맞아서, 헤론이 침울해하면 늘 다가와 기운을 돋워 주는 것 또한 그녀였다.

헤론은 세경이 준 샌드위치는 먹을 생각도 않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먹을 걸 마다하는 그의 모습에 세경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녀가 LM에 들어와 헤론이란 남자를 알게 된 지 어언 5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가 이렇듯 먹을 것을 마다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다시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그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헤론…… 어디 아파? 응?”

“아니. 멀쩡하다.”

귀찮은 듯 한숨을 푹 쉬며 대답하는 기운 없는 목소리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세경은 헤론의 손을 붙잡으며 재차 물었다.

“병원은? 혜린 언니한테는 가 봤어? 응? 언니가 뭐래? 어떻게 안 된대?”

“아픈 데 없다니까.”

“거짓말! 걱정하지 말라고 허세 부리는 거 모를 줄 알아? 이런 미련 곰탱이! 빨리 말해!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야? 얼마나 심각한데? 혹시 불치병이야? 응?”

헤론은 슬슬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세경의 양 어깨를 잡았다. 세경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니 헤론은 수아로 인해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슬쩍 고개를 드는 장난기에, 헤론은 정색을 하며 얼굴을 굳히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며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아,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뭐야? 얼른 말 하라니까? 그렇게 허세 부린다고 병이 나아? 말을 해야 돕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아냐. 신경 쓰지 마. 내가 실언을 했다. 방금 말은 잊어.”

“이 바보가!”

세경은 결국 울음보를 터트려 버렸다. 서럽게 울며 “헤론 바보!”만 외치는 그녀의 모습에 주위에서 쉬고 있던 단원들이 하나둘 두 사람 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헤론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쳐 대는 세경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기 직전이었으나, 진지한 얼굴을 유지한 채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슬쩍 눈을 떠 세경의 모습을 보던 헤론은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꼬맹아. 내가 없어도, 넌 행복하게 살아야 된다.”

웃음을 참느라 억눌린 헤론의 목소리가 너무 리얼해서인지, 세경은 그쳐가던 눈물을 또다시 쏟아내었다.

“헤론 이 멍청아! 오, 오빠가 죽으면, 흑! 나 어떡하라고! 오빠 너 죽으면, 내, 흐엉, 내가 평생 저주할 거야! 알겠, 히끅! 알겠어!”

끝내는 딸꾹질까지 하는 세경을 보던 헤론은 도저히 못 참겠는지 허리를 푹 꺾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이것이 그의 장난임을 눈치챈 단원들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하나둘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세경은 그런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허리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헤론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어리둥절한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결국 퉁퉁 부은 눈으로 딸꾹질을 하는 그녀를 향해 물이 든 컵을 내민 것은 그녀와 동갑이며, 같은 SI 멤버인 이수현이었다. 칠흑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의 그는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세경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뻥이야.”

그 말에 세경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직도 끅끅거리고 있는 헤론을 유심히 보더니 수현이 내민 물을 쭉 들이켰다. 딸꾹질을 멈춘 그녀의 주위엔 초콜릿을 닮은 마호가니색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수현은 그녀의 손에 들린 유리잔이 흐물흐물해지더니 곧 형체도 없이 녹아 버리는 모습에 쯧, 하고 혀를 찼다.

웃느라 정신이 없던 헤론도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움찔 몸을 굳혔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던 그는 사나운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세경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 미안, 미안. 처음부터 놀리려던 건 아닌데, 그게, 저기……. 세경 님?”

“이 빌어먹을 헤론 자식!”

화를 억누르지 못해 확 뒤집히는 그녀의 목소리에, 헤론은 얼른 수현의 뒤로 피했다. 그러나 수현은 자신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듯 옆으로 비켜서며 얄밉게 웃었다. 배신자, 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헤론을 향해, 수현은 방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자―기의 일을, 스스로 하자. 우우―리는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수현은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런 그의 뒤로 헤론의 처절한 비명이 홀을 울렸다.